권천 '장한백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서장 서장 그날, 경하(輕霞)에 물든 태양은 붉었다. 붉디붉은 산서무림(山西武林)의 황토대지(黃土大地)를 모두 태워 버 릴 만큼 태양은 붉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태양보다 더욱 붉었다. 애처로우리만치 꼬옥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 그 입술을 비집고 나오던 가녀린 숨소리. 흙투성이가 된 손과 발을 타고 흐르던 그녀의 선홍빛 피. 원독(怨毒)에 찬 그녀의 눈빛. 그리고 한 청년의 가슴에 새겨진 애틋한 연모의 정... 모두가 그날의 태양보다 붉었다. 그 붉기만 하던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 라보는 청년의 손엔 다섯 살 가량의 어린아이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직은 말소리조차 어눌한, 순박한 생김의 사내아이. 청년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삼 일을 걸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삼 일을 울었다.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아이의 눈물로 점철된 삼 일 동안의 여정(旅 程). 그 여정의 끝에 모든 이를 압도해 버릴 만큼 장대한 산이 우뚝 서 있었다. 예측을 불허하는 인간사의 소용돌이처럼, 짐작할 길이 없는 조화를 간직한 거대한 산맥에 우뚝 솟은 산. 그 산은 청년의 어린 시절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산이 들려 주는 운명의 속삭임을 알아들어서였을까? 한시도 그치지 않던 아이의 울음이 신기하게도 뚝 그쳐 버렸다. 대신, 아이의 눈엔 까닭 모를 두려움이 언뜻 내비쳤다. "수아(愁兒), 여기가 태행산(太行山)이다. 앞으로 네가 둥지를 틀고 살아야 할..." 청년은 가뿐히 아이를 들쳐 업고서 태행산 자락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청년의 목을 꼬옥 껴안고서 몸을 바르르 떠는 아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은 태행산이 드리운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 다. 인간의 추악한 야망과 음모가 얽힌, 길고 긴 한(恨)이 서린 혈겁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1 장 사마(邪魔)가 발흥(發興)하니 제1장 사마(邪魔)가 발흥(發興)하니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의 정오 무렵. 마치 거대한 체로 흔들어 뿌려 놓은 것처럼 대기를 가득 메운 먼지 바람이 천지(天地)를 붉게 물들였다. 이 바람을 뚫고 끝없는 황토대지(黃土大地)를 가로질러 달리는 사두 마차(四頭馬車)가 있었다. 그 주위로 열 필의 말을 탄 표사(士)들이 긴 장한 표정으로 연신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말의 입에서 흰 거품이 이 는 걸로 보아 장시간을 이렇게 달린 모양이었다. 문득, 말과 마차가 일으킨 뿌연 먼지 속에서 나직한 기침 소리가 들 렸다. "제길, 저놈들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건지... 이런 날씨에 저리 말을 재촉하면 오래가지 못할 텐데."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먼지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십대의 중년인과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중년인은 검은 수염을 가지런히 길렀는데,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눈 매가 날카로웠다. 꾹 다문 입술은 그의 굳건한 기상을 나타내는 듯했 다. 청년은 유난히 짙은 눈썹에 두툼한 입술로, 얼굴의 윤곽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칠 척이 넘어 보이는 키와 우람한 체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특히 그의 목소리는 커다 란 덩치만큼이나 우렁찼다. 두 사람 모두 등에 장검(長劍)을 매고 있었다. 중년인의 입이 열리며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다. 이 지역에서 비마표국(飛馬局)을 곤란하 게 할 일은 별로 없을 텐데." 청년은 입 안에 먼지가 들어가 몹시도 껄끄러운지 연신 침을 뱉으며 물었다. "사형(師兄), 저들이 비마표국의 사람들입니까?" "마차의 깃발에 날개 달린 말이 그려져 있지 않았느냐? 그건 비마표 국을 상징하는 깃발이거든." "그런데 오늘 저녁 그 마두(魔頭)가 정말로 휘월산장(輝月山莊)에 나 타날까요?" "글쎄다. 두 달 전 패환도(覇丸刀) 구예(邱)의 일족(一族)이 몰살(沒 殺)되었고, 한 달 전엔 이화창(梨花槍)의 명인(名人)이었던 이각(伊覺) 의 일족 또한 살아남은 이가 한 명도 없지." "하지만 오늘 휘월산장엔 많은 고수(高手)가 초빙(招聘)되어 오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혼자뿐이었던 이각과 구예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 지요." "그 마두의 수법이 워낙 악랄하니, 고수가 많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 다." 청년은 호기있게 두 손을 마주치며 싱글거렸다. "아무리 천하의 흉인(凶人)이라도 오늘 휘월산장엔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인 신검문주(神劍門主)의 대제자(大弟 子) 고량(高亮) 대협까지 왔을 테니 말입니다. 누가 감히 신검문을 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우린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마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가는 길인 만큼, 그자가 나타나길 기대해야 하지 않겠느냐?" 두 사람이 오대산(五台山) 망해봉(望海峰) 기슭에 도착했을 땐 사위 가 어두워지고 난 후였다. 중년인이 망해봉 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봉우리를 넘어 맞은편 기슭에 이르면 휘월산장이 있다." "어둠 때문에 산을 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신시(辰時)까지는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야지." 두 사람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진 가량 산길을 올라갔 을 때였다. 문득 청년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아! 저기에 사람이 움직이는 듯합니다."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숲속에 공터가 어슴푸레 보였다. 중년인의 시선이 그 공터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잘못 본 거 아니냐?" "아닙니다 분명 사람이었어요. 휘월산장이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사 람이라면 혹시..." "음..." 잠시 침음하며 공터를 노려보던 중년인이 살며시 장검을 뽑아 들었 다. "살펴보도록 하자." 두 사람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 가며 공터에 접근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공터는 반경 십여 장은 족히 됨직했다. 그 공터의 맞은편엔 자그마한 동굴이 시커먼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사람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아깐 분명 사람의 형태가 보였는데..." 청년이 머쓱해져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뇌까릴 때였다. "추수(秋愁)! 몸을 숙여!" 중년인이 다급하게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쩽그렁! 타-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요란한 파찰음이 정적을 가르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상체를 숙인 청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날 카로운 물체가 있었다. '암기(暗器)?' 청년이 해연히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중년인이 어깨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공터로 나가자!" 화스스-! 타다닥! 나뭇가지와 풀숲이 헤쳐지는 요란한 소리에 섞여 암기가 두 사람을 스치며 나무에 요란하게 박혔다. 두 사람이 공터에 내려선 순간에도 십여 개의 암기가 쏘아져 왔다. 청년이 검으로 암기를 쳐내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러나 대답 대신 암기만이 숲속에서 날아왔고, 두 사람은 수십 개 의 암기를 더 쳐내야만 했다. "제기랄!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암기만 던지다니, 비천한 잡배들이로 구나!" 청년이 분개하여 다시 숲으로 뛰어들려 할 때였다. "손을 멈추어라!" 동굴 속에서 나직하면서도 힘이 잔뜩 깃들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와 동시에 암기의 공격이 멈추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임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년인이 검으로 동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대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다짜고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인가?" "미안하외다. 수하들이 당신들을 황산파(黃山派) 사람들로 오해한 모 양이오." "황산파?" 중년인이 의아해 하며 뇌까리는 동안 동굴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 어나왔다. 달빛에 드러난 그는 불혹(不惑)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아직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있는 그의 얼굴은 구레나룻과 더불어 매우 강직한 인상을 주었다.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우 리더러 황산파라니!" 청년이 벌컥 화를 내며 나서자, 그 옆의 중년인이 손으로 만류하며 중년인을 항해 읍했다. "난 태행검파(太行劒派)의 궁조생(弓助生)이고, 여긴 나의 사제인 조 추수(趙秋愁)라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는지...?" "아! 태행검파의 고수였군요." 동굴 앞에 서 있는 중년인이 탄성을 터뜨렸다. 긴장하고 있던 좀 전 과는 달리 얼굴에 기쁜 빛을 띤 그는 이내 스스로를 궁조생이라 밝힌 중년인에게 다가와 정중히 읍을 했다. "소제는 비마표국의 진국충(陳國忠)이라 하오. 저희 국주(局主)님과 귀파의 장문(掌門)과는 친분이 두터우니, 우린 한집안식구라 할 수 있 소이다." 궁조생이 언뜻 놀라며 되물었다. "비마표국의 진국충? 귀하가 무당파(武當派) 출신의 진국충 대협이 란 말씀이오?" "그렇소." 이때 조추수라 불린 청년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음성으로 따지듯 물었다. "무당파라면 무림의 태두라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암기로 우릴 공 격하였소?" 그의 신랄한 추궁에 진국충은 겸연쩍은 표정이 되어 나직이 헛기침 을 했다.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소." 궁조생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귀표국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구려?" 이에 진국충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실은..." 진국충은 비마표국의 총표두(總頭)로서 항산(恒山)까지 표물(物)을 호송한 후, 오늘 오후 오대산을 지나던 중이었다. 망해봉 기슭에서 일단의 무리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비마표국의 마 차를 발견하고는 그들을 물리쳤는데, 그 마차엔 비마표국의 국주인 유 삼길(柳三吉)이 중상을 입은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대경 실색한 그가 수하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을 틈도 없이 다시 세 명의 고수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황산파의 황산삼귀로서 진국충으로서 는 도저히 당적할 수가 없었다. 진국충은 십여 명의 수하를 잃은 끝에 그들의 추적을 가까스로 뿌리 치고서 유삼길을 이 동굴에 피신시켰는데, 그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진국충 일행이 자리를 정돈하자마자 궁조생과 조추수가 나타났으니, 이들을 뒤쫓아온 황산파의 무리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진국충의 설명에 궁조생과 조추수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랬었구려. 그런데 황산파라면 안휘성(安徽省) 일대에서만 활약하 던 문파가 아니오? 그들이 왜 여기까지 나타나 귀국주를 살해하려 했 단 말이오?" "나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오. 경황이 없어 국주님께서 어떻게 당하 셨는지조차 알아보지 못했소이다." 진국충은 씁쓸히 웃으며 뒤돌아 동굴을 바라보았다. "국주님께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오." 궁조생과 조추수는 진국충을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그 동굴은 겉보 기완 달리 제법 넓었는데, 내부엔 인공의 흔적이 있고 나무침상마저 갖춰져 있었다. 나무침상엔 오십대의 중년인이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그는 상의가 벗겨진 채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진 표두님, 국주님의 상세가 위독합니다. 아무래도 빨리 의원에게 치료를 받지 않으면..." 한 표사가 다가와 근심스레 얘기하자 진국충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지금은 움직여선 안 돼. 국주님의 생사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어 그는 동굴 내부를 한번 둘러보고는 표사에게 명령했다. "밤공기가 차가우나 불을 피워선 안 된다. 국주님껜 옷을 벗어 덮어 드려라. 몸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진국충은 다시 유삼길의 상세를 살핀 후 동굴 입구로 나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좌우로 궁조생과 조추수가 앉자 진국충이 입을 열 었다. "비마표국은 만일을 대비해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 두었는데, 이곳도 그 중의 하나라오." 문득, 조추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국충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귀표국의 어려움도 모르고 조금 전 무례했던 저의 태도를 사과드리 겠습니다." 조추수의 깍듯한 예의에 기분이 좋아진 듯 진국충이 나직이 웃었다. "하하, 명문정파의 제자답게 예의가 바르시구려. 그땐 누구라도 화를 낼 만한 상황이었으니, 잘못은 전적으로 내게 있소이다." 진국충이 웃음을 터뜨리자 궁조생과 조추수도 따라서 웃었다. 세 사 람의 웃음 소리에 일순 주위엔 화기가 감도는 듯했다. 하나 이도 잠시, "그런데 황산 일대에서만 활약하던 삼귀가 이곳까지 와서 귀국주를 해치려 하다니, 진 형께선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으십니까?" 궁조생이 신중한 목소리로 묻자 진국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글쎄요. 평소 우린 그쪽 지방과 내왕이 없어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었는데... 우리도 영문을 알 수 없소이다." "그들은 귀국주의 목숨을 노렸으니, 이는 전면적인 도전이 아니겠 소?" 이때 동굴 안에서 한 표사가 나오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국주님은 황산삼귀에게 상처를 입으신 게 아닙니다." 진국충이 물었다. "그럼 누가 한 짓이냐?" "황산삼귀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일단의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는데, 그들 또한 황산파의 무사들이었습니다. 국주님은 그들 중 비쩍 마르고 키가 무척 큰... 아마 이분 소협과 비슷할 겁니다. 채찍을 쓰는 자에게 당하셨지요. 그자의 채찍 끝이 국주님의 가슴을 찔러서 상처를 입힌 겁니다. 간신히 그자의 손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국주님은 의식을 잃고 말았지요." "쇄비편(碎碑鞭) 막두철(莫斗澈)!" 진국충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쇄비편 막두철이 어떤 인물입니까?" 강호의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조추수가 묻자 궁조생이 침중하 게 대답했다. "그는 황산삼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황산파의 고수 중의 고수야." 진국충이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마저 나섰다면 우리 비마표국은 화를 피하기 어렵겠는걸." 이때였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느냐? 하하하하!" 대소(大笑)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세 명의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들은 각각 한 쌍의 금륜(金輪)과 은륜(銀輪), 혈륜(血輪)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황산삼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진국충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진 못해!" 금륜을 든 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한 인물을 바닥에 내동 댕이쳤다. 바닥에 엎어진 그는 나직이 신음하며 몸을 꿈틀거렸는데, 비 마표국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격전 중에 부상을 입어 동떨 어져 있던 그를 위협해서 진국충이 숨어든 위치를 알아 낸 듯했다. "진국충, 이제 저승에 갈 준비나 해라!" 황산삼귀가 저마다 흉흉한 안광을 뿜으며 다가오자 궁조생이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난 태행검파의 궁조생이라 하오. 귀하들은 무슨 일로 비마표국 사 람들의 목숨을 앗아 가려 하오?" 금륜을 든 자가 차갑게 냉소했다. "태행검파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간섭하지 마라." "무슨 말씀! 평소 비마표국의 유(柳) 국주(局主)는 본(本) 파(派)와 친분이 두터우니, 그들의 위험을 모른 체할 수는 없소." 궁조생의 말에 금륜을 든 자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근래에 태행검파의 이름이 제법 알려지긴 했다만..." 그가 말꼬리를 흘리자 옆에 있던 혈륜을 든 자가 음침하게 웃으며 한 걸음 나섰다. "아쉽게도 우린 그 정도의 이름에 자비를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 아 니지." 조추수가 검미를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악당들이로구나!" "이런... 하하하하!" 혈륜을 든 자가 조추수를 바라보며 대소했다. "미안, 미안. 소형제(少兄弟)에게 예의를 잃었구먼. 남들은 우릴 황산 삼귀(黃山三鬼)라 부른다네." 은륜을 든 자가 한걸음 나서며 조소하듯이 말했다. "이제 예의도 차렸으니 너희는 이만 죽어 줘야겠다." 그들의 오만함과 무례함에 화를 참지 못한 조추수는 이미 장검을 뽑 아 들고 있었다. "어디, 말만큼이나 너희들의 실력도 대단한지 보자." 조추수는 황산삼귀가 어떤 인물인지 몰랐다. 따라서 마치 두 사람의 목숨을 자기 것인 양하는 눈앞의 인물들을 고깝게 여겨 단숨에 베어 버리려 작정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궁조생의 경우는 달랐다. 황산삼귀는 황산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황산파(黃山派) 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친형제간으로 맏형이 방적(方赤)으로 금륜을 사용하고, 둘째가 방도(方陶)로 은륜을 사용하며, 셋째가 방탐(方耽)으 로 혈륜을 사용했다. 황산파는 중원무림에서 이름을 떨친 지 백 년이 넘은, 몇 안 되는 세력중 하나였다. 비록 그들이 황산파의 최고고수는 아니더라도 개개인의 실력이 능히 열 손가락에 꼽힐 만했다. 따라서 그들의 실력이 어떠할지는 불문가지 (不問可知)였다. 궁조생으로선 눈앞의 삼 인 중 한 명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라 상황이 어렵게 되었음을 느꼈다. 궁조생은 성질 급한 조추수를 말리며 방적에게 물었다. "황산은 이곳과 멀어 평소 내왕이 없었는데, 이렇게 혈겁(血劫)을 자 행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유는 지금 알 필요 없다. 저승에 가면 알려 주는 자가 있을 터이 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혈륜이 섬뜩한 소음을 일으키며 궁조생의 얼굴 로 날아들었다. "어딜!" 일갈(一喝)과 함께 조추수의 검이 혈륜을 마주쳐 갔다. 조추수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 즉시 공격해 오리라 짐작했으므로, 휘 두르는 검엔 공력(功力)이 잔뜩 실려 있었다. 따-앙! 혈륜과 검이 부딪치며 강한 금속성이 울렸다. 검의 반동으로 인해 혈륜이 방금 날아왔던 방향으로 날아가고, 잇따라 또 하나의 혈륜이 조추수의 목을 노리며 다가왔다. 보기에는 별로 무거워 보이지 않던 혈륜과 부딪치는 순간, 검을 타 고 전해지는 반탄력에 손목이 저려 와 조추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간담이 서늘해진 조추수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혈륜을 감히 받아 칠 생각을 못 하고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검을 뽑아 든 궁조생이 혈륜을 쳐내며 연이어 삼(三) 검(劍)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나의 혈륜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방탐은 왼손에 쥔 혈륜으로 검을 막으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나머지 혈륜을 회수하고 있었다. "고수로군. 태행검파엔 고수가 많지 않은데, 어째서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까?" 방적의 말에 조추수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최소한 그대들의 황산파보다는 고수가 많을 것이다." "하하하, 자존심이 강한 친구로군. 하지만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방적이 눈짓을 하자 방도와 방탐이 싸늘히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 왔다. 위기를 느낀 진국충 등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고, 방적의 일갈과 함께 삼귀가 덮쳐 들었다. 삽시간에 동굴 앞 공터엔 검과 륜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난무했다. 진국충은 방적을, 궁조생은 방도를, 그리고 조추수는 방탐을 상대하 여 어울렸다. 진국충과 궁조생은 방적, 방도를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금세 어려움 에 봉착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추수는 궁조생에 비해 검법의 조예가 한 수 정도 뒤처졌 다. 따라서 십여 초가 지나자 조추수는 방탐의 혈륜에 연신 밀리면서 작 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는 상처를 입을 때마다 신음 대신 기합성 을 내질렀지만, 그런다고 전세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조추수의 위급함을 보면서 궁조생은 탄식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사제와 난 이곳에 뼈를 묻어야겠구나!' 제일 먼저 조추수가 방탐의 혈륜에 희생될 것이 분명했다. 조추수가 죽고 나면 방탐은 방적이나 방도를 도울 터이니 어찌 당할 수 있겠는 가. 이때, 진국충이 동굴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나와 조 소협을 돕도록 해라!" 동굴 안에서 다섯 명의 무사가 저마다 칼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진 국충이 유삼길을 보호하기 위해 동굴에 배치한 무사들이었다. 상황이 위급한 만큼 앞뒤를 가릴 수 없었다. 그들이 동굴에 없을 때 누군가가 동굴로 들어간다면 유삼길의 목숨이 위태롭겠지만, 어차피 여기서 패 한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궁조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실력 이 만만치 않음을 이내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추수를 돕는다 면 오히려 방탐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 하나 이도 잠시, 다섯 무사가 조추수에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으하하하!" 귀를 찢을 듯한 웃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왔 다. 격전 중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장내에 내려서더니 신속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신법의 빠르기로 보아 장내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동굴에 들어감과 동시에 동굴 안에서 다급한 호통 소리와 서너 마디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놈!" 진국충은 안색이 대변하여 방적의 금륜을 물리치며 급히 동굴 쪽으 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방적이 내버려두질 않았다. "어딜!" 나직한 호통과 함께 한 쌍의 금륜이 진국충의 등을 노리며 다가들었 다. 유삼길에 대한 걱정으로 진국충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소리로 위치를 가늠하여 검을 휘둘렀다. 따-앙! 경쾌한 금속성이 울리며 금륜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진국충은 나 머지 하나는 검으로 쳐내지 못하고 상체를 우측으로 비틀었지만 완전 히 피하진 못했다. 금륜의 왼쪽 팔뚝이 스치며 피가 튀었다. 진국충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 않고 동굴 쪽으로 달렸다. 하나 진국충이 동굴 입구에 막 들어가려는 찰나, 한 인영이 뛰쳐나 오며 팔을 휘둘렀다.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진국충의 몸을 휘감아 왔 다.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피할 틈이 없어진 진국충은 검으로 그 기운 을 쳐내려 했다. 그런데 뱀과 같은 기운이 검에 부딪히자 똬리를 틀듯 휘감더니, 그 끝이 진국충의 왼쪽 옆구리를 강타하는 게 아닌가? "크윽!" 짜는 듯한 신음성이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진국충의 몸이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진국충을 물리친 인물은 오른손을 떨쳐 진국충의 검을 멀리 던져 버 리고 뱀 같은 기운을 회수했다. "하하핫!" 우뚝 서서 대소하는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은 이 장 길이의 가죽채 찍이었다. 그의 손 씀씀이는 쾌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회수한 채찍을 곧바로 휘둘러 궁조생을 공격했다. 휘리-릭! 듣기에도 섬뜩한 파공음에 궁조생은 기겁하여 맞설 생각도 못 하고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이때, 방도는 물러나는 궁조생을 구태여 공격하지 않았는데, 방탐 또 한 조추수를 공격하던 손을 멈추었다. "막 사형! 성공하셨군요." 방적이 반색하여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채찍을 든 자의 왼손에 고 정되어 있었다. "흐으으... 막두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진국충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입에서 피 를 흘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의 부릅 뜬 눈이 막두철의 왼손을 노려보았다. 깡마르고 키가 멀대같이 큰 막 두철의 왼손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유삼길의 수급을 쥐고 있었다. 진국충은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이성을 잃은 듯이 소리쳤다. "막두철! 대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기에 국주님을 죽였단 말이 냐?" 막두철이 가소로운 표정으로 냉소했다. "곧 죽을 놈이 그건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으아아-!" 괴성과 함께 진국충의 몸이 막두철을 향해 쏘아져 갔다. 생사를 도 외시한 육탄 공격이었다. 막두철은 냉혹한 표정으로 진국충이 다섯 자 앞으로 다가오길 기다 렸다가 벼락같이 걷어찼다. 원앙연환퇴(鴛鴦連環腿)의 쾌속무비한 공격이 진국충의 가슴에 작렬 했다. 앞으로 나아갔던 속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진국충의 몸이 뒤로 나 뒹굴었다. "진 형!" "진 표두님!" 궁조생과 다섯 무사가 놀라며 진국충에게 급히 다가갔다. 조추수 또 한 궁조생을 따라 진국충에게 다가갔는데, 막두철이 다시 공격해 올까 두려워 검으로 막두철을 겨누고 있었다. 진국충은 내상이 심한 듯 입으로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막두철, 정말 잔인하구나. 황산파는 마교(魔敎)의 무리에게 굴복하 여 악행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과연 사실이었구나. 너희는 무당 파와 태행검파의 보복이 두렵지도 않느냐?" 궁조생이 분노하여 호통하자 막두철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이 어렸 다. "너희들은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 터인데, 누가 알겠느냐? 방적, 어 서 저들이 입을 다물도록 처리하라." "예, 사형!" 막두철의 명을 받은 삼귀가 징그럽게 웃으며 다가들었다. '이제 저들을 막을 힘이 없으니 여기서 뼈를 묻게 되는구나.' 속으론 절망하였으나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궁조생은 비장한 각오로 검을 들며 조추수에게 말했다. "태행검파의 제자는 죽음에 결코 비겁해서는 안 된다." "물론입니다, 사형!" 조추수가 호기있게 대답했다. 그는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전의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오히려 막두철 에게 호통했다. "막두철! 하늘은 악(惡)을 행한 자에겐 반드시 화(禍)로써 보답하는 법. 오늘 네가 기고만장하더라도 훗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 다." 그의 이런 모습엔 대장부의 늠름한 기개가 어려 있었다. 이에 막두 철이 눈가에 언뜻 이채를 띠며 말했다. "어린 놈의 심지가 제법이로구나. 죽이긴 아까운 생각이 드는걸. 으 흐흐흐흐..." 하나, 마지막에 흘린 막두철의 음소(陰笑)에 장내엔 더욱 스산함이 감돌았다. 이때였다. 삘릴리-!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난데없는 피리 소리에 막두철과 삼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어둠을 타고 자연스럽게 퍼져 나오는 피리 소리는 끊어질 듯하다가 강렬해지곤 했는데,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 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 다. "제길! 시,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구나." 갑자기 막두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삼귀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 떠올랐다. 삼귀의 시선이 동시에 막두철에게 향했다. "사, 사형. 어, 어떻게 하지요?" 말을 꺼내는 방적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멍청아!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당장 그분께 가야지!" 막두철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유삼길의 목을 취했으니 서, 설마 우릴..."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말을 더듬던 그가 진국충과 궁조생 등을 노려 보았다. "네놈들은 오늘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가자!" 막두철의 신형이 번득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삼귀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장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모두 멍해져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문득, 진국충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궁조생의 정신을 일깨웠다. "진 형, 몸은 어떠하오?" 진국충은 웃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지만 억지로 고통을 참는 표정이 역력했다. "겨, 견딜 만하오." 조추수가 진국충을 부축하여 앉히며 물었다. "그들이 왜 갑자기 떠나갔을까요? 우릴 죽이는 건 쉬운 일이었을 텐 데." 진국충과 궁조생은 대답을 못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도 조 추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국충이 입을 열었다가 고통 때문인지 얼굴을 찌푸리더니 다시 말 을 이었다. "그 피리 소리는 그들을 부르는 신호였던 모양이네."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 보면 피리 소리의 주인은 대단한 인 물일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글쎄... 어쩌면 피리 소리의 주인은 마교의 주요 인물일지도 모르 지." 조추수가 얼굴 가득 놀라움을 담고 소리쳤다. "마교? 황산파가 마교의 일원이었단 말입니까?" 무림의 정세에 어두운 조추수였지만, 마교에 대해선 귀가 따갑도록 듣던 차였다. 현재 중원무림은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로 크게 양분되어 극단적 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정파를 대표하는 세력으로는 전통적인 무림의 태두(泰斗)로 군림해 온 소림(少林), 무당(武當)과 노가장(魯家莊) 등이 있었다. 노가장은 이백 년 전 무림을 경동시켰던 검도쌍마(劒刀雙魔) 중 검 마(劒魔)가 대별산(大別山)에 은거하면서 형성된 세력이었다. 소림과 무당이 무림의 일에 소극적인 데 반해 노가장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으므로, 정파를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사실상 노가장을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에 반해 사파는 회회교(回回敎)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황산 천도봉(天都峰)에 위치한 회회교는 교주(敎主) 봉천생(奉千生) 을 필두로 음풍노조(陰風老祖) 조천주(趙天柱), 검독쌍마(劍毒雙魔), 팔 비금마(八臂琴魔) 채담(蔡淡), 낭아조(狼牙爪) 공야직(公冶直) 등 여섯 장로들 모두가 중원무림 최강의 고수들이었다. 이십여 년 전부터 회회교의 봉천생은 세력을 확충하면서 사파의 이 백여 대소방파를 굴복시키더니, 마침내 강호제패(江湖制覇)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파에선 회회교와 그에 굴복한 사파의 방파들을 통칭해 마교라 불 렀다. 회회교와 정파무림과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작금엔 소림과 무당마저 개입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 회회교의 세력이 워낙 방대하고 강하여 정파는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아무튼 하늘이 우릴 도운 셈이야." 진국충의 중얼거림에 궁조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진국충이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유 국주님은 나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시오. 무당에 계시는 사부 님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반드시 황산파에 복수를 하고 말 것이오!" 일행은 유삼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다. 유삼길이 누웠던 침상엔 얼굴 없는 시신이 놓여 있었다. 목에서 쏟아져 흥건하 게 고인 끈적한 피가 침상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시신 의 목 부위는 억지로 뜯어 낸 것처럼 살점이 불규칙하게 너덜거렸다. "채찍으로 목을 내리쳐 끊었을 거야." 이제껏 가까이서 시신을 자세히 본 적이 없는 조추수는 역겨움에 눈 살을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그러나 공교롭게 시선을 돌린 곳에도 시신이 있었다. 유삼길을 지키 던 네 명의 표사들도 차가운 시신이 되어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궁조생은 진국충에게 작별을 고했다. "우린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휘월산장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요." 진국충이 깜짝 놀라더니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저런, 이거 우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천만에요. 사부님도 우리의 행동을 칭찬하실 겁니다. 오늘 일엔 너 무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그럼 저희는 이만!"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2 장 휘월(輝月)은 죽음만을 비춘다 제2장 휘월(輝月)은 죽음만을 비춘다 이미 약속한 시간을 넘긴 터라 궁조생과 조추수는 어둠을 무릅쓰고 경공(輕功)을 전개하여 망해봉을 넘었다. 두 사람은 경공을 시전한 지 한 시진이 못 되어 휘월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시(亥時) 무렵. 달빛이 비치는 개천 너머로 아담한 규모의 장원이 어슴푸레 눈에 들 어왔다. "사부님께서 늦어도 신시(辰時)까진 도착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렇 게 늦었으니..." 개울을 건너며 궁조생은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사형에게 한두 마디쯤은 할 만도 하건만, 조추수는 묵묵히 궁조생의 한걸음 뒤를 따를 뿐이었다. 조추수는 어려서부터 태행검파에서 무공을 배웠고 그 자부심이 대단 했다. 태행검파의 검법을 수련하여 대성하면, 강호를 주유하며 행협(行 俠)하여 이름을 떨치리라는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겪은 일은 어떠한가? 이제껏 고수라고 존경해 마지않던 사형조차 막두철의 한두 번 공격을 버거워하지 않았던가. 조추수는 막 두철의 놀라운 무공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유삼길의 수급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의기 소침해졌다. '어느 세월에 무공을 익혀 그를 능가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난 그 만큼의 무공 성취라도 이룰 수 있는 걸까?' 문득 피리 소리를 두려워하던 막두철의 표정이 떠올랐다. '막두철이 그토록 두려워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고수 일까? 추수야, 추수야... 넌 이제껏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조추수는 지난 이십 년간 무공을 익히는 동안 산을 벗어난 적이 없 었다. 사형을 따라 처음 하산(下山)한 조추수의 마음은 행협에 대한 기 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하산하여 처음 치른 격전에서 심한 좌절 감을 느낄 줄이야. 조추수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론 연신 실망의 한숨을 토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개울을 건너 휘월산장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희미한 윤곽 을 드러내고 있는 산장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산장의 대문과 십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자, 갑자기 궁조생이 걸음을 멈추며 대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쉿!" 원래 큰 조추수의 목소리를 주의시킨 후 궁조생은 손가락으로 대문 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데로 시선을 옮긴 조추수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희끄무레한 두 개의 물체를 볼 수 있었다. '시체?' 물체의 형상이 사람임에 틀림없는지라 조추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 다. 궁조생이 나직이 말했다. "산장에 무슨 변고가 있는 모양이다." "설마 그 마두가 나타나 산장의 사람들을 모두...?" 조추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는 궁조 생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돌연 궁조생이 날렵하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사형의 의도를 짐 작한 조추수도 즉시 뒤따랐다. 여치의 울음 소리만이 귓전을 간질이는 가운데 두세 호흡 정도의 시 간이 흘렀을 때였다. 돌연, 휘익! 담장 너머로 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그가 바닥에 착지한 순간, 또 다른 인영이 담장을 훌쩍 넘어와 앞의 인영을 가로막았다. 궁조생과 조추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이 보여 준 한 수의 경공만으로도 궁조생이나 조추수로선 도저히 상대할 수 없 는 수준의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착지한 순간부터 아무런 말 없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 다. 한 사람은 검을 들고 있었고, 뒤쫓아온 사람은 적수공권(赤手空拳) 이었다. 취리릭! 쉬잇! 장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어둠을 갈랐다. 그러나 상대는 더욱 빨랐다. 달빛 아래 장검이 번득일 때마다 맨손 의 인영은 귀신 같은 몸놀림으로 검광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두 사람의 출수가 너무 빠른 관계로 조추수는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 초식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단한 고수들이로구나. 하지만 이렇게 구경만 할 수는 없지. 관 장 주를 도와 마두를 물리쳐야 할 일이다.' 조추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 뛰쳐나가려 하자, 궁조생이 다급히 팔을 잡으며 나직이 물었다. "무엇 하려느냐?" "우리도 힘을 보태야지요. 둘 중 한 사람은 관 장주를 돕는 자일 것 이고, 한 사람은 마두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고수들이다. 우리가 나 서봐야 도움이 안 돼." "사형, 관 장주는 본 파의 어른들과 친분이 두터우십니다. 이렇게 구 경만 한다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사부님께서 내게 달리 내린 명도 있고 하니 잠시 관망키로 하자." "사부님의 명이라뇨?" "될 수 있으면 마두와 겨루지 말고 결과를 지켜보기만 하라고 하셨 다." "사부님께서 어찌하여 그런 명을 내리셨단 말입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그런 명을 하신 것은 따로 의도하시 는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무공을 익힌 의협인으로서 이렇게 몸을 사린다는 것은..." 조추수가 잔뜩 볼멘소리를 할 때였다. "아!" 갑자기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고, 연이어 검을 든 자의 신형이 힘없이 쓰러졌다. "흥! 감히 우리를 속이고 달아나려 하다니." 적수공권의 사내는 쓰러진 상대를 발로 차 죽음을 확인하더니, 싸늘 히 냉소하며 다시 담장을 넘어갔다. "무서운 권법이로군요. 저런 기묘한 수법은 처음 봅니다." 조추수가 감탄과 경악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을 때였다. 휘익! 휙! 장원 담장을 넘어 뛰쳐나오는 세 개의 신형이 있었다. 그들은 착지 하자마자 다시 몸을 날렸는데, 한 번 도약할 때마다 삼 장 이상을 가 볍게 나아갔다. 움직임이 너무 빨라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조금 전 살인을 한 자도 끼여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장원은 더 없는 정적 속에 빠져 들었다. 그들이 사 라진 후 일 각 이상이 지나서야 궁조생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산장은 이미 겁난에 휩쓸린 것 같구나." 궁조생은 조심스럽게 조금 전 쓰러진 시신에게 다가와 엎어져 있는 시신을 바로 눕혔다. 시신은 오십대의 중후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조 추수가 옆에서 보니 그는 칠공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사형, 이 사람을 아십니까?"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검법을 보아 무림에 이 름을 떨칠 만한 고수임엔 틀림없는데..." "우측 늑골이 모조리 바스러져 버렸군요. 무서운 권법입니다. 이런 고수를 그토록 수월하게 죽이다니, 대체 조금 전 그자는 누구였을까 요?" "..." 궁조생은 조추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대문으로 달려가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신 중 한 구를 뒤집었다. 그 시신 또한 칠공에 끈적끈 적한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 곁에 쓰러져 있는 시신도 마찬가지였 다. "모두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내장이 바스러져 죽었군." 궁조생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대문으로 다가갔다. 일 장 높이의 대문이 빠끔히 열려 있었고, 그 뒤로 부러진 빗장이 보였다. 누군가가 대문을 쳐 빗장을 부러뜨린 것 같았다. '무서운 힘이로구나.' 어른의 허벅지만큼이나 굵은 빗장을 보며 조추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문 뒤로 군데군데 패어 있는 조벽(照壁)을 지나자, 그 뒤로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앗!" 조벽 옆에 서 있는 아름드리 백양나무를 지나던 조추수가 나직이 경 악성을 토했다. 나뭇가지에 다리가 걸린 채 몸을 아래로 늘어뜨린 시 체 한 구가 어깨를 쳤기 때문이다. 정신을 수습하고 자세히 보니 그 시신도 칠공에 끈적한 피를 묻히고 있었다. 궁조생이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조금 전의 시신과 같은 수법에 당해 죽었군." "그 마두가 한 짓일까요?"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설마 초빙된 고수들이 모두 죽은 건 아니겠지요?" 조추수는 두려움에 가슴이 은근히 떨려 옴을 느꼈다. "글쎄... 아! 저기 또 시체가 있군." 정원의 한 가산(假山) 옆에 다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급히 가산 뒤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순간, "이런...!"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과 탄식이 어우러진 묘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산 뒤로 십여 구의 시체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인간이 어찌 이런 살겁(殺劫)을 자행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망해봉에서 목격한 유삼길의 죽음만으로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조추수였다. 하나, 그 한 사람의 죽음이 어찌 지금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조추수는 공포감에 앞서 자신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조추수에 비해 궁조생은 아주 침착했다. 그의 시선이 한 구의 시체에 고정되더니 재빨리 다가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도 그 시신이 고급스런 비단옷을 걸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과 전신을 자세히 살피던 궁조생이 탄식 했다. "이 사람은 휘월산장의 소장주(少莊主)인 관일지(關一志)로군. 그는 단지 이 작은 상처에 의해 즉사한 것 같은데..." 궁조생의 손이 관일지의 미간(眉間)을 가리켰다. 관일지의 미간엔 자 세히 보아도 발견하기 힘든 미세한 상처가 있었다. 실처럼 가는 반 치 가량의 혈선(血線). 그저 살갗을 살짝 스친 듯한 상처였다. 조추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까짓 상처에...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어두워 정확히 살피긴 어렵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 옆의 시신도 마찬가지야. 미간을 제외한 다른 곳엔 상처의 흔적이 보이지 않거든." 조추수가 옆의 시신을 바라보니 과연 미간에 관일지와 같은 상처가 있었다. "이렇게 미세한 상처는 검기(劍氣)에 의한 것일까?" 검미를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궁조생은 정원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보 이는 커다란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에 들어서자 자그마한 중정(中庭)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닥의 석판(石板)엔 역시 장원의 무사들로 보이는 시신 십여 구가 뒹굴고 있었다. 중정을 지나 상방(廂房:접객실) 너머로 대청(大廳:주인실)이 보였다. 건물 내부엔 불이 꺼져 있어 한치 앞을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조추수가 얼른 화섭자(火攝子)를 꺼내 불을 밝히자, 상방에 두 구의 시체가 눈에 띄었다. 그들의 복장은 정원과 중정의 무사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어 장원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한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칠공에서 피를 쏟고 죽 어 있었다. 그의 왼손은 철차(鐵叉)를 굳게 쥐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머리에 철부(鐵斧)가 박혀 선혈이 낭자해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철부는 그의 머리를 목 부위까지 쪼갠 채 꽂혀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휴우... 사람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 도저히 인성을 가진 자의 짓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군요. 철부를 휘두르는 잔인한 살인마(殺人魔) 라...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 철부는 흉수의 것이 아니야." "그럼?" "이 두 사람은 산서이협(山西二俠) 권두조(權斗朝), 권두수(權斗修) 형제야. 철차를 든 자가 권두조이고, 여기 철부에 당한 자는 권두수인 데, 철부는 바로 권두수의 애병(愛兵)이지. 이들은 오랫동안 협명을 떨 친 고수들인데, 자신의 병기에 당하다니... 흉수의 무공은 추측하기 힘 들 정도로군." "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흉악한 수법을 쓴 것일까 요?" 궁조생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의 탁자와 의자, 집기 등은 모두 어수선하게 파괴된 채 널브러 져 있었다. 그 사이로 군데군데 장원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궁조생은 그 중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시신에게 급히 다가갔다. 그 시신은 비단장포에 피가 흥건히 적셔져 있었고, 머리가 잘려져 없 었다. 조추수가 역겨운 듯이 중얼거렸다. "오늘 목이 잘린 시체를 두 번이나 보게 되는군요." "아마도 장주 관무목(關武牧)인 듯하구나." 궁조생은 낮게 탄식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주 외에 정확히 여덟 구의 시체가 더 있었다. "오늘 휘월산장의 사람들은 모두 화를 면치 못한 것 같구나. 벌써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니..." 궁조생은 연신 혀를 차며 무어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 보다. 아니면 하루 사이에 이토 록 많은 시체를 볼 리가 없잖은가. 여긴 마치 전쟁터와도 같구나. 추수 야, 추수야. 너는 아직 강호를 활보하려면 멀었다. 여기에 죽은 자들은 모두가 쟁쟁한 고수들인데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너라 면 오죽하겠느냐. 게다가 신검문의 고량 대협마저... 아! 고 대협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조추수는 마치 새로운 사실을 알아 낸 것처 럼 소리쳤다. "사형! 오늘 신검문의 고량 대협도 여기에 온다고 했는데, 그는 어떻 게 되었을까요?" 궁조생도 신검문의 고량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 다. "글쎄다. 아까 이 장원을 빠져 나간 세 명의 무공이 그토록 높으니 그라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는지..." 두 사람은 건물을 나와 장원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눈에 띄는 건 모두 장원의 무사들이었다. 어떤 자는 연못에 빠져 죽 었고, 어떤 자는 장원의 담벼락을 넘어가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 또 어 떤 이는 가산의 은밀한 곳에 숨은 채 죽어 있기도 했다. 흉수는 싸울 의사를 잃고 도망가는 자들에게도 가차없이 살수를 썼 음이 분명했다. 후원에 이르자, 산장 이외의 사람으로 보이는 세 구의 시체가 있었 다. 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한 사람은 우뚝 선 채 미동도 없었다.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철선(鐵扇)과 판관필(判官筆)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미간에 가는 상처를 입은 채 죽어 있었다. 우뚝 서 있는 자는 흰색의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그의 정수리 에 검의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마에 두른 영웅건을 흠뻑 적신 채 굳어 있었다. 궁조생은 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더니 이윽고 머리를 돌렸다. "검이 그의 머리와 목을 관통해서 내장까지 뚫어 버렸군. 이토록 잔 인한 수법을 쓰다니..." 궁조생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조추수는 온몸에 땀이 축축하게 배는 걸 느꼈다. 긴장과 불끈불끈 치솟는 분노로 인해 자꾸만 침을 삼켰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부엉이 소리가 스산함을 더해 주었다.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사형, 고 대협은 어디 있을까요?" 조추수의 물음에 궁조생이 길게 탄식했다. "이 사람이 바로 신검문의 고량 대협이란다." 순간, 조추수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신검문의 고량이라면 산서무림에선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 의 고수였다. 따라서 그라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리라 굳게 믿었던 조 추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 궁조생이 조추수의 손을 잡으며 황급히 후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야겠다. 만약 흉수가 되돌아오기라 도 한다면 우린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어." 두 사람은 바쁜 걸음으로 후원을 나서며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 로 향했다. 정원의 커다란 연못을 가로지른 석교를 지나 대문에 이를 즈음, 조 추수는 조벽 옆 백양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시체가 생각나 화섭자로 비추어보았다. 시체는 그대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조추수는 섬뜩한 느낌에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자연히 손에 들고 있 던 화섭자의 불빛이 조벽을 비추게 되었는데,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순간, 그의 입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형!" 막 조벽을 지나 대문으로 향하던 궁조생이 급히 돌아오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추수는 대답 대신 화섭자로 조벽을 가리켰다. 희미한 불빛에 아른거리는 조벽엔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혈채(血債)는 피[血]로써 갚아야 한다. 장한(長恨)> 글자는 피로 쓴 듯 흘러내린 자국으로 그 형상이 일그러져 있었다. 보기에도 섬뜩한 핏빛 글씨는 달빛에 어우러져 기괴(奇怪)함을 자아내 고 있었다. 놀람도 잠시, 궁조생은 조추수를 재촉하여 산장을 나섰다. * * * 휘월산장의 혈겁을 목격한 두 사람은 길을 재촉하여, 이레가 지나자 진성(晋城)과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진성과 태행검파가 있는 태행 산은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으므로 두 사람은 마음의 여유를 가 질 수 있게 되었다. "사형, 배가 몹시 고프니 저기서 식사나 하고 가죠." 조추수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나직한 구릉에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울타리 위로 초막의 지붕이 보였다. 가느다란 막대기의 끝엔 '주(酒)' 자가 적힌 하얀 깃발 이 바람을 받아 펄럭이고 있었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고, 먼 길을 급히 오느라 식사를 하지 못한 궁조 생은 마침 시장기가 동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주막으로 들어섰다. 다섯 개의 어설프게 만든 탁자 들이 눈에 띄었다. 동쪽 끝에 위치한 탁자엔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세 명의 장한 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 장검을 매고 있었다. 그들은 주막에 들 어서는 궁조생과 조추수를 힐끔 바라보더니 이내 식사에 열중했다. 그 들은 모두 청색 장삼을 걸치고 청색의 영웅건을 둘렀는데, 그 중 네모 진 얼굴에 짙은 눈썹을 한 사람의 강인한 기상이 돋보였다. 부엌에서 주인인 듯한 이십대의 청년이 재빨리 나와 탁자와 의자를 정돈하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궁조생과 조추수는 세 사람이 식사하고 있는 바로 옆 탁자에 앉았 다. 자리에 앉으며 조추수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우연히도 네모진 얼굴의 장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 장한은 음식을 씹으면서 씨익 웃어 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탁자의 음식으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주인이 걸레로 탁자를 닦으며 물었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닭고기 요리와 술을 한 병 주게." 주인이 물러가자 궁조생과 조추수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 다. 그들의 뇌리엔 아직도 휘월산장의 처참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계 속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사형, 흉수가 그토록 끔찍한 살겁을 자행한 이유가 무얼까요?" "글쎄다. 산장의 조벽에 쓰인 문구를 보면 원한 관계 때문인 것 같 은데... 하지만 무림은 궤모권술(詭謀權術)이 난무(亂舞)하는 곳이라 섣 불리 단정하기가 어렵구나." "석 달 전 패환도 일가가 몰살당한 이후 정확히 한 달 간격으로 혈 겁을 자행했어요.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더 일어날지 모르겠군 요." "이번에 사부님이 우릴 휘월산장에 보내 돕도록 하신 것은 흉수의 정체를 알아 내기 위함이었다. 우린 흉수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하고 여러 고수들의 시체만 보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 한 셈이야." "역부족임은 알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나서서 도와야 하지 않았을까 요?" 흉수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고수를 돕지 못한 것이 오는 길 내내 마음 에 걸려 한 말이었다. 궁조생이 씁쓸히 웃었다. "그랬다면 사제와 나의 시체 두 구만 늘어났겠지." 문득, 조추수가 길게 탄식하며 애석한 어조로 말했다. "흉수가 관 장주에게 어떤 원한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관 장주의 식 구들은 모두 원통해 할 테니 결과적으로 원한만 늘어난 셈이로군요." 조추수의 말에 궁조생의 마음도 움직이는 바가 있는지 어두운 신색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엔 은원의 시비(是非)가 끊임이 없어 항상 죽이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지. 심지어는 수대에 걸쳐 서로 죽이는 살겁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식사에 열중하던 세 사람은 궁조생과 조추수의 대화에 관심이 가는 지 식사를 중단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번 혈겁엔 공통된 점이 있더군요." 궁조생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으흠! 그래, 휘월산장에서 무얼 알아 냈느냐?" "휘월산장에서 알아 낸 거라곤 고수들의 죽음과 조벽의 문구밖에 없 어요. 제가 말한 공통점이란 패환도 구예와 이화창 이각, 그리고 휘월 산장의 관무목은 수십 년 전부터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것입 니다.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 닌 듯하군요. 그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자는 산서무림에 십여 명이 넘 으니 어쩌면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칠지도 모를 일이지요." 조추수의 설명에 궁조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들과 사부님께서도 친분이 두텁다는 것이 야." "어쩌면 이번 혈겁이 우리 태행검파에 미칠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신검문도 휘월산장과는 각별한 관계였으니..." 궁조생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야. 우선 사부님께 보고를 드리면 무슨 말 씀이 있으시겠지. 그분은 경륜과 지혜가 두터우시니까." "휴우! 어째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해야 할까 요? 강호에 나오자마자 이런 참사를 목격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습니다, 사형." 조추수는 태행산에서 자라 오는 동안 여러 사람들 틈에서 때로는 좋 은 일들을, 때로는 좋지 못한 일들을 겪었다. 이익이 결부되는 일에서 도 서로간에 적절한 타협과 이해가 존재하였기에 사람 사는 일이 과히 나쁘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휘월산장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추수는 나직이 한숨을 지었 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또 현재 어떤 은원이 있든 간에 이 번 살겁은 상대에게 추호의 선택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잔혹한 행위가 아닌가? 모두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침묵이 감도는 사이 주인이 음식을 내왔다.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기운도 잠시, 그보다는 당장의 배고픔이 우선했던지라 두 사람 은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몇 잔의 술과 절반 가량의 음식이 접시에서 사라질 무렵, 달그락거 리는 말발굽 소리에 이어 사립문 밖에서 말 몇 마리의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려면 멀었으니, 여기서 간단히 요기하고 길을 계속 감세." "예, 그러지요." 약간 새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사립문 안으로 네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익어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궁조생과 조추수의 안색이 홱! 변해 버렸다. 그들 또한 궁조생과 눈이 마주치자 일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중 키 큰 사내가 손가락으로 궁조생을 가리키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여기서 만나게 되는구나." 궁조생과 조추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탁자가 흔들리며 접시와 술잔이 엎질러져 음식과 술이 바닥에 흩어졌다. 조추수는 긴장으로 등줄기가 후줄근해짐을 느끼며 상대를 노려보았 다. 비쩍 마른 키에 뱀눈으로 살기를 줄줄이 내뿜는 중년인. 그는 다름 아닌 쇄비편 막두철이었다. 그 뒤엔 황산삼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눈과 입 주위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 다. 방탐이 혈륜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날 네놈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걸 생각하면 찢어 죽여도 시원치 가 않아." 오대산에서와는 달리 그의 말소리는 헛바람이 새는 듯했는데, 입을 벌리자 부러진 앞니가 눈에 띄었다. 입술 주변의 멍으로 보아 누군가 에게 호되게 맞은 것이 분명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막두철의 호통에 방탐이 움찔했다. 호통치는 막두철의 앞니도 두어 개 부러져 있었다. 막두철은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가죽채찍을 어루만지며 음침한 웃음 을 흘렸다. "너희 둘이 이곳에서 나를 만난 건 재수가 없는 탓이니 하늘을 원망 하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목을 튕기자,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채찍 이 스르르 풀리더니 궁조생의 목을 휘감아 왔다. 채찍의 위력을 경험한 궁조생은 감히 막을 생각을 못 하고 옆으로 피했다. 비록 채찍은 궁조생을 노렸지만 채찍의 끝에서 이는 기운이 예리하여 조추수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피하자 막두철은 그 자리에 선 채 손목만을 움직여 채찍 으로 탁자를 휘감더니 궁조생에게로 날려보냈다. 궁조생은 허공으로 훌쩍 뛰어 날아오는 탁자를 발로 찼다. 와지끈! 소리와 함께 탁자가 부서지고 궁조생은 탁자와 부딪힌 여력으로 두 자 가량 더 솟구치더니 막두철에게 떨어지며 검으로 찔러 갔다. "멋진 검법이로군." 옆에서 식사하던 세 명의 장한 중 한 명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에 다른 두 명의 장한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흥! 하는 냉소와 함께 막두철은 검봉이 석 자 거리로 좁혀 오길 기다렸다가 몸을 숙여 오른발을 우측으로 크게 내딛었다. 이어 오른발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팔을 교묘하게 놀리자, 어느새 채찍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뿐만 아니라 채찍의 끝은 허공에 떠 있는 궁조생의 발목을 후려치고 있었다. 쇄비편이란 외호에서 알 수 있듯이 채찍에 실린 힘은 엄청났다. 발 목을 격중당하면 여지없이 부러질 판이었다. 궁조생은 찌르던 검으로 채찍을 베어 갔다. 그러나 채찍과 검이 부 딪치는 순간, 베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똬리를 틀듯이 검을 휘감아 버리 는 것이 아닌가? 궁조생이 미처 착지하기도 전에 막두철이 채찍을 잡 아당겼다. 이에 궁조생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두 사람의 공방이 워낙 빨라 조추수는 감히 끼여들 생각을 하지 못 하다가 사형이 위험해지자 지체없이 막두철을 공격했다. 막두철의 채 찍은 궁조생의 검을 감고 있으므로 공격만 하면 물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조추수였다. 그러나 막두철은 조추수의 공격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추수 의 공격과 동시에 그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어느새 채찍은 조추수에게 로 향했다. 신속한 초식 변화에 깜짝 놀란 조추수가 급히 검을 휘둘러 몸을 보 호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채찍의 예리한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진 못했 다. 옆구리에 전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조추수는 몸을 비틀거렸다. "사제!" 궁조생이 다급히 소리치며 막두철을 공격했다. 막두철이 다시 궁조생을 상대하자 조추수는 옆구리를 살펴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시뻘건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조추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 이렇게 깊은 상처가 나다니... 감히 내가 상대할 바가 못 되는구나.' 조추수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막두철의 채찍은 겉으로 보기엔 가죽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으나, 실 은 가죽에 은사(銀絲)를 교묘하게 배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웬 만한 힘이나 보검으로는 그의 채찍을 자를 수가 없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궁조생과 조추수는 막두철에게 더욱 섬뜩한 느낌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으음..." 조추수는 몸을 움직이자 옆구리가 욱신거려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했다. 그러나 궁조생이 막두철에게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이를 악물고 검을 힘주어 잡았다. "야잇-!"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필요 이상의 기합성을 내지르며 막두철에게 달 려들려는 찰나였다. "억!" 갑자기 조추수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이어 숨이 막히고 전신의 근육이 무력해져 맥없이 검을 떨구었다. 난데없이 송곳과도 같은 날카 로운 기운이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과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으 로 밀려들며 내공을 산산이 흩어 버린 것이다. 눈앞의 사물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조추수는 어, 어? 소리를 서너 번 지르더니 균형을 잡지 못하고 결 국 쓰러지고 말았다. "으... 으...!" 조추수의 팔다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점차 푸르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사제!" 궁조생은 조추수의 돌연한 변화에 경악하여 소리쳤다. 그러잖아도 수세에 몰리던 궁조생이었다. 조추수에게 놀라 신경이 분산되자 막두철의 채찍이 그의 다리를 여지없이 휘감아 버렸다. 싸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다리에서 피가 튀었다. 한편, 황산삼귀는 막두철의 싸움에 끼여들 의향이 없었다. 싸움 결과 는 뻔한 터라 그들의 관심은 궁조생의 옆 탁자에서 식사를 하던 세 명 의 장한에게 있었다. 옆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들의 표정은 태연을 유 지하고 있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막두 철과 두 사람 사이의 싸움이 재미있는 양 싱글거리며 구경하고 있었 다. 그러던 중 조추수가 갑자기 쓰러지자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어, 막두철의 채찍에 독이 묻어 있었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조추수의 얼굴에 푸른빛이 어리는 듯하자 한 말이었다. 네모진 얼굴의 장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황산파가 비겁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독을 쓴다는 얘 기는 들어 보지 못했는걸." 이들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낮기는 했으나 황산삼귀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방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대뜸 욕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은 누구이기에 감히 황산파를 욕하느냐?" 네모진 얼굴의 장한이 삼귀를 힐끔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황산파가 비겁한 짓을 서슴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 데, 굳이 화를 낼 필요가 있는가?" "뭣이?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방도가 발끈하여 그 장한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이크!" 갑자기 그 장한이 놀라며 수중에 들고 있던 한 쌍의 젓가락을 던졌 다. 한 쌍의 젓가락은 정확하게 막두철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갔다. 막두철은 궁조생이 다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회심의 미소를 지 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날카로운 기운이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다가드는 게 아닌가? "누구냐?" 그는 즉시 채찍을 회수하여 날아드는 젓가락을 후려쳤다. 타-닥! 한 쌍의 젓가락이 바닥에 떨어지자 막두철은 채찍을 회수하며 네모 난 얼굴의 장한을 노려보았다. "하하하!" 그 장한은 막두철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대소했다. 이에 막두철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으나 자신만만한 장한의 태도에 노기를 누르 고 물었다. "그댄 누구이기에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장한의 대답은 엉뚱했다. "다른 이에게 맞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졸렬한 인간 들이 여기 있었군." 그는 일부러 손으로 눈 주위를 어루만지며 바람이 빠지는 듯한 발음 을 했다. 이는 막두철과 황산삼귀의 행색을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이 망할 녀석이!" 방탐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두 개의 혈륜을 던졌다. 휘이-잉! 두 개의 혈륜이 네모난 얼굴의 장한을 덮쳐 가자, "넌 내가 상대하마." 그 옆에 앉았던 장한이 일어나며 등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쩽그렁! 햇빛에 반사된 청강검(靑鋼劍)이 번쩍이며 혈륜을 쳐내자 두 개의 혈륜 중 하나가 바닥에 깊숙이 꽂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방 탐을 향해 튕겨 나갔는데, 방탐은 깜짝 놀라 머리를 숙이며 피한 후 뒤로 물러났다. 그의 혈륜은 맹렬히 회전하여 파괴력이 대단했으므로, 검으로 쳐내 기가 몹시 어려웠다. 오히려 힘을 주어 쳐내다가 검이 부러지는 경우 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름 모를 장한이 쉽게, 그것도 하나는 당장 회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땅속 깊이 처박아 버렸으니, 방탐은 모골이 송연해졌 다. 문득 막두철이 놀라 소리쳤다. "격검법(擊劍法)! 분명히 격검법이로군. 너희들은 노가장(魯家莊)의 제자들이로구나." "하하하하!" 네모난 얼굴의 장한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며 대소했다. "그렇다. 난 노가장의 여문량(呂文亮)이다. 너희는 마교의 앞잡이가 된 후로 중원 각처에서 행패를 부리는구나." 여문량의 입은 벌어지기만 하면 황산파를 비웃는 말이 나왔다. 게다 가 막두철은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이제 삼십이 갓 넘어 보이는 여문 량의 말투가 무례하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노가장의 이름은 중원 전역을 뒤흔들고 있었다. 노가장의 금 검절학(金劍絶學)은 무당의 검법과 함께 천하를 위진했고, 조금 전 여 문량 옆의 장한이 보여 준 검법은 막두철로서도 경시할 수가 없을 정 도였다. 게다가 행색으로 보아 여문량은 세 사람 중 우두머리 격이어서 무공 이 더욱 높을 것이라 생각하니 화를 억지로 누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 이자들은 은원이 있어 싸우는 것인데, 그대는 어째서 남의 일에 끼여드는가?" "흥! 태행검파는 정파의 명문이니 노가장과 동지라 할 수 있다. 저 두 사람은 태행검파의 제자인데 어찌 그들의 위험을 모른 체할 수 있 겠는가?" 이때 궁조생은 바닥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다리의 상처가 심해 선혈이 낭자했다. 여문량은 궁조생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막두철을 향해 느린 어조로 말했다. "막두철, 네가 저들에게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이대로 보내 줄 용의 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흥! 너희는 마교의 무리이니 이곳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막두철은 쇄비편의 무공을 연성한 이후로 남에게 두려움을 주었을지 언정 남을 두려워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나이 어린, 게 다가 노가장의 사람이라고는 하나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여문량 에게 위협을 당하자 마침내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죽일 놈! 네가 노가장의 배경을 믿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구나. 경망 한 행동을 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말과 동시에 막두철의 채찍이 바닥을 후려치며 누런 먼지가 일었다. 깡마른 체구와 어울리게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그의 얼굴이 노기로 흉 하게 일그러졌다. 하나 여문량은 여전히 얼굴에 비웃음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막두철 에게 손가락질까지 했다. "하하하!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까짓 새끼줄로 나를 어쩔 수 있겠느 냐?" "이노-옴!" 괴이한 포효와 함께 막두철의 채찍이 여문량을 휩쓸어 갔다. 동시에 여문량이 탁자를 밟고 위로 뛰어오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와지끈-! 채찍에 탁자가 부서지며 파편이 튀어올랐다. 이어 막두철이 손목을 가볍게 움직이자 채찍의 끝이 말리며 치솟아 여문량을 찔러 갔다. 순간, "흥!" 나직한 냉소와 함께 여문량의 신형이 한바퀴 회전하더니 왼발로 채 찍 끝을 가볍게 차며 막두철의 공격을 봉쇄했다. 연이어 검을 좌우로 흔들며 막두철의 두 눈을 찔러 갔다. 여문량의 번개같은 공격에 막두 철은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검을 피했다. 여문량의 반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발끝으로 살짝 차며 다시 벼락같이 앞으로 나아가며 잇따라 삼 검을 공격했다. 막두철은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세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이때, 휘리릭! 하는 파공음과 함께 좌우로 예리한 기운이 여문량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방적과 방도가 막두철의 위급함을 보자 각각 한 개씩의 륜을 던진 것이다. 여문량이 검을 휘둘러 금륜과 은륜을 쳐내 는 순간, 나머지 두 명의 장한이 방적과 방도를 덮쳐 갔다. 일순간이나마 여문량의 공격이 멈추자 막두철은 신형을 수습하여 정 신을 가다듬었다. '노가장은 검마(劍魔)의 후예로 검귀(劍鬼)들이 사는 곳이라더니, 과 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름도 없는 애송이의 검법이 이토록 고명하다 니.' 놀람으로 인해 식은땀이 막두철의 등짝을 축축이 적셨다. 한편, 궁조생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가 노가장의 사람임을 알 자 적이 놀랐다. '노가장은 마교의 무리와 맞서 싸우느라 산서무림엔 나타난 적이 없 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다니... 아무튼 그들로 인해 위기를 넘겼 으니 고마운 일이다.' 여문량의 검법은 막두철의 쇄비편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또한 황산삼귀와 어우러져 싸우는 두 장한도 오히려 우세를 점하고 있어 궁 조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차! 사제가...' 문득, 조추수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던 것에 생각이 미치자 궁조생 은 즉시 조추수에게 다가갔다. 조추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한 가운데 푸른 기운이 군데군데 번져 형상이 괴이 했다. 그는 몹시도 괴로운 듯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조추수는 성격이 강인하여 어려서부터 웬만한 고통엔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괴로워하므로 더욱 걱정이 되 었다. "더러운 놈! 채찍에 독을 묻히고 다니다니." 궁조생은 조추수를 안으며 막두철에게 욕을 퍼부었다. 궁조생의 품에 안긴 조추수의 몸이 주기적으로 부들부들 경련했다. 궁조생은 조추수의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사제, 정신차려라! 사제, 내 말이 들리느냐?" 조추수는 대답 대신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성과 함께 가슴의 옷자락 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궁조생은 조추수의 코로 손가락을 가져 갔다. 거친 숨결이 불규칙하 게 들락거렸다. 맥을 짚어 보니 진기가 빠르면서도 거칠게 요동쳤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인가?' 독을 당한 증상과는 다른지라 궁조생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추수의 안위가 걱정되어 다리의 통증마저 느낄 수 없었다. 궁조생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갑자기 조추수의 숨결 이 잦아들더니 힘없이 눈을 뜨는 게 아닌가? 돌연한 변화에 궁조생이 반색하여 소리쳤다. "사제, 정신이 드느냐?" "사, 사형..." 조추수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 가슴이... 심장이, 으웩!" 말을 하던 조추수가 피를 토했다. 그 피는 궁조생의 가슴 옷자락에 튀었는데, 빛깔이 시커먼 것이 마치 심한 내상(內傷)을 입은 후에 토해 낸 것과 흡사했다. "사제, 내상을 입었느냐? 어느 부위에..." 그러나 궁조생은 조추수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차 린듯한 조추수가 다시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의 얼굴 근육 한 쪽이 부풀어오르면 또 다른 한 쪽이 꺼지고 입이 뒤 틀리기도 하였다. 이 괴이한 증상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궁조생은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때였다. "억!" 짤막한 비명과 함께 여문량의 득의 만만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하핫! 쇄비편이란 이름은 약자만 괴롭혀 얻은 것인가?" 궁조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막두철은 오른쪽 어깨에 상처를 입 고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쇄비편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여문량이 그 끝을 밟으며 웃고 있었다. 연이어, "어이쿠!" "윽, 제기랄!" 연달아 비명이 들리며 방적과 방탐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은 각각 왼팔과 허리에 일검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상처를 입 지 않은 방도는 더 이상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급히 물러나고 있었 다. 싸움에 진 황산삼귀는 막두철의 곁으로 다가갔다. 막두철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는 여문량의 발에 밟힌 자신의 채찍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여문량! 치욕을 줄 바에야 차라리 날 죽여라. 너도 무공을 익힌 고 수로서 어찌 이리도 모멸을 주려 하느냐?" 무림인은 무기를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법이었다. 여문 량은 상대의 무기를 빼앗고도 모자라 발로 밟고 있으니 이는 더없이 상대를 조롱하는 행위였다. 여문량이 입을 삐죽 내밀며 냉소했다. "흥! 너희 같은 사파의 무리에게 무슨 예의가 필요하겠느냐?" 여문량은 보란 듯이 채찍을 더욱 세게 밟으며 바닥에 문질렀다. "이런 막돼먹은 놈 같으니!" 막두철은 치욕을 참지 못하고 여문량에게 다시 덤벼들려 했다. 이에 방적이 급히 만류했다. 여문량이 혀를 차며 이죽거렸다. "쯧쯧! 마교의 무리에게 굴복하고서도 자존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로 군. 불쌍해 보이니 목숨은 살려 주겠다. 어서 썩 꺼지도록 해라!" 여문량은 검을 회수하여 검집에 집어넣으며 뒤돌아섰다. 막두철은 생각 같아선 당장 여문량과 사생결단을 내고 싶었다. 그러 나 역시 치욕보단 죽음이 더 두려운 법이라, 이를 악물고 겨우 화를 눌렀다. 이때 방적이 나직이 소곤거렸다. "사형, 치욕은 언제고 갚을 수 있으니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고 봅시 다." "흥!" 막두철은 발을 한번 구르고는 뒤돌아 울타리 문밖으로 걸어갔다. 방 적, 방도가 그 뒤를 따랐다. 방탐은 바닥에 떨어진 막두철의 채찍을 집어 들려고 몸을 숙였는데, 여문량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싸늘히 소리쳤다. "싸움에 진 놈들이 무기를 챙길 자격이 있느냐? 어서 꺼져라!" 방탐은 찔끔하여 굽혔던 몸을 재빨리 일으키며 종종걸음으로 막두철 의 뒤를 따랐다. 막두철 일행이 사라지자 여문량은 궁조생에게 다가왔다. 궁조생은 조추수를 내려놓으며 읍을 했다. "난 태행검파의 궁조생이라 하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하오이 다." 이에 여문량은 활짝 웃었다. 위맹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친 근감이 깃들인 웃음이었다. "별말씀을. 우리는 모두 정도(正道)를 걷는 협사(俠士)들이니 당연히 어려움을 보면 도와야지요." 그가 조추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제 되는 분의 상세가 심각한 모양이구려?" 이때 조추수는 괴이한 증상이 다시 가라앉았는지 그저 정신을 잃고 얌전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만 창백한 안색에 파리한 기운은 여전 했다. "그렇소이다. 그런데 상처의 원인을 알 수가 없군요." 조추수에게서 시선을 뗀 여문량이 궁조생을 바라보더니 가슴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는 유심히 살폈다. "그건 이 사람이 토한 피요?" 궁조생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여문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음, 피가 검게 응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 내가중수법에 당한 증상이구려. 아무튼 일단 목숨엔 지장이 없는 듯하오. 우린 중요 한 일이 있어 더 이상은 도와 줄 수가 없구려. 이만 실례해야겠소." 여문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읍을 하고는 궁조생의 말을 더 들을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뒤돌아섰다. 두 명의 장한이 그의 뒤를 따라 울 타리 밖에 있는 말을 훌쩍 타고는 급히 길을 떠나 버렸다. '저 사람은 명문 출신으로 무공이 강하고 기개(氣槪)가 높지만 냉정 하기 그지없구나.' 궁조생은 떠나가는 여문량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3 장 기연(奇緣)은 비수(匕首)를 품어 제3장 기연(奇緣)은 비수(匕首)를 품어 주막의 방을 빌려 조추수를 눕힌 궁조생은 옆구리의 상처를 살폈다. 조추수의 옆구리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는 했으나, 출혈은 이미 멈춰 있어 문제가 되지 않을 듯했다. 그보단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증 세가 문제였다. 조추수의 상처를 치료한 궁조생은 자신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바 지를 벗고 피를 씻었다. 채찍을 맞은 허벅지의 살이 한 주먹 이상 떨 어져 나가 있었다. '쇄비편의 위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제대로 당하면 다리쯤은 쉽게 잘 려 나가겠는걸.' 간단히 지혈을 한 후 조추수의 상세를 살피던 궁조생은 의아함을 감 출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조추수는 얼굴의 푸른 기운이 사라졌고, 평 온한 신색으로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다행히도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구나.' 심한 격전으로 몹시 피곤했던 탓에 긴장이 풀리자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잠이 깬 궁조생은 누워 있어야 할 조추 수가 방안에 없자 깜짝 놀랐다. 급히 방문을 열어 보니 주막의 마당에 서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조추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제." 궁조생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조추수가 반색하였다. "사형, 일어나셨군요." 궁조생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다리의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조추수가 재빨리 다가와 부축했다. "다리의 상처가 심하니 아직 움직여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어제 치료할 때까지도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니 오히려 더 아프구 나." "상처가 중하여 길을 가기 어려우니 여기서 좀더 묵었다가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다. 휘월산장의 일이 중요하니 이까짓 상처로 지체할 수 없다. 그보다도, 어떻게 된 일이냐? 어제만 해도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는 데 하룻밤 새에 멀쩡해지다니..." "글쎄요..."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허리의 상처를 빼곤 전혀 이상이 없으니 이상하군요. 어제는 심장 이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것만 같았는데..." 궁조생은 조추수의 부축을 받으며 마당으로 나섰다. 몇 걸음 걸으니 오히려 통증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 공기를 깊숙이 들이키자 기분이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형. 우린 분명 막두철에게 목숨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죠?" "그건..." 궁조생은 여문량이 막두철을 물리친 경과를 세세히 얘기해 주었다. 얘기를 듣고 난 조추수가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어째서 그렇게 한숨을 쉬는 거냐?" "이제껏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제가 한심해서입니다. 막두철만 해도, 사형과 제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휘월산 장의 일은 어떠하고요. 그 많은 고수들의 목숨을 앗아 간 마두의 무공 은 얼마나 높을까요? 게다가..." 조추수는 말을 흐리며 궁조생을 바라보았다. "여문량이라는 사람은 사형보다 훨씬 어려 보였는데도 막두철을 쉽 게 물리쳤으니, 노가장의 검법이 우리 태행검파보다도 높은 것이 아닙 니까? 이젠 제가 본 파의 검법을 대성(大成)하더라도 무림에 나설 자 신이 서지 않는군요." 조추수의 목소리엔 낙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바라보는 궁조생은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궁조생은 일시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삼십 년 이상 무공 을 익힌 자신 또한 여문량의 검법에 비교하여 너무 초라함을 느낀 터 라 그의 심정 또한 조추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사제, 같은 검법을 익히더라도 그 성취는 개인마다 다른 법이다. 너 라고 여문량과 같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 너는 과묵하고 부지런 하니 반드시 검법에 대성할 거야. 난 재질이 미약하여 이 모양이지만 넌 나와 달라.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 낙담할 필요 없다." 그의 태행검파에 대한 충심과 애착은 지극했다. 따라서 태행검파의 검법이 노가장에 미치지 못함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궁조생이었 다. "과연... 그럴까요?" "물론이지!" 속마음을 감춘 채 궁조생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 * * 태행검파는 진봉현 남방에 위치한 태행산 주봉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개파한 지 이백 년이 넘어 연륜은 오래되었으나 제자의 수가 백 명 을 넘지 않아 규모 면에선 그리 크지 않았다. 또한 개파조사인 낙월검객(落月劍客) 추강원(鄒剛元) 이후로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지 않았다. 사십여 년 전 무림에 이름을 떨칠 만한 고수가 여럿 배출된 적이 있었지만, 까닭을 알 수 없이 죽거나 사라져 살아남은 고수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지금은 그저 산서무림에서 영향 력을 행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현장문인은 매천악(梅天岳)으로 궁조생과 조추수는 그의 제자였다. 궁조생은 매천악으로부터 삼십여 년 간 무술을 전수받은 대제자(大弟 子)였고, 조추수는 이십 년 전 매천악이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였다. 두 사람은 우선 사부인 매천악을 알현하기 위해 장문인의 거처를 찾 았다. 매천악은 항상 부드러운 얼굴로 남을 대했으며 화를 내는 경우가 드 물었다. 그래서 지인(知人)들은 그를 유면검(柔面劍)이라 불렀다. 지금 궁조생과 조추수 앞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칠십 가량의 노인이 바로 매천악이었다. 그의 길고 눈과 같이 흰 수염이 미 소와 어울려 유학자(儒學者)의 기풍을 느끼게 하였다. 매천악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걱정스런 얼굴로 두 사람의 상세 부터 살폈다. 궁조생의 상처가 제법 깊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절 로 아물 정도라 매천악은 안도하며 예의 부드러운 웃음을 되찾았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구나." 매천악의 염려에 궁조생과 조추수는 감읍하여 절로 머리를 숙였다. "제자들이 미숙하여 사부님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휘월산장의 일은 중하고도 위험하여 걱정이 많았는 데, 이렇게 무사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래,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궁조생은 자신과 조추수가 겪었던 일을 낱낱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천악은 황산파가 산서무림에 나타나 비룡표국의 국주를 살해한 대 목에선 은근히 노기를 띄웠다. 그러나 휘월산장의 일을 듣는 순간, 노 기는 씻은듯이 사라지고 놀라움만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단 말이냐?" 궁조생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기로 했던 고수들은 어찌 되었느냐? 그들이 있었다면 어찌 그런 혈겁을 당했겠느냐?" "장주 관무목은 물론 그의 아들과 산서이협, 그리고 철선을 쓰는 자 와 판관필을 쓰는 자, 그리고 고량 대협 등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모두... 죽었다고? 그들이...?" 놀라움이 지나치면 오히려 평온해지는 걸까? 매천악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무언가 중얼거리며 사색에 잠기는 듯했다. 문득, 매천악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권두수와 고량이 자신의 무기에 당했단 말이지?" 궁조생과 조추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상하구나.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죽이는 수법은 마교의 교주 봉 천생이 즐겨 쓰는 수법인데 그가 산서 땅에 왔을 리는 없을 테고... 그 의 제자가 왔을까? 황산파가 산서 땅에 나타난 걸 보면 전혀 무관하지 는 않을 듯도 한데... 아니야, 휘월산장의 관무목은 평소 마교와 아무런 은원이 없었으니 마교가 나설 이유가 없지." 매천악의 눈살이 잔뜩 찌푸려진 채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조추수가 말문을 열고 잠시 멈추자 매천악이 응시했다. "그런데 무엇이냐?" "휘월산장의 조벽엔 혈채는 피로써 갚아야 한다, 라는 글이 적혀 있 었습니다. 그 옆엔 장한(長恨)이란 뜻 모를 글자가 적혀 있었고요." 순간, 매천악이 깜짝 놀라며 크게 소리쳤다. "무엇이! 장한이라고 했느냐?" 매천악의 목소리가 워낙 컸으므로 조추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 개를 끄덕였다. 궁조생이 물었다. "사부님, 뭔가 짚이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다, 아직은 속단할 때가 아니다." 대답하는 매천악의 안색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굳었던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다가는, 늙어서 노란 기운이 감돌던 그의 얼굴에 홍조가 비치기도 했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장한이란 단어에서 어떤 실마리를 얻은 것이리 라고 궁조생과 조추수는 짐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차분한 신색을 되찾은 매천악이 수염을 쓰다 듬으며 말했다. "휘월산장의 일은 좀더 조사가 진행된 이후에나 결론을 내릴 수 있 겠구나. 그리고 음... 황산파와 노가장의 사람들이 산서무림에 나타난 건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이후 거동에 각별 히 신경 써야 한다. 너희는 우선 상처를 치료하도록 해라." 궁조생과 조추수는 간단히 예를 올리고 매천악의 처소에서 나왔다. 궁조생의 다리가 불편하므로 조추수가 부축하고 있었는데, 걸음을 옮기며 조추수가 물었다. "사형, 장한이란 말에 사부님이 놀라시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단서 가 된 셈이겠지요?" "글쎄다. 내 생각도 그러하긴 하다만..." "그렇다면 그 마두의 정체가 곧 밝혀지겠군요." 궁조생은 피식 웃으며 자신보다 키가 한 자 이상 큰 조추수의 얼굴 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일이 생각처럼 쉽게 풀린다면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苦 難)속에 있겠느냐? 모든 일은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니 속단은 금 물이다. 그보다, 네가 겪었던 이상한 증상에 대해 사부님께 말씀드리는 걸 잊었구나." "에이, 괜히 사부님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 금은 이렇게 멀쩡하잖습니까?" 태행산의 한 소로를 오르다가 중턱에 이르면 수백 개의 돌계단이 나 타난다. 그 계단의 중간에 태행검파라고 적힌 산문(山門)이 있었다. 산문을 지나 계단의 끝에 이르면 커다란 연무장(練武場)이 나타나고, 연무장의 좌우로 수십 채의 초막과 기와집이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엔 중앙의 커다란 전각 좌우로 작은 전각이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궁조생과 조추수가 나온 곳은 중앙의 커다란 전각이었다. 소나무기 둥에 기와를 얹은 이 전각은 높이가 이 장 가량 되었으나 그리 화려하 진 않았다. 태사전(太師殿)이라 불리는 이곳은 대대로 장문 일가(一家)의 거처 로 사용되었다. 매천악은 이곳에서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였다. 좌우의 작은 전각은 각각 집무전(集武殿)과 청빈전(請賓殿)이라 불 렸다. 집무전은 태행검파의 일 대 제자들이 수시로 거처하며 검법을 연구하고, 또한 문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청빈전 은 외부의 주요 내방객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런 전각과 가옥들 뒤로 가축의 축사와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 밭 들이 늘어져 있었다. 이곳 산중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커다란 길이 없어 대부분의 일상 용품을 자급자족(自給自足)하였다. 모든 건물과 가옥은 사문의 제 자들이 건축한 것으로, 커다란 시진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함이나 아름 다움은 없었다. 그저 일상 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으면 족하다고, 제자들 대부분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의 울창한 수목과 아름 다운 꽃들이 곳곳에 만발하여 조화스런 전경을 연출하고 있어 처음 찾 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태사전을 나선 궁조생과 조추수는 연무장 좌측에 있는 숙소로 걸음 을 옮겼다. 숙소에 도착한 조추수는 궁조생을 부축하여 침상으로 다가갔다. 탁 자엔 이번 휘월산장으로 가는 길에 꾸렸던 짐들이 놓여 있었다. 제자 중 한 명이 산문에서 받아 들어 이곳에 놓아 둔 모양이었다. 궁조생이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피곤할 테니 너도 방에 가서 쉬거라." "예, 사형. 그리고 국진(菊眞)을 불러 상처를 치료할 약을 가져 오라 시키겠습니다." 국진은 궁조생이 가르치고 있는 십오 세의 제자였다. 궁조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추수는 뒤돌아 방을 나섰다. 조추수가 나가자 궁조생은 이번 여정의 어려웠던 순간들에 대한 기 억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침상에 누웠다. 이때, 밖에서 조추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 사형들, 문중(門中)에 계셨군요." 이어 컬컬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 사제, 상처가 깊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멀쩡하네?" 목소리를 듣고 궁조생은 생각했다. '마원의(馬元義)로구나.' "저보다는 대사형의 상처가 심합니다만, 시일이 지나면 나을 것입니 다." 이번엔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사형은 안에 계시지?" '박위(朴偉)도 왔군.' "예, 방금 침상에 드셨습니다." "저런... 주무시기 전에 상처를 보아야 마음이 놓이지. 그리고 잠시 드릴 말씀도 있고." 이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네 사람이 들어섰다. 궁조생은 누웠던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고서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들 오게." 조추수와 함께 들어온 삼 인은 모두 중키에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 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인이 먼저 다가와 걱정스럽게 궁조생을 살피며 물었다. "사형, 이번 여정은 몹시 험난했던 모양이군요. 사형께서 상처를 입 을 정도라니..." "걱정을 해주어서 고맙네, 마 사제. 사실 나와 조 사제는 죽을 고비 를 여러 번 맞았는데 운이 좋아 이 정도의 상처로 그친 걸세." 이어 뒤의 두 중년인이 한마디씩 했는데, 눈이 약간 처진 자가 박위 였고 고운 얼굴에 유난히도 입술이 붉은 자가 추독(鄒獨)이었다. 이들 은 모두 매천악을 사부로 모신 동문들이었다. 마원의가 둘째, 박위가 셋째, 추독이 넷째 제자였다. 태행검파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평소 산을 벗어나는 경우가 드물 었다. 따라서 하산을 한 후 돌아오면 항상 겪었던 일을 사형제들에게 얘기하며 환담을 나누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마원의 등 세 사람은 두 사람이 겪은 일에 대해 물었고, 궁조생과 조추수가 번갈아 가며 설명했다. 문득 박위가 근심스레 말했다. "무공이 그토록 높은 자들이 산서무림에 나타났으니 근심거리가 아 닐 수 없군요." 조추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께선 산서무림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니 행동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추수가 사부님을 언급하자 추독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참, 사형! 사부님께서 저더러 배 사숙님께 서찰을 전하라고 하시 더군요." "서찰을?" "예. 그런데 몹시 다급한 표정이셨습니다. 아침만 하더라도 신색이 편안하셨는데, 사형께서 사부님을 알현하고 나서 그러시니 아마 휘월 산장의 혈겁 때문이 아닐까요?" "글쎄...?" "아무튼 오늘 중으로 반드시 전하라 하셨으니 서둘러 떠나야겠습니 다." 박위가 나가고 난 후 궁조생 등 네 사람은 얘기를 나누다가 함께 저 녁 식사를 하고 난 후에야 헤어져 각자 방으로 갔다. 조추수가 묵고 있는 자그마한 기와집엔 방이 세 개가 있었지만 조추 수만이 방 하나를 쓰고 있을 뿐 두 개는 비어 있었다. 따라서 밤이면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매우 조용했다. 자리에 누우니 누적된 피로가 몰려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보니 밖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문을 열자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곰보청년이 서 있었다. 조추수가 반색하여 물었다. "보운(甫運)이로구나. 요 며칠간 보지 못했는데 잘 있었느냐?" 보운이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버버! 소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엔 하얀 천 조각이 쥐여져 있었다. "사숙조(師叔祖)께서 보내신 서찰이냐?" 청년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그는 벙어리였고 그의 손짓은 수화(手話)였다. 조추수는 그와 오 년 이상을 자주 만나 지냈으 므로 그의 수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수화를 보던 조추수 의 안색이 홱 변하며 다급히 물었다. "어느 정도로 편찮으시냐?" 그러나 보운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뛰어가 버렸다. 하얀 천을 펼치니 숯으로 쓴 거친 글자가 나타났다. 수아(愁兒) 보아라. 내 나이가 많아 이번 병으로 살아나지 못할까 두 려워 이 글을 보운에게 전한다. 살아서 너를 볼 수 있다면 다행이거니 와 만약 내가 죽었다면 내가 지내던 동굴의 침상 밑을 파보아라. 그곳 에 네게 반드시 전해야 할 물건이 있다. 그리고... 편지를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더니 벼락같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 갔다. 그는 숙소의 뒤편을 돌아 산 위로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앞이 제대 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리하게 경공을 시전한 탓에 나뭇가지들 이 얼굴과 몸을 할퀴고 지나가며 상처를 남겼다. 산봉우리를 넘어 반대편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동굴 입구엔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숙조님! 사숙조님! 안에 계세요?" 조추수의 당황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메아리치며 되돌아왔다. 동 굴은 안으로 갈수록 넓어졌는데, 삼 장 가량 들어가자 갑자기 폭이 이 장 이상으로 커졌다. 그곳엔 돌로 만든 침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로 머리가 하얗게 새어 버린 비쩍 마른 노인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의 안색은 창백하여 푸른 기운마저 담고 있었다. 그는 태행검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대의 인물로 매천악의 사숙인 냉겸(冷謙)이었다. 조추수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사숙조님!" 그가 절규하듯 소리치며 침상으로 다가간 순간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냉겸의 눈이 번쩍 떠지며 나직이 기침을 몇 번 하 더니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게 아닌가? "이 녀석! 소리쳐서 이 노인네를 죽일 셈이냐? 이 좁은 곳에서 악을 왜 써?" "저, 저는..." 조추수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서 말을 더듬었다. "저는 사숙조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냉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빨이라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잇몸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였다. "헐헐헐. 네가... 보운의 편지를 본 모양이구나." 냉겸의 음성은 바람이 새는 소리가 심하여 발음이 모호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는데, 조추수는 그와 오 년 이상을 가까이 지내 왔으므로 알아듣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 다. "예, 사숙조님. 편지를 읽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헐헐... 네가 하산한 그 다음날 갑자기 열이 나고 어지러워 거동을 전혀 못 할 정도로 아팠지. 어느덧 내 나이 구십이 넘지 않았느냐? 병 에 견딜 힘이 어디 있으랴 생각하니 이제 죽는구나 싶더구나.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편지를 써서 보운에게 맡긴 건데... 그만 잊어버렸다. 그 녀석이 그냥 네게 전해 준 모양이구나." 조추수는 안도의 숨을 쉬며 웃었다. "그랬었군요." "그런데, 이번에 하산한 일은 잘되었느냐? 듣자 하니 요즘 산서무림 에 일어난 혈겁과 관련해 휘월산장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조추수는 휘월산장의 일과 황산파와의 일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냉겸은 휘월산장의 참사에 대해 들었을 때 비릿한 조소와 함께 예의 바람이 새는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모습에 조추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숙조께서는 어째서 웃으십니까?" 냉겸이 손을 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훗날 네게 그 이유를 말해 주마.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야." 이어 조추수는 막두철에게 궁조생과 함께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을 얘 기했다. 그가 가슴의 통증과 함께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된 대목에 이 르자 냉겸이 놀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 증상을 상세히 말해 보아라." 조추수는 궁조생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조추수의 얘기를 듣고 난 냉겸은 조추수의 맥을 짚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간이 한참 흐 르자 냉겸은 손을 떼며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좋아, 좋아! 기특하게도 그 동안 내공을 열심히 연마하였구나. 수궐 음심포경과 수소음심경에 그런 날카로운 기운이 일었다면 정말 기뻐해 야 할 일이야." "제가 겪었던 증상이 사숙조님께서 전수해 주신 내공과 관련이 있습 니까?" "물론이지." 한마디의 대답과 함께 냉겸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동안 싱글거 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 파의 내공법은 심기를 맑게 하는 효과는 있으나 그리 특출난 점 이 없지. 원래 검법은 내공과 초식(招式)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위력이 발휘되는 법인데, 본 파의 내공이 평이하다 보니 무당이나 노가장에 비해 뛰어난 고수가 배출될 수 없었다. 네 사형인 궁조생만 해도 보기 드물게 뛰어난 인재인데 무공은 평범하기 그지없단 말이야. 본 파의 시조께서는 타고난 신력이 남달라 고수로서 이름을 떨치셨지. 하나 후 대에 이르러 내공이 평범하고 힘이 없으니, 검법의 정묘함은 있으되 받쳐 주는 기운이 없어 고수를 만나면 번번이 패하고 마는 것이란다. 궁조생도 내공만 제대로 배웠다면 막두철에게 그리 쉽게 지지는 않았 을걸. 본 파의 검법초식만큼은 다른 문파와 견주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는 조추수의 몸을 은근히 훑어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넌 타고난 신력이 있어 궁조생보다 대성할 소지 가 많지. 그러나 그것만으론 너무 부족해. 검에 실리는 절묘한 힘의 배 분은 완력으로만 이루어질 수가 없거든. 그래서 뛰어난 내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진정한 고수가 되기 힘든 법이야. 내가 네게 전수한 내공 심법은 그런 면에서 네게 고수가 될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열어 줄 수 있지." "그렇지만..." 조추수가 말꼬리를 흐리자 냉겸이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사숙조님의 신신당부(申申當付)로 열심히 수련하기는 했습니다만, 전수해 주신 내공을 연마한 후론 본래의 내공이 그리 진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목이 흐려지는 현상까지 나타나더군요. 게다가 어 젠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문득 냉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안을 서성거렸다. 그는 조추수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 다.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익힌 내공은 천심장(穿心掌)이란 절세의 무공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이 천심장 수법은 위력이 대단해서 아무리 뛰어난 내공을 익 힌 고수라고 해도 요혈(要穴)을 격중당하면 몇 번 숨을 내쉬기도 전에 심장이 갈라져 절명하고 말지." "아!" 조추수가 놀라 감탄성을 터뜨리자 냉겸이 피식 웃었다. "천심장을 수련하면 바늘과 같은 기운이 수궐음심포경과 수소음심경 을 타고 흘러가 상대의 진원진기를 공격한다. 이 와중에 상대는 심장 이 터져 죽게 되지. 너는 천심장의 내공을 수련한 몸이라 그 기운을 견딜 수 있었지만 다른 이는 견딜 재간이 없단다." "그렇게 놀라운 무공이 본 파에 있었다면 어째서 저와 사형들은 모 르고 있었을까요?" "천심장은 본 파의 무공이 아니다." "아니, 그렇다면 전... 본 파의 문규(門規)를 위반한 셈이 아닙니까?" 조추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태행검파는 물론이고 대부분 다른 문파의 이들도 사부의 허락 없이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히는 건 금기시되어 있었다. 천심장이 태행검파 의 무공이 아니라면 조추수는 이 금기를 어긴 것이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냉겸이 즉시 말했다. "나는 너의 사숙조이고, 내가 너에게 전수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사부님이 이 일을 모르고 계시는데..." "그런 하찮은 허울에 얽매이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다. 그리고 내 가 이 무공을 네게 전수한 것엔 중요한 이유가 있으니 넌 개의치 말아 라."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지금은 말해 줄 수 없다. 다만 넌 내가 전수하는 무공을 불철주야 (不撤晝夜)로 익히기만 하면 된다. 알겠느냐?" 조추수는 냉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부를 속이며 무공을 익히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렸기 때문이다.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거냐?" 냉겸의 목소리가 커지며 동굴 안을 울렸다. 조추수가 머뭇거리다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전 사부님을 속이고 문규를 범할 수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조추수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냉겸이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좋다. 아직은 때가 일러 이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만 어쩔 수 없구 나. 나는 너의 신상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알고 있다. 만약 네가 이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그 사실들을 네게 말해 주지 않겠다." 냉겸의 말에 조추수는 멍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냉겸 또 한 의미 심장한 눈빛으로 조추수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제 신상에 관련된 사실이라뇨?" 조추수는 자신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것과 궁조생이 그 남매를 구한 후 자신을 태행산으로 데려왔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다섯 살 때의 일이라 기억의 편린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바가 약간 있을 뿐, 자신이 어디에 살았는지, 부모의 이름이 무엇인지, 누나 의 이름은 무엇인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다른 사형제나 제자들은 부모와 형제가 있어 가끔씩은 산으로 찾아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조추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냉겸이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하자 심장이 마구 고동치고 전신이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네 부모의 이름과 네가 고아가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 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지. 그러나 이 사실을 네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사숙조님, 전 천애 고아(天涯孤兒)로 죽을 때까지 부모의 이름을 모 를 줄 알았습니다. 사숙조님께선 알고 계시면서도 어째서 이제껏 말씀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문득 냉겸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흥! 내가 왜 하고많은 제자들 중에서 괜스레 너에게만 천심장의 무 공을 가르쳤는지 아느냐? 이게 다 너의 가문비사(家門秘事)와 얽혀 있 기 때문이다. 네가 다른 이에게 비밀로 하고 천심장을 수련하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난 결코 너의 가문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지 않 을 것이다." "꼭 사부님 몰래 천심장을 익혀야만 합니까?" "물론이다. 이 천심장은 네 가문의 무공이다. 그러니 네가 이 무공을 익힘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천심장이 제 가문의 무공이라고요?" "그렇다. 네 가문에서 비밀리에 전승되어 오던 무공 중 하나이지. 아 쉽게도 내 수중에 있는 건 천심장 한 가지뿐이지만 네 가문의 무공은 무림을 통틀어도 최고로 꼽을 만큼 뛰어난 것이지. 아무튼 넌 지금 내 게 맹세할 수 있겠느냐?" "..." 조추수가 일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냉겸이 채근했다. "내가 미덥지 못하다면 천심장을 익히지 않아도 좋다. 그 대신 너의 신상에 대한 비밀도 이후 나와 함께 영원히 땅에 묻힐 것이다." 조추수는 냉겸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숙조님이 나의 신상내력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일이 다. 아직껏 나의 신상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는데, 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아니, 그의 말이 사실일까? 하지만 그가 날 속이면서까지 천심장을 전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냉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의 조건을 수락해야만 알 수 있으므로 조추수는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맹세하겠습니다." 조추수의 말이 떨어지자 냉겸이 흡족한 듯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지금 천지신명께 맹세하여라." 조추수는 땅에 무릎을 꿇고 맹세를 했다. "제자 조추수는 사숙조님께서 전수해 주시는 천심장을 분골쇄신(粉 骨碎身)하여 수련하겠습니다." 냉겸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매천악과 다른 사형제들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이 사실을 저의 사부님은 물론이고, 대사형을 비롯한 다른 동문들 에게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냉겸이 다시 말했다. "또한 나의 부탁도 한 가지 들어줘야 한다." 조추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번 더 맹세했다. "또한 저는 사숙조님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드릴 것도 더불어 맹세 합니다." 맹세가 끝나자 냉겸은 연신 싱글거렸는데 조추수에게 건네는 음성도 아주 부드러웠다. "이제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천심장 수련에 들어가도록 하자." "사숙조님, 그보다도 저의 신상내력에 대해 먼저 말씀해 주실 수 없 습니까?" 물론 절세의 무공이라면 누구라도 갈망하겠지만 조추수는 천심장의 무공 수련보단 자신의 신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냉겸의 대답은 냉담했다. "지금 가문의 비사를 알아 봐야 오히려 너의 인생을 망칠 뿐이야. 네가 천심장에 조예가 깊어져 고수가 된다면 가르쳐 주겠다. 내가 말 해 줄 때까지 넌 가문에 대한 궁금증을 버리도록 해라. 알겠느냐?" '고수가 되어야만 가르쳐 주겠다니, 그럼 나의 가문비사엔 어떤 은원 이 내재되어 있다는 걸까?' 냉겸의 엄한 태도에 조추수는 치미는 의혹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냉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천심장 내공이 천심장을 수련한 자의 몸을 해친다면 익힐 수 가 없겠지. 네가 천심장의 기운에 고통을 당한 이유는 태행검파의 내 공이 천심장의 내공과 상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심장의 기운은 다른 종류의 내공을 결코 용납하지 않아. 그래서 무공을 익힌 이는 천심장 의 내공을 익히기가 어렵고 고통스럽다. 넌 내공이 그리 깊지 못해 그 정도의 고통으로 끝났지만, 만약 내공이 심후한 고수가 익힌다면 그에 반발하는 천심장의 기운도 더욱 거세어져 심맥이 터져 죽게 되지. 내 가 천심장을 수련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득 냉겸은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더니 가슴을 드러내어 보였다. 그 의 심장 부위엔 서너 개의 칼자국이 나 있었다. "처음 난 그 사실을 무시한 채 천심장을 수련했다. 그러나 천심장의 기운이 어느 정도 양성되자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심장을 공격하면서 주화입마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어. 마침내 죽음에 임박하게 되었는 데, 때마침 의술이 고명(高名)한 친구가 곁에 있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심장 부위를 칼로 자르고 피를 뽑아 천심장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지. 그러나 그 천심장의 기운은 아직도 나의 수소음심경과 수 궐음심포경에 잠복해 있어. 그 후 난 천심장의 수련을 포기하고 지금 껏 체내의 기운을 근근이 억누르며 살아 왔단다." 냉겸은 풀어헤친 옷자락을 추스르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짓으로 조추수에게 침상에 앉도록 지시했다. 조추수가 앉자 냉겸이 나직이 말했다. "천심장의 비결 중엔 내공을 이미 익힌 자가 천심장을 수련할 경우 본래의 내공을 천심장에 흡수시키는 비결이 적혀 있다. 물론 내공이 이미 경지에 오른 자는 결코 수련하지 말 것도 당부하고 있지. 내공 흡수를 위해선 천심장의 내공이 본래의 내공보다 커져 있어야 하는데, 네가 그 조건을 갖추었다. 이제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천심장의 기운을 일으켜 운행하도록 하여라." 이어 냉겸이 구결을 나직이 읊조리자 조추수는 그에 따라 천심장의 기운을 일으켰다. 처음엔 단전에서 태행검파의 진기가 일어나 임독양맥을 타며 휘돌기 시작하더니, 곧 이어 천심장의 날카로운 기운이 일어 뒤따랐다. 두 기운은 서로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면서 십이정경(十二正經)을 맴 돌기 시작했다. "천심장의 진기는 오행(五行) 중 화(火)의 기운을 받아 발흥하니 일 단 수(水)의 기운으로 기세를 약화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선 족태양방 광경(足太陽膀胱經)과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으로 기운을 보내고..." 족태양방광경과 족소음심경을 지나면서 천심장의 기운이 부드러워지 기 시작하면서 차례로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과 족궐음간경(足厥陰肝 經),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과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등을 지나면서 서서히 융화(融和)되기 시작했고, 열 개의 정경을 지나자 두 기운이 상 당 부분 어울리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기운이 수궐음심포경과 수소음심경에 이르는 순간, 갑자 기 천심장의 기운이 태행검파의 진기를 강력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조추수가 주막에서 당한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의 입 이 딱 벌어지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때 귓전에 냉겸이 다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태행검파의 진기를 임맥으로 되돌려라. 그러면 천심장의 기운 도 뒤따를 것이다." 조추수는 극심한 고통으로 정신이 몽롱해졌으나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진기를 임맥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인해 그의 전신 이 땀으로 후줄근해졌다. 약 일 각 동안 애쓴 끝에 태행검파의 진기가 임맥으로 스며들기 시 작했다. 이어 천심장의 기운도 임맥으로 향했는데, 그 기세가 마치 개 구리를 덮치는 뱀과도 같았다. 앞서가는 태행검파의 진기를 개구리 잡 아먹듯이 한 움큼 삼키고는 잠시 뒤따르다가 다시 달려들어 한 움큼을 삼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태행검파의 진기는 줄어들고 반대로 천심장의 기운이 커져 갔다. "다시 두 기운을 처음의 족태양방광경으로부터 시작해 똑같은 경로 를 반복하도록 하여라. 이와 같이 계속하면 결국은 천심장의 기운만이 체내에 가득하여 수소음심경과 수궐음심포경에선 더 이상 진기가 상충 하지 않을 것이다." 임독양맥에서 수소음심경에 이르기까지 횟수를 거듭할수록 고통이 사그라지더니 열두 번을 반복하자 과연 천심장의 기운만이 체내에 가 득하여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그의 내력은 이제까지와 는 달리 한결 충만해져 전신에 기운이 가득하였다.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온하여 서서히 무아지경에 이르는 순간이 었다. 문득 명문혈(命門穴)로부터 또 다른 천심장의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어 냉겸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 몸 속에 잠복해 있는 천심장의 기운을 네게 넘겨주겠다. 그러면 너의 내공은 고수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난 체내의 천심장 기운을 제거할 수 있으니 오래된 고질을 치료할 수가 있지. 이제부턴 잡념을 버리고 나의 기운을 받아서 흡수하도록 하여라." 냉겸의 천심장 기운은 조추수의 것보다 강했다. 따라서 처음엔 전신 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하나, 시간이 지나자 서로 융화 하여 마침내 조추수의 내공으로 완전히 흡수되고 말았다. 냉겸이 손을 뗀 후에도 천심장의 진기는 계속 체내를 배회했으며 조 추수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가 운공조식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땐 동굴 밖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냉겸은 침상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조추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냉겸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일단 내공 수련은 성공한 셈이다.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숙소로 돌 아가거라. 그리고 매일 밤 자시(子時)에 나에게 오너라. 이제부턴 본격 적으로 열두 가지의 천심장력 수련에 들어가야 한다. 날이 밝았다. 어 서 가거라." 조추수를 종용하는 냉겸의 목소리는 간밤에 비해 힘이 없었다. 아마 내공을 전수하느라 많은 힘을 소모한 듯했다. "사숙조님, 저 때문에 몸을 상했으니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단지 피곤할 뿐이다. 네 덕분에 오랜 고생 거리를 없앴으니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오히려 내가 너에게 고마워해야 일이지. 걱정 말고 어서 가거라." "그럼, 오늘밤 자시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조추수는 냉겸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동굴을 나섰다. 멀리 지평 선 너머로 한여름의 뜨거움을 발산하기 위해 해가 스멀스멀 솟아오르 고 있었다. '내가 사숙조님을 처음 뵈온 건 오 년 전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사 숙조님은 이 동굴에서 일절 나오지 않아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장문인 사부님과도 내왕이 전혀 없이 단지 보운을 통해 생사 확인을 할 뿐이었다. 그런 사숙조께서 보운을 시켜 나를 동굴로 오게 한 것과 내게 무공을 전수하신 것은 오래 전부터 계 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구나.' 의구심이 일었지만 조추수는 이내 사숙조의 의도가 어떠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상을 알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지 못하겠는가? 어릴 적 부모가 있는 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간절하게 바 랐던가? 어릴 적의 바람은 청년이 되어서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다만 나이를 먹은 만큼 요구되는 자제력과 예의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 었다. 자신의 근본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조추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가 전에 없이 감미로웠다. '이제 나의 출신내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4 장 앞일을 가늠할 수가 없도다 제 4 장 앞일을 가늠할 수가 없도다 숙소로 돌아온 조추수는 전신에 끈끈한 감촉을 느꼈다. 밤새 천심장 의 내공을 운용하면서 흘린 땀이 그의 옷을 열 번 이상은 흠뻑 적셨다 가 말랐기 때문이다. 천심장 진기의 효력에 의함인지 밤을 새웠지만 피로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막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설 때였다. "조 사숙님! 조 사숙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숙소와 연무장 사이의 굵직한 나무에 가렸다 가 언뜻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궁조생의 제자인 국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국진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이냐?"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는지 가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두어 번 다독거리던 국진이 간신히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큰일났어요!" 이어 그는 다시 숨을 씩씩거렸다. 조추수는 평소 야무지고 귀엽게 생긴 국진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했 다. 따라서 그가 힘든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자 애처로운 마음에 혀 를 찼다. "쯔쯧, 숨이 잦아들거든 얘기하려무나." 국진이 도리질하며 억지로 숨을 멈추며 말을 꺼냈다. "아녜요. 추 사숙께서... 추 사숙께서 돌아가셨어요!" 조추수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추 사형은 어제 오후 배 사숙께 편지를 전하러 떠났는데 갑자기 죽다니?" "저도 잘 몰라요. 다만 새벽에 산문 앞에 추 사숙님의 시신이... 사부 님께서 지금 당장 산문으로 오라고 조 사숙님께 전하라 하셨어요." "갑자기 웬 청천 벽력(靑天霹靂) 같은 소리란 말이냐?" 추독의 죽음이 언뜻 믿어지지 않는 조추수였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이내 연무장을 가로질러 산문 으로 달려갔다. 돌계단을 내려가자 저 멀리 산문 주위에 여러 제자들 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그곳엔 궁조생과 매천악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산문 옆의 고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목의 중간 높이쯤에 한 사람 이 축 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산문에 가까워지자 그 시신이 추독임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추 사형!" 조추수가 부르짖으며 다가오자 매천악과 궁조생이 고개를 돌렸다. "추 사형!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조추수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홉떠졌다. 항상 조용하고 다정다감했 던 추독의 모습이 떠오르자 불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어떤 놈이 추 사형을 죽였단 말인가?' "크으윽...!" 악 다문 조추수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누가 보아 도 활화산 같은 격정에 휘말려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여서 매천악과 궁조생은 잠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조추수가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듯하자 궁조생이 물었다. "사제, 추 사제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지금은 흉수를 밝혀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야. 진정하고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아라." 조추수는 고개를 들어 추독의 전신을 찬찬히 살폈다. 추독의 가슴 중앙을 꿰뚫고 있는 검병(劍柄)이 보였다. 추독은 그 검 에 의해 고목의 중간쯤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꺾여진 고개는 자 신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고, 팔다리는 아래로 축 처진 채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바가 없나?" 궁조생의 물음에 시신을 살피던 조추수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 검은...? 휘월산장!" 시신을 꿰뚫고 있는 것은 추독 자신의 검이었다. 궁조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휘월산장의 권두수와 고량도 자신의 무기에 죽었지. 추 사제 의 죽음이 그 두 사람과 흡사해." 곁에 있던 매천악이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진정 그러하단 말이지..." 조추수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예, 사부님. 그리고 추 사형의 사인은 심장에 꽂힌 검 때문이 아닌 듯합니다. 가슴에 피의 흔적이 없어요." 매천악이 추독의 가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동조했다. "네 말이 맞다. 검은 그가 죽은 다음에 찌른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매천악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매천악은 삼 장 가량 떠오르며 오른손으로 추독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았다. 검이 뽑힘과 동시에 시신이 아래로 떨어지자 그는 왼손으로 시신을 낚아채 안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조추수는 어려서부터 궁조생에게서 검법을 전수받아 매천악의 무공 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명목상으론 매천악이 사부였으나, 실질적으 론 궁조생이 조추수의 사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처음으로 매천악의 놀라운 경신술을 접하게 되자 조추수는 잠시 동안 슬픔도 잊은 채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과연 사부님이시다. 내 듣기로 제아무리 무림의 뛰어난 고수라 해도 혼자서 삼 장 높이를 뛰어오르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사부님은 힘들이지 않고 뛰어올라 나무에 깊숙이 박힌 검을 뽑고 추 사형의 시 신을 안고서 내려오지 않는가. 사숙조님께서 태산파의 무공을 비하하 셨지만 사부님의 무공을 보면 그 말을 취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추수는 흉수의 무공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매천악의 경신술이 놀랍기는 하지만, 흉수는 추독의 시신을 안 고 삼 장 높이로 뛰어올라 검으로 그의 시체를 나무에 못박아 놓았으 니 그 무공은 더욱 가공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매천악은 추독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고는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궁조생이 손가락으로 추독의 이마를 가리켰다. "역시 이마에 가는 혈선이 있군요. 휘월산장에서 관일지를 비롯한 여러 고수들의 이마에 난 상처와 동일합니다." "으-음!" 시신을 살피던 매천악의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그는 시신의 이곳저 곳을 훑어보더니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 었다. "내 칠십 평생에 숱한 고수들을 보아 왔지만 이토록 놀라운 검법은 처음이다. 검기만으로 미간을 찔러 즉사시키다니." "과연 검기에 의한 상처입니까?" 궁조생은 자신이 휘월산장에서 짐작했던 사인을 매천악이 얘기하자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 검기가 미간을 뚫고 뇌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천하의 누구 라도 이 수법에 당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토록 신묘(神妙)한 검법이 라면 정말 봉천생이라도 나타난 걸까?" "대체 누가 이런 검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요?" "음, 노가장이라면 그런 고수가 있을지도... 그러나 노가장에서 이런 혈겁을 자행할 이유가 없지." "그럼 사부님 말씀대로 마교의 봉천생이...?" "황산파의 고수들이 나타났다고 하니 그저 짐작해 보았을 뿐이다. 아직껏 봉천생이 검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다 만 그의 무공이 신기(神技) 막측(漠測)하니 검법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그는 무림쟁패를 위해 여념이 없는 데, 이곳 산서무림에 직접 나타날 이유가 없지." 매천악은 추독의 가슴과 소매를 더듬더니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배 사제에게 보낸 편지가 없구나. 그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었 는지나 모르겠군." "무슨 편지입니까?" "그건 알 필요 없다." 궁조생의 질문을 일축해 버린 매천악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 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매천악의 목에 갑자기 힘이 잔뜩 실렸다. "연쇄적인 혈겁에 본 파도 대상이 되었음을 확인한 셈이로구나. 흉 수의 수법이 잔인하기 그지없으니 제자들은 절대 산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이어 그는 근심 어린 어조로 재차 말했다. "어젯밤 박위와 마원의를 공손 사제의 집에 보냈는데, 그들은 무사 할지 모르겠구나." "막내 사숙의 취산장(翠山莊)에 머물고 있는 약화(葯花) 사매(師妹) 를 데려오기 위해 그들을 보내셨습니까?" "음, 그 철없는 것이 진작에 오라고 해도 오지 않더니 결국 이 아비 의 속을 태우는구나." "취산장은 경관이 수려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럼, 다시 사람을 보 내 아예 중추절(仲秋節)의 집회 때 막내 사숙과 동행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낫겠구나." 약화 사매의 얘기가 나오자 추수는 눈에 이채를 띠며 매천악의 대답 을 기대했다. 매천악에겐 아들과 딸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매휘양(梅輝陽)으로 나이가 궁조생보다 두 살 적은 마흔하나였다. 그는 지금 매천악의 사제인 배간(裵幹)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딸의 이름은 매약화(梅葯花)라고 했는데, 미모가 출중하고 생기발랄 했다. 어려서부터 귀여움만 받고 자라 고집이 세었는데, 약 한 달 전부 터 매천악의 막내 사제인 공손월(公孫越)의 취산장에 머물고 있었다. 원래 매천악이 그녀를 취산장으로 보낼 땐 보름 안에 산으로 돌아오도 록 다짐을 받아 두었는데, 그녀는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넷으로 조추수보다 한 살이 적었다. 조추수와 그녀는 나이가 비슷했으므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어울 려 놀았다. 그녀에겐 많은 사형들이 있었으나 나이 차가 많아 귀여움을 받을지 언정 친구처럼 지낼 만한 이가 없었다. 다만 조추수만이 그녀의 벗이 되어 주었는데, 그런 만큼 그녀는 조추수를 각별히 좋아했다. 조추수 또한 여자라고는 그녀밖에 몰랐고, 다정다감한 그녀를 좋아 했다. 그는 무공 연마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기에 하루 중 대부분은 검과 함께 지냈다. 검법을 수련하는 동안이 아니면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를 본 지 한 달이 넘었으므로, 사부와 사형이 그녀를 언급하자 자연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궁조생이 두 달 후에나 있을 중추절 집회를 거론하고 매천악이 동조하자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추독의 시신을 옮기는 사이 매천악과 궁조생, 조추수 등 세 사람은 태사전으로 향했다. "제자들에게 시켜 추독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모에게 알리도록 해라. 장례를 치러야 할 터이니." "추 사제의 집은 여기서 이틀 거리가 넘습니다. 그의 부모와 면식이 있는 제가 직접 다녀올까요?" 매천악에게 묻는 궁조생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매천악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몸으로 먼 길을 간단 말이냐? 소식을 전하는 일은 삼 대 제자들 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정체도 모르는 흉수가 본 파의 제자들을 노리고 있는데,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제자들이 간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흉수가 나타난다면 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정곡을 찌른 말이라 궁조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와 추수는 산을 떠나면 안 돼. 본 파의 안위가 더욱 중요하다. 그 리고 흉수가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산을 벗어난 나이 어린 제자들을 죽이기야 하겠느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조추수가 갑자기 격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 흉수는 이미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추 사형이 목 숨을 잃었잖습니까? 어찌하여 제자들을 풀어 흉수를 찾지 않으십니 까? 추 사형의 죽음을 보고도 산에 꼼짝 않고 있는다면 제자들의 사기 가 떨어지게 되고, 다른 이들은 우리더러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입 니다.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건..." 갑자기 매천악이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닥쳐라! 네가 무얼 안다고 그따위 소리냐?" 호통치는 매천악의 얼굴이 노기로 붉어져 있었다. 갑작스런 사부의 호통에 조추수는 어리둥절한 모습이 되었다. 조추수는 추독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흉수에 대한 적개심이 끓 어올라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추독의 복수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천악이 오히려 제자들을 산에 묶어 두려 하자 이해할 수 없어 속마음을 털어놨던 것인데, 뜻밖에 사부의 진노를 사게 되자 섭 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궁조생 또한 매천악이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 껏 매천악은 상대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사형제가 살해되었다면 복수심이 불타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고 궁 조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조추수가 사부의 심려원모(深慮遠謀)를 알지 못하여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쳤다고 하지만, 이를 이해 못 할 매 천악이 아닌 만큼 그가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에이! 철없고 무지스러운 것!" 매천악은 호통을 치고 나서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소매를 크게 떨 치면서 걸음을 빨리 했다. 궁조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추수를 위로했다. "사제, 사부님도 추 사제의 죽음에 충격을 많이 받으신 모양이다. 사 부님의 심기가 좋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아라. 그리고 제 자가 함부로 사부님의 뜻에 반박하는 건 잘못이야. 지금은 네 방에 돌 아가거라. 나중에 사부님의 노기가 가라앉거든 사과를 드리도록 하고." 조추수는 매천악의 뒤를 따르는 궁조생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거처로 향했다. 매천악은 그 후로 며칠 동안 그를 찾지 않았다. 사부가 아직도 노기 를 풀지 않았나 보다, 라고 생각하니 더욱 섭섭한 마음이 일었다. 이에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공에 전념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게 되 었다. 매일 밤 자시가 되면 어김없이 냉겸을 찾아가 그의 지도하에 천 심장을 수련했다. 밤이면 천심장을 수련했고, 낮이면 태행파의 검법을 연마했다. 조추수는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공이 급격히 증진 됨을 느꼈다. 원래 냉겸이 자신의 천심장 진기를 조추수에게 전수하면서 그의 내 공은 이미 고수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만 그 기운을 미처 활용 하지 못해 느끼지 못했을 뿐인데, 천심장을 수련하면서 점차 자신의 기운으로 화했다. 보름이 지나자 그의 내공 조예는 이미 궁조생을 뛰 어넘고 있었다. 내공이 증진되면서 검법 또한 그만큼 깊어졌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 했던 변화들을 깨닫게 되었고, 검에선 날카로운 검기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궁조생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위력이 나타나자 조추수는 흥 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실을 들은 냉겸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사형제 들은 물론이고 매천악에게도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고 당부했 다. 조추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검법을 수련함에 더욱 조심하 게 되었다. 다시 보름이 지나자 그의 내공 수위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천심 장의 기운이 손에서 뻗어 나오더니 그 기운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냉겸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심장으로 아름드리 나무를 쳐보라고 했 다. 그대로 하자 나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는 나뭇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조추수는 무척 실망하고 말았 는데, 냉겸은 며칠 동안 나무를 관찰해 보라 하였다. 과연 삼 일이 지나자 나뭇잎이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보름째가 되자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 지가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너의 천심장 일격에 나무의 내부가 모조리 끊어지고 만 거야." 냉겸이 나무를 이리저리 만져 보며 흡족한 듯이 껄껄 웃었다. 조추 수 또한 주체하지 못할 흥분으로 온몸이 짜릿해졌다. "천심장력을 쏟으면 상대는 봄바람 같은 경력을 느낄 뿐이지. 그러 나 그 기운이 몸에 닿는 순간 그의 혼은 구천을 떠돌게 되는 거야. 천 심장은 매우 냉정하고 혹독한 수법이니 목숨이 위태롭거나 상대가 용 서하지 못할 대악인이 아니라면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냉겸은 천심장의 위험성을 누차 강조했다. 천심장 화후가 깊어 갈수 록 그의 당부는 빈도를 더해 갔다. 이렇게 조추수가 천심장을 배운 지 한 달 보름이 지나갔다. 이때쯤 그는 천심장의 수법을 대부분 익히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 그는 무공만을 익힌 건 아니었다. 매천악이 조추수를 불러 이것저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궁조생과 더불어 산 주위를 맴돌며 수상한 징후를 살피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흉수는 추독을 죽 인 이후로 태행검파의 제자들에게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매천악이 그를 처음 불렀을 땐 추독의 죽음 이후 보름이 지나서였 다. 조추수는 사부를 보자마자 그날의 무례함부터 사죄했다. 그러나 매 천악은 그에 대해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다만 냉정한 표정으로 이 것저것을 지시했을 뿐이었다. 조추수는 불만없이 사부가 시키는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길만이 사부의 노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조추수를 대하는 매천악의 냉랭한 태 도가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추독이 죽은 지 한 달 보름이 지나면서 가끔씩 궁조생이 검법을 수 련하는 모습을 볼라치면 그 허점과 미숙함이 눈에 띄게 늘어 갔다. 조추수의 검법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태행검파의 여러 사숙들에 근접할 정도가 되었다. 다만 조추수 본인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사 형제들과 매천악은 더 더욱 까마득하게 몰랐다. 오직 냉겸만이 조추수 의 무공 수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매휘양이 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항상 온화한 얼굴의 매천악과는 달리 눈매가 날카롭고 남에게 지길 싫어했다. 물론 남에게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그의 호승심은 유별났다. 동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사사 건건 시비를 걸었다. 그런 성격 탓에 이(二) 대(代)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는 동문들 중에서도 특히 조추수를 더욱 구박했다. 조추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매휘양이 사형이라 그저 묵묵히 참고 지내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를 특별히 아끼는 궁조생이 종종 매 휘양의 횡포를 막아 주곤 했기에 그런대로 지낼 만하였다. 아마 궁조생이 조추수를 아끼는 마음이 컸기에 매휘양이 조추수를 더욱 구박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동생인 매약화는 그 반대였다. 그녀는 항상 조추수의 편에 섰고, 매휘양이 조추수를 괴롭힐 때면 오히려 대신해서 오빠와 말다툼까지 하였다. 매휘양의 구박이 심해질수록 매약화의 정성 또한 더욱 깊어졌다. 산에 돌아온 매휘양은 예전과 다름없이 조추수를 대했다. 예전에도 잘 참는 조추수였지만, 지금은 이제껏 알지 못하던 무공의 신묘함에 빠져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여념없었기에 매휘양의 박해쯤은 가볍게 흘려 버렸다. 며칠 동안 몇 번 집적거려도 별 반응이 없자 매 휘양은 이내 시들해졌는지 더 이상은 조추수를 찾지 않았다. 다시 보름이 더 지나 중추절이 되었다. 그 동안에도 조추수의 무공은 한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천심장은 물 론이고 검법을 펼칠 때에도 때때로 강력한 검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나 뭇가지가 잘라지곤 했다. 아직은 그 검기를 뜻대로 조절하기에 어려움 이 있었지만, 무공의 진척으로 보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해결될 것이 라며 냉겸은 기뻐했다. 그의 무공은 이제 무림에 이름을 떨칠 만한 수준에 오르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무공이 평범하던 청년이 고수로 변모하는 건 무 림을 통틀어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기사(奇事)라 할 수 있었다. 그러기 에 조추수의 무공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 태행검파의 일 대 제자는 매천악을 위시해서 그의 유일한 사형 인 원가량(袁加良), 그리고 사제인 곽입지(立志), 배간, 공손월 등 다섯 명이 전부였다. 매천악을 제외한 일 대 제자들은 모두 태행산을 벗어나 산서무림에 흩어져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원가량은 선공산(仙公山) 기슭의 원가장(袁家莊)에서 제자를 지도하 며 강호의 고수들과 교분을 두터이 했다. 곽입지는 조부 때부터 내려온 능천(陵川) 의정문(意定門)의 문주직 을 계승하였다. 배간은 고평(高平) 지역에서 종이를 만드는 가업을 계승하고 있었다. 공손월은 동문들 중 태행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청양산(靑羊山) 취산장에서 칩거하며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매년 중추절이면 태행검파의 일 대 제자들이 사문에서 정기적으로 집회(集會)를 가졌다. 이때가 아니면 멀리 떨어진 동문들을 보기 힘들 었다. 조추수는 사숙들에게 많은 제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들 중 면식이 있는 동문들은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 었다. 따라서 서로간에 서먹한 경우가 많았기에 번거롭기만 한 중추절 의 집회를 그리 반기는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릴 때부터 천 애 고아(天涯孤兒)인 조추수를 멸시하곤 했기에 꺼리는 마음이 더욱 컸다. 그러나 이번 집회만은 손꼽아 기다렸다. 그 이유는 막내 사숙인 공손월과 함께 오기로 되어 있는 매약화 때 문이었다. 그날은 이른 새벽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무공 연마를 할 수 없었다. 날이 밝자 제일 먼저 찾아온 이는 원가량이었다. 원가량은 자신이 아끼는 제자인 갈웅휘(葛雄揮)와 이무연(李霧然), 곽철(郭澈) 등과 원 가장의 여러 무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조추수는 원가량에게 공손히 예를 올린 뒤 갈웅휘와 이무연에게 형 식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곽철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잡았다. "곽 사형, 결혼식에 참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곽철은 올 봄에 신부를 맞았는데, 조추수는 그의 결혼식에 가지 못 했었다. 동문들 중 궁조생을 제외하면 가장 맘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형이라 결혼식에 불참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넌 아직 산중에 얽매여 있는 몸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 보다도 작년에 비해 너의 신색이 훤한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있는가 보 구나." 곽철은 키가 작은 편이라 유달리 큰 조추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천심장을 수련한 이후에 조추수의 두 눈은 전에 없이 맑고 빛이 났다. "항상 같은 생활을 할 뿐인데 특별히 좋은 일이 있겠어요?" 조추수가 계면쩍게 웃었다. 이때 갈웅휘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조 사제, 넌 그 동안 버릇만 없어졌구나. 내겐 말 한마디 없이 눈인 사만 하고 곽 사제에게는 친절히 굴다니, 네 사부가 그리 가르치더 냐?" 조추수는 움찔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갈웅휘는 이 대 제자들 중에서도 성격이 잔인하고 대담 무쌍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갸름한 얼굴 전체엔 살얼음과도 같은 냉혹함이 배어나오고 있었고, 옅은 눈썹과 가늘면서도 유난히 붉은 입술은 상대로 하여금 은연중에 살기를 느끼게 하였다. "왜 말이 없느냐? 궁조생이 너를 편애하더니 이젠 나도 안중에 없는 거냐?" 문득 조추수는 노기가 치솟아 눈썹을 꿈틀거렸다. 장문인을 함부로 '네 사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존장을 모독 하는 행위였다. 게다가 대사형인 궁조생의 이름을 불렀으니, 갈웅휘는 사부와 궁조생을 같이 모욕한 셈이었다. 갈웅휘의 사부인 원가량은 전대 장문인 곡우성(曲雨晟)의 대제자였 다. 따라서 모든 동문들은 그가 차기 장문직을 계승하리라 믿어 의심 치 않았고 자신 스스로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천악이 곡우성의 어린 딸인 곡비연(曲飛燕)과 결혼함으로 써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삼십여 년 전 곡우성이 죽기 전에 매천악에 게 장문 지위를 물려주자 원가량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원가량은 사사건건 매천악과 대립하였고, 매년 중추절이면 항 상 매천악과 다투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갈웅휘 또한 궁조생 등에게 적대감을 자주 드러냈다. 궁조생은 장문의 대제자였으므로 태행검파의 이 대 제자들은 모두 그를 대사형이라 불렀다. 그러나 원래 원가량이 매천악의 사형이고 자신은 원가량의 대제자이 며 나이 또한 궁조생보다 두 살이 더 많으니 당연히 자신이 대사형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궁조생을 대사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항상 이름을 불렀다. 다만 사문의 존장들이 있을 때에 만 궁조생을 사형이라 불렀다. 갈웅휘가 궁조생을 비하(卑下)하자 조추수의 가슴속에서 노기가 꿈 틀거렸다. 이런 그의 표정을 눈치챈 곽철이 마주잡은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갈 웅휘는 심사가 뒤틀리면 동문이라고 해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평소 갈웅휘의 무공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곽철은 조추수가 한마디 대꾸만 한다면 갈웅휘의 손에 최소한 팔다리 한군데쯤은 부러지리라 생각했다. 이때 이무연이 나서며 갈웅휘에게 한마디했다. "사형, 조 사제는 아직 어려 철이 없으니, 화를 내시면 오히려 체면 이 상합니다. 그만 하시고 사부님을 따라 어서 태사전으로 듭시다." 이무연은 지금 문제가 생긴다면 필히 갈웅휘가 매천악을 '네 사부'라 부른 말이 화를 부르리라 생각했기에 갈웅휘를 만류한 것이다. "흥!" 갈웅휘 또한 자신의 실수를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직이 냉소한 후 몸을 돌렸다. 조추수는 화가 나기는 했지만 괜스레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으 므로 갈웅휘가 돌아서자 곽철의 만류에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곽 사형,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눌 분위기가 되지 않아 조추수는 곽철에게 인사를 하고는 산문으로 향했다. 산문을 지나 수백 개의 계단이 끝나는 지점 에 이르러 그는 소로 옆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주위엔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비탈을 가득 덮은 낙엽이 때때로 바람에 살랑 흔들거리거나 뒹굴기도 하면서 조추수의 마음을 간질였다. 쫑쫑 거리는 새소리에 마음이 풀려 조추수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나무숲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 속에 사매의 방긋 웃는 아리따운 모 습이 아른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로를 따라 아래를 바라보던 조추수의 눈에 세 사람의 모습이 들어 왔다. 수염이 희끗한 한 명의 노인과 사십대의 중년인, 그리고 나이 삼 십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조추수는 바위에서 일어나 반가움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소리쳤 다. "배 사숙님!" 조추수가 다가가자 노인이 반기며 물었다. "추수로구나. 어쩐 일로 여기에 혼자 내려와 있느냐?" 조추수는 매약화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노인은 배간이었다. 그는 평소 매천악과 왕래가 잦았고 매천악의 제 자들에게 친근히 대했는지라 조추수도 곧잘 따랐다. "너 궁 사형께 꾸지람을 듣고 여기에 몰래 내려온 게 아니냐?" 혀를 차며 묻는 중년인은 배간의 제자인 나신(羅信)이었다. 조추수를 아끼는 궁조생이었으나 잘못엔 엄격하여 종종 그를 꾸짖곤 했는데, 그 럴 때면 조추수는 혼자서 몰래 산속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궁조 생과 시간을 같이할 기회가 많았던 나신은 그의 이런 버릇을 알고 있 었다. "어머, 사형은 얘가 매일 꾸지람만 듣고 사는 줄 아나 봐?" 여인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조추수를 변호했다. 이에 조추수는 헤벌 쭉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녀는 조추수에게 단 하나뿐인 사저(師姐), 왕옥진(王玉眞)이었다. 조추수가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선 태사전에서 사숙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음, 그래. 너도 이곳에 오래 있지 말고 어서 올라오도록 해라." 배간은 자애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신 이 뒤따르자 왕옥진이 조추수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겨 뒤로 한걸음 물 러나며 물었다. "궁 사형께선 잘 계시지?" 그녀와 궁조생 사이의 염문(艶聞)은 동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조추수가 되물었다. "하하, 궁 사형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면서, 어째서 아직도 궁 사형께 시집을 가지 않으십니까?" 부끄러움에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나직이 코 웃음을 쳤으나 그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대신 묘한 눈빛으로 조 추수를 흘겨보다가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약화 사매와 같이 있지 않고?" 왕옥진은 평소 조추수와 매약화가 자주 어울리는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매약화가 석 달 동안 취산장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사매는... 공손 숙부님과 같이 취산장에 있어요." 조추수의 대답에 왕옥진이 갑자기 교소(巧笑)를 터뜨렸다. "아하! 조 사제는 여기서 사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로구나. 호호 호..." 그녀의 커다란 웃음 소리만큼 조추수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피어올 랐다. 계단을 오르던 배간이 뒤돌아보았다. "옥진, 무엇 하느냐? 어서 따라오지 않고." 이에 그녀는 조추수에게 혀를 날름거리며 한마디를 던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럼 여기서 계속 그리운 임이나 기다리려무나." 날렵하게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보며 조추수는 부끄러움이 사그라지 지 않아 걸터앉았던 바위를 지나 비탈의 나무 뒤로 돌아가 앉았다. '사매가 아니면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야지.' 조추수는 두 손을 턱에 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릴 적 봄날, 사 매와 같이 산과일이며 꽃을 따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버렸고 두 사람은 길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늑대 울음 소리에 사매는 울고불고 야단이었 다. 짐짓 여유있는 표정을 지으며 사매를 위로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속 으론 겁이 났던 조추수인지라 결국엔 사매를 따라 울어 버렸다. 두 사 람은 한참을 울었는데, 먼저 울음을 그친 쪽은 사매였다. 울다가 지쳐 서 멈추었던 것인데, 아직도 울고 있는 조추수의 모습이 우스웠던 모 양이었다. 사매는 갑자기 막 웃다가 한마디 핀잔을 주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해놓고서 나보다 더 크게 울면 어떡해? 남자 가 바보같이..." 그녀의 꾸지람에 머쓱해져 조추수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눈에는 닭 똥 같은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두 사람은 수백 년은 됨직한 백양 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꼬박 밤을 새웠다. 그날 밤 태행검파는 발칵 뒤집혔다. 문파의 모든 제자들이 태행산을 뒤졌다. 그리고 그들은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고목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사문으로 돌아간 조추수는 장문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 리고 불과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성심동(省心洞)에 갇혀 한 달을 보 내야만 했다. 성심동에서 홀로 지내게 된 조추수는 외롭고 무서워 매 일 밤 울었다. 그런데 갇힌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밤 사매가 몰래 찾아 왔다. 성심동은 사문에 잘못을 저지른 제자를 가두어 반성케 하는 장 소였다. 사문의 제자는 식사를 전달하는 목적 외에는 성심동에 들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놀란 조추수가 빨리 돌아가라고 했으나 그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조추수를 가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해가 뜰 때까지 같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왔다. 덕분 에 조추수는 성심동에서의 하루하루가 지겹지 않았다. 낮이면 잠을 자 거나 사매를 기다리는 마음에 해가 길지 않았고, 밤이면 그녀와 지내 며 밤이 짧은 것을 아쉬워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두 사람은 더욱 가 까워졌다. 세월이 흘러 사매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었고, 조추수는 늠름한 장 부가 되었다. 두 사람은 춥지 않은 날이면 어릴 적 껴안고 밤을 새웠 던 그 백양나무 아래에서 몰래 만나곤 했다. 그리고 산을 두루 돌아다 니며 꽃과 나비와 이름 모를 새들과 감미로운 시냇물 소리와 함께 즐 거움을 같이했다. 태행산 곳곳엔 두 사람의 웃음 소리와 재잘거리던 그녀의 숨결이 배어 있었다. 옆에서 후닥닥,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조추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달콤한 조추수의 상념을 질투라도 하는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다 람쥐 한 마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아래쪽 길목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사람의 남자 목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섞여 나 왔다. '사매로구나!' 조추수는 반색하여 나무 옆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앞으로 다가 오면 깜짝 놀래 줄 생각이었다. 소로로 세 명의 남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조추수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막내 사숙인 공손월의 제자인 뇌가명과 황보웅, 그리고 몽매에도 그 리던 사매 매약화였다. "사..." '사매'라고 부르며 뛰어나가려던 조추수는 말을 급히 주워담으며 몸 을 숨겼다. 뇌가명의 팔짱을 끼고 있는 매약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 다.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매약화는 연신 싱글거리며 재잘거리고 있었 다. 이에 뇌가명이 다감스런 모습으로 매약화를 내려다보며 간간이 말 을 받았다. 세 사람이 조추수가 숨어 있는 나무 아래를 막 지나갈 때였다. 문득 매약화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휴! 이곳은 정말 답답해요. 산문에 이르는 계단만 봐도 지겹다니 까. 취산장에 또다시 가고 싶어요." 뇌가명이 웃으며 응대했다. "하하, 사매가 원한다면 난 언제든지 환영할 거야. 사부님도 사매를 어여삐 여기시니 문제 될 게 없지." "뇌 사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제게 이토록 잘 대해 주시니. 취 산장의 아름다운 풍경과 뇌 사형이 있는데, 어찌 또 가고 싶지 않겠어 요? 하지만 아버님이..." 황보웅이 끼여들며 말했다. "사매가 원하고 사부님이 허락하시면 장문께서도 굳이 말리지는 않 으실걸. 내가 사부님께 말씀드려 볼까?" 그녀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어머, 정말? 그럼 황보 사형께서 말씀해 주세요. 아버님이 허락만 하시면 그땐..."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들의 웃음 소리만이 조추수의 귀를 괴롭 혔다.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약화는 뇌 사형을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다.' 뇌가명과 매약화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 다. 조추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영상을 떨치려 하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사매는 가끔씩 엉뚱한 짓을 하곤 했지. 지 금도 그녀는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야. 함부로 그녀를 의심해 선 안 돼.' 조추수는 억지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금 전의 모습을 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내 실망스러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었다. '아아, 헤어져 있는 몇 달 동안 난 사매만을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 동안 날 잊고 뇌 사형과 어울리고 있었구나. 사매의 마음이 변한 걸 까?' 실망스런 마음이 슬며시 원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흥! 그녀는 내게 잘 대해 주기는 했지만 결국엔 제멋대로였지. 난 그녀의 뜻에 따르기만 할 뿐이었어. 그녀가 원한다면 사부님인들 어떻 게 막을 수 있겠어?' 매약화는 매천악의 하나뿐인 금지옥엽으로,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았 다. 심지어 모든 이에게 지엄한 예법을 강조하던 매천악도 그녀에게만 은 예외로 대할 정도였다. 당연히 조추수와 그녀가 어울리는 동안에도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숱하게 있었고, 그럴 때면 그는 항상 그녀의 말을 따르며 기분을 맞추 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어. 사매는 반드시 나와 결혼하겠다고 언 약(言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어떻게 뇌 사형과... 아니야, 그녀는 나 와의 약속을 지킬 거야. 성격이 고집스럽고 행동이 제멋대로이긴 해도 그녀는 자기가 한 약속만은 반드시 지켰지. 그래, 사매를 의심하는 내 가 나쁜놈인 거야. 감히 사매를 의심하다니...' 조추수는 주먹으로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나쁜놈! 넌 맞아야 해. 사매를 의심하다니.' 그러나 뇌가명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는 매약화의 모습이 머릿속 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조추수는 돌을 집어 들어 허공으로 힘껏 던졌다. 돌이 날아가는 곳 엔 두 사람의 다정스런 영상이 있었다. 휘익! 돌이 그 영상을 뚫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5 장 의문(疑問)은 풀기가 어렵고 제 5 장 의문(疑問)은 풀기가 어렵고 풀이 죽어 연무장을 가로지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조추수에게 나이 어린 삼 대 제자 한 명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조 사숙님, 매(梅) 사고(師姑)께서 찾고 계십니다." "응, 사매가...?" "예. 태사전에서 장문 사조님을 뵙고 나신 후 바로 사숙을 찾으셨어 요." 조추수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힘없이 대답했다. "알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이에 삼 대 제자가 급히 소 리쳤다. "사숙님, 사고께선 지금 태사전에 계십니다." 그러나 조추수가 대답없이 계속 가던 길로 가자 제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추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상에 벌렁 누워 버렸다. 지금쯤이면 사문의 모든 제자들이 떡과 과일 등을 먹으며 즐겁게 얘기를 나눌 시 간이건만 조추수는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방문 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아름다운 교성(巧聲)이 들렸다. "추수, 추수! 방에 있어요?" 조추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입에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뇌가명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재빨리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았다. 사뿐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향긋한 분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속삭이는 정겨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추수." 조추수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킥 하는 웃음과 함께 다시 예의 음성이 보다 강하게 들렸다. "추-수-" 조추수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런 기척 이 없자 조추수는 사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보드랍고 향긋한 숨결이 귓전에 닿는다고 느낀 순간, "추! 수!" 약간은 신경질적인 듯한, 그러나 항상 그리웠던 그녀의 교성과 더불 어 날카로운 손톱의 감촉이 어깻죽지로 전해졌다. "아-얏!"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키는 조추수. 그 앞에 아미를 상큼 치켜 올렸다가 이내 싱글거리는 매약화의 모습이 눈 속에 들어왔다. 그녀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째서 모른 척하는 거예요?" 화가 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가 자지 않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무안하여 오히려 반문하는 조추수에게 그녀는 새치름하게 코를 찡긋 거렸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 요. 그렇게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내가 속겠어요?" '쳇, 자신의 잠자는 모습을 스스로 볼 수는 없지 않는가? 이제껏 말 해 주지 않았는데 내가 알 게 뭐람!' 속으로 투덜거리는 조추수의 표정이 밝지 못하자 그녀가 물었다. "내가 취산장에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 화가 났나요?" "..." 조추수가 대답을 않자 그녀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이내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하! 그럼 내가 편지를 하지 않아서 화가 난 거군요." "..." '평소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없었는데, 굳이 그것 때문에 화 가 날 리 있겠어? 다만...' 뇌가명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조추수는 그저 시무룩하게 있 을 뿐이었다. "이것 때문도 아니고, 저것 때문도 아니고, 그럼 무엇 때문일까? 음... 추수, 말해 줘요. 난 당신이 화가 난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에요." "사매." "응?"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조추수의 눈을 응시했다. "저, 말이야... 난 화가 나지 않았어. 다만..." "다만?" "아, 아냐. 취산장은 어땠어? 듣기에 아름다운 곳이라던데." "흥! 또 딴소리로군요." 짐짓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취산장을 떠올리자 이내 즐거운 표정이 되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공손 사숙은 정말 고매한 선비예요. 우리가 어릴 적에도 그분은 항 상 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 않았어요? 평소에도 제자들에 게 부드러웠지만 취산장에 가보니 그분의 성품을 확연히 알 수 있었어 요. 저 멀리 취산장이 보이는 곳에서부턴 길을 따라 수양버들이 늘어 져 선녀처럼 하늘거리고, 입구에 들어서면 작약(芍藥)의 희고 붉은 꽃 잎이 바람에 날리며 코끝에 향기를 뿌려서, 마치 선경에 드는 기분이 에요. 취산장의 어디든 이름을 알 수 없는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수백 년이나 살아 온 신수(神樹)가 없는 곳이 없고, 진기하고 아름다운 새들 의 지저귐을 들을라치면 마치 선경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예요. 게다가..." 그녀의 얘기를 들을수록 조추수의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특히 얘 기가 더욱 진행되어 그녀의 입에서 뇌가명이란 이름이 나올 때면 가슴 이 덜컥거리며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조추수의 이런 심경을 아 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취산장의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조 사숙님 계셔요?" 사형 궁조생의 제자인 국진의 음성이었다. 그녀의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던 조추수인지라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반가웠다. "들어오너라." 조추수의 응답에 방안으로 들어오던 국진은 매약화를 발견하고는 순 진한 눈동자를 끔벅이며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냐?" "장문사조님께서 사숙님을 찾으신대요. 태사전으로 바로 오시라고 하더군요." 조추수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매약화가 뒤따르며 조추수의 팔을 잡았다. "추수, 아버님을 뵙고 나면 나를 만나러 와야 해요." "응." 짤막하게 대답을 한 조추수는 방을 나섰다. 매약화는 여전히 걸음을 같이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청수원(淸水園)에서 기다릴게요." 조추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태사전으로 향했 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매약화는 의아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화가 났을까?" 태사전엔 매천악을 비롯해 원가량, 곽입지, 배간, 그리고 공손월이 모두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궁조생은 말석에 자리하여 묵묵히 앉아 있었는데, 전내엔 진중(珍重)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매천악의 옆 자리엔 조추수가 처음 보는 오십대의 중년인이 앉아 있 었다.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그는 검병이 유난히도 긴 검을 등에 매고 있었다. 조추수가 들어서자 매천악이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신검문의 홍희(洪熹) 대협께 인사를 올리거라." 조추수가 홍희라고 불린 중년인에게 예를 올리자, 매천악이 한마디 덧붙였다. "홍 대협께선 휘월산장의 착상을 살피셨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터 라 당시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하는구나. 홍 대협께서 는 너희들에게 의문나는 점을 묻고자 하시니, 당시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려 홍 대협께 한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설명해 드리거라." 홍희는 궁조생에게 가볍게 읍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두 분을 번거롭게 해드려 미안하오. 휘월산장의 일은 자칫 산서무 림 전체의 문제로 번져 나갈 조짐이 보이고 있소. 그래서 실례를 무릅 쓰고 두 분을 청한 것이니 양해 바라오." 홍희는 신검문주 위지광(慰遲光)의 사제로, 배분상으로 매천악과 동 배였다. 따라서 그가 궁조생과 조추수에게 가볍게나마 읍을 한 것은 두 사람에게 대단히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궁조생 또한 즉시 읍을 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저희가 홍 대협께 약간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추수가 궁조생의 옆 자리에 앉자, 홍희는 두 사람에게 휘월산장의 이모저모를 물었다. 특히 그는 피살된 고수들의 사인(死因)에 대해 집 중적으로 물었는데, 그가 휘월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당수의 시신 이 없어져 있었던 듯했다. 그는 권두조, 권두수 형제와 관일지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그나마 나머지 시신들도 짐승들에 의해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설명이 끝나자 문득 원가량이 가볍게 탁자를 치며 특유의 날카로운 음성을 높였다. "혈겁을 자행한 마두가 이젠 방두교(龐斗巧) 대협에게까지 손을 뻗 치려 하니, 이러다간 산서무림엔 고수가 남아나질 않겠소이다." 홍희가 그의 말을 받았다. "고량의 죽음에 저희 문주께선 크게 분노하고 계시지요. 게다가 혈 겁이 그치질 않고 산서무림 전체로 번져 나가니, 더 이상 좌시한다면 여타 방파도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그렇소. 이번 일련의 혈겁엔 우리 태행검파와 신검문도 예외라고 단정할 수 없는 형편이오. 게다가 흉수의 수법이 너무 잔악하니 이것 만으로도 반드시 흉수를 찾아 제거할 이유가 되는 셈이오." 매천악이 동조하자 홍희가 즉시 말을 이었다. "이번 방두교 대협을 돕기 위해 저희 문주께서는 신검삼호(神劍三 護)를 파견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신검삼호를?" 매천악은 물론 원가량, 곽입지, 배간, 공손월 등 모두가 놀람을 감추 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저희 문주께서는 이번에 기필코 혈겁의 원흉을 제거하 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귀문주께서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시니 우리도 성의를 보이지 않을 수 없구려. 그렇다면..." 매천악의 시선이 배간과 공손월에게 이르자 두 사람은 가볍게 머리 를 숙여 보였다. "본 파에선 배간과 공손월이 방 대협을 돕도록 하겠소. 그리고 휘월 산장의 현장을 자세히 살핀 바가 있는 궁조생과 조추수가 대협과 동행 하여 도움이 되도록 하겠소." 이때 원가량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장문인께선 흉수가 본 파의 제자를 죽였다고 하지 않았소? 이는 이 미 본 파에 대해서도 도전을 한 셈인데, 그 정도의 조치로는 부족한 듯하오. 이번에 나도 동행을 하여 반드시 흉수를 잡도록 하겠소." 홍희가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귀파의 제자도 흉수에게 당했단 말입니까?" 이에 매천악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원가량을 힐끔 쳐다보았으나 이내 신색을 바꾸었다. "흉수는 나의 셋째 제자인 추독을 죽이고서 시신을 본 파의 산문 앞 나무에 매달았다오. 사인이 휘월산장의 수법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동 일한 흉수의 짓이라고 믿고 있지요." "허어!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귀파는 본 문과 더불어 산서무림 의 양대지주(兩大支柱)가 아닙니까? 흉수가 귀파의 제자를 죽여 산문 앞에 매달았다면, 공공연히 산서무림 전체를 대상으로 혈겁을 자행하 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건..." 매천악이 그의 말을 받았다. "아마도 흉수의 실력이 우리가 생각한 이상일지도 모르오." 홍희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비록 태행검파가 강호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지만, 산서무림에선 신검문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태행검파와 신검문은 지난 수십 년간 관계가 돈독 하여, 둘을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즉, 태행검파에 대 한 도전은 신검문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신검문주의 대제자 고량이 흉수에 의해 이미 죽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아무래도 이번 사태엔 산서무림 전체의 흥망이 걸린 듯합니다. 본 문의 문주님께 속히 알려야겠군요." 그의 음성엔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에 매천악이 담담한 음 성으로 응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이번에 방 대 협을 도울 고수들은 우리와 산서무림의 십여 고수들뿐 아니라 무당사 협(武當四俠)까지도 합세하기로 했다오." "무당사협이? 최근 무당파는 마교와의 대립으로 경황이 없어 산서무 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어쩐 일로..." "실은 비마표국의 유 국주가 황산파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는 데, 그때 진국충 또한 목숨이 위태로웠다오. 우연히도 나의 제자 둘이 서 그를 도와 생사를 같이했는데, 며칠 전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무당사협이 서신을 보내 왔더군요." "황산파가 산서무림에 나타나 비마표국을 공격한 일은 저희도 들었 습니다." "비마표국의 진국충은 무당의 속가제자라 유 국주의 원한을 갚기 위 해 무당에 도움을 청했소. 무당에서는 황산파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산서무림을 삼키려는 마교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무당사협 을 보낸 모양이오. 그들은 이곳에서 일련의 혈겁을 전해 듣고는 자진 하여 방 대협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라오." "무당사협은 개개인이 모두 무림에서 보기 드문 절정고수들입니다. 그들이 나선다면 안심이 되는군요." 몇 마디의 말을 더 주고받은 후 홍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 하였다. 그가 태사전을 나간 후 문득 원가량이 불편한 신색으로 말을 꺼냈다. "장문사제, 자네는 내가 태행검파에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보군." 느닷없는 그의 말에 매천악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사형?"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진작에 추독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않았 나? 자넨 오늘에서야 그 일을 내게 들려 줬어. 그리고 휘월산장의 일 도 그렇네. 자넨 내게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자네의 제자 둘만 그 곳에 보냈어. 자넨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내게 알려 주었네. 이는 자칫 본 파의 운명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인데 자네 혼자 처리하고 내겐 통지 하지 않았음은 날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때 곽입지가 나서며 원가량을 거들었다. "장문사형께서는 내게도 통지를 하지 않았소. 배 사제, 공손 사제, 자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갑자기 전내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렀다. 배간과 공손월은 난감한 기색으로 매천악을 바라보았다. 매천악은 두 사람의 갑작스런 공격성 발언에 곤혹을 감추지 못하더 니 나직이 헛기침을 하였다. "사형, 휘월산장의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파장을 일으키리라고는 당시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휘월산장과의 친분이 있어 그들의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의도로 제자 둘을 그곳에 파견했을 뿐이지요. 만약 사전에 심각성을 알았다면 어찌 사형과 사제들에게 의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원가량이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흥! 패환도 구예와 이화창 이각이 이미 멸문지화를 당한 상황이었 는데 그 심각성을 몰랐단 말인가?" "그건..." 매천악은 난감하면서도 불쾌한 눈빛으로 원가량을 바라보더니 이어 궁조생과 조추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아마 일 대 제자들 간의 언쟁을 제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내린 명 이리라 생각하며 궁조생과 조추수는 태사전을 나섰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태사전을 뒤로하며 십여 걸음을 묵묵히 걷던 궁조생이 나직이 탄식 했다. "사형, 무슨 근심거리가 있으신가요?" 궁조생은 씁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콧수염이 바람에 나부끼며 암울한 표정을 더해 주었다. 다시 십여 장을 말없이 걸어가던 궁조생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 사백부는 장문이 되지 못한 걸 평생의 한으로 생각하는 모양이 다. 암운(暗雲)이 가득한 이때에도 사부님의 흠을 잡으려 혈안이시 니..." 태행검파는 장문인 매천악이 거느린 세력보다는 외지(外地)에서 기 반을 잡은 사형제들의 세력이 더욱 컸다. 물론 그들 개개인의 세력이라면 매천악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문제는 그들이 연합을 한다면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원가량은 장문 지위가 매천악에게 넘어가자 즉시 선공산 원가장으로 돌아가 지난 삼십여 년 간 세력을 넓히는 데 주력했는데, 호시탐탐 장 문의 자리를 노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곽입지가 그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다. 칼부림이 없을 뿐 사실상 태행검파의 세력은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궁조생은 심기가 불편한 탓이지 별다른 말 없이 숙소로 들어가 버렸 다. 방으로 돌아간 조추수는 침상에 눕는 순간 매약화가 남긴 말을 상기 했다. 잠시 망설인 끝에 매약화가 기다리고 있을 청수원으로 걸음을 옮겼 다. 청수원은 태사전 뒤편에 인공적으로 만든 반경 십여 장 정도의 정원 이었다.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가산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가 마음을 청량(淸凉)하게 한다고 하여 청수원이라 불렸다. 매천악은 밤이면 청수원을 거닐며 사색하기를 좋아했는데, 조추수와 매약화는 매천악이 없을 시간이면 종종 이곳에서 몰래 만나 시간을 보 내곤 했다. 청수원에 발을 들여놓자 매약화와 다정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 리를 스치며, 우울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졸졸졸 흐르는 인공 개울을 따라 십여 장을 가면 사슴처럼 생긴 가 산이 나온다. 조추수와 매약화는 이를 녹산(鹿山)이라 불렀다. 두 사람 은 늘 녹산의 그늘진 곳에서 밀담을 나누었다. 따라서 조추수는 지금 도 그녀가 녹산에서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다. 개울을 따라 걸으며 조추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 사매를 만나면 뇌 사형과의 사이를 물어 봐야지. 나 혼자 가 슴에 묻고서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일단 결심을 하자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녹산이 살짝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녹산의 뒤편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침 바람이 강하게 불어 착각인가 했으나 이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매약화와 뇌가명의 목소리였다. 천근이 넘는 바위가 가슴을 쿵, 하고 내리친다고 조추수는 생각했다. 조추수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녹산으로 접근했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십여 번씩 쿵덕거리며 뛰었다. 문득 뇌가명의 짜증 섞인 음성이 녹산 뒤편에서 흘러나왔다. "사매, 언제까지 그를 기다릴 거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요. 태사전에서 얘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에 요." "흥! 태사전엔 사부님, 사백부님, 사숙님들이 모여 회담(會談) 중이신 데, 조 사제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있을 일이 있겠어? 그는 사매와 의 약속을 잊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아요. 추수는 이제껏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단 말이에요." 매약화의 음성이 약간 날카로워졌다. "그럴까? 그가 사매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어째서 취산장으로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지? 사매가 취산장에 머문 지 석 달이 넘도록 말이 야." 능글맞게 들리는 뇌가명의 목소리에 조추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뛰어나가 '난 이렇게 와 있는데, 왜 나와 사매 사이를 이간질하려 는 거지?'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건... 추수와 난 이제껏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어 편지를 보내 지 않았겠죠. 나도 그에게 편지 쓸 생각을 못 했는걸요." "사매가 조 사제에게 편지할 생각을 못 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방금 말했잖아요. 우린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고요." "그건 두 사람이 태행산에 같이 있었을 때의 이야기지. 조 사제가 그 동안 항상 사매를 생각했다면 어떻게 편지 쓸 생각을 하지 못했겠 어? 또 사매는? 만약 취산장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와 청양 산을 노니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편지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건..." 매약화는 일시 반박을 못 하고 말꼬리를 흐리더니 더 이상 말이 없 었다. '뇌 사형과 매약화가 같이 청양산을 노닐었다니... 약화는 나보다도 취산장의 아름다움이 더 좋았던 걸까? 나보다도 뇌 사형과 지내는 것 이 더 즐거웠던 걸까?' 문득 머릿속에서 질투심이 스멀스멀 번져 나와 가슴으로부터 손끝까 지 적시는 듯했다. 은근히 마음이 아파 와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 먹을 불끈 쥐었다. 뇌가명의 말이 계속되었다. "조 사제도 마찬가지야. 그는 휘월산장을 다녀왔다지? 그 동안 다른 여자가 생겼을지 알게 뭐야?" "괜한 소리 말아요." "아무튼 그에겐 사매와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기에 사 매에게 편지를 하지 않았을 거야. 그에겐 사매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 각하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사매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있다니, 그게 뭘까?" "흥!" 쌀쌀맞은 매약화의 냉소가 뇌가명을 뜨끔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뇌 가명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잠시 바람 소리만이 녹산 주위를 맴돌며 침 묵을 메웠다. 조추수는 휘잉, 하니 가슴을 시원스럽게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이 더 없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뇌가명에게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 을 매약화의 깜찍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흐트러진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뇌가명이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 로 침묵을 끊었다. "알았어. 더 이상 조 사제 얘기는 하지 않겠어. 그리고..."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매약화의 탄성이 들렸 다. "어머, 이건...!" "놀랐지? 담비의 모피에 공작 깃털을 꽂아 만든 모자야. 이제 날씨 가 추워지면 이 모자를 쓰고 길을 나선다고 생각해 봐. 아마 다른 모 든 사람들이 사매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바라볼걸." "너무 아름다워요." "하하하!" 득의 양양한 뇌가명의 웃음과 함께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매약화 의 음성에 조추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녹산을 살그머니 올라갔다. 두어 번 팔을 놀리자 조추수는 녹산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고개를 살며시 내밀어 아래를 보니, 매약화는 두 손으로 모자를 받쳐 들고 이 리저리 살펴보며 기쁨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 습을 뇌가명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사매? 마음에 들어?"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이 귀한 걸 내게 줘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지. 사매에게 주려고 일부러 만들었는걸."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조금 전 뇌가명에게 화를 내던 매약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녀는 모자를 들어 달빛에 비추기도 하고 코앞으로 가져 가 냄새를 맡 기도 했으며, 조심스럽게 머리에 쓰고는 눈동자를 위로 치켜 뜨며 깃 털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한동안 그녀의 하는 양을 바라보던 뇌가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매, 이제 해가 완전히 졌는걸. 황보 사제가 한 시진도 넘게 우리 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추수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녀는 내키지 않는 음성으로 대답했지만, 그 강도가 선물을 받기 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이를 감지한 뇌가명이 재빨리 말했다. "황보 사제는 사매가 모자를 쓴 아름다운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고 했단 말이야. 그리고 조 사제는 나중에라도 만날 수 있잖아?" "어떡하지?" 그녀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뇌가명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삼 대 제자들 중 한 명을 시켜 조 사제를 부르면 되잖아." "아이참!" 매약화는 마지못한 듯 몇 걸음 주춤거리더니 이내 뇌가명을 뒤따라 총총걸음으로 녹산에서 멀어져 갔다. 조추수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매약화의 뒷모 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자를 쓰고 즐거워했을 매약화의 웃음이 아른거렸다. 어두워 자세 히 보지는 못했지만 모자를 쓴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거 라고 생각했다. '약화와 난 이십 년을 같이 자랐다. 그러나 난 사매에겐 담비모자보 다도 못한 존재로구나.' 갑자기 전신의 기운이 쭉 빠졌다. 조추수는 녹산을 내려와 등을 기 대었다. 녹산을 스치는 바람이 갑자기 송곳이 되어 조추수의 마음을 뚫고 지 나갔다. 가슴이 텅 비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조추수는 힘없이 어 깨를 늘어뜨리곤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뇌가명과 약화가 팔짱을 낀 모습과 녹산에서의 대화가 자꾸만 머리 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억지로 생각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검법의 이치를 하나하나 그려 보기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상념이 똘똘 뭉쳐 주체 못 할 탄식으로 흘러나왔을 때, 갑자기 들려 오는 늙수그레한 음성에 조추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밖에 추수가 온 게냐?" 자신도 모르게 냉겸이 묵고 있는 동굴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추수는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사숙조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냉겸은 예의 모습대로 침상에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조추수가 절을 하자 냉겸은 유심히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구나. 무슨 걱정이 있는 게냐?" 일순 조추수는 부끄러움에 전신이 확 달아올랐다. 또한 냉겸에게 자 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고 민을 털어놓기에 사숙조라는 냉겸의 신분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조추수는 냉겸의 질문에 적당히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려 태사전에서 의 일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조추수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냉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 다. "방두교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그의 이십사초 비홍검법(飛鴻劒法) 은 제법 일가를 이룰 만하지." "이번엔 무당과 신검문의 고수들이 대거 돕기로 했으니 흉수가 아무 리 신출귀몰(神出鬼沒)하고 잔인해도 뜻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글쎄..." 냉겸은 지그시 눈을 감고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리 혈겁을 통지할 정도라면 이 정도의 대응은 예상하고 있지 않 을까? 게다가 흉수의 무공은... 산서무림에서 당할 자가 있을지 모르겠 군." "상대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사부님의 무공만 해도 굉장하던데요. 게다가 신검문주는 천하제일검이라 불리지 않습니까?" "흥! 천하제일검이라고?" 냉겸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나이답지 않게 냉 겸의 어조가 몹시 격해지고 빨라졌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그의 검법이 일취월장(日 就月將)하여 명성을 제법 얻기는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서무림에 나 국한될 뿐이야. 중원의 고수들이 위지천을 안중(眼中)에나 두는 줄 아느냐? 신검문 정도의 문파라면 하남성(河南省)에만 해도 열 개가 넘 는단 말이야." 어쩐 일인지 사뭇 흥분한 냉겸의 태도에 조추수는 더 이상 말을 잇 지 못했다. 조추수의 모습에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냉겸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 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 앞 조그마한 공터엔 비쩍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 다. 조추수의 천심장에 수백 년의 생을 마감한 백양나무였다. 냉겸은 그 나무를 어루만지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치 주술이라도 걸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나무를 서너 바퀴 돌던 냉겸이 시선을 땅 에 둔 채 말문을 열었다. "세상일이란 왕왕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지. 자신 의 미래에 아무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늘은 그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단 말이야." "..." 뜬금없는 말에 조추수는 냉겸에게 의아한 눈길을 주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은 냉엄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은 누구 나 자신이 행한 대가를 치러야만 해. 누구도 예외일 수 없지. 이제 그 때가 왔을 뿐이야. 허허허허..." 냉겸은 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허허롭게 웃기 시작하더니 한참이 지 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가을 밤의 세찬 바람이 그의 허연 수염을 이리 저리 흔들었다. 늙어 꼬부라진 그의 등과 앙상한 팔다리를 보노라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저 수염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냉겸의 기묘(奇妙)한 웃음 소리가 잔월(殘月)이 뿜는 어스름한 빛과 어울려 주위를 스산하게 맴돌았다. 문득 휘익, 하고 강한 바람이 일더니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하나 가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 때문이었을까? 냉겸은 맴돌던 걸음을 멈추며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조추수를 지그 시 응시했다. "추수야, 너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완전 히 믿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배신을 당하더라도 절망해서는 더 더욱 안 된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제자가 우둔하여 알지 못하겠습니 다." "앞으로 네게 험난한 일들이 일어날 것 같아 해본 말이다. 그저 내 말을 흘리지 말고 기억해 두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보 다도..." 냉겸은 말끝을 흐리며 의미 심장한 시선으로 조추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목걸이를 잘 간직하고 있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조추수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무슨 목걸이를 말씀하시는지요?" "네가 항상 목에 걸고 있던 그 목걸이 말이다. 옥으로 만든." "아! 이걸 말씀하시는군요." 조추수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꺼내자 냉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지?" "예, 산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벗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사형의 말 씀으론 저의 부모님께서 남긴..." 조추수는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상기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말 꼬리를 흐렸다. 냉겸은 목걸이를 유심히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번 살펴보자꾸나." 조추수가 목걸이를 건네자 냉겸은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목걸이는 조그마한 백옥구슬을 실로 꿰어 만들었는데, 손바닥의 절 반은 됨직한 청색의 옥패(玉佩)가 달려 있었다. 그 옥패는 원래 원형이 었으나 절반이 채 못 되는 부분이 세로로 깨끗하게 잘려 나가고 없었 다. 옥패의 앞면엔 연화(蓮花) 무늬의 테가 둘려져 있었고, 가운데 잘 려 나간 면에 접하여 '정(呈)' 자(字)가 양각되어 있었다. 냉겸은 목걸이를 조추수에게 되넘겨주며 물었다. "넌 옥패에 새겨져 있는 '정' 자의 의미를 아느냐?" 자신의 신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옥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추수는 글을 배워 익히면서부터 '정' 자의 의미를 알아 내려 잠을 설친 날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없이 단지 한 글자만으로 그가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추수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이제껏 수없이 생각해 봤지만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더군요." 냉겸은 다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혹시 그에게서 옥패에 대한 어떤 답이 나올까 기대하며 조추수는 말 없이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일 각의 시간이 지나 냉 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엉뚱한 것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방가장에 가서 흉수를 만나게 된다면... 그 리고 그 흉수가 여인이라면, 그리고 그녀의 손에 너의 목숨이 위태롭 게 된다면 그 옥패를 보이도록 하거라. 어쩌면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 잠시 어리둥절하여 냉겸의 말을 되새기던 조추수는 문득 짐작되는 바가 있어 물었다. "사숙조님께서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혈겁들이 저의 신상내력과 관 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냉겸은 대답 대신 조추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씀해 주십시오. 사숙조님께선 이 옥패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계 시는 게 분명합니다." 분명 냉겸이 어떤 실마리를 잡고 있음을 느낀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 게 흥분되어 언성을 높였다. 냉겸은 조추수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저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 한 말일 뿐이다. 확실하지 않으니 심각 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러나 이미 알고자 하는 욕구가 불같이 인 조추수는 냉겸의 미온적 인 대답에 승복할 수 없었다. "사숙조님께서는 제가 천심장을 수련하면 신상내력을 말씀해 주시겠 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옥패를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어 느 정도 확신하는 바가 있으시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천심장의 공력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으니, 저의 신상내력을 들려 주실 때가 되지 않았 습니까?" 희미한 달빛 아래여서, 흥분으로 상기된 조추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떨리고 격앙된 목소리는 그가 어떤 심경인지 충분히 말 해 주고 있었다. 냉겸은 주름진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조추수를 엄히 꾸짖었다. "신상내력을 알기엔 너의 무공이 아직 부족하다. 때가 되면 일러줄 터이니 조급하게 굴지 말아라. 다만 그때까지 조심하여 몸을 보존하는 것이 네게 중요할 뿐이다." "사숙조님!" "시끄럽다! 내 말을 명심하고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냉겸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떨치며 동굴로 들어갔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6 장 정해(情海)는 헤어나기가 어렵다 제 6 장 정해(情海)는 헤어나기가 어렵다 다음날 아침. 태행검파의 산문엔 방가장의 혈겁을 저지하기 위해 떠나는 일행과 이를 배웅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태사전의 회의 결과 결국 원가량이 직접 일행을 인솔하여 방가장을 돕기로 결정했다. 방가장으로 떠나는 인원은 원가량을 비롯한 그의 제자 갈웅휘, 이무 연, 배간을 위시하여 나신과 왕옥진, 공손월과 뇌가명, 황보웅, 그리고 궁조생과 조추수 등 총 열한 명이었다. 이는 태행검파 고수들의 절반 에 해당되었다. 문파 외의 일에 이만한 인력을 파견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 다. 산문에서 일행을 배웅하는 매천악은 겉으론 웃고 있었으나 언뜻언뜻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때마다 원가량은 뜻 모 를 웃음을 짓곤 했다. 하나 조추수는 이런 두 사람 간의 분위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매약화에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 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그는 매약화에게 다가갈 기회를 엿보았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 옆에 매천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엔 뇌가명이 있었 다. 평소 매천악은 조추수와 매약화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을 나무라곤 했다. 그 이유는 무공에 전념하지 않고 쓸데없이 노닥거린다 는 것이었지만, 은연중에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음 을 조추수는 느끼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의 마음이 갈수록 서로에게 기울어졌으므로 조추수는 이를 개의치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매천악은 뇌가명과 매약화가 연무장을 지나 산문에 내려올 때까지 줄곧 같이 붙어 얘기를 하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조추수는 매천악의 평소와는 다른 이런 행동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는 자신의 생각일 뿐이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는 했지만. 아무튼 조추수는 줄곧 매약화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뇌 가명 따위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가 새치름하게 웃으 며 다가오거나 아니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뇌가명을 따라 공손월에게 다가갔다. 조추수의 시 선 또한 그녀를 따라 공손월이 서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이때 누군가가 조추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느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궁조생이었다. 조추수의 얼굴을 보며 궁조 생이 혀를 찼다. "보아하니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게로군. 얼굴이 거칠구나. 무슨 걱정이 있는 게냐?" "..." 대답없이 고개를 흔들던 조추수의 시선이 이내 매약화에게로 돌려졌 다. 궁조생은 조추수와 매약화를 번갈아 보다가 가볍게 혀를 차며 조추 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난 이십 년간 매약화와 조추수를 곁에서 보 아 온 궁조생인지라 두 사람 사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추수의 모습이 단지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 같은 게 있었겠지, 라고만 짐작할 뿐이 었다. 이제까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면 항상 고민하는 쪽은 조 추수였고, 결국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쪽도 조추수였음을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도 이제까지의 경우와 다름없으리라 생각 한 것이다. 한 순간 매약화가 공손월에게 머리를 숙이고 뇌가명에게 손을 흔들 며 작별을 고하더니 조추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조추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분명 그녀는 조추수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와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조추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 하며 입을 열었다. "약..." 그러나 그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흥! 하며 얼음장 같은 냉소성과 함께 그녀는 그에게 촌음(寸陰)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추수는 자신의 혀와 생각이 일순간 에 얼어붙었다고 느꼈다. 등뒤로 매약화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대사형, 몸조심하세요." 그뿐이었다. 윙, 하니 귓전이 울렸다. 그 이후론 어떤 소리도 조추수의 정신을 일깨우지 못했다. 길을 가 는 내내 끝없는 심연(深淵)으로 추락(墜落)하는 듯한 느낌만이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날 밤 조추수는 술이 주는 망각의 감미로운 힘을 처음으로 알았 다. 깨어날 때면 술이 여지없이 선물하는 고통 따위는 마음속에서 활화 산처럼 분출되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날 눈부신 햇살 속 에서도, 여정을 재촉하는 사숙들의 채근 사이사이로 술병만이 아른거 릴 따름이었다. 궁조생과 왕옥진이 위로하기도 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는 조추수에 게 질렸는지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꾸벅꾸벅 조는 듯이 뒤처져 따라오는 조추수를 보며 왕옥진이 근심 스럽게 말했다. "사형의 짐작 이상으로 약화 사매와 심각한 일이 있었나 봐요. 저렇 게 슬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걱정되기는 궁조생도 마찬가지였다. "쯧쯧, 추수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예민한 구석이 있어.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이번엔 더욱 유별난걸." "사형은 추수에게 친형과 다름이 없으니 잘 구슬려 이유를 알아보세 요." 평소 조추수와 오누이처럼 사이가 좋았던 왕옥진인지라 걱정을 누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궁조생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추수는 하기 싫은 말이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입 밖에 꺼내지 않 아. 정히 견디기 어려우면 스스로 알아서 내게 얘기하겠지. 약화와 추 수가 어울린 지 이십 년이나 되었는데, 한 순간의 갈등이 큰 문제가 되겠어?" 왕옥진은 속으로 원망인지 조소인지 모를 코웃음을 쳤다. '흥! 남녀의 문제라면 여전히 목석이로군요. 그러는 당신과 내가 만 난지 거의 삼십 년이 되었다는 걸 아나요?'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궁조생은 갑자기 말을 재촉하 여 앞서가는 원가량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일행이 선공산의 원가장에 이른 것은 태행산을 출발한 이튿날 밤이 었다. 일행은 십여 일 내에 심원(沁源), 청원(淸源)을 거쳐 석루산(石樓 山)에 위치한 방가장에 도착할 여정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궁조생은 심원으로 가는 도중에 선공산이 머지않아 원가장에 들르자 고 원가량에게 청했는데, 이는 매천악이 시킨 일이었다. 궁조생은 매천악의 의도를 즉시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일 대 제자들 간의 갈등을 제자들에게 내색을 않던 매천악 이었다. 매천악의 이런 명은 문파 내부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가량에게 청을 하는 궁조생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 다. 우려와는 달리 원가량은 궁조생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원가장은 엄밀히 말하면 멀리 선공산이 보이는 작은 마을에 위치하 고 있었다. 장원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곳곳에 축조된 대리석건물과 인공적인 정원 등은 태행산의 사문에 비해 훨씬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었다. 원가장의 식솔들을 제외하면 제자 수가 이십을 넘지 않아 그다지 큰 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묵고 있는 객(客)들의 면면을 살피면, 모두가 산서 지 방에서 한가락씩은 한다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이 원가량의 제자들이 속해 있는 가문의 고수들로, 그들의 세력을 생각하면 그 규 모가 본산의 매천악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결속력을 제외 한다면 매천악을 능가할 수도 있었다. 원가량은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함인지 그들을 일일이 일행에게 소개하였다. 모두가 눈빛이 형형하여 궁조생으로선 만만히 볼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원 사백부께선 사문의 장문 지위를 노리고 세력을 길러 왔다고 하 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닌 듯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의 제자 마다 무슨 방(幇)이니, 문(門)이니, 무슨 보(堡)니 하는 집단의 우두머 리들의 자제들이겠는가? 이들 중에는 그리 떳떳하지 못한 방파의 출신 들도 많다. 원 사백부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항상 내재되어 있던 사숙백들 간의 갈등이 문파 전체의 문제로 확산 될 가능성에 대해 항상 우려해 왔던 궁조생은 내심 밀려오는 근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조추수는 원가량이 누구를 소개하건 말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저 매약화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다가 문득 뇌가명이 눈에 띌라치면 주 먹을 불끈 쥐며 숨을 씩씩거리다가, 결국 술 마실 기회만을 찾을 뿐이 었다. 자연히 원가량이 넓은 정원에서 일행에게 풍성한 저녁을 대접하는 동안 조추수는 음식 대신 술로 배를 채웠으며, 이내 대취하고 말았다. 곁에 있던 왕옥진이 만류하기도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음식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마시더니 결국 자세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추수, 더 이상 마시면 안 돼. 벌써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잖아." 왕옥진이 조추수의 왼손에 들린 술병과 오른손의 술잔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조추수는 빼앗기지 않으려 두 팔을 가슴으로 오므렸다. "사저, 전 취하지 않았어요." 조추수의 혀는 이미 꼬부라져 있었다. '내게서 술을 앗아 가려 하다니.' 지금 조추수에겐 술만이 유일한 위로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술을 만 류하는 왕옥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왕옥진의 눈에 비친 조추수의 모습은 영락없는 주정꾼이었 다. "추수, 술잔을 놓고 숙소로 가자꾸나." 그녀는 다시 힘주어 조추수의 술병과 잔을 당겼다. 그러나 조추수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팔을 계속 오므렸다. 자연히 두 사람은 서로 술병 과 잔을 사이에 두고 때로는 밀리고 때로는 당기면서 옥신각신하게 되 었다. "추수, 술잔을 놓으란 말이야. 취했으니 숙소로 가서 쉬어야 해." "안 돼요. 술은... 들고 가야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한 순간, 두 사람의 힘을 이기지 못한 술병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 고 술이 사방으로 튀며 조추수와 왕옥진의 옷을 적셨다. "어머!" 왕옥진이 놀라 자신의 옷을 터는 사이 조추수는 균형을 잡지 못해 탁자에 엎어지고 말았다. 조추수가 몸을 일으키려 팔을 휘젓자 와르륵, 하며 탁자 위의 접시와 술잔들이 뒤집히고 음식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이에 한자리에 있던 나신과 뇌가명, 황보웅 등이 옷에 음식이 묻지 않도록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났다. "이게 무슨 추태야!" 나신이 나직이 호통했다. 조추수는 취중에서도 나신의 호통을 듣고는 시선을 들어 바라보았 다. 자신이 탁자 위의 음식들을 쏟아 버린 것을 알고는 사과하려 입을 열었다. "사형, 전... 죄송..." 그러나 왕옥진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형, 추수는 많이 취했으니 제가 숙소에 데려가겠어요." "쯧쯧! 평소와는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으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 에 이 모양인 게야?" 왕옥진이 조추수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며 나신은 더는 나서지 않았 다. 조추수는 보통의 성인 남자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태행검 파 내에서도 조추수와 키와 덩치에서 비견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 다. 따라서 자그마한 여인의 몸으로 비틀거리는 조추수를 부축하는 모 습은 보기에 우스꽝스럽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난, 취하지 않았어요.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조추수가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하며 몸을 흔들자 왕옥진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일시 비틀거렸다. 이때 뇌가명이 재빨리 왕옥진에게 다가왔다. "사저, 조 사제는 제가 부축하고 숙소로 데려가겠습니다. 사저께서는 이곳에 계십시오." 왕옥진은 조추수를 뇌가명에게 넘겼다. 비록 오랫동안 동생처럼 여겨 온 조추수라고 하지만 어엿한 성인이 었다. 여인의 몸으로 남자를 부축하여 숙소로 데려감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추수의 왼팔을 어깨 너머로 걸어 넘긴 뇌가명이 나신을 바라보았 다. "조 사제를 눕히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조추수는 크게 취한 터라 자신을 부축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 하였다. 다만 그에 의해 이십여 걸음을 끌려갔는데, 그가 말을 걸어 오 자 비로소 누구인지 인식하게 되었다. "조 사제,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지? 약화 사매 때문인가?" "뇌... 사형?" 조추수는 언뜻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조추수에겐 그것이 비웃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몸 속 깊은 곳에서 불덩이와 같은 노기가 치밀어 올라 팔을 떨쳤다. 이에 뇌가명이 힘주어 조추수를 끌어안으며 나직이 한 자 한 자 힘 주어 말했다. "약화 사매는 아름답지. 그러나 네겐 어울리지 않아." "뇌 사형, 다, 당신이...?" "지난 이십 년간 약화 사매와 같이 지내 온 것만으로도 네겐 과분 해." 조추수가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자 뇌가명이 부축한 팔을 풀며 한걸 음 뒤로 물러났다. "내게 그, 그 말을 하는 이, 이유가 무엇이오?" 치솟는 분노와 술기운에 말이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뇌가명이 비릿 한 웃음을 띠며 빠른 말투로 속삭였다. "원숭이 같은 네가 약화 사매와 같이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공연 히 비웃음만 사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하란 말이다. 그러면 오늘처럼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일이 없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매약화와 어울리던 뇌가명이 죽도록 미운 터였다. 산 문에서 자신에게 냉정히 대한 매약화의 태도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매약화가 팔짱을 꼈던 뇌가명의 팔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 이었다. 더구나 술에 취해 사고가 단순해진 조추수였다. 그러던 차에 조추수 를 비웃는 뇌가명의 말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덩치만큼이나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쩌렁쩌렁 터져 나 왔다. "뇌! 가! 명!" 뇌가명의 목소리는 조추수에게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조추수의 고함은 정원에서 식사를 하던 모든 사람들의 주목 을 끌기에 충분했다. 원가량을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들은 조추수의 커다란 주먹이 뇌가명의 얼굴을 강타하는 장면을 목 격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뇌가명의 몸이 정원 바닥에 나뒹 굴었다. "저, 저런!" "이게 무슨 짓이야?" 중인들의 경악성이 사라지기도 전에 뇌가명의 당황한 목소리가 중인 들의 귀에 들렸다. "조 사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뇌가명은 막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그를 조추수가 다시 덮쳐 갔다. 조추수가 뇌가명의 배를 노리 고 발길질을 하자, 뇌가명은 두 팔로 배를 감쌌다. 발길질의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두어 바퀴 구른 후 신형을 일으킨 뇌가명이 노하여 소리 쳤다. "네가 사형인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이즈음 황급히 달려온 원가량과 궁조생 등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 었다. 다시 뇌가명에게 달려드는 조추수의 팔을 궁조생이 붙잡으며 호통했 다. "추수,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조추수의 입에선 대답 대신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괴성 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궁조생의 꾸짖음도 들리지 않는지 그의 눈은 뇌가명을 죽일 듯이 노 려보고 있었다. "정신차리지 못하겠느냐!" 철-썩! 궁조생이 조추수의 뺨을 모질게 쳤다. 조추수의 뺨에 드리워진 빨간 손자국이 효과를 주었기 때문일까? 조추수의 거친 행동이 멈추었다. 조추수는 연신 숨을 씩씩거리며 이 를 악물었다. 그의 큰 덩치가 부들부들 떨렸고, 호랑이 같은 눈은 여전 히 뇌가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뇌가명은 몹시 흥분한 듯 얼굴이 상기되어 소리쳤다. "술에 취한 널 부축한 사형에게 주먹질이라니... 이럴 수가 있느냐?" 이때 원가량이 뇌가명과 조추수 사이로 나서며 노성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일이냐?" 원가량의 위엄 덕분이었는지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던 두 사람의 눈 빛이 흩어지며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원가량이 조추수에게 엄히 물었다. "추수, 왜 사형을 주먹으로 쳤느냐?" "저, 전..." 평소 존장을 어렵게 생각하던 추수였다. 비록 취중이라 할지라도 원가량이 나서자 당황하여 일시 대답할 바 를 몰랐다. 취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데다가 말까지 흐리자 궁조생이 보기에도 딱했다. 원가량은 이런 조추수의 모습에 한심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선 시선을 뇌가명에게 돌렸다. "가명, 말해 보아라. 추수가 무엇 때문에 너를 때렸더냐?" 뇌가명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지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 답했다. "조금 전 조 사제는 술에 취해 탁자 위의 음식들을 모두 엎질러 버 렸지요. 전 조 사제에게 술에 취해 이런 추태를 보이면 어떡하느냐고 말했는데, 갑자기..." 코피가 흘러 입술을 적시자 뇌가명은 옷소매로 코를 훔쳤다. 이 모 습이 원가량을 더욱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원가량은 손가락을 들어 조추수를 가리키며 노성을 질렀다. "이놈! 사형의 꾸짖음을 귀담아들어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 고 오히려 사형에게 주먹질을 한단 말이냐? 네가 사문의 규율을 우습 게 아는 모양이로구나!" 입이 움직일 때마다 긴 수염이 덩달아 사방으로 흔들거려 화가 난 그의 모습을 더욱 부추기는 듯했다. 궁조생이 황급히 조추수를 부축하던 손을 놓고 읍을 하며 사정했다. "사백부님, 취중에 저지른 실수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 다." "시끄럽다! 사문의 존장이 있는 곳에서 이토록 대취한 것만으로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 게다가 사형을 때렸는데 이를 묵과한다면 사문의 위엄이 어디 남아나겠느냐?" 궁조생이 부축한 팔을 풀자 조추수는 일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 거렸다. 이에 조추수의 몸이 크게 한 번 흔들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 았다. 원가량이 이를 가리키며 냉소했다. "저놈 하는 양을 보아라! 존장이 꾸짖는데도 바닥에 퍼질러 앉는 꼴 이라니..." 이때 배간이 나서서 원가량을 만류했다. "사형, 추수는 평소 언행이 바른 아이였습니다. 취중이라고 하나 실 수를 저지른 데엔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방가장의 일 에 전념해야 하니 일단은 접어 두시죠. 이후 추수의 행동을 봐서 사문 으로 돌아가 치죄 여부를 장문에게 여쭙기로 하지요." 배간이 장문을 거론하여 만류하자 원가량은 냉소를 거듭하며 정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원가량이 물러가고 궁조생이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철썩!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공손월의 노성이 들렸다. "시끄럽다. 사형이 되어 사제를 헐뜯는 소리만 하다니, 내가 너를 그 렇게 가르쳤더냐? 분명 너의 언행에 잘못이 있었기에 추수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겠느냐? 에이, 못난 놈 같으니!" 손으로 뺨을 감싸며 난감해 하는 뇌가명을 노려보던 공손월은 이내 짜증스런 일성(一聲)과 함께 정원을 나가 버렸다. 저녁 만찬은 엉망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배간도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기 싫은 모양이었다. "조생아, 넌 이곳을 정돈하고 추수를 보살피도록 하여라. 취한 상태 에서 무슨 말인들 먹혀들겠느냐? 술이 깨고 나서 꾸짖을 일이다." 배간이 떠나자 이 대 제자들도 제각기 자리를 떴다. 뇌가명은 멀어져 가는 배간의 뒷모습을 보며,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조추수와 그를 부축하는 궁조생을 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별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오다가 눈동자를 흐르는 물기에 휩싸여 사방으로 번지곤 했다. 조추수는 소매로 눈을 닦았다. 술에서 깨기 위해 뒤집어쓴 연못의 물이 머리에서 흘러내려 닦는 듯 이 보였으나, 실은 눈물을 닦기 위함이었다. 궁조생이 조추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추수야, 어제와 오늘 사이 네게 근심이 있는 줄은 알았다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구나. 내가 네게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다." "사형,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순간 뇌 사형이 죽 이고 싶도록 미웠을 뿐입니다." 슬픔이 설움으로 변하며 조추수는 나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뇌가명이 자신에게 무어라 말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에 의해 매약화의 얼굴이 떠올랐고, 매약화의 곁에서 득의의 웃음을 짓는 뇌가명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으며, 때문에 자신 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였다는 것만 느끼고 있을 따름이 었다. 남이 보는 앞에서 우는 조추수의 모습을 처음 보는 궁조생이었다. 그는 조추수의 번민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깨닫고는 크 게 놀랐다. "대체 무슨 일로 네가 울기까지 하느냐? 너의 행동을 흩뜨릴 만큼 무거운 짐을 안겨 주는 고민이 무엇이냐?" "사형, 전..." 조추수는 더듬더듬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산문에서 매약화와 뇌가명이 다정스럽게 올라오던 모습 하며 녹산에 서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 산을 떠나올 때 한겨울의 삭풍(朔風)처럼 차갑기만 하던 매약화의 태도, 매약화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라 가슴을 옥죄는 번민 등을 모두 털어놓았다. "약화와 난 이십 년을 함께 자랐습니다. 밥을 먹을 때나 무공을 익 힐 때, 그리고 꿈속에서도 그녀를 그리곤 했지요. 그리고 약화도 내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뇌 사형이 우리 둘 사이에 끼여들었어요. 그는 내게서 약화를 뺏으려 하는데 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조추수의 얘기를 들을수록 궁조생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져 갔다. 남 녀간의 문제라면 이제껏 성혼(成婚)하지 않은 궁조생도 조추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조추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제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남녀간에 주고받은 마음이 그리 쉽게 변할 리가 있겠느 냐? 너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는데, 약화의 마음이 변했다고 믿는 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일을 끝내고 사문으로 돌아가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되는 구나. 그보다도 오늘 뇌 사제와의 일이 더욱 큰 문제다. 뇌 사제가 네 게 어떤 말을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결과적으로 너 의 큰 잘못이 되어 버렸다. 어쩌자고 그런 실수를 했단 말이냐?" "..." 조추수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말이 없었다. 고개를 떨군 조추수를 바라보던 궁조생은 길게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들어가 자거라.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한다." "사형 먼저 들어가 쉬십시오. 전 술이 좀더 깨도록 찬바람을 쐬고 들어가겠습니다." 궁조생은 조추수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린 후 숙소로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들었다. 흐드러진 빛을 발하는 달덩이가 왕옥진의 얼굴처럼 아 른거렸다. 갑자기 오 년 전 왕옥진과 혼담이 오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나와 혼인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지. 어쩌 면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녀가 나를 사 랑한다는 확신이 서질 않았어. 그런데 나는 왜 그 혼사를 거부했을까? 내가 혼담을 수락만 했다면 지금쯤 왕 사매와 난 부부가 되었을 터인 데...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달빛에 어린 왕옥진의 얼굴이 일렁이더니, 갸름하고 새치름 한 한 여인의 얼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아직도 그녀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 궁조생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멀어져 가는 궁조생의 발걸음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조추수는 연 못에 비친,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 그림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달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술기운이 제대로 가 시지 않았는지, 흐늘거리는 달 그림자를 보노라니 어지러움에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들었다. 초롱초롱한 별들이 제각각 아름다움을 뽐내며 달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조추수의 어깨를 짚었다. 흠칫 놀란 조추수가 고개를 돌렸다. 갈웅휘가 등뒤에 서 있었다. "갈 사형...?" 조추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평소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갈웅휘인지라 술기운이 가시며 온몸이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갈웅휘가 이마를 찌푸리더니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술 냄새! 정말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로군. 하하하! 널 만나 러 왔다가 본의 아니게 네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미안하구나." "그, 그런..." 조추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던 자신의 고민과 마음을 다른 이도 아닌 갈 웅휘가 알게 되다니... 이제 그가 마음먹고 다른 동문들에게 이를 알린 다면 자신은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이런 조추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갈웅휘가 말했다. "약화 사매와 네가 서로 정이 깊음은 동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 이야. 누군가가 너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조추수는 얼굴을 붉힌 채 대답하지 못했다. 갈웅휘의 말이 계속되었 다.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이제껏 개인 감정 에 치우쳐 누구 한 사람만을 미워한 적은 없어. 그리고 동문들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는 알고 있는 사람이지. 설사 내가 뇌 사제보 다 조 사제를 더욱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사문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앞설 수 있겠나?" 조추수는 갈웅휘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갈웅휘가 사문의 도리를 운운하자 자신이 뇌가명을 때린 일을 지칭하여 꾸짖으 려는 건가, 라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음에 이어진 갈웅휘의 말은 조추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 사제와 약화 사매의 정분이 두터운데 뇌 사제가 끼여들었으니, 이는 사형제간의 의를 저버린 셈이야. 비록 내가 너를 좋아하지는 않 지만 옳지 못한 일을 그냥 방관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갈웅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조추수는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그의 말뜻을 알고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의 말 한마디는 조추수의 고민에 한 줄기 탈출구를 주는 느낌이었다. 갈웅휘의 말이 계속되었다. "내가 보기엔 뇌가명이 약화 사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는 모양이다만, 너와 사매 사이엔 이십 년간 쌓아 온 정이 있지 않 느냐? 이번 일이 끝난 후 사문에 돌아가 사매에게 너의 감정을 숨김없 이 토로하려무나. 그러면 사매도 마음이 움직이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필코 너를 돕도록 하마. 본 파의 사형제간의 질서를 바 로잡기 위해서라도 네가 약화 사매와 연분을 맺기를 바란다." '사매에게 직접 얘기하라고? 그러면 그녀의 마음이 정말 내게로 돌 아설까?'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할 자신이 없는 일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기 때문일까? 조추수는 갈웅휘가 더없이 고맙게 생각되었 다. "전... 사형의 고마우신 말씀에 어떻게 사의를 표시해야 할지..." 조추수가 감격에 겨운 표정을 하자 갈웅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 드렸다. "오늘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라. 취중에 발생한 일이니, 내일 한차례 꾸중을 듣고 나면 그만일 뿐이다. 편히 쉬려무나." 조추수는 멀어져 가는 갈웅휘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7 장 용호(龍虎)가 상봉(相逢)하면 제7장 용호(龍虎)가 상봉(相逢)하면 다음날, 원가량과 배간은 조추수를 한바탕 훈계하고서야 일행을 출 발시켰다. 조추수는 뇌가명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는 시종일관 냉랭한 표정이었다. 동문들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진 조추수는 풀이 죽어 일행의 꽁무 니에 처져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가끔씩 갈웅휘가 눈을 찡긋거리며 힘을 내라는 손짓을 하므로 위로가 되었고, 그가 더욱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졌다. 원가장을 출발한 지 삼 일째 되던 날 오후, 일행은 심원(沁源)에 도 착하여 하루를 묵었다. 일행이 식사 후 숙소에 머물며 여독을 푸는 동 안, 조추수는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 거리로 나섰다. 무작정 거닐던 조추수가 찾아든 곳은 수운(秀雲)이라는 이름의 비교 적 작은 주점(酒店)이었다. 주점에 들어선 조추수는 무의식적으로 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열 개의 낡은 탁자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밤이 이슥하여 술을 찾는 이가 많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 고 있는 이는 구석진 탁자에 한 명뿐이었다. 그 사람은 조추수가 들어서자 눈을 돌려 힐끔 쳐다보았는데, 일견 (一見)하여 이십 세가 갓 넘은 듯했다. 짙고 긴 눈썹과 꽉 다물어진 붉 은 입술이 흰색의 영웅건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 잘생긴 용모가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조추수는 입구 쪽의 탁자에 앉아 늙은 주인이 가져 온 분주(汾酒)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기 시작했다. 일 각이 못 되어 조추수가 술을 반 병 가량 비웠을 때였다. 십사오 세 가량의 소년과 일곱이 채 안 된 어린 사내아이를 재촉하 며 주점 안으로 들어오는 중년인이 있었다. 사십 줄에 갓 들어선 듯한 중년인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고 간간이 혈흔이 비쳤다. 두 아이는 원래는 고급스러웠을 것으로 보이는 지저분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소년은 연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작은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훌쩍거렸다. 아이의 우는 소리에 조추수와 구석진 곳에 있던 백의청년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그래, 그래, 완아(完兒)... 여기서 잠시 쉬면서 요기를 하자꾸나. 그 만 울거라." 아이를 구슬리는 중년인의 왼손엔 이가 군데군데 빠진 장검이 들려 있었다. 심한 격전의 흔적이 분명했다. 늙은 주인이 이들의 남루하고 초췌한 행색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 나 중년인의 손에 들린 검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눈에서 번득이는 혁 혁한 안광 때문인지 감히 박대하지 못하고 맞이했다. 중년인은 세 그릇의 국수를 시키고는 맞은편에 앉은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학아(學兒), 힘들지? 이 아비 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구나." "저에 대한 염려는 마십시오, 아버님. 몸이 힘든 것보다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 놈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한스러울 뿐입니다." 대답하는 소년의 두 눈엔 원독의 광망이 이글거렸다. 실로 소년답지 않은 살기요, 눈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왼손에도 검이 들려 있 었다. 아들의 나이답지 않은 모습이 자못 애처로웠던지 중년인이 깊은 탄 식을 흘렸다. 백의청년은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유심히 쳐다보았다. 반면, 조추수는 이내 관심을 거두고 다시 매약화에 대한 번민에 빠 져 들며 술을 들이켰다. 조추수가 나머지 반 병의 술마저 다 비웠을 때였다. "아! 네놈들이...?" 주인이 막 내온 국수에 젓가락질을 하던 중년인이 경악성을 터뜨리 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이어 소년이 옆의 동생을 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문득, 아이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의외의 사태에 조추수는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입구엔 매부리코 가 유난히 눈에 띄는 초로의 인물이 발을 들여놓으며 득의 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유권(劉權),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곳 산서 땅에 선 우리의 손을 피해 달아날 수 없다.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결 국 죽게 될 뿐이야." "으으, 동철비!" 유권이라 불린 중년인이 이를 갈며 검을 치켜 들었다. 그의 부릅떠 진 두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이때, 두려움에 울고 있는 어린 동생을 뒤로 물린 소년이 벼락같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소리쳤다. "이 원수, 죽어랏!" 소년은 패검을 휘둘러 동철비라 불린 사내를 공격했다. "학아, 안 된다!" 유권이 깜짝 놀라며 몸을 날려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소년은 유권에 비해 이미 두 걸음을 앞서 있었는데, 그가 반 걸음을 더 나아 가기도 전에 유권이 뒷덜미를 움켜쥔 것이다. 이 한 수의 몸놀림은 보 기 드문 고수의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본 조추수는 물론이 고 구석의 백의청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의 경공은 실로 대단하구나. 진퇴(進退)가 번개같으니, 이 한 수만 해도 감히 내가 흉내내기 어렵겠다.' 조추수는 내심 감탄하며 유권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곧은 코 와 커다란 눈에 갸름한 얼굴 윤곽은 강인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의 형형한 눈빛과 일자로 꽉 다물어진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장부 의 기상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가 나서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유권이 나직이 꾸짖자 소년이 동철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너의 실력으론 괜히 저자에게 목숨을 내어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 는다. 내가 저자를 상대하마. 그리고..." 유권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소년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 다. 이때였다. "흥, 유권! 네 아들놈에게 도망갈 궁리를 가르칠 거라면 그만두시지.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니까." 빈정거림과 더불어 다시 몇 사람이 주점에 나타났다. 이들을 바라본 유권의 눈에 절망감이 떠올랐다. 사실 그는 동철비를 공격하는 동안 두 아들을 주점 밖으로 피신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유권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모종의 결심이 선 듯 그는 가 슴을 펴며 한걸음 나섰다. "좋아, 이 유 모를 상대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고수가 나섰다니, 실 로 영광이로군, 영광이야. 하하하!" 유권의 웃음 소리가 공허하게 주점을 울렸다. "헤헤헤... 물론 영광이지, 영광이야." "그러니 목을 길게 늘이고 순순히 칼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어? 히 히히..." 동철비의 좌측에 있던 두 명의 인물이 나서며 서로 주고받듯이 말했 다. 그들은 묘하게도 갸름한 얼굴에 염소수염, 그리고 왼쪽 눈 밑의 콩 알만한 검은 점까지 똑같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한 명은 붉은 장삼을, 다른 하나는 푸른 장삼을 입고 있어 확연히 구분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얄궂게 웃으며 푸른 장삼을 입은 자가 먼저, 그리고 붉은 옷 을 입은 자가 나중에 말을 계속했다. "유권, 헤헤헤! 어서 목을 내놓아라. 아프지 않게 잘라 주마." "네 두 아들놈도, 히히히, 저승으로 동행시켜 주지." 유권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아, 무서워! 흑흑흑..." 소년이 아이를 꽉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들의 모습에 조추수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 두 쌍둥이 형제의 말은 저속하고도 잔인하구나. 어떤 원한이 있 기에 어린아이마저 죽이겠다는 건가.' 조추수는 동철비 곁에서 히히거리고 있는 쌍둥이 형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조추수는 눈앞의 유권이나 쌍둥이 형제 등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동철비는 사숙들 간에도 간간이 거론되던 인물이라 잠시 눈여겨 봤을 뿐이었다. 동철비 뒤에는 쌍둥이 형제 외에 세 사람이 더 있었는 데, 그들이 누구인지도 역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와 안광 으로 미루어 만만치 않은 고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철비는 산서무림에서는 스무 손가락 안에 능히 들 만한 고수였다. 그는 한 쌍의 건곤권(乾坤圈)으로 많은 고수들을 물리쳐 무적건곤(無 敵乾坤)이라는 외호를 얻고 있었다. 쌍둥이 형제는 한 쌍의 호수구(護手鉤)로 이름을 날린 오부(伍孚), 오유(伍裕) 형제였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그리 특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상호의 약점을 적절히 보완한 합격술은 뛰어난 고수들도 당해 내기 어려웠다. 나머지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뚱뚱했고, 한 사람은 키가 작고 호리호리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중키에 애꾸눈이었다. 이들은 각각 계덕유(契德瑜), 도궁(陶宮), 만보각(萬寶覺)이라고 하는데, 모두 가 산서무림에서 나름대로 협명을 얻던 자들이었다. 문득 유권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동철비, 듣기와는 달리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여럿의 힘을 빌려 나 를 죽이려 하다니. 더구나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아이까지 죽이려 한단 말이냐?" 동철비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너 같은 사마외도의 무리를 척결하는 데에 한 명이면 어떻고, 다수 면 어떠한가?" 오씨 형제가 동철비의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넌 동 대협의 동생을 죽였으니 더욱 죽어 마땅하다."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사악한 놈의 씨는 사악하기 마련이니 남겨 두어선 더욱 안 되지." "하하하, 날더러 사마외도라고? 가증스럽구나, 동철비. 내 이제껏 악 행을 일삼는 자를 죽인 적은 있으되, 선량한 이를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나를 사마외도라고? 가소롭구나, 하하하하... 정말 가소로 워!" 유권의 웃음 속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키 작은 도궁이 나서며 일갈(一喝)했다. "닥쳐랏! 너 같은 마두의 말을 누가 믿는다더냐? 동 대협,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소. 어서 저놈의 명줄을 끊어 산서무림의 화근을 없애 버리도록 합시다." 동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권에게 다가가자, 오씨 형제 등 다섯 명은 그 주위의 탁자들을 발로 차서 구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삽 시간에 유권과 동철비 사이에 일 장여의 공간이 생겼다. 오씨 형제 등 다섯 명의 고수는 동철비를 중심으로 학 날개 모양으로 유권을 마주하 여 섰다. 문득, 계덕유가 공간이 협소하다고 생각했는지 입구의 탁자에 앉아 있는 조추수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여기에 있으면 위험하니 밖으로 나가 주시겠소?" "..." 그러나 묵묵부답, 조추수가 여전히 술잔을 만지작거리자 계덕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이 조추수의 아래위를 훑었다. "그대는 태행검파의 제자로군. 난 원가량 대협과는 일면식이 있지. 그대는 원 대협과 어찌 되는가?" "..." 조추수는 여전히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일단 여러 고수들이 한 사람을 공격하려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 지 않았던 데다가, 몹시 상심한 상태라 다른 이에게 말을 건네고픈 생 각이 전혀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추수가 대꾸를 않자 자존심이 몹시 상한 모양이었다. 계덕유의 얼 굴이 붉어지며 대뜸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흥! 네놈이..." 그러나 동철비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계 형, 그는 상관 말고 일단 유가 놈부터 처리합시다." 이에 계덕유는 조추수를 야멸차게 노려보고는 등을 돌려 유권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미 독한 분주 한 병을 비워 제법 취기가 오른 조추수는 남의 싸움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 으므로 거추장스럽게 생각되었을 뿐이었다. 하나, 구태여 그들에게 시 비를 걸고 싶지는 않은지라 그저 싸움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장내 를 주시했다. 잠시 유권을 노려보던 동철비가 나직한 기합을 내지르며 건곤권을 휘둘렀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한 쌍의 건곤권이 유권의 가 슴과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에 유권은 검을 일직선으로 뻗어 동 철비의 목을 찔렀다. 건곤권은 단병(短兵)이다. 같이 서로를 찌르면 검을 쥔 유권이 유리 한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동철비가 노리는 건 유권의 몸이 아니었다. 그의 건곤권엔 날카롭게 휘어진 톱니가 열 개나 박혀 있어 검을 낚아채는 효용이 뛰 어났다. 그는 한 쌍의 건곤권을 교차하며 유권의 검을 얽으려 했다. "흥!" 동철비가 이런 수를 쓸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유권은 우측으로 신속히 이동하며 연속 삼 검을 내질렀다. 워낙 신속한 공격에 동철비는 감히 검을 낚아챌 엄두가 나지 않았 다. 그저 건곤권을 휘둘러 검봉(劍峰)을 봉쇄하기에 급급했다. 건곤권을 쓰는 동철비는 상대에게 바짝 접근해야만 단병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권의 신법은 표홀(飄忽)하여 동철비보다 훨씬 뛰어났다. 동 철비는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없었고, 전세는 단숨에 유권에게 기울 었다. 이들의 결투를 보면서 조추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 유권이라는 사람의 검법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구나. 동철비는 무공이 지극히 고강하여 원 사숙께서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라고 들었다. 반면에 유권이라는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이 없다. 그런데도 동철비는 유권에게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도 해보 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강호엔 기인이 구름처럼 많다고 하더니 과연 그러하구나.' 유권과 동철비가 격돌한 지 삼십여 초가 지났다. 그 동안 동철비는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수비에 급급하였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동철비가 상처를 입고 패할 게 분명했다. 이에 오씨 형제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갑작스레 탁자 뒤에 몸 을 숨기고 있던 소년에게 덮쳐 들어갔다. "요 꼬마 놈들, 어서 이리 오너라!" "이 아저씨가 네 어미 곁으로 보내 주마." 오씨 형제가 유권의 아들에게 다가간 것은 유권의 이목을 흐리기 위 한 수작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소리쳤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다. "검아, 완아!" 유권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동철비는 제쳐 두고 몸을 돌려 다급 하게 소리쳤다. 당연히 유권의 자세에 허점이 생겼다. 비록 승기를 잃고 있었다고 하나 동철비는 이름난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유권이 몸을 돌린 순간, 동철비는 한 쌍의 건곤권으로 유권의 등을 후려쳤다. 유권이 아차, 하며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유권은 다급히 주저앉으며 몸을 앞으로 굴렸다. 하나 동철비의 건곤 권은 이미 유권의 오른쪽 어깨를 깊숙이 찢으며 지나간 후였다.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타고 피가 주르 륵 흐르더니 이내 검을 떨어뜨렸다. 유권은 검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 전 발등으로 검신을 걷어차 올리며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한편, 유권의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오씨 형제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 었지만, 정작 그들은 유권의 아들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년의 어깨를 잡아 가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기운을 담 은 암기가 오부, 오유의 미간을 노리며 날아든 것이다. 오씨 형제는 깜짝 놀라 다급히 신형을 멈추며 호수구를 휘둘러 암기 를 쳐냈다. 호수구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암기는 대나무젓가락 한 쌍이었다. "흥!" 구석진 탁자에서 백의청년이 냉소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오부와 오유가 그를 노려보며 동시에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이기에 남의 일에 간섭을 하느냐?" 청년은 대답 대신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고 있는 소 년에게 다가갔다. "고수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다니. 소형제, 자네의 담력이 대단하군." "생면부지의 저를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년이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한 쌍의 눈은 여전히 오씨 형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약자를 괴롭히는 소인배(小人輩)를 혼내 주는 것은 무공을 익힌 자 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청년은 고개를 돌려 오씨 형제를 노려보았 다. 그의 안색은 어느새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흥! 연약한 아이를 공격하는 짓은 녹림의 무리들도 경멸하고 있다. 소위 정파라 자처하는 네놈들이 이따위 짓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 냐?" 추상같이 호통하는 청년에겐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어려 있었다. 게다가 청년의 말이 옳은지라 오씨 형제는 일시 얼굴을 붉혔다. 그들 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는 이내 노기를 보태어 더욱 붉어졌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감히 어르신네를 훈계하려 하다 니...!" "우린 지금 악인을 제거하여 무림의 정의를 실현하는 중이시다. 공 연히 끼여들어 화를 자초하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아하하하하!" 청년이 대소를 터뜨리더니 오씨 형제를 손가락질하며 빈정거렸다. "우습구나, 정말 우스워. 소인배들이 감히 정의를 운운하다니... 너희 야말로 강호무림의 쓰레기들이다." "닥쳐랏!" "죽일놈!"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한 오씨 형제가 호수구를 휘두르며 청년을 공 격했다. 붉은 옷의 오부는 청년의 목을 베어 버릴 듯이 호수구를 휘둘렀고, 푸른 옷의 오유는 청년의 무릎을 후려쳤다. 그들의 공격은 동시에 이 루어져 청년은 두 사람의 공격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처지가 되었 다. 그러나 백의청년은 여전히 경멸의 눈빛을 하며 여유있는 웃음을 띠 고 있었다. 그는 한 쌍의 호수구가 몸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리더니, 번개같이 뛰어올라 오유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엔 어느새 한 자루의 유엽도(柳葉刀)가 들려 있었는데, 오부의 호수구를 강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쨍-그랑! "억!" 귀를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오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왼손으로 호수구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움켜잡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잠시의 틈도 없이 청년은 원앙퇴(鴛鴦腿)의 수법으로 오유를 걷어찼 다. 오유는 다급한 김에 두 팔뚝으로 청년의 발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 다. "아!" 백의청년이 한 번의 공격에 오씨 형제를 곤경에 빠뜨릴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한 터라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추수 또한 청년의 놀라운 신위에 탄성을 질렀다. 사실 조추수는 진작에 오씨 형제들의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다만 동철비가 사문의 수장들과 교분이 두터워 나서기가 꺼려질 뿐이 었다. 그러던 차에 백의청년이 소년을 도와 오씨 형제를 물리치자 속 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유권은 청년의 놀라운 무공을 확인하자 여유를 찾고 다시 동철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동철비, 정히 네 아우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나 하나만으로 족할 터인데, 무공을 전혀 모르는 나의 처와 동생을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고도 모자라 이젠 나의 두 어린 아들들까지 죽이려 하다니, 그러 고도 네가 정파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느냐?" 이에 동철비가 냉소했다. "흥! 평소 너의 손에 죽은 정파의 협사들이 한둘이었느냐? 너의 사 악한 피를 이어받은 네 아들을 살려 둔다면 훗날 화가 될 것이 뻔한 데, 어찌 살려 두겠느냐?" 이때 청년의 보호로 여유를 찾은 소년이 악에 받친 목소리를 토했 다. "아버님 손에 죽은 이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겉으론 의 협인(義俠人)을 가장하면서도 몰래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는 자들을 그 냥 모른 체하란 말이냐? 당신의 아우만 해도..." "닥쳐랏!" 동철비가 다급히 호통하여 소년의 말을 끊었다. 동철비가 다시 유권을 공격하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계덕유와 도궁, 만보각 등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만보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오씨 형제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을 도와 청년을 상대할 모양이었다. 어깨를 다쳐 왼손에 검을 쥔 유권은 검법이 서툴고 움직임이 민첩하 지 못하여, 그의 적수가 되지 않던 동철비에게 오히려 밀리며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동철비의 건곤권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옷을 스치 며 살갗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결이 이십 초를 넘을 때에 즈음하여, 계덕유가 허리에 감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쇠사슬은 길이가 일 장이 조금 넘었다. 그 끝에는 주먹만한 철구(鐵球)에 쇠바늘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은백색의 빛을 발하는 낭아추(狼牙錘)였다. 계덕유는 낭아추의 철구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유권의 움직임을 지그 시 응시했다. 반면, 도궁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유권을 노려보기만 했다. 조추수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유권과 동철비의 싸움을 주시했다. 어깨에 선혈이 낭자한 유권은 동철비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제풀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동철비는 정파의 유명한 협객이라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면 저 유권이라는 사람은 무슨 악행을 범한 흉인일까? 그리고 동 대협 을 따르는 무리들이라면 정파의 인물이 분명할 텐데, 유권의 아들을 죽이려는 행위는 결코 옳지 못하다. 지금 내가 저 아이들을 돕기 위해 검을 빼어 들면 결국 동 대협과 겨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부님 의 친우를 공격할 수는 없잖은가?' 조추수가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받아랏!" 계덕유가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내지르며 낭아추를 떨쳤다. 쫘르르르- 철구가 섬전같이 유권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며 요란한 쇠사슬 소 리가 뒤따랐다. 때마침 유권은 검으로 한 쌍의 건곤권을 밀치고 있던 중이라 검을 들어 낭아추를 쳐내지 못하고 허리를 비틀며 상체를 숙여 피하였다. 간발의 차이로 낭아추가 유권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윽!" 유권은 나직한 비명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연이어 쩽그렁,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유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등엔 짤막한 단검의 손잡이가 보였다. 가까스로 고개를 치켜 든 유권이 싸늘히 웃고 있는 도궁을 노려보았 다. 단검의 주인은 바로 도궁이었던 것이다. 계덕유가 주점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지르며 낭아추를 던진 건 유권 의 이목을 낭아추에 집중시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도궁은 비검술(飛劍術)에 아주 능했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는 낭아추의 뒤를 따라 소리없이 단검을 던졌던 것이다. 경황이 없었던 유권은 낭아추의 공격은 피했으되 뒤따르는 단검은 피하지 못했으니, 그들의 합격술은 훌륭히 성공한 셈이었다. "아버님!" 백의청년 뒤에 있던 소년이 자지러질 듯이 놀라며 유권에게 달려갔 다. 하나, "크-흑!" 소년이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동철비의 건곤권이 유권의 목을 찔렀 다. 목에 박힌 건곤권을 움켜쥔 손가락을 비집고 선혈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동철비가 징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발로 유권의 가슴을 걷어차자, 유권의 신형은 힘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소년이 도착한 것은 유권이 뒤로 쓰러진 직후였다. "아버님!" 소년이 유권의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유권은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유권의 목에서 피가 샘솟듯 쏟아지자 소년이 손 으로 틀어막으며 울부짖었다. "아버님, 일어나세요! 아버니-임!" 소년의 울부짖음을 듣는 순간 조추수는 가슴이 진탕되어 코끝이 찡 하게 울렸다. 소년은 고아가 되었다. 자신도 어려서부터 부모의 얼굴을 모르는 고아로 자라나지 않았던 가? 문득, 소년의 슬픔이 마치 자기 것인 양 느껴졌다. 조추수는 무의식 중에 동철비를 증오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유권의 시신을 잠시 노려보던 동철비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고죽검(孤竹劍) 유권이란 이름이 제법 대남강북을 울렸다 만, 결국 나의 손에 죽었구나. 그러게 하북(河北)의 고향에 틀어박혀 있을 일이지, 어찌하여 이곳 산서무림에 나타나 나의 아우를 죽였더란 말이냐? 아하하하!" 몹시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는 한참 동안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였다. "이 원수, 죽어랏!" 유권의 시신을 흔들며 울부짖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 검을 들더니, 웃고 있는 동철비를 찔러 갔다. 그러나 그 일검은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소년의 검은 건곤권에 부딪히는 순간 주점 구석으로 날아가고 말았 다. 동철비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 "흐흐흐, 이놈아. 그러잖아도 네 아비 곁으로 보내 줄 생각이었으니 조급하게 굴 것 없다. 계 형, 오씨 형제와 만 형을 도와 저 청년을 물 리치도록 하시오. 시간 끌 것 없이 아이 녀석들을 죽이고 갑시다." 계덕유가 백의청년을 향해 가자 동철비는 느닷없이 소년을 걷어차 버렸다. 아! 하는 비명과 함께 소년은 유권의 시신 위로 쓰러졌다. 소년의 입에서 한 모금의 선혈이 튀어나왔다. 비교적 여유있게 상대를 몰아붙이던 백의청년은 소년이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공세의 강도를 높여 세 사 람을 공격했지만, 계덕유가 가세하여 낭아추를 날리자 우세를 점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동철비와 도궁마저 가세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 이 위험하게 될 형편이었다. 동철비는 기어이 소년을 죽이고야 말 심산인지 쓰러져 신음하는 소 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입가의 피를 닦고는 고개를 들어 동철비를 노려보았다. 선혈 이 묻어 섬뜩한 느낌을 주는 건곤권을 보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에 더욱 살심이 인 동철비가 소년을 후려치려 할 때였다. "손을 멈추시오!" 조추수가 버럭 고함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생각되던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동철 비에게 다가가 건곤권을 치켜 든 오른손을 걷어차고 있었다. 조추수의 다리에 실린 힘이 막강함을 느낀 동철비는 급히 오른손을 회수하며 왼손의 건곤권으로 다리를 후려쳤다. 이에 조추수는 다리를 움츠리며 검을 뽑아 건곤권을 받아 쳤다. 쩽그렁! 검과 건곤권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동철비는 팔에 은은히 전달되는 통증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 러났다. 조추수는 소년의 앞을 막아 서서 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동철비를 응 시했다. 그의 두 눈은 은근히 분노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동철비는 자신을 방해한 자가 조추수임을 알아보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넌 태행검파의 제자가 분명한데, 어째서 이들을 돕는 것인가?" "당신과 유권이라는 사람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정의를 중시하는 자라면 노약자는 공격하지 않는 법이오. 당신 은 정파의 협사로서 오늘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오." 이미 동철비에게 혐오감을 느낀 조추수의 어투는 거칠기 그지없었 다. 조추수의 무례함을 느꼈음인지 동철비의 뒤에 서 있던 도궁이 호 통했다. "닥쳐랏! 어린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네가 무얼 안다고 그따 위 소리냐?" 조추수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피어났다. "흥! 어린아이에게 정사의 구분이 어디에 있겠소?" "버르장머리없는 놈이로구나. 태행검파의 제자가 감히 나를 공격한 단 말이냐?" 동철비가 노성(怒聲)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매천악이나 원가량과 친 분이 있는 관계로 억지로 노기를 누르며 다시 물었다. "넌 누구의 제자냐?" "난 조추수라 하오. 본 파의 장문인이 나의 사부님이시오." "..." 매천악의 제자란 말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잠시 말없이 조추수의 아래위를 살피던 동철비가 무슨 속셈인지 비교적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버릇이 없기는 하다만 매 장문이 제자 하나는 잘 두었군." 이는 조금 전 한 수를 교환하면서 조추수의 검법이 뛰어남을 알아보 고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조추수는 동철비의 칭찬이 전혀 달갑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태도에서 위선자(僞善者)의 면목을 보는 느낌이었다. "태행검파와의 친분을 고려해서 너를 추궁하진 않겠다. 어려움을 알 고 이 자리에서 물러가도록 해라." 동철비로선 선심을 베푼 말이었지만 조추수는 그의 호의 따위는 귀 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흥! 불의를 보고 피한다면 어찌 장부라 할 수 있겠소?" 말과 동시에 조추수는 소년을 안고서 구석으로 물러났다. 소년이 공 격받을 수 있는 방위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이를 보며 동철비는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끝내 화를 자초하는구나! 나중에 매 장문에게 사과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훈계해야겠다." 건곤권을 든 동철비의 두 손이 꽉 쥐여졌다. '아이들을 보호할 사람은 저 청년과 나, 두 사람뿐이다.' 시간을 끌면 아이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다. '선제 공격만이 최선!' 일단 결심이 서자 조추수의 검이 건곤권보다 먼저 움직였다. 동철비는 매천악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매천악을 통해 태행검법 을 견식할 기회가 많았고, 과거 매천악의 무공 수위도 잘 알고 있었다. 매천악은 그보다 한 수는 높을지언정, 결코 두 수가 높지는 않았다. 따 라서 나이 어린 조추수가 자신의 적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사오 초가 지나면서부터 동철비는 자신의 생각을 후회 해야 했다. 조추수의 움직임은 유권만큼 신속하지는 못했으나, 검에 실린 힘은 유권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검과 건곤권이 부딪치면 팔은 물론이고 어깨까지 저려 왔다. 심지어 조추수의 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한 자 이상 뻗어 나올 때에는 자칫 팔다리가 잘려 나갈 지경이었다. 해연히 놀란 동철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축축이 흘러내렸다. '그저 덩치가 크기에 힘이 좋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단순한 근 력(筋力)이 아니다. 검기가 일어 살을 엘 듯하니, 젊은 놈의 내공이 어 찌 이리도 심후하단 말이냐?' 도궁은 동철비가 수세에 빠지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품속의 단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겐 일곱 개의 단검이 더 있었다. 조추수에게 빈틈만 보이면 비검술(飛劍術)로써 동철비를 도울 요량이었다. 동철비를 상대함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조추수가 백의청년에게 소 리쳤다. "뉘신지 모르나 아이들을 구하려면 우선 주점을 벗어나야 하오." 백의청년이 유엽도로 호수구를 밀치며 대답했다. "옳으신 말씀!"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들은 오씨 형제와 만보각, 계덕유 등이 더욱 공세를 강화했다. 백의청년은 탁자 밑에 몸을 숨긴 아이를 빼내어 공 격권을 벗어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순, 계덕유가 낭아추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청년의 머리를 공격 했다. 때마침 오씨 형제가 호수구로 그의 두 다리를 걸었고, 만보각이 검으로 가슴을 찔러 오는 터라 검으로 낭아추를 막을 형편이 되지 않 았다. 백의청년은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려 이들의 공격을 피했는 데, 이 때문에 아이가 숨어 있는 탁자와 멀어지게 되었다. 도궁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음침하게 웃으며 양손을 떨쳤다. 휘이익! 네 줄기의 은광이 탁자 밑의 아이를 향해 쏘아져 갔다. "아!" 조추수와 청년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조추수는 도궁이 비검술로 암격하여 유권을 해치는 것을 봤기에 동 철비와 겨루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그 단검이 탁 자 밑의 아이를 노리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동철비를 제쳐 두고 몸을 돌려 단검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가 제지할 수 있는 건 두 개뿐이었다. 나머지 두 개의 단 검은 여전히 아이에게 날아갔고, 백의청년은 오씨 형제에게 가로막혀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두 개의 단검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던 아이의 정수리에 정확히 꽂혔다. 아이의 머리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아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해 버린 듯했다. 안타까움도 잠시, 조추수는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참지 못해 노성을 질렀다. "이 악독한 놈아!" 강한 내공이 실린 조추수의 음성이 주점 내부를 뒤흔들었다. 그는 치미는 분노에 동철비는 제쳐 두고 몸을 날려 도궁을 덮쳐 들어갔다. 조추수는 있는 힘을 다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태행검법 중 가장 파괴력이 강한 뇌진관산(雷震貫山)의 일초였다. 도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품속으로 가져 갔다. 그의 손에 세 개의 단검이 쥐여졌다. 그러나 그에겐 단검을 던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조추수의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도궁의 정수리가 쩌억 갈라졌다. 조 추수의 검에서 강한 검기가 일어 도궁의 머리를 양단해 버린 것이다. 도궁의 머리가 갈라지며 뇌수와 선혈이 튀었다. "어?" 동철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도궁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 다. 조추수에게 연신 밀리다가 한숨을 돌리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백의청년을 공격하던 네 명의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우렁찬 조추수의 고함에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들 의 눈 속에 들어온 건 도궁의 머리가 갈라지는 모습이었다. 조추수는 도궁을 일검에 격살한 후 동철비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선 빛보다도 강렬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움찔 놀란 동철비가 한걸음 물러선 순간, 괴성과 함께 조추수의 검 이 동철비를 향해 휘둘러졌다. 조추수의 검에선 맹렬한 검기가 일어 주위의 고수들이 그 기세를 뚜렷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동철비는 감히 건곤권으로 조추수의 검을 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체면 불구하고 등을 보이며 신형을 뒤로 물렸다. 검이 닿지도 않 았는데, 탁자와 의자들이 베어져 이리저리 흩어졌다. 동철비는 도궁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그의 죽음에 분노할 겨를이 없 었다. 심리적으로는 조추수의 기세에 압도되어 버렸고, 기선을 제압당 하여 그에게 반격을 취할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조추수의 검 기가 당장에라도 몸을 양단할 기세라 허겁지겁 몸을 피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위, 위험하다!" 계덕유가 신형을 돌려 조추수에게 다가갔다. 촤라라라! 그의 낭아추가 동철비를 압박하고 있는 조추수의 등을 노리고 날아 들었다. 비록 아이의 죽음에 광분한 조추수였으나, 이미 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러 이내 등뒤로 다가드는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숙였다. 이때, 동철비는 조추수의 검기에 밀려 벽을 등지고 있는 상태였다. 낭아추가 조추수의 등 한 치 위를 스치듯 지나가자, 이내 낭아추는 동 철비를 노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제길!" 급한 김에 오른손의 건곤권으로 낭아추를 쳐냈다. 탕! 콰-앙! 강한 힘이 실린 낭아추가 건곤권에 튕기며 벽을 강타했다. 이 순간, 몸을 숙였던 조추수가 몸을 돌려 세우며 검을 아래서 위로 휘둘러 계덕유의 팔을 베어 갔다. 원래 계덕유는 낭아추가 조추수를 격중하지 못하자 바로 회수하여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동철비가 강한 힘으로 낭아추를 쳐내는 통에 미처 팔을 회수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조추수의 검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으-악!" 팔꿈치부터 잘려 나간 계덕유의 오른팔이 피와 함께 솟구쳤다. "이노-옴!" 계덕유가 상처를 입자 신형을 추스른 동철비가 달려들었다. 한편, 백의청년을 공격하던 오씨 형제와 만보각은 계덕유의 부상에 분노하여 조추수를 공격하려 했다. 하나 백의청년이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조추수와는 생면 부지(生面不知)였지만,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남의 어려움을 돕는 동지 로서 조추수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추수를 합공하려 는 그들이 더욱 밉게 생각되었다. 백의청년은 지체 않고 세 사람을 공격해 들어갔다. 계덕유가 합세해 네 명이 합공해서도 백의청년에게서 우세를 점하지 못하던 그들이었다. 따라서 백의청년이 맹공을 가하자 세 사람은 자신 의 몸을 추스르기에도 급급하게 되었다. 동철비는 처음엔 조추수가 계덕유의 팔을 베는 사이, 바짝 접근하여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식이 거듭되자 유리함은 점점 사라 지고, 다시 조추수의 검법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동철비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임을 절감했다. 게다가 계덕유의 팔에서 쏟아지는 피가 멈추지 않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 숨이 위태로운 지경이라 이내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했다. 동철비는 사력을 다해 조추수의 검을 물리치고는 뒷걸음질치면서 소 리쳤다. "검을 멈춰라!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 조추수는 살기가 크게 일었지만, 동철비가 사부와 친분이 있음을 상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추수가 망설이는 사이, 동철비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계덕유 를 부축하여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오 형, 만 형! 유권을 죽여 원한은 갚은 셈이니 그만 물러나도록 합 시다." 오씨 형제와 만보각은 재빨리 신형을 추스르며 동철비에게 다가갔 다. 그들이 물러나자 백의청년은 재빨리 탁자 밑의 아이를 살펴보더니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갈했다. "짐승 같은 놈들! 어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죽인단 말이 냐!"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의 품엔 머리에 단검이 꽂힌 아이의 시신이 안겨 있었다. 아이의 머리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이때였다. "악! 완아!" 구석에 주저앉았던 소년이 자지러질 듯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원래 소년은 동철비의 발에 채인 순간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는 조 추수가 앞을 가로막는 동안 의식을 잃어 동생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년이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땐 백의청년이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나고 있었다. 동생의 죽음을 확인한 소년은 상처의 고통도 잊은 채 백의청년에게 다가갔다. "완아, 완아-!" 소년이 아이를 흔들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백의청년은 침통한 모습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조추수는 다시 분노가 일어 주점 입구 쪽의 동철비를 노려보았다. 동철비와 오씨 형제는 옷자락을 찢어 계덕유의 팔을 지혈하고 있었 다. 지혈이 끝나자 동철비는 몸을 일으켜 조추수를 바라보았다. 동철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넌 사마외도의 무리를 도와 정파의 협사를 죽였으니, 반드시 네 사 부에게 죄를 묻고야 말겠다!" 이 한마디가 화를 근근이 억누르던 조추수를 더욱 자극하고 말았다. 조추수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동가야, 오늘 네가 한 일을 보아라!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 을 저지르고도 스스로 정파의 협사라고 칭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 으냐?" 동철비는 새카만 후배에게서 무례한 말을 듣자 모욕감에 수염을 부 르르 떨었다. 그러나 세가 불리한지라 억지로 노기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이놈!" 이를 갈며 뒤돌아서는 동철비에게 조추수가 적의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똑똑히 기억하거라. 내 이름은 조추수다. 언제고 너의 악행을 세상 사람들에게 낱낱이 고하겠다!" 조추수는 분노가 가시지 않아 동철비 일행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 라질 때까지 노려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조추수는 백의청년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백의청년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년을 안고 있었는데, 소년은 입에서 피를 꾸역꾸역 게워 내고 있었다. 조추수가 깜짝 놀라 다가가자 청년이 추궁과혈(追宮過穴)의 수법으 로 소년의 가슴 혈도를 두드리며 말했다. "상심(傷心)이 지나쳐 가슴의 내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소. 어허, 이 러다간 일가족이 모두 이곳에서 죽고 말겠는걸." 백의청년은 연신 혀를 차며 소년의 가슴을 주물렀다. 의술을 배우지 못한 조추수는 그저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 에 없었다. 백의청년은 치료 경험이 많은 듯 손 놀림이 매우 능숙했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소년의 토혈이 멈추었고, 안색이 평온해지 며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백의청년은 손을 멈추고 조추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다행이오. 들끓던 기혈이 겨우 진정되었으니 한동안 안정하면 생명 엔 지장이 없을 듯하구려." 소년의 안위에 가슴 졸이던 조추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형씨의 의술이 고명하구려." "천만의 말씀이오. 그저 이 소년의 명이 긴 탓이라오." "아니오, 형씨가 없었다면 난 이 소년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 을 것이오. 그대는 인술(仁術)을 베푼 셈이니 바로 고명한 의원이 아니 겠소?" "하하하!" 청년이 웃자 조추수도 따라 웃었다. 조추수는 눈앞의 백의청년이 더없이 멋진 의인(義人)이라 생각되었 다. 시원스런 생김에 호감이 갔고, 불의를 참지 않고 몸을 던진 청년에 게 뭉클거리는 감명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두 사람의 웃음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주방에 숨었던 주인이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백의청년이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주인장, 여기 술과 잔을 주시겠소?" "예, 예! 하지만 탁자와 의자가 모두 부서져..." 두려움 때문인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는 주인의 얼굴은 울 상이었다. 백의청년이 품속에서 한 덩이의 은을 꺼내 주인에게 던지며 시원스 럽게 말했다. "이것으로 부서진 기물 값을 대신하겠소. 그리고 의자가 없다면 그 냥 서서 마시면 될 일이지. 그렇지 않소, 조 형?" 아마도 조추수가 동철비에게 이름을 밝힌 것을 귀담아들은 모양이었 다. 그의 시선이 닿자 조추수 또한 시원스럽게 답했다. "물론이오." "하하, 난 보구천(普求天)이라 하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오. 조 형 과 같은 영웅협객(英雄俠客)을 만났으니." "보 형이셨구려. 내게 영웅이란 말은 지나친 과찬이오." "아니외다. 불의를 참지 않고 당당히 나섰으니, 바로 영웅의 기개를 보인 셈이 아니겠소?" 보구천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어 흔들어 보이자, 조추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때 주인이 술 한 병과 두 개의 잔을 내왔다. 보구천이 이를 받아 조추수에게 잔을 내밀어 술을 권하였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자 보구천이 더욱 마음에 들었으므로 조추수는 주저 않고 잔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잔을 마주 들어 보이곤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에 술을 채워 비우기를 세 차례. 보구천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소년을 안아 들었다. "이 소년의 상처가 위중하니 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치료해야 겠소." "아, 일행이 이곳에 계신 모양이구려?" 보구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추수가 다시 물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나의 사문은 태행검파라오. 보 형의 사문은 어찌 되시오? 보 형의 무공이 뛰어나니 필시 훌륭한 사부를 모시고 계시겠 지요?" 보구천이 오씨 형제 등을 상대하며 펼친 무공 실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하하, 조 형의 무공이 나보다 더욱 뛰어나니 듣기에 부끄러운 말씀 이오. 나의 사부님은 강호무림의 인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분이라 오. 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구려." 무림인들 중엔 사문을 밝히길 꺼리는 자들이 많다는 말을 이미 들은 터라 조추수는 개의치 않았다. 문득 보구천이 바닥에 쓰러진 유권의 시체와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나직이 탄식했다. "무림에 보기 드문 협의지사가 이렇게 죽어 가는구나." 이에 조추수가 물었다. "보 형은 유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소?" "유권은 하북의 이름난 고수였소. 그의 성격은 대쪽 같아 악행을 저 지르는 자를 보면 가차없이 처단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죽검(孤竹 劍)이라 불렀다오. 그의 손에 죽은 자들 중엔 정파의 인물들도 다수 있었기에 정사(正邪)의 많은 고수들이 그를 미워했소. 그들의 위협에 유권은 오 년 전 하북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곳 산서무림으로 왔던 모양이오. 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될 줄은... 쯔쯧." "그랬었구려. 난 동철비가 유권을 죽이려 하기에 사파의 인물일 거 라고 생각했다오." 이 말에 보구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조 형, 오늘 동철비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오?" "글쎄요. 평소 사부님과 사형께선 동철비가 정파의 협의지사라고 말 씀하셨다오. 그러나 오늘 일은..." 보구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엔 선(善)을 가장한 악인들이 너무나 많소. 그러고도 그들은 자 신이 한 일을 정의라고 내세우지요.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마교니 사파니 하며 몰아세우길 좋아 한다오. 부디 조 형은 편협된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마시길 바라 오." 조추수는 일순 응대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보구천의 말이 가슴속에 미묘한 여운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보구천이 물었다. "이곳 심원은 태행산과 거리가 먼데, 조 형께선 어디로 가시는 길이 오?" "석루산의 방가장으로 가는 길이외다." "방가장?" 문득, 보구천의 눈에 기광(奇光)이 어렸다. "그렇소. 최근 산서무림엔 연쇄적으로 혈겁이 일어나고 있소이다. 얼 마 전 휘월산장의 혈겁을 저지른 마두가 방가장에 통첩을 보냈소. 본 파에선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고수를 파견했다오." "조 형은 혈겁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있소?" "모르오. 다만 마두의 수법이 너무 잔인하니 의협인으로서 방관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보구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엔 어딘지 모르게 암울 한 기색이 어렸다. 이를 눈치챈 조추수가 물었다. "왜 그러시오, 조 형?" "아, 아니외다." 대답을 얼버무리는 보구천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어렸다. 문득 보구천이 길게 탄식하며 뇌까렸다. "애석하다, 애석해!" 뜬금없는 말에 조추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무언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소?" "내 이제껏 중원을 두루 다녔지만 당신과 같은 기개를 가진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소. 당신과 같은 분이라면 만사를 제쳐 두고라도 친우 로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려." "나 또한 보 형과 같은 호걸을 친구로 얻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듯하오. 하지만 그대의 칭찬은 감당하기가 힘드오이다." "아니외다, 아니외다. 그대는 가히 인중지룡(人中之龍)이라 할 수 있 소. 하지만..." "...?" 조추수로서는 도무지 보구천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어 그저 그의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선악(善惡)이야 뜻대로 행할 수 있다지만, 화복(禍福)은 뉘라서 알 수 있겠는가?" 천장을 보며 망연히 뇌까리던 보구천은 이내 조추수에게 작별을 고 했다. "조 형, 마음 같아선 그대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지만 여의치 못하구려. 소년의 상세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니 오늘은 이만 헤어져 야겠소.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회포를 풀도록 합시다." 보구천은 소년을 안은 채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총총히 주점을 나섰 다. 유권과 그 어린 아들의 시체만이 을씨년스럽게 나뒹구는 주점의 비 극을 슬퍼하듯, 밖엔 비가 질척질척 내리고 있었다. 조추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비를 맞으며 멀어져 가는 보구천을 멍 하니 바라보았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8 장 풍운(風雲)은 조화(造化)를 부려 제 8 장 풍운(風雲)은 조화(造化)를 부려 다음날 심원을 출발한 일행은 말을 재촉하여 삼 일 만에 청원(淸源) 에 이르렀다. 산서 지방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분수(汾水)와 청원수(淸源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청원은 태원부와는 불과 반나절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일행이 이층 주루에 들러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두 사람의 무사가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며 이층 계단을 올라왔다. "저들은 청하방(靑河幇)의 무사들이 아닌가?" 원가량의 말에 일행 모두 두 사람의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청의장삼에 청색 두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과연 두건엔 '청하(靑 河)' 라는 흰색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의 군데군데 찢겨진 옷에 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도(刀)로 바닥을 짚고 겨우 신형을 추스르며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을 찾는 모양이었다. 궁조생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두 분은 청하방의 무사가 아니오? 무슨 일로 온몸에 상처를 입으셨 소?" 궁조생의 옷차림을 알아본 두 사람의 안색이 밝아졌다. 얼굴이 붉은 대한이 읍을 하며 물었다. "태행검파의 제자시군요. 여기서 저희 방주님을 보지 못하셨습니 까?" "저희 일행은 여기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귀방주를 뵙지 못했 소." "큰일이군..." 두 사람이 다급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곤란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도울 수도 있지 않겠소?" 이때 원가량이 큰 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거기 두 사람!" 두 장한이 원가량에게 시선을 돌리자 궁조생이 나직이 말했다. "저분의 성함은 원가량으로 나의 사숙이시오." 이에 두 사람이 반색하며 원가량에게 다가갔다. 원가량은 두 사람의 행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보아하니 어려운 일을 당한 게로군." 고수들과 친분을 쌓기 좋아하던 원가량인지라 청하방주 왕측(王測) 과도 교분이 있었다. 따라서 청하방도의 일이라면 모른 체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원가량에게 읍을 한 후 얼굴이 붉은 장한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 소방주님은 물론이고 여러 고수 분들께서 마교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한 지경입니다." "뭣이! 마교라고?" 원가량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가량뿐만 아니라 일행 모 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난데없이 마교라니, 그 무슨 말인가?"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희 방주님께선 방두교 대협의 어려 움을 아시곤 방 대협을 돕기 위해 방가장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때마침 방주님께선 이 주루에서 엄여(嚴輿) 대협과 만날 약속이 있기 에 저희 소방주님과 여러 고수 분들이 먼저 방가장으로 출발했는데, 갑자기 황산파와 장춘곡(長春谷)의 고수들이 나타나..." "황산파!" 궁조생과 조추수가 동시에 소리쳤다. 조추수는 막두철과 황산삼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자 이를 갈았다. 언제고 그들에게 당한 분풀이를 톡톡히 하리라 작정한 터였다. 궁조생 또한 얼굴에 노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황산파와의 일을 들어 알고 있는 원가량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었 다. "황산파뿐만 아니라 장춘곡의 고수까지 있다면 마교가 산서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분명하군. 어째서 그들이 이곳에 나타나 횡포를 부린단 말인가?"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충격은 대단한 모양이었다. 배간과 공손월까지도 침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배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거...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곳에 마교가 준 동하다니..." 배간은 궁조생과 조추수가 황산파의 고수들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말 을 들었을 때만 해도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황산파와 비마표 국 간의 은원 때문에 황산파의 고수들이 산서무림에 발을 들여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마교가 산서무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고, 또한 마교 는 남경(南京)에서 발흥하여 하북, 하남 지역에서 소림, 무당, 노가장 등과 세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산파뿐만 아니라 장춘곡까지 나타나 산서무림의 고수들을 공격했다면, 이는 단순한 은원 관계로 치부할 수 없었다. 마교가 본격 적으로 산서무림에 진출하기 시작한 징조일 수도 있었다. "마교엔 세상을 울릴 만한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고 하오. 그들이 산 서무림에 발을 들여놓으면 대란(大亂)이 이는 것 아니오?" 배간의 겁에 질린 말에 원가량이 냉소했다. "아직은 속단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도..." 원가량의 시선이 청하방의 무사에게 돌려졌다. "위험에 빠진 자들이 누구누구인가?" "저희 소방주님과 월아산(月牙)을 쓰시는 손조(孫操) 대협, 철차(鐵 叉)를 쓰시는 여번(呂蒜) 대협, 노호검(怒虎劍) 강정(姜靜) 대협 등 모 두 열일곱 사람입니다." 원가량은 탁자 위의 검을 움켜쥐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모두 길을 떠날 채비를 하여라." 곁에 있던 배간이 나직하게 물었다. "사형, 지금 그들을 도우러 갈 생각이십니까?" 배간의 어투엔 두려움이 묻어 있음을 원가량은 즉시 느낄 수 있었 다. "손조, 여정, 강정 등은 모두 산서무림을 지탱하는 고수들이야. 그들 의 위기를 모른 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상대는 마교의 고수들입니다. 마교의 미움을 사면 우리 태 행검파는..."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마교가 산서무림을 삼킬 작정을 했다면 가만 히 있는다고 본 파가 무사할 줄 아는가? 이런 때일수록 단결을 해야 지, 어찌 그런 비겁한 소릴 한단 말인가?" 원가량의 질책에 배간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행 모두 분분히 검과 짐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원가량이 청하방의 두 무사를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들의 상처를 보니 길을 재촉하기 힘들겠군. 습격을 받은 장소 를 일러주게." "분수 강변을 따라 태원부 쪽으로 가면 정가촌이 나옵니다. 그곳으 로부터 십여 리 떨어진 강변에서 마교의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지 요. 지금쯤 모두 화를 입지는 않았을는지..." 두 무사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일행은 주루를 나서 현장으로 말을 몰았다. 싸늘한 강바람이 누런 모래 알갱이를 동반하며 시야를 가렸다. 현장에 이르자 숲속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청하방도의 시신이 세 구, 그리고 정파의 협사로 보이는 시신 두 구가 있었다. 마교의 인물로 추정되는 시신도 두 구가 있었다. 마교의 시신은 모 두 노란색과, 녹색, 자색이 어울린 알록달록한 빛깔의 옷을 입고 있었 다. "이 옷차림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있어. 아마 이들은 장춘곡의 하 수인들인가 보군." 원가량이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갈웅휘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여기 핏자국과 여러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갈웅휘가 가리킨 곳엔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과 바닥에 점점이 묻은 선혈 등 부상을 입은 채 도주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행은 흔적을 따라 말을 재촉했다. 가는 길 군데군데에 시체가 널 브러져 있었다. 도주의 흔적은 강변을 벗어나 몽산(蒙山) 방향으로 향 하고 있었다. 일 각여를 달리자 다시 여러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 대부분 이 산서무림의 사람들이라 일행은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지친 말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할 무렵, 일행은 몽산 기슭에 당도 했다. 그리고 이내 산기슭의 작은 숲속에서 병장기 소리를 들을 수 있 었다. 원가량이 지체없이 그곳으로 말을 몰자 일행도 그의 뒤를 따랐 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숲속에 위치한 직경 십여 장 가량의 공터였다. 그곳엔 열두 명의 인물이 세 사람을 중앙에 두고 포위를 하고 있었다. 중앙의 세 사람은 각각 월아산과 철차와 그리고 검을 든 사십대의 중년인들이었다. 일행은 그들이 손조와 여번, 강정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몹시 지친 듯 행동이 민첩하지 못했다. "멈춰라!" 대갈일성과 함께 원가량이 공터로 말을 몰아가자, 마교의 인물들은 일순 당황한 듯 좌우로 비켜섰다. 하나 이도 잠시, 그 중 알록달록한 괴인형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원가량을 덮쳤다. 그는 일 장 높이로 뛰어올라 한 쌍의 단검으로 원가 량의 목과 가슴을 노렸는데, 그 신법이 영활하여 원가량은 깜짝 놀라 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원 대협!" 원가량의 얼굴을 알아본 여번의 안색이 밝아지며 반갑게 소리쳤다. 그러나 원가량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 그 단검이 다시 옆구 리를 노려 왔기 때문이다. 원가량은 급히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등의 장검을 뽑아 휘둘렀다. 쨍!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원가량을 공격했던 괴인형이 뒤로 공 중제비를 돌며 물러났다. 이때였다. "이놈! 감히 사부님을 암격하다니." 싸늘한 일갈과 함께 뒤따라온 갈웅휘의 장검이 단검을 쥔 자를 후려 치고 있었다. 다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 알록달록한 괴 인형이 허공으로 다섯 자 이상 솟구쳤다. 강정이 다급히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그는 회선쌍검(回旋雙劍) 구..."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록달록한 괴인형은 다시 말을 탄 갈웅휘에게 달려드는 게 아닌가! "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선회하는 공격은 생각도 못 한 갈웅휘 에게 방어할 틈은 없었다. 한 쌍의 단검이 갈웅휘에게 격중될 순간, 갈웅휘의 우측에서 검이 불쑥 튀어나오며 아래서 위로 단검을 후려쳤다. 공손월이었다. 다시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괴인형이 위로 치솟더니, 이번에는 공손 월에게 달려들었다. "흥!" 나직한 코웃음과 동시에 공손월의 장검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 신 형을 감싸듯이 휘둘러졌다. 공손월은 삽시간에 일곱 번을 찌르고 일곱 번을 베었다. 햇빛을 받 아 번쩍이는 검광이 알록달록한 신형을 감싸 버렸다. 태행파의 검법 중 장강유사(長江流巳)라는 일초였다. 이는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검봉을 이용하여 찌를 수도 있고 검인 (劍刃)으로 상대를 벨 수도 있어, 신법이 빠른 상대를 공격하기에 적합 한 검초였다. 이 초식은 정교하고도 강한 내공을 요구하기 때문에 익 히기가 몹시 까다로워, 낙월검객 추강원 이후로 이백 년 동안 태행검 파에서도 터득한 이가 몇 되지 않았다. 따라서 공손월이 이 초식을 펼치자 원가량과 배간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놀람은 공격을 받는 당사자가 더했다. "이게 뭐야?" 그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단검을 어지러이 휘둘러 몸을 보호 했다. 까가가-강! 요란한 파찰음(破擦音)이 잇달아 귀를 찢으며 알록달록한 신형이 검 막(劍幕)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뒤를 따라 몇 조각의 알록달록한 옷자 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괴인형은 상당한 낭패를 봤음이 틀림 없었다. 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추수는 장강유사의 검법을 배운 적이 없으므로 놀라움을 금치 못 하고 검법의 변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갈웅휘와 공손월을 공격했던 괴인형이 조추수에게 날아오는 게 아닌가? "여기도 있다!"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주체 못 한 조추수의 검이 그 신형을 무지막지 하게 강타해 버렸다. 따다-당! "윽!" 단검 하나가 허공으로 치솟았고, 괴인형은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괴인형이 날아간 방향은 마교의 고수들이 늘어선 곳이었는데, 날아 가는 기세가 워낙 세찬지라 모두들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다만 그 중 에 금의장삼을 걸친 초로의 노인만이 미동도 않고 서 있다가 괴인형에 게 손을 내밀었다. 찌이익! 옷자락이 찢어지며, 괴인형은 일 장을 더 물러간 뒤에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신형을 멈추고 보니 그는 키가 오 척이 겨우 될까말까 한 단신의 노인이었다. 그의 알록달록한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특히 금의노인이 움 켜쥐었던 왼쪽 어깻죽지는 소매까지 통째로 뜯겨 나가고 없었다. "놀랍군, 놀라워. 태행검파에 이런 고수들이 있다니!" 큰 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엔 아직도 놀람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금의노인이 눈에 이채를 띠며 조추수를 응시했다. "보통 힘이 아니로군." 그 동안 태행파의 모든 일행이 손조, 여번, 강정을 중심으로 원을 그 리며 모여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세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전 신을 덮고 있는 상처에선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나 그들은 상처의 고통도 잊은 듯 공손월과 조추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때 예의 난쟁이노인의 큰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헤헤헤... 태행검파의 검법이 이토록 대단할 줄은 몰랐는걸. 이봐,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리고 넌, 나이도 어린 놈이 대단한 검력 (劍力)을 지니고 있구나." 난쟁이노인은 공손월과 조추수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며 묘하게 웃었 다. 그는 자신이 입은 손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공손월이 가볍게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난 태행검파의 공손월이오. 그리고 이분은 나의 사형이신..." 공손월이 원가량과 배간을 소개하려 하자 난쟁이노인은 귀찮다는 표 정으로 손을 휘 내저었다. "시원찮은 놈은 소개받고 싶지 않아. 이 녀석아, 네 이름은 무엇이 냐?" 난쟁이노인은 원가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조추수에게 고 정시키고 있었다. 이에 원가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매천악에게 장문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으로도 항상 분을 삭이던 그 였다. 그런 만큼 아랫사람에게서 대접받기를 더욱 원하던 그인지라 난쟁이 노인이 자신을 공손월보다 훨씬 못한 존재로 치부해 버리자 치미는 화 를 참을 수가 없었다. 원가량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녀석은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례한가?" 난쟁이노인이 시선을 돌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원가량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헤헤, 나를 모른단 말이냐?" "네까짓 놈이 누구인지 알 게 뭐냐?" "헤헤헤헤, 견문이 형편없는 놈이로구나. 모르면 관둬라, 관둬. 그보 다도..." 난쟁이노인은 묘한 미소를 띠며 조추수에게 다가갔다. 이에 원가량이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여번이 원가량의 소매를 잡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원 대협, 그는 회선쌍검(回旋雙劍) 구화성(具華盛)입니다." "장춘곡주(長春谷主) 구화성...?" 원가량은 놀라움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여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구화성의 소맷자락을 쥐고 있는 금 의 노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자는 금응방주 용문원(龍文遠)이지요." 장춘곡과 금응방은 모두 하북성에 위치한 방파로, 마교에 가입한 이 후 그 세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구화성과 용문원의 무공은 원가량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 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들이 직접 이곳에 나타나다니..." 원가량의 침음성에 강정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사실 우리 세 사람이 입은 상처는 모두 구화성 한 사람에게 당한 것입니다. 저들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우린 벌써 저승의 고혼(孤魂)이 되었을 것입니다." 손조, 여번, 강정 등 세 사람은 결코 녹록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물 론 그들이 원가량의 적수가 될 만한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 사람이 협공을 한다면 원가량으로서도 승부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따 라서 그들이 구화성 일인에게 당했다면, 그의 무공이 원가량보다 아래 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일단 꺼리는 마음이 일자 원가량은 더 이상 큰소리치지 못하고 구화 성을 지그시 노려보기만 했다. 한편, 언행이 범상치 않은 구화성이 다가오자 조추수는 흠칫 놀라며 검을 꽉 쥐었다. 구화성은 몸까지 흔들릴 정도로 요란하게 웃으며 말 위의 조추수를 올려다보았다. "이 꼬마 놈아! 윗사람을 보고도 건방지게 말 위에서 내려다본단 말 이냐?" 왕옥진과 황보웅의 웃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키가 작은 구화성에 비해 조추수의 덩치는 산만했다. 게다가 조추수 는 말까지 타고 있었으니 그 차이가 오죽하랴. 그런 구화성이 조추수 에게 꼬마라고 하자 우스울 수밖에. 조추수는 말에서 내려 구화성을 마주보며 섰다. "흥! 마교의 인물들은 나이를 먹어도 입이 고약하군." 조추수의 입에서 독설이 나왔지만, 구화성은 조추수의 말에 화를 내 기는커녕 더욱 요란하게 웃었다. "입이 얌전해지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겠느냐? 그리고, 에헤헤 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에 묘한 시선으로 조추수의 아래위를 살폈다. "좋은 덩치로구나. 네가 나의 단검을 날려 버렸단 말이지? 좋아, 좋 아. 이제껏 나의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린 사람은 세 사람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야 내가 모시는 상전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네놈 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섬전같이 조추수에게 쏘아져 갔다. "추수, 위험하다!" 궁조생과 공손월이 다급히 외쳤다. 구화성의 움직임이 워낙 빨랐으 므로 두 사람은 조추수를 도와 줄 틈이 없었다. 구화성의 신형이 조추수와 부딪치려는 순간, 조추수의 가슴 한가운 데서 검광이 번뜩였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들어 구화성을 찌른 것이었 다. 조추수의 검봉과 구화성의 몸이 부딪치려는 찰나, 구화성의 신형이 왼쪽으로 재빠르게 회전했다. 구화성이 자랑하는 회선무류(回旋無流)라는 신법. 그는 일순간에 조추수의 등뒤로 돌아가며 단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변화 막측하게 방향을 선회하는 그의 신법에 이제껏 수많은 고수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조추수의 검법 또한 교묘했다. 조추수는 제자리에 선 채 뒤로 허리를 활같이 휘면서 검을 휘둘렀는 데, 등을 찌르는 구화성의 단검을 정확하게 쳐내고 있었다. 쩽그렁!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일며 구화성의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대단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보법이 어지러워졌다. 나직한 기합과 함께 조추수의 신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날카 로운 그의 검이 파공음을 일으키며 구화성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있었 다. 순식간에 태행검법의 여섯 초식이 잇따라 펼쳐졌다. 변화가 막힘없 이 풀려 나와 누가 보더라도 대가(大家)의 솜씨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단한 검법이다!"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 등의 입에서 절로 찬탄이 흘러나왔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하더라도 조추수의 검법이 평범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은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감탄을 하기는 금응방주 용문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새로이 나타난 태행검파의 인원수가 많아 서로의 실력을 가늠 하던 중이었다. 그가 주시한 인물은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이었다. 그 중 원가량의 검법은 충분히 자신할 만했고, 공손월의 검법이 대단하여 그만 제압하 면 목적한 일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전 조추수가 보여 준 검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나이가 어리므 로 검법의 조예는 신통치 않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화성이 고전하자 놀랄 수밖에. 한편, 조추수와 구화성의 대결을 지켜보던 공손월이 원가량에게 속 삭였다. "사형, 추수의 검법이 의외로 대단하군요. 이 상태로라면 구화성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용문원만 제압한다면 일이 수 월하게 해결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원가량은 조추수의 검법에 얼이 빠졌는지 엉뚱한 말을 중얼 거렸다. "어허, 추수가 언제 저런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을까? 매 사제가 언 제 저렇게 고수로 키워 냈지?" 매천악에 대해 경쟁 의식을 갖고 있는 원가량은 누구보다도 조추수 의 실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답답해진 공손월이 원가량의 소매를 흔들었다. "사형, 지금 금응방과 장춘곡을 공격하도록 합시다." "으, 으응?" "제가 용문원을 공격하겠습니다." "그, 그러지." 얼떨결에 원가량의 승낙이 떨어지는 순간, 공손월이 검광을 뿌리며 용문원을 공격했다. 이에 금응방과 장춘곡의 무사들이 분분히 무기를 휘두르자, 배간과 궁조생 등 태행검파의 모든 제자들이 달려들어 혼전이 벌어졌다. 장춘곡의 한 인물이 원가량에게 박도(朴刀)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그 는 알록달록한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실력이 원 가량에게 뒤지지 않았다. 배간에게는 한 쌍의 쌍수도(雙手刀)를 휘두르는 금응방의 고수가 달 려들었다. 그의 무공 또한 대단해서 배간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다. 그밖에도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가 금응방과 장춘곡의 정예들이어 서 궁조생을 제외하면 오히려 이 대 제자들의 실력이 달리는 형편이었 다. 한편, 구화성은 조추수와 겨룰수록 낭패감에 마음이 흐트러졌다. 승 부야 나지 않았지만, 이제껏 명성을 떨친 고수로서의 체면이 서질 않 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조추수가 형성하는 검막 이 예상외로 엄밀하여 접근이 용이치 않았다. 게다가 단검으로 조추수 의 검을 막을라치면 충격이 손에서 가슴까지 전해 와 운신하기가 버거 울 정도였다. 자연히 구화성은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추수는 천심장을 수련한 이후 내공이 크게 진보하였고, 태행검법 의 세세한 변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혼자 수련하여 얻은 진전으로, 실전에서는 충분히 활용 하기 어려웠다. 구화성과의 대결이 지속되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자, 연습에 그 쳤던 세세한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상대의 반응에 따라 펼쳐 지게 되었다. 결국 초식이 거듭될수록 조추수의 검법은 계속 향상되는 셈이라 구 화성이 느끼는 어려움은 더욱 커져 갔다. 히죽거리며 웃느라 벌어졌던 그의 입은 닫혀진 지 오래였고, 안색마 저 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돌연 닫힌 그의 입이 다시 열리며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염병할 녀석아! 네놈이 늙은이를 구박하고도 뒤가 좋을 줄 아느 냐? 너 같은 놈은 자식을 얻어 봐야 상거지들만 득실거릴 터이니 없는 것만 못하다. 차라리 내가 네놈의 물건을 싹둑 잘라 주마. 어떠냐? 받 아라! 뒈질놈! 우라질놈!" 한번 터진 욕설은 끊이질 않았다. 그는 조추수를 공격했다가 물러나면서 한마디 욕설을 했고, 또 물러 났다가 달려들면서 두 마디의 욕설을 하곤 했다. '어처구니없는 노인네로구나.' 구화성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저속함에 조추수는 혀를 내두르며 공 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장내의 상황 변동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전세는 태행검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조, 여번, 강정 등은 이미 상처가 심하여 전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 지 못했다. 특히 이 대 제자들의 형세가 위급한지라 조추수의 얼굴엔 다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경험이 풍부한 구화성이 이런 조추수의 심리를 놓칠 리 없었다. 그 는 입가에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으며 조추수에게 다가왔다. "헤헤, 이놈아, 어차피 모두 죽을 놈들인데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 느냐?" 사형제들의 손을 덜어 주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눈앞의 형 세가 더욱 급한지라 조추수는 구화성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앗!" 구화성에게 시선을 돌리던 조추수가 돌연 경악성을 터뜨렸다. 구화성의 등뒤로 막두철과 황산삼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 다. 막두철의 옆에는 녹색 장삼을 걸친 늙은이가 뒷짐을 진 채 장내를 살피고 있었다. 구화성이 뒤를 돌아보더니 반색하며 소리쳤다. "등 형, 때맞춰 나타나셨구려." 녹의노인이 오만한 표정으로 턱짓을 하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요?" "태행검파의 제자들이라오." "태행검파? 흥! 쓰잘데없는 것들이 죽을 줄도 모르고 몰려왔구먼." 조추수는 막두철에게 호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일시 놀랐지만, 녹 의노인의 안하무인 격의 말에 노기가 치밀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함부로 태행검파를 비웃는 것인가?" 조추수의 말에 녹의노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구화성이 그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이 녀석은 나이가 어리지만 보통이 아니라오." 이때였다. "무엄한 놈! 감히 누구에게 무례를 범하느냐?" 막두철이 버럭 노성을 지르며 조추수에게 일격을 휘둘렀다. 막두철은 구화성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하더 라도 자신의 일초식조차 변변히 받아 내지 못하던 조추수가 아니었던 가? 휘리리-릭! 파공음과 함께 그의 채찍이 꿈틀거리며 조추수의 다리를 쓸어 왔다. 이에 구화성이 놀라 소리쳤다. "어? 이봐!" 구화성이 하고자 했던 말은 '자넨 이 청년의 적수가 되지 못해'였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조추수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 솟았다. 동시에 막두철의 채찍이 무서운 기세로 조추수의 다리를 휘감 아 갔다. 막두철의 이 수법은 진성의 한 주점에서 이미 견식한 터였다. 따라 서 조추수는 지체하지 않고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면도 날과 같은 검기가 일었고, 그 검기는 채찍을 양단해 버렸다. 연이어 그의 신형이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내질러 막두철의 미간을 찔러 갔다. "아!" 조추수가 일검에 채찍을 잘라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막두철 은 대경하여 황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이놈!" 대갈일성과 함께 조추수에게 예리한 권풍이 날아든 것은 이때였다. 이 일권은 녹의노인이 막두철을 구하기 위해 떨친 것으로 기세가 대단 했다. 허공에 있던 조추수는 일순 피할 틈을 찾지 못하고 좌장을 내밀어 날아오는 권풍을 마주쳤다. 퍼-억! 마치 부풀어오른 포대에 구멍이 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조추수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그곳엔 막두철이 몸을 굴린 후 막 일어나던 참이었고, 조추수의 검이 회전의 여세를 빌려 막두철의 오른쪽 어깨를 베어 버렸다. "윽!" 막두철의 입에서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이 대담한 놈!" 녹의노인이 노성을 지르며 신형을 가다듬은 조추수에게 일권을 날리 려던 찰나, "이, 이게 무슨 수법이냐?" 녹의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엔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어 구화성은 어리둥절하여 물 었다. "무슨 말씀이오?" 그러나 녹의노인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조추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조추수에게 일권을 내질렀던 왼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숨을 고르는 게 아닌가? 구화성은 그에게 중대한 변고가 있음을 알고 해연히 놀라 조추수를 경계하였다. 녹의노인은 조추수가 권풍에 실린 힘을 이용하여 오히려 막두철을 상하게 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에 권에 전력을 집중하여 조추수를 격살하려 했는데, 난데없이 가운뎃손가락의 중충혈(中衝穴)로 부터 바늘 같은 기운이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을 따라 침투하는 게 아닌가? 그가 조추수의 천심장을 어찌 알겠는가? 이런 증상은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천심장을 수련한 조추수의 내공은 항상 전신 경맥을 돌고 있었다. 따라서 무의식적으로 장을 내밀었지만 천심장의 기운이 자신도 모르게 일었던 것이다. 녹의노인의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워낙 창졸간에 떨친 일장 이라 천심장의 기운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 다면 녹의노인의 내공이 아무리 심후하더라도 지금처럼 서 있지는 못 할 터였다. 조추수 또한 위험한 상황을 넘긴 터라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검으로 몸을 보호하며 기식을 조절했다. 다행히 녹의노인의 일권에 상처를 입 은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추수는 구화성과 녹의노인에게 다가갔다. 그 에게서 전의(戰意)가 분명히 느껴지는지라 구화성의 눈썹이 꿈틀거렸 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그가 막 소리치며 나서려 할 때였다. "구 형, 저놈은 내게 양보하시오." 어느새 운기조식을 마친 녹의노인이 구화성 앞으로 나서는 게 아닌 가? 이전의 오만한 표정과는 달리 그의 태도는 몹시 신중했다. "조금 전 네가 쓴 수법이 무엇이냐?" 조추수는 그가 천심장을 묻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냉겸의 당부를 상기하고 냉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흥!"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원한다면 태행검법의 위력을 보여 주지." 대답과 동시에 조추수의 검이 번득이며 검광을 뿌렸다. "좋아, 그 수법을 다시 사용하게 만들어 주마." 녹의노인은 조추수의 검을 피하지 않고 곧장 달려들어 왼팔로 조추 수의 검을 막았다. 깡! 경쾌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조추수의 목을 노렸다. 이에 조추수는 몸을 숙이고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녹의노인의 허 리를 베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녹의노인의 우측 팔뚝이 조추수의 검을 다시 틀어막 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다섯 자 이내로 근접한 채 한 사람은 검을 휘두르 고 한 사람은 그 검을 팔뚝으로 막으며 상대의 요혈을 노리는 격전은 실로 위험천만(危險千萬)이었다. 따다다-당! 쇳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지며 찢어진 소맷자락이 허공에 나풀거렸 다. 녹의노인의 찢어진 옷소매 틈으로 팔뚝을 보호하고 있는 묵빛 금 속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눈이 현란할 정도로 교환되는 초식의 변화는 구경하는 막두철과 황 산삼귀의 눈을 어지럽혔다. 아니, 구화성조차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 정 도였다. "저, 저게 삼 개월 전의 그 녀석이 맞는 건가?" 막두철과 황산삼귀의 눈엔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한 순간, "타아-핫!" 귀청을 뚫을 듯한 기합성과 함께 녹의노인이 뒤쪽으로 쏜살같이 물 러났다. 조추수와 삼 장의 간격을 두고 선 녹의노인의 안면은 고통으로 일그 러져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팔뚝을 보호하던 금속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조추수의 검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내공이로구나.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네가 정녕 태행 검파의 제자가 맞느냐?" 녹의노인의 물음에 조추수는 가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난 비록 무명(無名)이지만 고수가 없는 황산파를 상대하기엔 충분 하지." 이는 일전에 황산삼귀가 궁조생과 조추수에게 한 적이 있는 말을 상 기하여 흉내낸 것이었다. 녹의노인의 긴 수염이 꿈틀거렸다. "핫!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로군. 알량한 실력을 믿고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좋아, 좋아." 그는 막두철과 황산삼귀를 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저들을 도와 태행검파의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 여라. 그리고 구 형, 그대 또한 저들을 돕도록 하오. 이 건방진 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야겠소이다." 그의 말엔 조추수의 심기를 흩뜨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구화성 은 녹의노인의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구태여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이렇게 되자 정작 다급해진 건 조추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세에 처한 태행검파였다. 구화성과 막두철, 황산삼 귀 등이 가세한다면 동문과 사숙들은 일방적으로 도륙될 게 뻔했다. 이때였다. "하하하하!" 우렁찬 대소(大笑)와 함께 녹의노인이 나왔던 숲속으로부터 세 개의 인영이 뛰쳐나오더니, 한 명은 구화성을, 다른 두 명은 막두철과 황산 삼귀를 덮쳐 가는 게 아닌가? "웬 놈들이냐?" 갑작스런 변화에 녹의노인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이와는 반대로 조추수의 입에선 반가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 대협!" 세 사람은 바로 노가장의 여문량과 그 일행이었던 것이다. 여문량의 검법은 눈부셨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선기를 잃은 탓인지 구화성은 여문량의 검법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또한 황산삼귀는 노가장의 두 장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막두철은 이미 오른쪽 어깨를 다쳐 채찍을 쓰지 못하는 상태라 도움 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황산삼귀는 진성의 주점에서 자신들의 애병(愛兵)을 잃은 상 태라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임시 방편으로 검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솜씨가 서툴기 그지없었다. 십 초가 지나기도 전에 황산삼귀는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두 장한은 황산삼귀를 제거하고 나자 곧 이어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장춘곡과 금응방 의 무사들이 차례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검법을 알아본 녹의노인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런 쳐죽일! 노가장의 놈들이 여기까지 나타나서 일을 방해한단 말이냐." 그가 노가장의 두 장한을 덮칠 기세를 보이자, 조추수는 주저 않고 그를 막아 섰다. "당신은 내가 상대하겠소." "오냐, 우선 네놈부터 죽여 주마." 노가장 무사들에게 죽은 황산삼귀는 황산파 내에서도 고수급 인물들 이었다. 고수를 잃은 녹의노인의 분노와 살기는 이미 하늘에 닿을 정 도였다. 두 사람은 다시 치열하게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 동안 장춘곡과 금응방의 무사들은 모두 쓰러졌고, 남은 이는 원 가량과 배간과 겨루고 있는 두 인물과 구화성, 그리고 녹의노인뿐이었 다. 막두철은 상처가 심해 더 이상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 녹의노인은 연신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조추수를 공격했지만, 장내 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젠 반대로 그들이 태행검파의 제자들에 의해 포위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일단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파악하자 노련한 그는 이내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공세를 줄이며 수세로 전환하였다. 이에 조추수는 더욱 기세 등등하게 검을 잇따라 일곱 번 내질렀다. 그리고 녹의노인은 일곱 걸음을 물러났다. 고수들의 대결에서 한번 수세에 처하면 그 세를 만회하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일단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조추수는 쉬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한 순간, 계속 뒤로 몰리던 녹의노인의 신형이 가볍게 비틀거렸다. 절호의 기회. 문득 조추수의 몸이 늘어나듯이 앞으로 쏠리며 녹의노인의 아랫배를 찌르더니, 갑자기 검끝이 부르르 떨리며 방향을 바꾸어 목을 노리는 게 아닌가? 이는 태행검법 중 비연추운(飛燕追雲)의 일식으로, 변화는 단 한 번 뿐이나 빠르기가 섬전 같아 피하기 어려운 초식이었다. 녹의노인에겐 이 일 검을 피할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 공격이야말로 녹의노인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받아랏!" 대갈일성(大喝一聲)과 함께 그가 옆으로 반보를 움직이며 두 팔을 세차게 휘두르자 사나운 권풍이 조추수에게 몰려왔다. 조추수의 공격을 어깨로 받으며 혼신의 공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만 약 조추수가 검을 회수하지 않는다면 녹의노인의 어깨를 찌를 수는 있 었다. 대신 녹의노인의 일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조추수는 소스라치게 놀 랐다. 그는 즉시 찌르던 검을 옆으로 휘둘러 권풍을 차단하며 몸을 비 틀어 녹의노인의 공격을 피했다. 이 순간, 노인의 권풍은 씻은듯이 사라졌고, 그는 신형을 뒤로 일 장 이상 물리며 소리쳤다. "구 형, 일단 여기서 물러나도록 합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숲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을 한 게 그만이 아니었다. "찢어 죽일 놈들! 두고 보자. 반드시 보복을 하고야 말겠다." 욕설과 함께 구화성이 여문량의 공격을 떨치며 뒤를 따랐고, 금응방 주 용문원 또한 공손월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막두철은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화성보다 빨리 도망가 고 있었다. 원가량과 배간과 겨루던 이들도 어느새 숲속으로 줄달음치고 있었 다. 그들이 사라지자 태행검파의 모든 제자들은 여문량을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여문량이 원가량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난 노가장의 여문량이오. 그리고 이들은 나의 동문인 장양(張楊), 동민(董旻)이오." 서로 분분히 인사를 나눈 후 원가량이 사의를 표했다. "여 대협이 아니었으면 우린 화를 면키 어려웠을 거요. 노가장은 무 림의 지주이니 우리 또한 그 은혜를 입게 되었소." "별말씀을. 실은 수개월 전 마교의 무리가 산서 땅에 출몰하고 있다 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희 장주께서 저희를 파견하셨소. 우린 진성에서 궁 형과 헤어진 후 암중에 황산파를 감시해 왔소. 그들을 뒤따르다 보 니 이곳에 이르러 여러분을 돕게 된 것이외다." 여문량은 잠시 말을 멈추고 조추수를 기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이분의 무공은 수개월 전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로군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더니, 이는 이 소형제 분을 이르는 말인 것 같 소." 모두의 시선이 조추수에게로 향했다. 이에 조추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조추수라고 합니다, 여 대협. 그때 그 주막에서 입은 구명지은 (救命之恩)에 답례를 하지 못했군요." 여문량이 물었다. "조 형이셨구려. 조 형과 겨루었던 녹의노인이 누구인지 아시오?" 조추수뿐만 아니라 태행파의 모든 사람들은 녹의노인을 본 적이 없 어 정체를 모르고 있었기에 여문량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황산파의 이인자인 황산박룡(黃山搏龍) 등고(鄧高)라오. 그는 마교 내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인데 조 형이 물리쳤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오." 황산박룡이라는 이름은 중원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 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쟁쟁한 고수였다. 원가량, 배간, 공손월 등은 아연 실색한 얼굴로 조추수를 바라보았 다. 그들은 조추수의 무공에 경이로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공이 평범 했던 조추수가 짧은 기간에 이토록 놀라운 검법을 구사하게 된 배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추수는 황산박룡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당혹스런 내 심을 감추려 계면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사숙조님의 가르침을 잊고 나도 모르게 무공을 드러내고 말았구나. 사숙님들이 묻는다면 어떻게 변명을 한단 말이냐?' 그가 후회로 마음을 졸일 때, 다행히도 여문량의 심각한 어조가 중 인의 관심을 돌렸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서무림엔 마교의 여러 방파들뿐만 아 니라 중요 수뇌들까지 와 있는 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배간이 물었다. "우리 산서무림은 무림의 패권 다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소이다. 그런데도 마교가 예까지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오? 더구나 이렇게 살겁 을 자행하다니." 여문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배간의 말에서 마치 노가장 또한 무림의 패권을 다투는 방파로 치부 되는 인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교와 대항하여 무림의 안녕을 지키 는 문파임을 자부하는 그로서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나 그는 이내 이런 기색을 감추었다. "우리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소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최근 들어 음풍노조까지 산서무림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오." "음풍노조 조천주!"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 등이 대경하여 소리쳤다. 여문량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손조와 여번, 강정 등은 아예 사색이 된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그가 나타났다면 우, 우린..." 배간은 놀라움이 지나쳤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림을 통틀어도 조천주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 소. 원인이 무엇이든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한차례 겁난을 피할 수 는 없을 것 같소." 갑자기 침묵이 주위를 휘감았다. 음풍노조(陰風老祖) 조천주(趙天柱). 그는 지난 사십여 년 동안 천하무림을 경동시킨, 마교에서도 고수 중의 고수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소림, 무당을 위시한 구대문파의 고수 오십 명 이상이 그의 성명절 기인 음풍장(陰風掌)에 고혼이 되었다. 실제 정파무림을 통틀어서도 조 천주와 자웅을 겨룰 만한 이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조천주는 항상 마교의 수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다녔다. 따라서 그가 산서무림에 나타난 이상, 이곳엔 이미 상당한 마교의 세력이 진출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산서무림의 누가 조천주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원가량 등 견식이 있는 자들은 모두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조추수와 뇌가명, 황보웅 등 조천주의 무서움을 모르는 이 대 제자들은 눈을 말똥거리며 사숙들과 여문량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제 목 : [장한백설] 1 권 제 9 장 길흉(吉凶)이야 알 길이 없도다 제 9 장 길흉(吉凶)이야 알 길이 없도다 조추수에게 무공이 급진전하게 된 동기를 물었을 때, 조추수는 불철 주야로 검법을 연마했을 뿐이라고 했다. 원가량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추수가 천심장을 연마했음을 알지 못하는 원가량으로선 당연한 일 이었다. '불철주야로 연검(鍊劍)한다고 해도 불과 수개월 사이에 무공이 이토 록 증진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조추수가 구화성을 상대로 사용한 초식은 분명한 태행검법이 라 달리 의심할 길이 없었다. 원가량은 혼전 중에서도 조추수의 검법 을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조추수가 다른 무공을 익혔음을 더욱 상상하 기 힘들었다. 이는 배간과 공손월 등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디 그들뿐이랴. 누구보다도 조추수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궁조생의 놀라움은 더욱 컸고, 갈웅휘와 뇌가명 등은 놀라움을 넘어서 질시의 눈길을 조추수에 게 주곤 했다. 조추수는 이들의 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천심장의 비밀을 실토할 수는 없는 일.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문량은 마교의 무리가 방두교를 도우러 가는 고수들을 공격한 것 에 의혹을 갖고 태행검파의 일행과 동행하기로 했다. 길을 가던 중 문득, 원가량이 여번에게 다가가 물었다. "청하방주 왕측의 아들이 그대와 같이 동행했다던데, 그는 어찌 되 었소?" 청원에서 만났던 청하방도의 부탁을 떠올려 한 말이었다. "글쎄요... 워낙 경황이 없던 터라... 아마 우리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저런! 왕 방주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군." 원가량은 왕측의 호방한 모습을 떠올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 * * 휘리릭! 휘-익! 싸늘하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가르는 검풍이 사방으로 예기(銳氣)를 뿌리고 있었다. 미약한 별빛만이 근근이 시야를 트는 어둠 속에서 조추수는 이제껏 배운 육십사 초의 태행검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삼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선 공손월이 안광을 번득이며 조추 수의 검법을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추수는 어려서부터 힘이 남달랐다. 지금 그가 휘두르는 검엔 대단한 힘이 실려 있구나. 본 파의 조사께서도 남다른 신력으로 태행검법을 완성하셨으니, 추수가 아니면 누가 본 파의 검법을 대성하여 무림에 이름을 떨칠 수 있겠는가?' 공손월은 흡족한 표정으로 조추수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 다. 그는 사형제간의 권력 암투에 환멸을 느껴 일부러 태행산을 떠난 인 물이었다. 사문의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대신 청양산의 취산장에 은거하면서 태행검법을 익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십 년이 넘도록 검법 수련에 매진해도 태행검법을 완전히 터 득하지 못하여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대에 기대를 하려고 해 도 제자들 중에선 검법에 대성할 인재가 없는지라 더욱 고심하던 차였 다. 이런 그에게 오늘 조추수가 보여 준 무위는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조추수의 검에 천심장의 기이한 내공 이 실려 있음을 공손월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몽산을 벗어나 방가장으로 향하던 일행은 날이 저물자 이곳 분수의 강변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원가량은 여문량 과 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대 제자들 또한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원가량과 여문량의 얘기를 경청하 고 있었다. 다만 조추수만이 흥미를 잃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려 하였는데, 공손 월이 몰래 손짓하여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공터로 조추수를 데려온 것이 다. 공손월은 조추수에게 다짜고짜 태행검법을 차례로 시전토록 명했다. 조추수는 사숙의 명이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추수는 검법을 시전하면서도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공손월이 그의 무공이 급진전하게 된 연유를 날카롭게 캐묻는다면, 적 절히 회피할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법 연무를 끝내고 약간 거칠어진 숨결을 고르는 조추수에 게 공손월은 그러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본 파의 검법은 날카롭고 세세한 변화에 진의(眞意)를 두고 있으나, 이는 절묘한 힘의 분배가 필수적이다. 넌 이미 요점을 깨달아 검로(劍 路)에 담고 있으니 본 파에 기재가 탄생한 셈이야. 참으로 기쁜 일이 다. 너야말로 조사님이 남기신 칠십이 초의 태행검법을 완전히 터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임이 분명하다." 공손월에게서 칭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지라 조추수는 일순 응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사님께서는 칠십이 초의 태행검법을 남기셨지만 이제껏 후반 팔 초식은 아직 제대로 익힌 이가 없었지. 우리 사형제의 대에 이르러서 도 마찬가지였어. 이를 애석하게 여겨 난 이제껏 취산장에 머물면서 검법 연마에만 매진했지만 겨우 세 초식을 더 터득했을 뿐이야." 공손월이 손을 내밀자 조추수는 검을 건넸다. 덩치와 힘이 유별난 조추수의 검은 동문들의 것보다 반 자 이상 길 었다. 길이만큼 묵직한 장검의 무게에 공손월이 기쁜 빛을 띠었다. "그렇지. 조사님이 쓰시던 검 또한 이렇게 무거웠을 거야." 검을 들어 허공에 두어 번 휘두르던 공손월이 나직이 말했다. "지금 내가 펼치는 초식을 잘 살펴보거라. 특히 각 초식마다 어떤 특징이 있는지에 유념하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공손월이 벼락같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검 을 내질렀다. 한 걸음에 일곱 번을 내지르고 회수하는데, 낮에 구화성을 상대로 펼친 그 검초였다. 그런데 검을 뻗는 수법이 기이하였다. 일직선으로 상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팔을 약간씩 굽혀 검신(劍 身)으로 상대를 밀듯이 비스듬히 찌르고 당기는 것이, 마치 톱질을 하 는 동작과 유사했다. 공손월은 다섯 번이나 자세를 바꾸어 가며 계속 초식을 펼쳤으나, 이와 같이 검을 내지르는 기법은 여전하였다. 한 순간, 공손월의 다리가 갈지자형으로 꼬이더니 검법이 일변하여 사방으로 어지러이 검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검이 일으키는 파공음 속에 검광이 파묻혀 조추수의 시선을 어지럽 혔다. 공손월은 삽시간에 십이 검을 연속하여 내지르고 휘둘렀는데, 조추 수의 눈엔 마치 동시에 사방을 찌르고 베는 것처럼 보였다. 조추수는 이처럼 빠르게 검을 사용하는 초식을 배운 적이 없어, 입에서 절로 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공손월의 검법은 또 한 번 일변하였다. 이제까지처럼 상체를 높여 신속하게 검을 휘두르던 것과는 달리, 갑 자기 그의 신형이 비틀거리듯이 낮춰지며 검을 가슴에 감싸듯이 안았 다. 그가 교묘하게 몸을 비틀자 검은 그의 몸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 았다. 그는 이 상태로 몇 걸음을 비틀거리며 이동하였는데, 마치 술에 취 한 사람과도 같았다. '취팔선보법(醉八仙步法)일까?' 강호의 기인들 중에는 취팔선보법과 취검(醉劍)을 쓰는 이가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공손월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 어올랐다. 동시에 쭉 뻗은 검은 귀기 어린 살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과도 같은 탄성을 토했다. '검이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니 어느 부위를 공격해 올 것인지 전 혀 예측할 수가 없구나.' 어느새 공손월의 신형은 처음의 움츠린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이한 보법에 따라 공손월의 신형은 옆으로 튀기도 하고, 어떤 때에 는 바닥을 구르기도 했는데, 검을 다섯 번 더 내지르고서야 끝을 맺었 다. "이 검은 내가 사용하기엔 다소 무겁군." 전력을 다했음인지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방금 공손월이 시연한 검법은 이제껏 조추수가 배워 온 검법과는 천 양지차였다. 조추수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서운 검법이군요. 이토록 놀라운 검법이 우리 태행검파에 있었다 니!" 조추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 나왔다. 이에 공손월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방금 보여 준 장강유사(長江流巳), 가금불상(呵禁不祥), 교룡둔 장(蛟龍遁藏)의 세 초식은 태행검법의 후팔초식의 일부에 불과하지. 태 행검법의 정화는 후팔초식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초식마다 독 특한 변화를 담고 있어 태행팔변(太行八變)이라고 한단다. 애석하게도 본 파엔 이제껏 태행팔변을 제대로 익힌 이가 없었어. 게다가 사십여 년 전 사문에 불미스런 일이 생긴 후론 나머지 다섯 초식의 검보(劍 譜)마저 사라졌으니..." 공손월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멀리서 늑대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쌀쌀한 가을 바람이 이마의 땀방울을 모두 날려 버릴 즈음 사색에서 깨어난 공손월이 말문을 열었다. "원래 태행팔변은 일 대 제자에게만 전수토록 되어 있다. 따라서 지 금은 네게 이 검법을 정식으로 전수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문득 공손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내가 연검하는 장면을 보고서 네 스스로 검법을 습득한다면 문제삼 을 이가 없겠지." 공손월은 다시 세 초식의 검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별빛 에 반사되어 번득이는 검광이 바닥에서 이는 먼지 사이로 언뜻언뜻 드 러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검풍과 옷자락 소리가 아늑한 가을 정취를 흩어 버리는 것이 아쉬웠 는지, 어디선가 밤부엉이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사숙이 사질에게 친히 검법을 전수하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공손 월은 사문의 문규까지 어기면서 조추수에게 검법을 전수하고 있으니, 조추수로서는 감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손월은 열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조추수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조 추수는 공손월의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치미는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여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제게 검법을 전수해 주시는 사숙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의도? 격식에 얽매여 해야 할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하하!" 공손월은 소매를 떨치며 뒤돌아서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모두의 마음이 초롱초롱한 별과 같다면 세상에 환난이 어디 있으 리..." 공손월의 흐느적거리는 걸음과 웃음이 조추수의 가슴을 묘하게 뒤흔 들었다. 하나 감흥도 잠시, 조추수는 종종걸음으로 공손월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난 후 근처의 풀숲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몸 을 일으켰다. 뇌가명과 황보숭이었다. "사형은 사부님에게서 저 삼 초의 검법을 전수받은 적이 있습니까?" "쳇! 장강유사, 가금불상 같은 초식은 오늘에야 처음 듣는 것이야." "사부님은 어째서 조 사제에게 검법을 전수하는 걸까요?" "알게 뭐냐? 너무하시는군. 평소에도 사부님은 조 사제에게 필요 이 상으로 잘 대해 주셨어. 도대체, 도대체 사부님이 나보다 조 사제를 편 애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야." 뇌가명은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발을 두어 번 굴렸다. "흥! 감히 약화 사매를 넘보고도 모자라 사부님에게서 검법까지 전 수 받아? 두고 보자, 조추수!" * * * 박에는 마른 잎이 걸려 있고요 (匏有苦葉) 분수에는 깊은 나루가 있어요 (汾有深涉) 깊은 물은 나룻배 타고 건너고 (深則) 얕은 물은 옷을 걷고서 건너요 (淺則揭) 분수의 물결이 출렁이고 (有汾盈) 까투리 우는 소리 들리네요 (有雉鳴) 물결은 출렁여도 차축은 젖지 않고 (汾盈不濡軌) 까투리는 울면서 수컷을 찾지요 (雉鳴求其牡) 기러기 기럭기럭 울고 (鳴雁) 해가 솟아 아침이 되면 (旭日始旦) 신랑은 아내를 맞아 와야 해요 (士如歸妻) 얼음이 녹기 전에 (氷未泮) 사공이 손 흔들어 불러 (招招舟子) 남들은 건너가도 나는 아니 가지요 (人涉否) 남들은 건너가도 나 아니 감은 (人涉否) 내 임을 기다리기 때문이에요 (須我友) '왕 사저...?' 요요(姚姚)한 노래가 조추수의 귓전을 간질여 잠을 깨웠다. 불그스레 한 아침 햇살이 강 건너편 산 위로부터 부챗살처럼 뻗어 나와 눈을 부 시게 했다. 조추수는 담요에 앉은 차가운 밤이슬을 털어 내며 노래의 진원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끊어질 듯 들려 오는 노랫가락은 분수의 강가에서 들려 왔다. 다시 처음부터 반복되는 가사를 듣자니 문득 매약화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리움이 영상을 따라 가슴속 심연(深淵)에서 뭉클거 리며 피어올랐다. '약화...!'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노랫소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으스러지는 누런 풀잎을 헤치고 십여 장을 나 아가자, 바위의 저항에 못 이겨 흰 포말을 뱉어 내는 물의 아우성이 들려 왔다. 조추수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수면 위로 살짝 고개를 내민 새하얀 바위였다. 그곳엔 두 사람이 있었다. 아침 바람이 부는 대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구성 지게 노래를 부르는 여인. 왕옥진이었다. 왕옥진은 제법 차가워진 강물에 두 발을 담가 이리저리 물방울을 튀 기며 바위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엔 궁조생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어딘가 어색한 듯한 몸 가짐이었다. 왕옥진과 궁조생. 같이 있을 기회가 주어질 때면 두 사람은 항상 남 의 이목을 피해 노닐곤 하는 것을 조추수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대 부분은 왕옥진이 먼저 궁조생에게 다가갔지만, 가끔씩은 궁조생이 그 녀에게 편지를 할 때도 있었다. 조추수가 판단하기에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오 년 전이었던가? 궁조생과 왕옥진 사이에 혼담이 오갔던 적이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의 사이가 사형제들을 통해 배간과 매천악의 귀에 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천악이 혼담을 꺼냈을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궁조생은 혼 사를 거부했다. 조추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조추수뿐만 아니라 다른 동문 사형제들과 사숙들도 모르고 있 었다. 그럼에도 조추수의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했다. 강바람에 어지러이 날리는 왕옥진의 머리카락이 궁조생을 휘감는 모 습은 조추수에게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혹시나 두 사람의 눈에 띄어 방해가 될까 저어하여 조추수는 발걸음 을 돌렸다. 갑자기 자신이 매약화와 더욱 멀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풀어진 옷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리 고 잦아들었다가 오히려 더욱 또렷이 들려 오는 노래가 조추수의 심기 를 더욱 어지럽혔다. 기러기 기럭기럭 울고 해가 솟아 아침이 되면 신랑은 아내를 맞아 와야 해요 얼음이 녹기 전에 사공이 손 흔들어 불러 남들은 건너가도 나는 아니 가지요 남들은 건너가도 나 아니 감은 내 임을 기다리기 때문이에요 새삼스럽게 뇌가명이 더욱 미워지기 시작했다. * * * 조추수 일행이 석루산을 지척에 둔 계하구(界河口)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요란한 말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내의 외침이 들려 왔다. "여어! 거기 가시는 분은 혹시 태행검파의 궁 형과 조 아우가 아니 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리던 조추수가 반색하여 소리쳤다. "진 표두님이시군요." 일행에게 질주해 오고 있는 한 필의 말 위엔 텁석부리의 장한이 연 신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오대산에서 헤어졌던 비마표국의 진국충이 었다. 그는 조추수의 곁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는 크게 웃었다. "자네의 유별난 덩치는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이야." "그 동안 뵙지 못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조추수가 그의 손을 반갑게 쥐며 흔들자 그는 몸이 흔들거릴 정도로 대소하며 조추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그랬다네. 그런데..." 진국충이 목소리를 낮추어 조추수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자네 요즘 좋지 않은 일이 있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대낮부터 술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심란한 일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왕옥진의 노래를 들은 이후로 매약화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심해져 조추수는 어지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덕분에 술에 대한 욕구 가 한층 강렬해졌다. 급기야 주루에서 식사할 때를 틈타 사숙들 몰래 술병을 챙겨 행낭 속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론 야심한 시각뿐만 아니라 대낮에 길을 가면서도 주위의 시선 을 피해 가며 한 모금씩 마시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지 금도 조추수의 입에선 술 냄새가 풍겼고, 진국충은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이때 궁조생이 다가와 진국충에게 인사했다. "진 형, 여기서 만나게 되는구려." "이번에 방가장으로 오면 반드시 궁 형을 만나게 되리라 짐작은 했 지만, 이렇게 만나고 보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요란스럽게 나타난 데다가 진국충의 목소리가 워낙 컸으므로, 일행 의 시선이 모두 진국충에게 집중되었다. 이에 궁조생은 모두에게 진국 충을 소개했다. 인사를 나눈 후 원가량이 물었다. "무당사협께서 진 표두와 동행했다고 들었소만." "태행파의 고수 분들이 먼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저 먼 저 말을 달려 왔습니다. 제 사형들은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이 각이 지나지 않아 네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 다. 항상 과묵하고 오만한 표정의 여문량이 이례적으로 기뻐하며 그들에 게 달려갔다. 여문량이 마중하는 네 명의 중년인은 모두 청색 장삼에 문사건을 두르고 있었다. 무당사협이란 무당파의 속가제자 중 널리 무명을 떨치고 있는, 이봉 (易棒), 제양(諸讓), 혁승(赫勝), 희견(希堅)의 네 명의 고수를 일컫는 다. 그들의 배분은 진국충과 같은 이 대 제자였지만 무공 실력은 비교 가 되지 않았다. 마교의 등장에 침울했던 일행은 그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근심을 모 두 날려 버린 듯했다. 무당파는 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었으므로 무 당사협의 등장은 다가올 어려움에 대한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었다. 조추수는 궁조생, 진국충과 담소를 나누며 말 머리를 나란히 했다. 무림의 정세에 어두운 궁조생과 조추수는 주로 진국충의 말을 경청하 고 있었다. 문득 진국충이 신중한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우린 이미 사흘 전에 이곳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폈소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궁조생이 물었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석루산과 황첨산(黃尖山), 강현(崗縣), 진경령(鹿徑山令) 등을 중심 으로 한 지역에 마교의 인물들이 심심찮게 출몰하고 있소." 이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조추수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 그럼...!" 갑자기 조추수가 놀라자 두 사람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 았다. "혹시 휘월산장을 멸문시킨 흉수가 마교일지도 모르겠군요." 궁조생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며칠 전 방 대협을 돕기 위해 이곳으로 오던 많은 고수들이 마교의 손에 희생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이유없이 살겁을 저지르지는 않았 을 것이고, 지금 이곳에도 마교의 인물들이 준동하고 있다면 그들이 방 대협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겠습니까?" 진국충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벌써 마교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 있단 말이오?" "그렇소. 우린 몽산에서 장춘곡과 금응방, 그리고 황산파의 여러 고 수들과 격돌했는데, 이미 많은 고수들이 그들 손에 목숨을 잃었지요. 왕 방주의 아들도 그때 희생되었다오." "황산파?" 진국충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막두철과 황산삼귀도 있었소?" "있었소. 하나 황산삼귀는 노가장의 장양, 동민 두 분의 손에 죽었 고, 막두철은 조 사제의 검에 부상을 당한 채 도주했다오." "으음, 그랬었군요. 삼귀가 죽었다니 위안이 되기는 하오만... 막두철 그자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오." 말을 하면서 이를 가는 것으로 보아, 진국충의 원한은 조금도 사그 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휘월산장과 방가장은 미지의 흉수로부터 사전에 통첩을 받은 공통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출몰하고 있는 마교의 고수들이 방 대 협을 노리고 있다면, 당연히 휘월산장 멸문의 범인도 마교라는 결론이 나오지요." 조추수의 설명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일행은 방가장에 당도하고 있었 다. < 제1권 끝 >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0 장 흉중(胸中)의 계략(計略)은 헤아리기 제 10 장 흉중(胸中)의 계략(計略)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 방가장으로부터 석루산 정상으로 반 시진 가량 올라가면 자그마한 공터가 있었다. 주위엔 빽빽히 들어선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을의 쌀쌀한 날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녹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바위 주위엔 알록달록 단풍이 든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이 운치를 더해 주고 있어 가을의 정감을 느끼게 했다. 공터엔 두 사람이 기합성을 토하며 검을 휘두르는 데 열중이었다. 두 사람이 펼치는 검법의 동작이 일치했고, 가끔씩 동작을 멈추고 수군거리기까지 하는 게 검법을 연습하는 듯했다. 그들은 한 동작을 연습하고는 수군거리다가 다시 한 동작을 반복하기를 되풀이했다. 이 두 사람은 바로 뇌가명과 황보웅이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는 것으로 보아 검법 연마에 얼마나 열심인지 알 수 있었다. 일순간, 몸을 웅크린 채 비틀거리며 검을 옆으로 휘두르던 뇌가명이 두어 번 휘청거리더니 땅에 쓰러졌다. "사형, 괜찮아요? 이건 도무지 진도가 없으니... 에이!" 황보웅이 투덜거리며 뇌가명에게 다가갔다. 몸을 일으켜 옷을 털던 뇌가명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런, 제기랄! 몇 번을 연습해도 제대로 되지가 않아." 숨을 시근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는 뇌가명을 황보숭이 위로했다. "여러 번 보았다곤 하지만 보기만 하고서 이런 난해한 검초를 터득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사형." "알 게 뭐야? 추수 녀석의 검법 실력을 보란 말이다. 어디 너와 내가 그 녀석에게 비교가 되더냐? 사부님께서 짐작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 녀석에게 검법을 시연해 보인 것 아니겠어?" "그럼, 사형께선 추수, 그 녀석이 검법을 터득했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쳇! 사부님께서 언제 허튼 행동을 하신 적이 있느냐?" 뇌가명은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더니 검을 주워 들었다. 분수의 강가에서 공손월이 조추수에게 검법을 전수하자 뇌가명은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네가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 할 것 같으냐, 하는 오기가 생겼다. 조추수 또한 공손월에게서 따로 구결을 전수받은 바가 없었고, 공손월이 검법을 열 번 시연하는 장면을 자신도 본 셈이니 익히지 못할 것도 없을 듯했다. 그날 밤 이후로 뇌가명과 황보웅은 틈만 나면 일행과 동떨어져 검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습을 해도 도통 진도가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런대로 꾹 참고 연습을 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검로가 희미해져 이젠 자신이 연습하는 초식이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마저 들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동작마다 균형이 잡히질 않고 심지어는 기의 흐름이 역행하여 가슴이 답답한 증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었다. 태행팔변은 별도의 검로가 정해진 검법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하나의 초식마다 독특한 검의 운용 기법이 있어 그 원리를 터득하는 것이 요체였다. 공손월이 조추수에게 전수한 것은 검법의 형이 아니라 그 초식의 원리와 효용이었던 것이다. 조추수는 공손월의 시연을 통해 각 초식마다 담겨진 오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는 조추수의 검법이 이미 힘을 적절히 배분하고 초식의 효용을 깨달아 실전에 활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뇌가명과 황보웅의 검법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실상 공손월의 시연은 그들에게 있어서 우이독경(牛耳讀經)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뇌가명은 답답한 한숨을 토했다. "장강유사, 가금불상은 물론 이 교룡둔장 초식도 몸에 무리가 갈 뿐 동작이 전혀 연결이 되질 않아." "혹시 우리가 검초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부님께서 이 교룡둔장을 펼칠 땐 정말 신묘하기 그지없지 않았습니까?" "글쎄..." 뇌가명이 공손월의 동작을 떠올리려 눈을 지그시 감을 때였다. 좌측의 숲에서 황보웅의 말을 비웃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핫, 가소롭군! 교룡둔장이라고? 하긴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신묘하기는 했어. 그런데 내가 보기엔 구인유동(蚓動:지렁이가 꿈지럭거린다는 뜻)이라고 함이 딱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떤 놈이야?" 뇌가명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좌측 숲속에서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눈썹이 유난히 짙고 긴 백의청년과 검은색 궁장 차림에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여인의 용모는 면사에 가려져 있어 알 길이 없었으나, 백의청년은 시원스런 얼굴에 기세가 헌앙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장부의 늠름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청년의 허리엔 유엽도 한 자루가 걸려 있었고, 면사여인은 허리에 두 자 정도 길이의 패검(佩劍)을 차고 있었다. 백의청년이 뇌가명과 황보웅을 향해 걸어오면서 이죽거렸다. "이봐, 외다리 병신이 검을 휘둘러도 그따위로 멍청하게 쓰러지지는 않을걸." 그러잖아도 검법이 뜻대로 연마되지 않아 속이 부글부글 끓던 참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이가 불쑥 나타나 자신들을 비웃었으니 뇌가명과 황보웅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하나, 배경없이 이토록 당당하지는 못할 터. 뇌가명은 근근이 노기를 누르며 물었다. "당신들은 어느 방이나 문파의 소속이오? 방 대협을 도우러 오셨소?" "흥! 그걸 알아 무엇 하겠느냐?" 백의청년의 여전한 태도에 황보웅이 발끈했다. "네가 감히 우리 태행검파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구나!" 이에 백의청년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겨우 태행검파의 이름으로 날 겁주려 하느냐? 좋아, 말해 주지. 난 황산 천도봉에서 왔다." "황산 천도봉...!" 나직이 중얼거리던 뇌가명의 안색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황보웅 또한 깜짝 놀라 턱이 덜덜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귀하는 마교...?" 뇌가명과 황보웅은 무의식적으로 검을 들어 백의청년을 겨누었다. "쯧쯧! 놀라기는..." 백의청년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더니 옆의 면사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면사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엔 미리 작정한 바가 있었는지, 백의청년 또한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시종 여유있으면서도 짓궂은 웃음이 배어 있었다. 뇌가명은 상대가 마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안 순간, 사색이 되어 버렸다.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단 두 사람만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뇌가명은 필요 이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며 소리쳤다. "너희들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냐?" "하하, 잠시 후면 절로 알게 될걸?" 백의청년은 여전히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그는 뇌가명과 황보웅의 검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검과 석 자가 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느린 걸음으로 근접해 왔다. 석 자라면 한 번 내딛는 걸음으로도 상대를 충분히 찌를 수 있는 거리였다. 좋은 기회라 여긴 뇌가명이 대갈일성하며 백의청년의 가슴을 찔렀다. "네가 우리를 너..." 원래 뇌가명은 네가 우리를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라고 말하려 했다. 그는 '네가' 라고 말하면서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이라고 말하는 순간엔 검봉이 청년이 서 있던 위치까지 도달했는데, 청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질 않았다. 그 대신 뇌가명은 우악스런 손이 자신의 뒷덜미를 움켜쥠과 동시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때 그의 입에선 '너' 라는 말이 막 튀어나오고 있었다. 팔다리를 바동거렸지만 그의 몸은 이미 일 장 이상 뒤로 날아간 후였다. 날아간 기세가 워낙 세찼으므로 이대로 땅에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게 뻔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등부터 떨어진 바닥엔 공교롭게도 자그마한 돌부리가 솟아 있었다. 그 돌부리가 그의 양관혈(陽關穴)을 강타해 버린 것이다. "어이구!" 뇌가명의 등이 활처럼 휘어지더니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입에 흐르는 피로 보아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했는데, 이는 아랑곳 않고 두 손으로 양관혈을 감싼 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황보웅은 뇌가명의 상세가 염려되었지만, 상대가 어떤 수법으로 뇌가명을 집어던졌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기에 긴장이 되어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곧 이어 자신도 뇌가명과 같은 꼴이 되리라 생각하니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져 버렸다. 이때 백의청년이 짓궂은 표정으로 황보웅에게 물었다. "이봐, 너도 저 꼴이 되고 싶나?" 황보웅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릴 뿐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백의청년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말라구.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만 하면... 히히, 저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니 양관혈을 다친 모양인데, 아마 장가가 사내 구실 하기 힘들걸." 황보웅은 검을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뜨리더니 전신을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눈앞의 상대는 뇌가명에게 심한 수를 쓰면서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웃으면서 말을 하니, 대체 언제 어떤 수를 써서 자신을 해칠지 알 수가 없어 두려움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백의청년이 물었다. "이봐, 내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해줄 테지?" 황보웅은 지체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청년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다시 물었다. "지금 방가장엔 너희 태행검파 외에 또 누가 와 있느냐?" 황보웅은 즉시 대답했다. "무당의 사협과 신검삼호, 그리고 동철비 대협과 오씨 형제, 곡윤 대협, 철괴(鐵拐)를 쓰는 사마세충(司馬世忠) 대협, 그리고 손조, 여번, 강정, 또..." "됐다, 됐어. 어중이떠중이들의 이름을 모두 읊조릴 참이냐? 합이 몇 명인지만 말해." "예, 예, 그러지요. 그러니까... 저희가 이 산으로 올라올 때가 두 시진 전이었는데, 그때가..." 갑자기 백의청년이 황보웅의 멱살을 벼락같이 움켜쥐더니 짜증스런 어투로 윽박질렀다. "이놈 참 말이 많구나. 그냥 몇 명인지만 말하란 말이다!" "예에, 스물한 명이었습니다. 캑캑! 우리 태행검파를 제외하고 스물하나... 에고!" 대답하던 황보웅이 비명을 질렀다. 백의청년이 주먹으로 코를 사정없이 쳤기 때문이다.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백의청년은 이번엔 이를 갈면서 나직이 물었다. "태행검파를 포함해서 몇 명이야?" 당장이라도 목뼈를 부러뜨릴 것 같은 느낌에 황보웅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서른두 명입니다! 정확히 서른두 명!" "진작에 그렇게 대답했어야지." 백의청년이 잡았던 멱살을 놓으며 황보웅을 밀쳤다. 이에 황보웅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뇌가명 곁에 쓰러졌다. 뇌가명은 여전히 양관혈을 두 손으로 감싸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내상이 심한 탓인지 그의 신음성엔 힘이 빠져 있었다. 백의청년이 면사여인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의도대로 모일 만한 놈들은 방가장에 다 모인 셈이군요. 일이 수월하게 되었어요." 면사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야 원래 예상했던 일이 아니냐? 저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지. 호호호!" 청량(淸凉)한 웃음 소리가 면사를 살랑 흔들며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엔 은은한 연륜이 묻어 있어, 황보웅은 면사여인의 나이가 삼십여 세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면사여인이 백의청년에게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백의청년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후 쓰러져 있는 황보웅에게 다가와 물었다. "조추수란 녀석도 이곳에 있느냐?" 황보웅은 백의청년이 갑자기 조추수의 이름을 거론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자칫 지체하면 목숨이 달아날까 두려워 즉시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그 녀석의 일검에 황산파의 막두철이 결국 죽고 말았어. 듣기로 나이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무공이 그렇게 높다는 건 믿어지지 않는걸. 그 녀석이 태행검파에 입문한 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 "그게..." 황보웅은 기억이 나지 않아 초조한 표정으로 백의청년을 힐끔 쳐다보았다. 백의청년이 눈을 부라렸다. 이에 황보웅은 울상이 되었는데, 갑자기 아! 하며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십 년쯤 되었습니다. 저희 대사형이 그를 태행산에 데리고 왔지요." 백의청년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너의 대사형이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이름을 대라, 이름을!" 황보웅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궁조생입니다!" 이 순간 면사여인이 움찔하더니 그녀의 소맷자락이 거세게 펄럭였다. "궁조생이라..." 백의청년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면사여인을 뒤돌아보았다. 면사여인은 무엇 때문인지 눈을 지그시 감고 묵묵히 서 있었다. 문득, 백의청년이 황보웅 앞에 쪼그려 앉으며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이제 알고 싶은 건 다 알았으니... 너희 둘을 어떻게 처리할까?" 황보웅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옆에서 신음하던 뇌가명도 이 말엔 고통조차 잊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백의청년의 입을 주시했다. 잠시 동안 백의청년이 묘한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등줄기에 땀이 후줄근하게 흘렀지만, 두 사람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후들후들 떨며 간절한 눈빛으로 선처를 호소할 뿐이었다. 백의청년은 이런 두 사람의 처지를 즐기려는 모양이었다. 이때였다. "천아." "예, 사고(師姑)." 면사여인의 부름에 백의청년이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곧 이어 여인이 그의 귓전에 대고 소곤거리자 백의청년이 산 아래쪽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과 같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희를 살려 줄까? 말까?" 도대체 상대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해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인 양 말을 하지 못했다. 이에 백의청년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흥!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죽여 달라는 뜻이로군." 황보웅과 뇌가명이 화들짝 놀라며 애원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고?" "예, 예! 귀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까? 뜻을 이루었으니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하하하하!" 갑자기 백의청년이 주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더니 정색하여 큰 소리로 호통했다. "내가 누구냐? 마교의 인물이 아니더냐? 제기랄, 내가 너희를 살려 준다면 마교의 인물로서 체면이 어떻게 서겠느냐?"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허리의 유엽도를 빼어 들었다. "그저 목을 길게 늘이고 극락 왕생(極樂往生)이나 기원하거라. 아프지 않게 잘라 줄 테니까." 두 사람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문득 뇌가명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과연 마교 놈답구나.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이때였다. "거기 멈추거라!" 산 아래쪽에서 대갈일성과 함께 두 개의 신형이 공터로 급히 달려왔다. 백의청년과 면사여인, 그리고 뇌가명과 황보웅 두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순간, 뇌가명과 황보웅의 안색이 활짝 펴지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사부님!" 그 두 사람은 공손월과 방두교의 아들 방일광(龐一光)이었다. 백의청년이 공손월을 보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몸놀림을 보아하니 보통 고수가 아니로군." 그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공손월이 지척에 이르러 뇌가명의 표정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가명, 상처가 깊으냐?" "전... 견딜 만합니다. 이들은 마교의 주구이니 어서 죽여 버리십시오." 이에 공손월이 백의청년을 노려보았다. "대담하구나. 감히 단둘이서 여기에 나타나다니." "흥! 방두교나 태행검파를 안중에 둔다면 마교의 체면이 서지 않지." 백의청년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하자 공손월은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 말만큼이나 실력이 따라 주는지 보자." 공손월은 지체 않고 백의청년을 공격했다. 이에 청년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허리의 유엽도를 꺼내 들어 공손월의 검을 맞아 갔다. 두 사람의 동작은 빠르기 이를 데 없었다. 불과 한 호흡 사이에 오 초식을 주고받았는데, 검과 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여섯 번째의 초식을 펼치자 공손월의 장검은 상대의 유엽도와 처음 부딪치게 되었다. 쨍!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손월의 장검이 부르르 떨렸다. 연이어 상대의 유엽도가 검신을 타고 내려오면서 자신의 팔을 노리는 게 아닌가? 공손월은 다급히 검을 떨쳐 상대의 유엽도를 밀어 내며 뒤로 물러났다. '어린놈이 대단한 공력을 지니고 있구나. 그리고 도법의 변화가 교묘(巧妙)하여 태행팔변이 아니라면 상대하기 어렵겠다. 나의 제자뻘밖에 되지 않는 놈조차 나에게 뒤지지 않는 무공을 가지고 있으니, 마교엔 이런 인재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공손월이 내심 이런 놀람과 감탄을 반복할 때, 백의청년이 면사여인에게 소리쳤다. "사고(師姑)님, 이자의 무공이 뛰어나서 제가 감당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어요." 면사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때, 사부가 나타나자 용기를 얻은 황보웅이 어느새 여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흥! 비록 여인이나 요망한 마교의 무리이니 그냥 보내 줄 수 없다!" 상대가 여인인지라 얕보는 마음이 든 황보웅은 씩씩하게 검을 빼어 들어 여인을 겨누었다. "여인임을 감안하여 반항하지 않는다면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 제법 여유를 갖고 자신만만하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면사여인은 아무런 대꾸를 않고 조소하는 눈빛으로 황보웅을 잠시 응시한 후 몸을 돌려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것이!" 황보웅은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은 척도 않자 노기가 치솟아 검으로 면사여인의 등을 찔러 갔다. 하나 괴이하게도 여인은 그리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숲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어?" 예상치 못한 결과에 황보웅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의청년은 매몰찬 공격을 퍼부어 공손월을 물러서게 한 후, 재빨리 면사여인이 사라진 곳으로 도주해 버렸다. 마교의 두 사람이 사라지자 공손월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뇌가명에게 다가갔다. 뇌가명은 여전히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구나. 이런, 그리고 허리를 다친 게냐?" 뇌가명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양관혈 부위가..." 공손월은 즉시 뇌가명을 엎드리게 한 후 옷을 걷어 살펴보았다. 엉덩이와 허리 사이에 위치한 양관혈 부근에 시뻘건 응혈이 나타났다. "이런, 쯧쯧... 상처가 심한걸. 그러나 다행이다. 내가 아주 늦지는 않아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니." 공손월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마교가 방가장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공손월은 조추수에게 검법을 전수한 이후로 자신의 두 제자가 몰래 엿본 검법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태행팔변을 익히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뇌가명이나 황보웅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지라, 태행팔변을 무리해서 수련하면 오히려 몸에 해로움을 끼칠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방가장에 이르자 두 제자를 불러 검법 수련을 하지 말도록 훈계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들이 몰래 검법을 수련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 공손월은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방일광과 동행하여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산 중턱에 이르자 쩌렁쩌렁한 웃음 소리가 들려 급히 달려오던 중 백의청년이 두 제자를 죽이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공손월이 뇌가명에게 그윽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네가 한 말을 다 들었다." 이 말에 뇌가명과 황보웅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이쿠! 우리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말을 다 들으셨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로 치도곤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공손월의 말에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히 소리칠 수 있는 용기를 지녔으니 내가 제자를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 사람은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해가 지면서 어스름한 어둠이 산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공손월은 방가장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에게 마교의 인물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뇌가명은 상처가 심해 엎드린 채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고, 황보웅이 산 중턱에서 겪은 일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일이 수월하게 되었다고? 그게 무슨 뜻일까?" 원가량은 대청 바닥에 엎어져 있는 뇌가명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뇌가명과 황보웅에게서 마교의 인물이 나타났음을 보고받은 대청 안의 고수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특히 방두교의 안색은 파리하다 못해 거의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마교가, 마교가 왜 날 노린단 말이오?" 마교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원래 원가량이나 무당사협은 근처에 마교의 인물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두교에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두교를 지원하기 위해 오던 일부의 고수들이 희생되기까지 했지만, 그들이 통첩을 보낸 혈겁의 흉수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히 방두교에게 말하여 근심을 늘려 줄 필요는 없다고 그들은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마교가 방가장을 노린다는 사실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방가장엔 신검문의 신검삼호와 태행검파의 고수들뿐만 아니라 방두교의 죽마고우인 곡윤(曲倫), 사마세충(司馬世忠), 그리고 동철비도 있었다. 동철비는 심원에서 유권을 죽인 후, 방두교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오씨 형제와 함께 방가장으로 온 것이다. 그는 조추수 일행이 당도하는 순간, 심원에서의 치욕이 떠올랐다. 하나, 작금 방가장의 형세가 위급하므로 일단은 그 일을 접어 두고, 기회가 오면 원가량을 추궁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방두교 곁에 있던 동철비가 위로했다. "방 형, 걱정 말게. 상대가 마교라 한들 무슨 상관이겠나? 여기 무당사협과 신검문의 세 분 고수, 그리고 태행검파의 고수들이 있으니, 그들이 나타난다면 오히려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걸." 방두교와 죽마고우(竹馬故友)인 곡윤과 사마세충 또한 동철비를 거들었다. "동 형의 말이 맞네. 마교의 무리가 산서무림에 나타난들 그 수가 얼마나 되겠나? 여긴 고수가 많으니 철옹성이라 할 수 있네. 근심 걱정일랑 털어 버리게." 두 사람이 이러저러한 말로 방두교를 위로했지만, 방두교는 여전히 불안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때, 이제껏 묵묵히 듣기만 하던 녹색 장포의 세 노인 중 제일 우측에 있던 노인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흥! 만약 마교 놈들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산서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저승에 가서야 후회하게 될 것이오." 말을 한 녹색 장포의 노인은 얼굴이 우락부락했는데, 우측 뺨에 길고 깊은 자상이 있어 더욱 흉측해 보였다. 그는 신검문에서 두 번째로 강한 고수라고 알려진 신검삼호 중 녹야극(綠冶克)이었다. 그의 좌측에 서 있는 두 노인은 역시 신검삼호 중의 두 명으로 각각 제갈후(諸葛侯), 모경(牟敬)이라 했는데, 모두 생김이 평범했다. 세 사람 모두 한 자 반에 이르는 흰 수염을 멋들어지게 늘어뜨려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초로를 지나 육십에 가까워 보였다. 신검삼호의 뛰어난 검법은 산서무림에 정평이 나 있었다. 산서무림에선 신검문주 위지광(慰遲光) 이외에 가장 뛰어난 고수는 신검삼호라고 평하는 자들이 많았다. 원가량이나 배간 등도 자신의 무공이 신검삼호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방가장에 있는 고수들 중에선 신검삼호의 무공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녹야극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방두교는 약간이나마 불안감이 가시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들을 보면서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여문량이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지. 마교의 무서운 점은 고수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술수가 많다는 것이야. 그들이 어떤 술수를 쓸지 알 수가 있나.' 원가량과 무당사검, 그리고 신검삼호 등이 꺼림칙한 마음으로 마교의 의도를 생각할 때였다. 갑자기 한 무사가 허겁지겁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는 흑의경장 차림의 중년인이었는데,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방두교와 얘기를 나누던 곡윤이 그를 보더니 놀라 물었다. "자넨, 상명(桑明)이 아닌가?" 상명이라 불린 중년인의 발이 옮겨질 때마다 핏빛 자국이 선명히 찍히고 있었다. "장주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진경령 주위엔 마교의 무리들이 득실대고 있습니다. 벌써, 벌써... 본 장의 여러 무사들이 그들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곡윤이 대경 실색(大驚失色)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뭣이라고? 자세히 말해 보라." 그러나 상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힘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곡윤이 그를 안아 일으키자 상명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장원 주위에 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나... 모두 죽일 것이라고..." 그는 억지로 몇 마디의 말을 더하려다 기침을 연신 해대더니,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고는 기절해 버렸다. 동철비가 소리쳤다. "제기랄, 그들이 노린 건 곡 형이었군!" 곡윤이 비명과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대청 밖으로 달려가려 했다. 이에 무당사협이 소리치며 곡윤을 가로막았다. "곡 대협, 잠깐만 기다리시오." 곡윤이 다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그는 조급함을 참지 못해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당사협이 좌중을 둘러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쉽사리 단정할 일은 아닌 듯하오." 동철비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무당사협 중 이봉이 신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건 우리를 끌어 내려는 마교의 술책인 듯하오." 동철비는 곡윤의 일가가 위험에 처하자 오랜 친우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의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져 이봉의 말에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요. 생각해 보시오. 이제껏 그들은 패환도 구예와 이화창 이각, 그리고 휘월산장을 차례로 멸문시켰소. 그리고 휘월산장의 경우 여러 고수들이 관무목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소. 그렇다면 이번엔 보다 많은 고수들이 자신의 목표 인물을 돕고 나서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게 아니겠소? 그들은 이런 판단하에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방법을 쓴 거요. 우린 빨리 곡 형을 도와 마교를 물리쳐야 하오." 이번엔 무당사협 중 제양이 말했다. "그들이 곡 대협의 일가를 노렸다면 굳이 성동격서의 병법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예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누구를 노리는지 우리가 알 수 없잖소? 그런데도 그들이 방 대협께 통첩을 보내 세인의 이목을 끈 건 분명 다른 속셈이 있는 겁니다. 그들은 이곳 방가장을 공격하기 위해 곡 대협 일가를 이용하려는 게 분명해요." 그의 의견에 다시 동철비가 반박했고, 또한 여기에 모인 여러 고수들중 곡윤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들은 동철비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무당사협과 여문량은 고수들이 곡윤을 도우러 방가장을 빠져나가는 걸 한사코 반대했다. 결국 동철비를 찬성하는 편과 무당사협의 의견에 동조하는 편으로 나뉘어 설왕설래(說往說來)가 계속되었다. '이거 진퇴양난(進退兩難)이로구나.' 방두교는 당연히 자신의 오랜 친구인 곡윤을 도와야 한다고 나서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만약 무당사협의 말대로 마교의 계략이라면 자신의 일가가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한편, 이들의 주장을 듣고 있는 곡윤은 조급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 자신의 의견 피력에 열중하고 있는 좌중의 고수들이 얄밉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제기랄. 당신들이야 토론할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일은 내 일가의 목숨이 달린 문제란 말이다. 내 마누라와 아들딸이 모두 그곳에 있단 말이다. 너희가 나라면 이렇게 입으로만 앞뒤를 가리겠느냐? 일단 가보고 확인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곡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의 식솔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에야 결론을 낼 참이오?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나 혼자라도 가야겠소." 그가 화를 내며 자리를 뜨려 하자 동철비가 급히 소매를 부여잡으며 말렸다. "곡 형,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잠시만 참게나. 자네 혼자 가면 죽임을 당할 게 뻔하지 않는가? 저들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 혼자라도 자네를 따라감세." 이어 좌중에게 말했다. "조금 전 황보웅이 전한 말을 잊었소? 일이 수월하게 되었다고 한 말 말이오. 이는 의도적으로 우리를 이곳에 몰아 놓고 곡 대협의 일가를 공격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해요." 여문량이 가당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난 이제껏 마교의 음흉함을 수없이 겪어 왔소. 따라서 그들의 수법에 익숙해져 있지요. 그건 황보웅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일부러 그 말을 흘리기 위한 술책이 분명하오."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저 두 사람을 죽이려 했다지 않습니까? 공손형이 조금만 늦었어도 저들은 죽고 말았을 터인데, 일부로 말을 흘리다니요?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렇지 않소, 공손 형?" 공손월이 황보웅에게 물었다. "그들이 분명히 그리 말했느냐? 이건 중요한 문제이니 잘 생각해 보아라." 황보웅은 주저 않고 대답했다. "틀림없습니다. 그 마교 녀석은 분명히 '의도대로 모일 만한 놈들은 방가장에 다 모인 셈이군요. 일이 수월하게 되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옆에 엎어져 있던 뇌가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동철비는 의기 양양하여 목청을 높였다. "그것 보시오. 마교 놈들이 곡 형을 노리는 것이 분명하잖소? 어서 진경령으로 가서 곡 형을 돕도록 합시다." 그러나 여문량은 여전히 동철비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되오. 그 또한 마교의 술책이 분명하오. 장담하건대 진경령의 곡 대협 일가는 무사할 것이오. 우린 이곳을 떠나선 아니 되오." 동철비가 노해 소리쳤다. "그대는 계속 억지를 부릴 셈인가?" 여문량이 싸늘히 냉소했다. "흥! 그대는 마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우기니 참으로 한심하오." "뭐라고?" 동철비가 노성을 버럭 질렀다. 당장이라도 여문량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잠자코 사태를 살피던 녹야극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시오. 적을 맞이하기도 전에 집안끼리 싸워서야 되겠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린 마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세 사람과 사마대협을 주축으로 몇몇 고수 분들이 곡 대협을 도와 진경령으로 가도록 하고, 무당사협과 여 대협, 그리고 태행검파의 고수 분들은 여기에 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합시다. 방가장과 진경령은 그리 멀지 않으니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상호 연락하도록 합시다." 좌중은 별다른 대안이 없는 터라, 결국 이봉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결국 무당사협과 진국충, 여문량, 오씨 형제 그리고 태행검파의 고수들이 방가장에 남기로 하고, 신검삼호와 동철비, 사마세충, 강정, 손번 등 열 명의 고수들은 곡윤을 도와 진경령으로 가게 되었다. 동철비 일행이 떠나자 이봉이 방두교에게 말했다. "방 대협, 이곳의 경비를 강화해야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마교가 노리는 곳은 이곳 방가장이 분명해요. 많은 고수가 빠져 나갔으니 마교의 내습이 멀지 않은 것 같소." 방두교는 긴장한 표정이 되어 무사들에게 경비를 엄중히 하도록 지시했다. 이봉은 마교를 상대한 경험이 풍부해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자신하는 이상 그의 말이 확실하리라 생각하니 원가량 또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가량은 배간과 공손월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미 우린 가명이 상처를 입어 피해를 입었네. 무당사협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니 제자들을 단속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겠어." 배간과 공손월 또한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들을 여기 대청으로 모두 불러모아야겠습니다. 마교의 목표는 대청에 있는 방 대협이니까 이곳이 격전장이 되겠지요." "그럼세." 공손월이 뇌가명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황보웅에게 명했다. "가명을 숙소에 눕히도록 해라. 곧 의원을 보내 치료토록 하겠다. 그리고 조생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에게 이곳으로 결집하라고 전해라. 지금 당장!"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1 장 오로지 결과만이 비탄(悲嘆)을 강요한 제 11 장 오로지 결과만이 비탄(悲嘆)을 강요한다 "오라버니, 난 도무지 그 사람을 이해 못 하겠어요." "누구 말이냐?" "조추수란 사람 말이에요. 우리를 도우러 온 사람이 벌써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어떡해요? 더구나 이렇게 긴박한 때에." 여인은 정원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향하며 투덜거렸다. 명모호치(明眸皓齒)에 둥근 얼굴의 그녀는 사내로 하여금 눈을 기울이게 할 만한, 이십이 채 안 된 미녀였다. 그녀 옆엔 이십대 초반의 영준한 청년이 걸음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방두교의 아들인 방일광과 금지옥엽(金枝玉葉)인 방운영(龐雲影)이었다. 방운영은 고운 아미를 앙큼스럽게 치켜세우고 있었다. "글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흥! 이유는 무슨... 사형이 만류하는데도 아랑곳 않고 술을 마시는 그의 작태를 봤잖아요. 그가 태행검파의 제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 소릴랑 말아라. 어쨌든 그는 우리를 도우러 온 사람이다. 나중에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지도 모를 일이지." "쳇! 하늘이 두 쪽나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방운영은 불쾌한 표정으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들이 대청에 이르렀을 때엔 무당사협과 여문량, 그리고 태행검파의 모든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뇌가명과 조추수가 자리를 비웠는데, 원가량은 궁조생에게 조추수의 행방을 다그치고 있었다. "추수는 어디에 있기에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거지?" 궁조생과 나머지 이 대 제자들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조생! 추수는 어디에 있느냐? 왜 대답하지 않는 거냐?" 그러지 않아도 원가량에게 미움을 사고 있는 조추수였다. 조추수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음을 얘기한다면 원가량이 어떤 벌을 내릴지 몰라 궁조생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는 궁조생이 딱해 보였는지 나신이 대신 나섰다. "추수는 술에 취해 상방(廂房)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나신의 대답을 듣는 순간, 원가량은 노기가 극에 달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뭣이?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단 말이냐? 이런 막돼먹은 놈 같으니. 웅휘! 당장 가서 그놈을 끌고 오너라. 오늘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다. 어서 끌고 와!" 갈웅휘는 짐짓 근심스런 눈길로 궁조생과 동문들을 둘러본 후 대답했다. "예, 사부님." 이 광경을 보며 방운영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방일광에게 나직이 소곤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작자는 이제 혼쭐이 나겠네요." 갈웅휘가 막 대청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으-악!" "적이다!" 갑작스런 비명이 대청 밖에서 터져 나왔다. 마음을 졸이던 방두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왔구나! 마교 놈들이 왔어!" 무당사협과 여문량 등도 분분히 일어나며 검을 빼 들었다. 상황이 급전하자 원가량은 갈웅휘를 부르며 소리쳤다. "웅휘! 이리 오너라. 태행검파의 모든 제자들은 마교의 악적들이 눈에 띄는 대로 주살하여라. 절대로 손에 사정을 두지 말라." 태행검파의 제자들이 원가량, 배간, 공손월을 중심으로 막 원진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아하하하하!" 우렁찬 광소성(狂笑聲)과 함께 십여 개의 신형이 대청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일 먼저 뛰어든 이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신법이 대단하여 한눈에 절정의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문량과 장양, 동민 등이 백발노인에게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세 사람은 모두 검법의 고수들이라 그들이 휘두르는 세 자루의 검은 백발노인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무당사협은 뒤따라 날아든 마교의 인물들을 상대하려 분분히 흩어졌다. 백발노인을 뒤따라 대청으로 들어선 이는 구화성과 용문원, 등고와 금응방, 장춘곡의 인물들이었으며, 그 외에 흑의면사여인과 훤칠한 백의청년 등 십여 명이었다. 방두교를 돕는 일행과 마교의 무리들이 겨루게 되자, 장내는 삽시간에 혼전(混戰)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사태는 한 순간에 마교에게 기울고 말았다. 여문량과 장양, 동민이 펼친 검세는 물샐틈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노인은 힘들이지 않고 빠져 나가더니, 여문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좌중을 훑어보고는 냉소하는 것이었다. "노가장의 검법이로군. 쯧쯧, 고생스럽게 여기까지 와서 노부의 손에 죽겠다는 것이냐?" 백발노인의 기괴한 신법에 놀란 여문량. 그러나 노인의 빈정거림에 이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노가장의 검법은 이미 견식한 바 있느니, 더 이상 구경하고 싶지 않구나." 백발노인은 여전히 이죽거리며 세 사람의 검진을 여유있게 벗어났다. 이어 가볍게 두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순간, 여문량은 살을 엘 듯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는 걸 느꼈다. "엣취!" 여문량은 전신에 오싹하는 한기가 스며들어 자신도 모르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여문량이 장양, 동민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 할 때였다. 백발노인이 다시 한 번 소매를 떨쳤고, 연이어 자신의 두 동료가 몸을 후들거리더니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게 아닌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여문량은 두려움이 오싹 일었다. 여문량은 자신도 모르게 목에 힘을 잔뜩 실어 소리쳤다. "음풍장(陰風掌)! 당신은 음풍노조 조천주로군!" "아하하하! 이제야 알았느냐?" 조천주가 백발을 날리며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심후한 내공이 담긴 웃음 소리가 대청을 뒤흔들었다. '그가 산서무림에 나타난 걸 알면서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 어리석은 실수를 했어...' 여문량은 내심 한탄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여문량과 비교적 가까이 있던 무당사협 중 희견은 마교의 고수들과 겨루다가 여문량의 외침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다급히 상대를 떨치며 가까이 있던 혁승에게 소리쳤다. "혁 사형, 여 대협이 상대하고 있는 자는 조천주입니다. 일단 그를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혁승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상대를 떨친 후 조천주에게 다가갔다. 혁승과 희견이 조천주의 곁에 내려섰을 때, 여문량은 체내에 침투한 한기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따라서 혁승과 희견, 두 명만이 조천주를 상대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조천주는 희견과 혁승에게 가소로운 눈길을 주었다. "너희들도 내 손에 죽으려는 게냐?" 혁승과 희견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때, 조천주의 출현을 알아차린 이봉이 곁에 내려서며 소리쳤다. "저자의 음풍장력을 조심하게!" 세 사람은 조천주를 에워싸며 무당 삼재검진(三才劍陣)의 방위를 밟기 시작했다. 방두교는 자신의 두 아우인 방두철(龐斗喆), 방두직(龐斗直)과 함께 금응방주 용문원과 쌍수도를 사용하는 인물과 겨루고 있었다. 방두교는 원가량과 자웅을 겨룰 만한 고수였고, 두 아우 또한 그에 못지않아 금응방주 용문원과 쌍수도를 쓰는 두 사람에게 밀리지 않고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상대와 겨루는 틈틈이 장내의 변화를 주시했다. 태행검파의 원가량은 박도를 사용하는 장춘곡의 한 고수와, 공손월은 장춘곡주 구화성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배간은 오씨 형제와 더불어 백의청년을 협공하고 있었는데, 조금의 우세도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당사협 중 제양은 황산박룡 등고와 겨루고 있었다. 제양의 무당검법이 현란한 검광을 뿌리며 상대를 압박해 갔지만, 등고 또한 추호도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등고의 육장(肉掌)이 제양의 검을 밀치며 우세를 점하는 듯했다. 방일광과 방운영은 방가장의 무사들을 인솔하여 장춘곡과 금응방의 고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행검파 제자들의 힘을 입어 근근이 버티기는 했지만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엔 십수명이었던 마교 무리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자, 방두교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방두철과 방두직에게 소리쳤다. "아우들! 잠시 이 두 사람을 부탁하네." 말과 동시에 그는 검을 거두고 방일광과 방두영을 공격하고 있는 마교의 고수를 물리치며 말했다. "너희 둘은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도록 해라." 방일광과 방운영은 이미 팔다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있었다. 방일광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장춘곡 무사의 공격을 막으며 소리쳤다. "아버님을 두고 저희가 어찌 여길 떠난단 말입니까?" "바보 같은 놈!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너의 어머니를 죽게 할 셈이냐? 지금쯤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르니 어서 내가 일러 둔 곳으로 어머니와 숙모들을 모시고 가거라." 방운영이 울먹였다. "아버님!" 이때, 금응방의 한 무사가 방운영을 공격하자 방두교가 급히 방운영을 안으며 일검을 내질렀다. 그 무사는 억! 하는 비명과 함께 팔을 감싸며 물러났다. "바보 같으니. 너희가 무사해야 내가 운신하기 편할 게 아니냐? 어서 서둘러라, 어서!" 방두교가 주위의 고수들을 물리치며 두 사람의 등을 떠밀듯 몰아 내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 부디 옥체 보중하십시오!" 소리치는 방일광의 두 눈엔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한편, 오씨 형제는 눈앞의 백의청년에게 이를 갈면서도 공격은커녕 뒷걸음치기에 급급했다. 백의청년의 무공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배간과 같이 협공을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밀리는 형편이었다. '이 녀석은 심원의 그 객잔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동 대협과 실력이 비슷한 배 대협과 합공을 하는데도 이렇게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백의청년은 조추수와 함께 소년을 구하기 위해 동철비와 맞섰던 보구천이었다. 또한 면사여인과 함께 황보웅과 뇌가명을 곤욕을 치르게 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보구천은 유엽도를 휘둘러 배간을 세차게 몰아붙였다. 그의 흉맹한 공격에 배간은 수비를 하기에 급급했고, 오씨 형제는 끼여들 틈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간간이 끼여들었다가 유엽도의 날카로운 기세에 호수구를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물러서기만 할 뿐이었다. 금응방의 무사와 싸우던 황보웅은 보구천을 보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갈웅휘와 이무연에게 다가가 보구천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형, 저놈이 뇌 사형을 부상 입힌 놈이오. 지금 배 사숙이 위험하니 우리가 돕도록 합시다." 갈웅휘와 이무연은 즉시 검을 거두며 보구천을 노려보았다. "좋아, 뇌 사제의 복수를 해야지." 황보웅과 갈웅휘, 이무연, 세 사람은 배간과 싸우느라 등을 보이고 있는 보구천에게 소리없이 다가갔다. 한편, 마교의 무리 중 면사여인만이 유일하게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누굴 찾는 듯이 장내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시선은 주로 태행검파의 제자들에게 쏠려 있었다. 한동안 장내를 주시하던 면사여인은 황보웅 등 세 사람이 보구천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는 싸늘히 코웃음치며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마치 공기를 가르는 제비처럼 번득이며 격전을 벌이는 군웅들의 머리를 넘어 삼 장을 가로질렀다. 그녀는 어느새 허리의 패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보구천에게 다가가던 갈웅휘는 이상한 느낌에 등을 돌렸다. 순간, 그의 동공에 쏟아져 들어오는 쾌속무비한 신형을 보았다. 그는 놀랄 사이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제야 상대의 가공할 경신술에 놀란 그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황보웅과 이무연은 면사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모른 채 보구천의 등뒤로 접근하고 있었다. 두 사람과 일 장 거리에 근접한 여인의 검이 가볍게 흔들리며 검광을 번득였다. 두 자가 채 안 되는 그녀의 검이 황보웅과 이무연의 풍부혈(風府穴)을 가리키는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이내 쓰러지는 게 아닌가? 검봉과 두 사람의 거리는 석 자 가량 떨어져 있었다. 갈웅휘는 이와 같이 적을 격살하는 수법을 처음 보았다. 두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보구천의 유엽도를 힘겹게 막아 내던 배간 또한 면사여인이 황보웅과 이무연을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경고를 하려 했지만 면사여인의 쾌속무비한 공격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두 사질을 쓰러뜨린 면사여인이 허공을 날던 기세를 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에, 배간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면사여인이 배간과 보구천 사이에 사뿐히 내려섰다. 바람결에 그녀의 면사가 펄럭였다. 순간, 갸름한 듯하면서도 둥그스름한 턱과 새빨간 입술이 살짝 드러났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그 시리도록 하얀 치아가 오히려 배간에게 깊은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나 따위는 비교될 수조차 없는 무서운 고수다!' 배간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연신 뒷걸음질쳤다. 오씨 형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배간보다 훨씬 앞서 도망가고 있었는데,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면사여인이 보구천에게 물었다. "천아, 조추수란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네가 말한 그 덩치는 어디에도 없구나."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듯합니다. 제가 이 장원을 둘러 찾아볼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보다도..." 면사여인이 방일광과 방운영이 사라진 대청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 "방두교의 아들과 딸이 저곳으로 도망쳤다. 넌 그들을 찾아 주살하여라." 보구천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고, 방두교의 목숨만 취하면 될 일이지 그의 아들과 딸까지 죽일 필요가..." "네가 나의 명을 거역하려느냐?" "아, 아닙니다." 면사여인의 얼음장 같은 호통에 보구천은 몸을 움찔거렸다. "저기 학창홍(鶴蒼弘)과 같이 쫓아가서 둘을 죽여라."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박도를 휘두르며 원가량과 한창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춘곡의 고수였다. 보구천이 학창홍을 도와 원가량을 물리치고 대청을 빠져 나가자 면사여인은 지체없이 신형을 번득였다. 그러더니 어느새 방씨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방두교와 겨루던 용문원이 뒤로 물러나자 면사여인이 소리쳤다. "방두교는 내가 직접 죽이겠다. 용문원, 너는 수하들을 이끌고 방씨 일가의 피붙이를 한 명도 남김없이 주살하여라." 그녀의 말에 방두철과 방두직이 노해 부르짖었다. "독한 년이로구나!" "우리가 너희 마교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힘없는 사람들마저 죽이려 한단 말이냐?" 반면, 방두교는 말없이 면사여인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면사여인이 방두교를 응시하며 냉소했다. "방두교, 이제 이십 년 전의 혈채를 받겠다!" 순간 벼락맞은 사람처럼 방두교의 전신이 격하게 떨렸다. "과연 그랬었구나. 그때 확실히 삭초제근(削草除根)했어야 했는데..." "흥!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있군." 면사여인은 가볍게 검을 떨치며 방두교에게 다가갔다. 이때 방두철과 방두직이 먼저 나서서 검을 휘둘렀다. "마녀! 여기서 너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어 주겠다." "흥!" 두 사람의 검이 면사여인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면사여인은 두 사람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냉소하며 시선은 여전히 방두교에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패검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의 검봉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일었다. 그 검기가 정확히 방두철과 방두직의 미간을 향해 폭사되었다. 두 사람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에겐 피할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신형이 면사여인을 찌르던 자세 그대로 멈칫하더니 이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 두 동생의 허망한 죽음에 방두교가 경악성을 터뜨린 순간, 면사여인의 검에서 솟구친 검기는 어느새 방두교의 미간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장춘곡의 고수를 상대하던 궁조생은 면사여인의 일검에 황보웅과 이무연이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하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나 거리가 멀었고 당장 눈앞의 상대도 처리하기 힘든 상황이라, 안타까운 마음뿐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면사여인이 궁조생의 근처에 있던 방씨 형제를 죽이고 방두교마저 죽이려 하자 눈앞의 상대를 제쳐 두고 달려들었다. 궁조생은 전신의 힘을 검에 실어 면사여인의 등을 찔러 갔다. 면사여인은 등에도 눈이 달린 듯했다. 그녀는 아직 방두철의 몸에 닿지도 않은 검을 회수해 등을 돌리지 않은 자세로 궁조생에게 검을 휘둘렀다. 면사여인의 검봉이 자신을 향한다고 느낀 순간, 궁조생은 방두교의 미간에 미세한 혈흔이 이는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확 돋았다. '휘월산장! 바로 이 여자였구나!' 혈겁을 일으킨 흉수가 일개 여인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면사여인의 검은 궁조생의 우측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피가 솟구치고 궁조생은 화끈한 통증과 함께 검을 놓쳤다. 하나 그는 통증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전신을 강타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나직이 냉소하며 다시 검을 찌르는 면사여인의 흐릿한 신형이 궁조생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검봉이 크게 확대되어 동공을 가득 메울 때야 비로소 궁조생은 자신을 뒤덮는 죽음의 그림자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나 할까? 궁조생을 찌르기 위해 지척에 이른 면사여인이 갑자기 놀람의 탄성을 지르며 검을 회수한 것이다. 앞으로 내지른 검의 관성을 누르기 위해 뒤로 한바퀴 회전하는 그녀의 자태는 한 마리 나비인 양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신형을 고정한 후 궁조생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면사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눈빛은 물살을 가르는 작살처럼 궁조생의 전신을 꿰뚫을 듯했다. 면사여인이 갑자기 검을 거둔 이유를 몰라 궁조생이 어리둥절할 때, 여인의 옥음(玉音)이 면사를 흔들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갑자기 나의 이름을 왜 묻는단 말인가?' 난데없는 질문에 궁조생은 눈을 크게 치켜 떴다. 궁조생이 머뭇거리는 사이 면사여인이 다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궁조생이 아닌가요?" 상대는 수차례 혈겁을 일으킨 희대의 마녀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궁조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내 이름을 어찌 아시오?" 궁조생의 반문에 면사여인은 검을 늘어뜨렸다. 날카롭기만 하던 그녀의 눈빛이 어느새 잔잔한 연못의 물결처럼 애잔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것일까? 그녀의 면사가 흔들거리며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몇 번 흘러나왔다. 일순간 기묘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나 이도 잠시.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별안간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방두교의 목을 베어 버렸다. 궁조생은 그녀의 잔혹함에 이를 갈며 바닥의 검을 주워 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을 베다니, 정말 악독한 마녀로구나!" 궁조생은 상대가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절정의 고수임을 안 터라 몸을 사리지 않고 검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궁조생의 검을 피하며 왼손을 슬쩍 내저었다. 부드러운 경력이 그녀의 손에서 밀려나왔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궁조생은 균형을 잃고 뒷걸음질쳤다. 이때였다. "괘씸한 놈! 감히 사고를 마녀라 칭하다니." 일갈과 함께 금응방의 한 고수가 쌍수도를 휘둘러 궁조생의 등을 베어 왔다. 그는 금응방주 용문원과 함께 방두교 형제를 상대했던 인물이었다. 궁조생은 강한 도풍(刀風)을 감지했지만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라 피할 길이 없었다. '끝장인가?' 궁조생이 내심 한탄하며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쌍수도가 궁조생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 고수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다. 바닥에 허물어지고 있는 그의 신형 뒤엔 어느새 면사여인이 서 있었다. 쌍수도를 쓰는 고수는 금응방의 부방주로 용문원을 도와 금응방의 위세를 떨쳤던 광일풍(匡一風)이란 자였다. 자신이 아끼던 수하를 죽이자 용문원이 대경하여 소리쳤다. "사고께선 왜 그를...?" 면사여인이 냉소하며 용문원의 말을 잘랐다. "누구든지 그를 죽이려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평소 면사여인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용문원인지라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감히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소란스런 소리에 잠을 깬 조추수는 이내 장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방문을 열고 회랑으로 나서자, 정원을 두른 담장 너머로 여인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경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조추수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곳엔 또 다른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는데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월동문으로 세 개의 신형이 나타났다. 조추수는 그들 중 두 명의 얼굴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방일광과 방운영, 그리고 한 명의 노부인이었다. 그들이 막 월동문을 벗어나려는 순간, "악!" 노부인이 애처로운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어머니!" 방일광과 방운영의 자지러지는 절규와 함께 월동문으로 장춘곡의 무사가 나타났다. 피가 뚝뚝 흐르는 박도를 치켜 들고 흉측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는 학창홍이었다. 연이어 월동문의 담장 너머로 여섯 개의 신형이 넘어왔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아 그들도 무시 못 할 고수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원형을 이루어 바닥에 내려섰는데, 자연스럽게 방일광과 방운영 남매를 둘러싸는 형상이 되었다. 이 모두가 조추수가 몸을 일으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창홍이 득의 만면(得意滿面)하여 소리쳤다. "하하하, 이제 너희들의 목을 가져 가면 사고께서 내게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계속될 수 없었다. "이놈들!" 조추수의 신형이 허공으로부터 떨어지며 학창홍에게 육박해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세가 워낙 세찼으므로 학창홍은 움찔 놀라 박도를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학창홍이 물러나자 조추수는 방일광 남매 곁에 내려섰다. "조 형!" 방일광은 자신의 위기를 구해 준 이가 조추수임을 알아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는 방운영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학창홍은 자신을 위협한 장본인을 알아본 순간 섬뜩해져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조추수! 너로구나!" 자신이 상전으로 모시고 있는 구화성조차도 낭패를 당했던 상대인지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이내 조추수의 손에 검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심기일전하여 부하들에게 명했다. "공격!" 장춘곡 여섯 무사의 커다란 운두도(雲頭刀)가 사나운 경풍을 일으키며 조추수를 감싸기 시작했다. 조추수는 방씨 남매를 밀치며 뛰어올랐다. 조추수는 어려서부터 검법만을 연마한 터라 적수공권의 싸움엔 익숙하지 않았다. 천심장을 수련하기는 했지만, 이는 내력상의 성취였을 뿐이었다. 물론 천심장의 수련법 중에 상대를 격하는 초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권법에 깊은 조예를 쌓은 후에나 빛을 발할 수 있는 수법들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그는 술이 제대로 깨지 않아 몸을 마음대로 가누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여섯 방향에서 무거운 운두도가 쇄도해 오자, 조추수는 일순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허둥지둥하는 조추수를 보며 학창홍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어린놈이 수련을 쌓았으면 얼마나 쌓았겠는가? 검이 없으니 결국 맹탕이 되어 버리는군.' 그는 서서히 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일도에 조추수를 격살할 기회를 노렸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도 잠시. 방씨 남매는 이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실력은 일천해서 조추수가 패하거나 죽임을 당하면 꼼짝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두 사람은 손에 땀을 쥐며 조추수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조추수가 궁지에 몰리자 두 사람은 최후의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 자구책이란 조추수를 도와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방일광은 방운영에게 눈짓한 다음 조추수를 공격하고 있는 한 무사를 공격했다. 그 뒤를 따라 방운영도 뛰어들었다. 방씨 남매가 검을 들어 두 명의 무사를 공격하자, 네 명만이 조추수를 공격하게 되었다. 일단 상대가 두 명 줄어들자 조추수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유를 찾은 조추수는 상대의 도를 피하며 천심장을 떨칠 기회를 포착하여 장력을 뻗었다. 장춘곡의 무사들은 천심장의 무서움을 모르는지라 부드럽게 밀려드는 경력을 무시하고 조추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중 두 명이 천심장에 격중되어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상대가 두 명으로 줄자, 조추수는 지체 않고 다시 천심장력으로 두 명을 격살했다. 그런 그의 귀에 방운영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내심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방일광이 등에 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있었다. 학창홍의 박도에 당한 것이다. 방운영은 검을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을 향해 학창홍의 박도가 쇄도해 갔다. '이런...!' 조추수가 다급히 천심장력으로 학창홍을 후려칠 때였다. 삐이이-익! 삐익!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이에 학창홍이 흠칫 놀라더니 몸을 날리며 남은 두 명의 수하에게 소리쳤다. "어서 철수하자!" 살아남은 장춘곡 무사 두 명이 학창홍의 뒤를 따라 줄달음질치려는 순간, "어딜 가려느냐!" 조추수가 신형을 날리며 천심장력으로 두 무사를 후려쳤다. 조추수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두 무사를 뛰어넘어 학창홍을 따라가려 했지만, 학창홍의 신형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어쩔 수 없이 조추수는 노부인과 방일광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방운영에게 다가가 위로했다. "방 소저, 어머님과 오라버니를 잃은 그대의 슬픔이 클 것이나 지금은 화급을 다투는 때이니, 잠시 슬픔을 참으시오. 대청에 있는 그대 부친의 안위가 걱정스러우니 어서 가도록 합시다." 조추수는 노부인의 시신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방운영을 설득하여 대청으로 데려갔다. 조추수와 방운영이 정원을 떠난 후 정원의 한구석 어둠 속에서 백의청년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보구천이었다. 그는 방일광과 노부인의 시체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아하! 구태여 이렇게까지 잔인한 살겁을 일으켜야 하는 걸까?" 이어 바닥에 널브러진 장춘곡 무사들의 시체를 발로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대단하구나. 이게 사고께서 말씀하신 천심장의 위력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칠공에서 피를 쏟은 채 죽어 있었다. 보구천은 천심장에 당한 여섯 구의 시체 중 하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조추수와 방운영이 대청에 이르렀을 때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대청에 있던 마교의 고수들도 호각 소리와 함께 썰물 빠지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청 바닥엔 방가장 무사들의 시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 등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대청 입구엔 무당사협이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 옆에선 여문량이 비통한 모습으로 두 구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장양과 동민의 시신이었다. 조추수는 망연자실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조추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건 방운영의 비명이었다. "아악! 아버님!" 그녀는 방두철과 방두직의 시신 옆에 엎어져 있는 목 없는 시체를 바라보고 처절하게 울부짖더니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그 목 없는 시신을 본 순간, 조추수는 휘월산장의 목 없는 시신을 떠올렸다. '그 마두가 왔었구나!' 이때, 원가량과 공손월이 비통하게 소리치며 한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이무연과 황보웅의 시신이 포개져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이무연과 황보웅을 안아 들었는데,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조추수 또한 깜짝 놀라 원가량 곁으로 다가갔다. "이 사형, 황보 사형! 사백부님, 사형들이, 사형들이... 죽은 겁니까?" 조추수의 음성이 들리자 고개를 돌린 원가량이 조추수의 뺨을 후려쳤다. "이 망할 놈! 술을 처먹고 어디에 숨었다가 이제서야 나타나는 거냐?" "사백부님, 전..." 조추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본 파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느냐? 넌 당장 죽어 마땅한 놈이다." 노기를 참지 못한 원가량이 검을 들어 조추수를 내리치려 했다. 공손월이 화들짝 놀라 원가량의 손을 부여잡았다. "사형, 고정하십시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추수! 어서 용서를 빌어라." 조추수는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사백부님. 못난 제자 행동이 방탕하여 사숙백님들과 동문들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이무연과 황보웅이었으나, 그들이 마교의 손에 희생되었음을 상기하자, 그리고 자신은 술에 취해 그들과 생사를 같이하지 못했음을 떠올리자, 조추수는 자괴하는 마음이 일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공손월이 원가량에게 말을 건넸다. "사형, 추수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고 남의 이목도 있으니 그만 용서하시죠." 공손월의 간곡한 만류에 원가량은 노기를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조추수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리가 자리인만큼 여기서 치죄하진 않겠다. 하나, 사문으로 돌아가 너의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니 그리 알아라." 여전히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조추수의 어깨를 흔들며 공손월이 말했다. "사백부님께 어서 감사드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조추수는 고개를 들어 원가량을 바라본 후 다시 숙이며 말했다. "사백부님, 감사합니다. 전..." 원가량은 조추수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매정하게 소리쳤다. "널 용서한 게 아니니 고마워할 것 없다!" 원가량은 조추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무연의 시신을 바닥에 곧게 눕히고는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못난 사부가 널 보호하지 못해 불귀의 객이 되게 했구나. 나의 잘못이 크다. 나의 잘못이 커." 그의 중얼거림을 듣자 조추수는 더욱 죄스런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조추수의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공손월 또한 비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내가 아끼던 두 제자 중 웅아는 죽고 가명은 중상을 입었느니... 아참! 가명은 어찌 되었느냐? 추수, 당장 가명을 살펴보거라, 어서!" 진국충과 제양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이봉과 혁승, 희견의 곁에 서서 근심스런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세 사람의 얼굴은 하나같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한창 운기 중인 그들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이따금씩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문득, 무당사협의 곁에서 멍청하게 서 있던 여문량이 검을 내동댕이 치더니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부르짖었다. "조천주! 반드시 널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겠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2 장 싸앗이 떨어지면 싹이 트는 법 제 12 장 싸앗이 떨어지면 싹이 트는 법 "무당사협은 지금 음풍장력의 음기를 몰아 내고 있는 중이야." 공손월은 무당사협의 머리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가리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당사협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몸의 떨림도 더욱 심해졌다. "상태가 아주 심각해 보이는군요." 궁조생은 음풍장력의 위력을 몰랐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무당사협이라 심려를 금치 못했다. "조천주의 음풍장은 정말 무섭지. 저렇게 살아서 음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야." "그렇게까지나요? 무당사협의 무공은 모두 절정에 이르렀는데도 세 명이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했으니, 저로선 조천주의 무공을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공손월의 입에서 근심에 젖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산서무림엔 조천주를 당할 고수가 없으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우리로선 산서무림의 앞날을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을 듯하구나. 그보다..." 공손월의 시선이 궁조생의 어깨로 향했다. "어깨는 괜찮으냐?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 것 같은데." "이제 피가 멎었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 그 마녀가 저를 죽이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군요." 궁조생의 말에 공손월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그녀가 널 알아보았다고 했으니, 분명 네가 만나 본 적이 있는 여인일 것이다." "그러나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생각할 수록 답답하기만 하군요." "아무튼 휘월산장의 혈겁을 일으킨 장본인은 밝혀진 셈이다." 여문량은 방두철과 방두직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시신엔 이마의 혈선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여문량의 안색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한참 동안 시신을 살피던 여문량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무서운 검법이다. 무서운 검법이야!" 이어 그는 두 동료의 시신 곁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검을 주워 들어 뚝! 부러뜨려 버렸다. "난 이제껏 검법을 헛되이 익혔어. 바보 같은 여문량아, 넌 이제껏 무엇을 했느냐?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채 미친 듯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동철비가 대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 대협!" 그가 나타나자 원가량이 놀라 소리쳤다. 동철비를 필두로 신검삼호와 사마세충 등 곡윤을 도우러 갔던 고수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 모두 이마에 땀이 흥건하여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완전히 그들의 흉계에 농락당했구나." 대청 내의 시신을 둘러보며 동철비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사마세충이 목 없는 시체에게 달려가며 부르짖었다. "방 형제, 내가 어리석어 자네를 죽게 했네. 우리가 이곳에 있었던들 자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장내의 처참한 광경에 신검삼호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서 긴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악독한 놈들이로구나!" 방두교뿐만 아니라 방두교의 아내와 아들 방일광, 그의 동생과 그 아내, 자식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고 동철비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추수와 태행검파의 사람들은 또 한 번 비감이 솟구쳐 더욱 침울해졌다. 동철비와 사마세충 등의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무렵 공손월이 녹야극에게 물었다. "녹 대협, 곡 대협을 도우러 갔던 그대들이 어떻게 다시 오게 되었소?" "우린 이곳을 떠난 지 반 시진이 못 되어 진경령에 도착했다오. 길을 가는 도중 마교의 무리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지요. 하나 그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지 않고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이었소. 곡 형의 집에 도착하니, 그의 일가는 무사하고 집 주위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더군요. 우리는 그곳에 도착한 후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는데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수효가 무척 적음을 알았지요.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세가 이상하여 우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오. 그런데 우리가 다가가자 그들은 모두 도망가는 게 아니겠소? 이에 우리가 속았음을 깨닫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지요. 여기로 오는 도중 적들의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에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녹야극은 말을 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치솟는 분기를 억누르기 힘이 들었는지 동철비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제기랄! 그놈들의 흉계가 이렇게 깊을 줄이야... 정말 간악한 모리배들이다." 여문량이 냉랭한 음성으로 동철비의 말을 잘랐다. "무당사협과 나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오." 여문량의 질책에 동철비는 화가 났지만, 잘못이 있는지라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여문량을 외면했다. 이때였다. "이 사형,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진국충의 커다란 음성이 중인의 시선을 끌었다. 무당사협 중 이봉이 운기를 마치고 길게 숨을 내쉬며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공손월이 반색하여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 대협, 음풍장에 상한 데는 없으시오?" 이봉은 공손월에게 씁쓸히 웃어 보이곤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기를 완전히 몰아 내지 못했소. 아무래도 일주일 이상은 요상해야 할 듯하오. 조천주의 무공이 대단하단 말은 들었지만 우리 세 사람이 변변히 손을 써보지도 못할 줄은 몰랐소이다. 아마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거요." 공손월이 놀라 물었다.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물론이오. 우린 조천주의 십여 초를 받아 내었지만 이내 검진이 흩어져 허점이 많았다오. 어쩐 일인지 그는 기회를 잡고서도 살수를 쓰지 않고 번번이 지나쳤기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소." 이봉은 격전의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린 그의 다섯 자 이내에 접근을 해보지도 못했소. 그럼에도 음풍장의 한기에 상처를 입고 말았으니..." 이봉의 말은 장내의 고수들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봉과 겨루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신검삼호 또한 무당사협의 일인과 겨루어 필승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무당사협 중 세 사람이 합공하고서도 목숨을 구걸받다시피 했으니, 자신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더구나 방두교의 목을 베어 간 면사여인의 검법은 또 어떠한가? "만약 그들이 우리 모두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사마세충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모두 몸을 흠칫 떨었다. 이봉이 담담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그들도 우리 모두가 모이길 꺼렸기에 성동격서의 술수로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려 했을 것이오. 만약 그들이 우리를 한꺼번에 상대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희생도 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의 말이 이치에 닿는지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혁승과 희견이 차례로 운기를 마쳤다. 이 와중에 오씨 형제가 동철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동철비가 어? 하는 소리를 지르더니 확인하듯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오씨 형제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심원의 바로 그놈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에 동철비는 득의 양양하여 원가량에게 말을 건넸는데, 이죽거리는 투가 분명했다. "원 대협, 귀문파의 조추수가 술에 취해 마교 무리와 겨룰 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오?" '그건 본 파 내부적인 문제일 뿐이데 저자가 왜 갑작스럽게 끄집어 낸단 말인가?' 기분이 나빠진 원가량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동 대협께선 무슨 연유로 그 일을 들추시는 거요? 그대가 간섭할 일이 아닌 것 같소만." "내가 귀문파의 일에 간섭할 이유는 없지요. 그러나 이는 여기에 있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이기에 말씀드리는 거외다. 내가 생각하기에 조추수는 일부러 술에 취해 마교와 싸우지 않으려 한 것 같소이다." "뭣이?" 원가량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부라렸다. 한쪽 구석에 서서 동철비의 말을 듣던 조추수는 동철비의 엉뚱한 모략에 화가 치밀었다. "당신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추수, 넌 가만히 있거라!" 원가량은 조추수를 물리친 후 동철비를 노려보았다. "동 대협, 난 이제껏 그대에게 예를 잃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당신은 본 파의 흉을 잡기에 주저함이 없으니 난 실망을 금치 못하겠소." "흉을 잡고자 하는 게 아니오. 다만 시비를 분명히 하여 화근을 없애자는 것이오." "그대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 자리에서 해명해 보시오. 만약 가당치 않는 말로써 본 파의 제자를 모략한다면 그대는 응당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원가량의 어투엔 은근히 살기마저 감돌았다. 비록 원가량은 매천악에게 장문 지위를 빼앗긴 한을 품어 오긴 했지만, 누구보다도 태행검파의 위신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천악의 제자인 조추수의 방만한 행동을 미워했지만, 그 미움이 사문의 존엄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동철비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동철비는 지금처럼 원가량이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어 오씨 형제를 쳐다보았다. 오씨 형제는 염려 말라는 눈짓으로 동철비를 안심시켰다. 이에 힘을 얻은 동철비가 당당하게 물었다. "배 대협, 오늘 마교의 무리들 중 그대와 겨룬 사람의 생김새를 확실히 기억하시겠지요?" 질문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배간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소." "여기 오씨 형제 분들도 배 대협을 도와 그 청년과 싸웠지요?" 배간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자신과 오씨 형제 세 명이 힘을 합해서도 그 청년을 이기지 못하고 쩔쩔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철비의 말이 계속되었다. "난 수일 전 심원에서 오씨 형제와 계덕유, 만보각, 도궁의 협조로 고죽검 유권과 은원을 해결한 일이 있소. 그때 날 방해한 인물이 둘 있었는데, 바로 조금 전의 백의청년과 귀파의 조추수였소." "아! 보구천이 바로 마교의 사람이었단 말이오?" 조추수가 소스라치게 놀라자 동철비는 그것 보라는 듯이 원가량에게 실눈을 뜨며 이죽거렸다. "그것 보시오. 귀파의 제자는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구려." 원가량이 조추수에게 물었다. "넌 그 녀석과 어떤 관계냐?"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조추수는 내심 곤혹을 면치 못했다. "심원에선 그와 통성명을 했을 뿐 그가 마교의 제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언행이 호방하고 정당한지라..." "알았다. 그만 해라." 원가량이 조추수의 말을 잘랐다. 조추수는 심계가 엷어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떤 불리한 말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추수는 유권과 그 백의청년을 도와 도궁을 죽이고 계덕유를 불구로 만들었단 말이오." "무엇이?" 원가량과 공손월이 대경하여 조추수를 바라보았다. "추수, 그게 사실이냐?" 분노로 인해 원가량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공손월은 난감한 기색이 되어 원가량과 조추수를 번갈아 보았다. 도궁과 계덕유는 산서무림에선 제법 협명을 떨치던 자들이었다. 그들을 죽였다면 이는 시비 거리가 될 소지가 충분했다. 더구나 조추수는 마교의 인물과 합세하여 그들을 죽인 셈이 아닌가? 동철비의 모략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조추수는 담담했다. 그는 동철비와 오씨 형제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전 당시 죄없이 죽어 가는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려 했을 뿐입니다. 저들은 무공도 모르는 아이를 죽이는 파렴치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보고서도 참는다면 제가 어찌 정파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동철비가 노해 소리쳤다. "닥쳐라, 파렴치하다니!" "추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공손월이 재빨리 조추수를 꾸짖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도궁과 계덕유를 죽인 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한푼의 보탬도 없이 자초지종을 말해 보아라." 조추수는 심원에서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조추수의 말이 계속될수록 동철비와 오씨 형제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조추수의 얘기가 끝나자 공손월이 원가량에게 나직이 말했다. "사형, 듣기로 고죽검 유권의 손에 정파의 인물이 더러 죽기는 했지만, 실은 그들이 몰래 저지른 죄과가 있었다고 합디다. 도궁과 계덕유의 일은 추수가 아이를 구하려다 일어난 불상사이니 추수만 탓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원가량의 생각도 공손월과 일치했다. 그는 동철비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상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른이 아이를 핍박함은 가당치 않은 일이외다. 이를 보고 달려든 젊은이의 협기를 어찌 마냥 탓할 수만 있겠소?" 동철비가 다시 따지듯 물었다. "그럼 조추수가 마교의 청년을 도운 건 무어라고 변명하실 참이오?" "동 대협, 그 청년이 마교의 인물이었다고 치더라도 추수가 마교와 한패라는 건 억지가 아니오?" "흥! 그 청년은 당시 조추수가 태행검파의 제자임을 알고 있었는데, 한패가 아니라면 어째서 조추수를 공격하지 않았겠소?" 조추수는 동철비가 자신을 자꾸 마교와 결부시키자 화가 나기는 했지만, 명확히 해명하지 못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등뒤에서 들려 온 교성(嬌聲)이 이런 조추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었다. "동 대협의 말은 억지에 불과해요. 조 사형이 마교와 한패라면 마교의 제자를 여럿 죽이고 절 구해 줬을 리가 없겠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방운영이었다. 부친의 처참한 죽음에 기절했던 방운영은 정신이 들자 졸지에 외톨이가 된 셈이라 막막하기만 했다. 한동안 오열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가 조추수였음을 상기하고 감사의 말을 하기 위해 조추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동철비의 모함에 조추수가 곤경에 처하게 되자 주저없이 나선 것이다. 방운영의 말은 동철비가 야기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했다. 조추수는 고마운 생각이 들어 방운영에게 머리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에 방운영은 상큼한 미소로 응대했다. 원가량이 목소리를 높여 동철비에게 비아냥거렸다. "동 대협, 이젠 추수가 마교의 제자를 죽인 건 속임수라고 우기실 차례인 듯하오." 동철비는 일순 응대를 못 하고 주위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운기를 마친 혁승과 희견이 이봉 옆에 서서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여문량이 그 곁에 있었다. 공손월과 배간은 싸늘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고, 나머지 태행검파의 제자들도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길! 말을 잘못 꺼내 망신만 당했구나.' 동철비는 체면이 크게 상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애꿎은 오씨 형제를 노려보았다. 오씨 형제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장내를 휘감고 돌자 이봉이 낮게 기침하며 화해를 주선했다. "아직 마교의 무리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다투어 좋을 게 하나도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수습하고 진경령의 곡 대협에게로 가봅시다. 그쪽이 심히 염려되는군요." 일행은 장원 내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방씨 일가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는 방운영밖에 없었다. 따라서 방씨 일족의 장원 뒤 봉분(封墳)의 수가 무려 열일곱에 달했다. 마교 무사들의 시신은 총 여덟 구였다. 어둠 속에서 분주히 처리하느라 조추수에 의해 죽은 자들의 사인(死因)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모든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일행이 진경령에 도착했을 때, 일행을 맞이한 건 장원 내부에서 군데군데 치솟는 가느다란 연기뿐이었다. "이곳도 당했단 말이냐?" 괴이하게 찢어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동철비가 제일 먼저 신형을 날려 장원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모두 죽었구나, 모두 죽었어! 잔인한 마교 놈들. 모두 죽여 버렸어!" 동철비의 외침엔 어딘지 모르게 분노보다는 공포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장원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건 정원 구석구석과 상방 등에 널브러진 시체였다. 그 시체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고, 불에 타다 만 시체도 더러 있었다. 동철비는 미친 듯이 시체 사이를 넘나들면서 일일이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마 곡윤을 찾는 모양이었다. '아아, 이렇게 참담할 수가! 그들에게 마(魔)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로구나.' 조추수는 방가장에 이은 곡윤 일가의 비극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곡 형! 곡 형! 이게 웬 말인가? 난 하룻밤 사이에 두 명의 친구를 잃게 되었구나. 그대의 처자식까지 모두 죽어 버렸으니 나중에 죽더라도 그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졌네..." 대청 안에서 동철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애써 태연하려던 사마세충이 대청으로 후닥닥 뛰어들었다. 그 또한 곡윤과는 오랜 친우였던 터라 심정은 동철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사마세충의 대갈(大喝)을 들으며 대청에 들어선 일행은 목 없는 시신 곁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철비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사마세충이 노발충천(怒髮衝天)하여 대청이 울리도록 소리쳤다. "이 마교 놈들아!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 나의 두 친구를 앗아 갔단 말이냐? 어린것들과 힘없는 여인들은 또 무슨 죄가 있기에 이토록 처참하게 죽였단 말이냐?" 그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숨을 씩씩거릴 때였다. "아!" 무엇 때문인지 동철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갑자기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모습이 겉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났으므로 중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사마세충이 그에게 다가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동 형, 자넨 또 왜 이러는가?" 그러나 동철비는 입을 벌린 채 대답을 하지 않고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사마세충이 동철비의 어깨를 잡으며 흔들었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말을 해보게." 동철비의 표정이 괴이하여 군웅들이 두 사람을 둥그렇게 에워싸며 숨을 죽였다. 말없이 떨기만 하던 동철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화급히 말했다. "난 먼저 떠나야겠소이다. 그리고 원 대협..." 심상치 않은 동철비의 태도에 원가량은 즉시 대답했다. "말씀하시오." "난 분서(汾西)의 본 가에 들른 후 태행검파로 가서 귀파의 장문을 만나 뵙도록 하겠소."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대청 밖으로 달려나갔다. "동 형!" "이보시오, 동 대협!" 사마세충과 원가량이 다급히 동철비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모습을 감추더니 곧 이어 말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씨 형제는 동철비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쫓아갔다. 동철비의 돌변한 행동에 군웅들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경황없이 떠난단 말인가?" 사마세충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동철비가 나간 대청 입구를 바라보았다. 사마세충은 친구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나 버린 동철비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문득, 무당사협의 이봉이 한탄했다. "결국 우린 마교의 농간에 완전히 놀아난 셈이 되었소." "그들은 애초에 방 대협과 곡 대협을 다 노렸던 거요. 이제껏 마교의 간악함을 겪어 잘 알면서도 당했으니 부끄럽소이다. 심히 부끄러워요..." 여문량이 덩달아 애석해 하자 사마세충은 속으로 자괴하는 마음이 일었다. '내가 눈앞의 일에 눈이 어두워 친구 두 명을 모두 죽게 했구나. 여문량의 말대로 했다면 친구 하나는 살아 있었을 것을.' "마교의 준동이 확실해졌으니 더 이상은 머뭇거릴 때가 아닌 듯하오. 우린 지금 즉시 신검문으로 돌아가 문주께 이번 일을 보고해야겠소이다. 아마 이 겁난은 산서무림의 모든 문파가 힘을 모으지 않고서는 헤쳐 나가기 힘들 것이오." 녹야극의 말에 원가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 또한 사문으로 돌아가 장문께 귀문과의 회동을 청하겠소이다." "그럼, 저흰 이만!" 신검삼호가 떠나자 일행은 태원부로 향했다. 사마세충과 오씨 형제 등은 이미 떠난 터라 일행은 태행검파의 제자들과 무당사협, 진국충, 여문량, 방운영이 전부였다. 그날 일행이 분수의 강변에서 노숙을 준비할 때였다. 여문량이 나머지 일행에게 작별을 고했다. "저도 이만 여러분과 헤어져 길을 재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여 대협! 지금은 밤도 깊었는데 어찌 이리도 급하게 떠나시려 하오? 하룻밤쯤은 우리와 같이 노숙을 해도 무방하지 않겠소?" 이봉의 만류에도 여문량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이번에 조천주에게 두 명의 형제를 잃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음식을 입에 넣어 씹어도 넘어가지 않고, 잠을 청해도 꿈속에 들 수 없을 것 같군요. 더구나 혈겁의 원흉인 마녀의 검법을 떠올리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사문으로 돌아가 저희 장주님께 상황을 알리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검법을 수련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조천주에게 복수를 할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겠지요." 여문량의 뜻이 완고하여 일행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여문량이 떠나자 이봉이 나직이 탄식했다. "여 대협의 말씀처럼 그 마녀의 검법이 정녕 대단하오. 실력으로 따진다면 조천주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군요. 검법의 흔적은 보았으되, 그 마녀의 출수를 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평생 검을 수련한 자라면 당연히 가질 만한 아쉬움이었다. 적이 어떤 인물이든 간에 고명한 검법에 대한 존경과 호기심만은 떨치지 못하는 이봉이었다. 이는 이봉뿐만이 아니라 무당사협의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봉의 탄식에 배간은 속으로 뜨금했다. 사질들의 죽음을 보고서도 도망간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배간은 속마음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고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연이은 혈겁을 조장한 흉수가 마교, 그것도 한 여인이 주도한 것임을 확인했으니, 수확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로군요." 배간의 말에 문득 제양이 아,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조추수에게 물었다. "자네, 그 백의청년의 이름이 보구천이라 했는가?" "예. 그는 분명 내게 보구천이라 밝혔지요." 조추수가 대답하자 이번엔 제양의 시선이 공손월에게 돌아갔다. 이때 이봉과 혁승, 희견 등이 덩달아 어? 하며 놀랐다. 이에 중인들은 무당사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놀라시오?" 원가량의 물음에 아랑곳 않고 무당사협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분명하지요?" "틀림없네. 나도 이제 보구천이란 이름이 기억나는구먼." 이봉과 제양의 뜻 모를 문답에 중인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중인들의 기색을 알아차린 이봉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쩌면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원가량이 급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 마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공손 대협, 귀제자의 말에 의하면, 백의청년이 면사여인을 사고(師姑)라고 불렀다고 했소. 우리가 듣기로 마교의 수괴(首魁)인 봉천생은 세 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무골(武骨)이 뛰어나 이미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들었소.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보구천이라오." "그래서 무공이 그토록 뛰어났던 거로군." 공손월이 중얼거리자 배간도 맞장구쳤다. "그 녀석의 도법이 기이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어 상대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네. 아마 봉천생에게서 친히 전수받은 것이겠지." "그 청년, 보구천이 면사여인을 사고라고 불렀다면, 그 여인은 봉천생의 사매가 되는 셈이오." "이 대협께선 마교에 대해 잘 아시니 그 마녀의 이름을 알겠구려." 원가량의 물음에 이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봉천생의 사매라면 악명 높은 비화살(飛花殺) 강월령(姜越嶺)이 있는데, 그녀는 패검을 쓰지 않아요. 두 자루의 수리검(袖裏劍)을 쓴다고 들었지요. 그리고 봉천생에게 또 다른 사매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해서...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소이다." "마녀의 무공이 그토록 대단한데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오."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소이다. 하지만 무당으로 돌아가 정파의 고수들에게 수소문을 해보면 알아 낼 수 있을 것이오." '쳇, 결국 지금은 모르는 것 아닌가? 어느 세월에 그대가 무당으로 돌아가 그 마녀의 정체를 알아 내어 우리에게 알려 준단 말인가? 지금 당장 그 마녀의 마수에 산서무림은 공멸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원가량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궁조생은 면사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저 손을 한번 놀리면 나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었다. 왜 날 살려 주었을까? 그녀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공손 사숙의 말씀대로 그녀와 난 만난 적이 있었을까?' 궁조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정체를 알 길이 없어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녀의 검에 쓰러지는 방두교의 모습이 떠오르자 여전히 가슴이 섬뜩했다. 그리고 궁조생을 찔러 오던 그녀의 검과 허공을 맴돌던 그녀의 우아한 자태,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애잔했던 눈빛... 문득, 어디선가 그 눈빛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명은 여전히 허리를 타고 올라 머리를 헤집는 고통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공손월이 담가(擔架)를 만들어 주었지만, 거친 길을 가는 여정에 허리가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말의 뒤에 늘어져 끌려가면서 행여 돌멩이에 걸릴 때면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공손월이 다가와 염려스런 표정으로 몇 마디 위로를 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뇌가명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보구천을 생각할 때마다 이가 갈렸다. 지금 다른 일행들은 모닥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자신은 동떨어진 나무 아래 홀로 누워 있는 처지라 더욱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조추수를 원망하는 마음도 일었다. '사부님이 추수에게 몰래 삼초식의 검법을 전수하지만 않았어도 그 산에 올라가지는 않았으리라. 그 산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그 녀석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이렇게 다쳤을 리도 없겠지. 도대체 추수 그 녀석이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사부님이 그런 검법을 전수하셨단 말인가?' 자신이 다친 이유를 조추수와 결부시킬수록 조추수가 자꾸만 더 미워졌다. 게다가 그와 조추수는 매약화를 사이에 둔 연적이 아니던가? 매약화를 생각하자 보구천이 황보웅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양관혈을 다쳤으니 사내 구실을 하기 힘들 거라고?' 양관혈은 체내의 양기를 끌고 가는 관문이었다. 이곳을 심하게 다치면 하반신이 마비되거나 양기의 흐름이 막혀 성 불구가 될 수도 있었다. '제기랄! 설마 그렇게 되기야 하겠는가? 약화 사매가 추수 그 녀석에게 시집가는 꼴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 하든 약화 사매를 내 마누라로 만들고야 말겠다.' 이런 생각으로 그가 조추수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사제, 이제 몸은 견딜 만한가?" 뇌가명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니 갈웅휘가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갈 사형께서...?" 다른 동문들과 마찬가지로 뇌가명 또한 갈웅휘와는 사이가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갈웅휘가 가까이 다가오자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뇌가명이 마지못해 몸을 움직이자 갈웅휘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무리하지 말거라. 허리를 다쳤으니 수삼 일은 꼼짝하지 않는 게 좋아." 그는 뇌가명의 머리맡에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문득, 그가 나직이 탄식하며 연신 애석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더니 또한 괘씸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뇌가명은 그의 이상한 언행이 이해되지 않아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애석하고 괘씸합니까?" "생각해 보아라. 어제 점심까지만 해도 이 사제와 황보 사제는 우리와 똑같이 말을 하고 밥을 먹었지. 그런데 불과 하루 저녁이 지나지 않아 마교에게 희생되어 버렸어. 난 황보 사제와는 자주 볼 기회가 없어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동문의 정이란 게 있어 슬픔이 이는 건 어쩔 수가 없어." 갈웅휘의 말에 뇌가명은 마음이 숙연해졌다. "무연은 나와 어릴 때부터 같이 무공을 익혔으니 그 정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돌아가 제수씨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실로 막막해. 무연의 어린 딸과 아들은 이제 아비 없이 살아 가야만 하니 불쌍하기 그지없어. 그리고 황보 사제를 생각해도 그렇지. 그는 앞길이 창창한 청년이 아니었나? 자네도 집에 돌아가면 그의 부모님께 사제의 죽음을 알려야 할 텐데 무어라고 말할 텐가? 울부짖는 그의 부모를 볼 자신이 있나?" "황보 사제를 생각하면 비탄지감(悲嘆之感)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 그의 부모님을 뵐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합니다." "자네가 그러할진대 공손 사숙의 심정은 오죽하시겠나? 그런데 말이야..." "..." 갈웅휘가 말끝을 흐리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까 궁금하여 뇌가명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뇌가명이 자신의 얘기에 완전히 빠져 들었음을 확인한 갈웅휘는 갑자기 분노한 표정을 지으며 격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울 적에 조추수, 그 녀석은 무얼 하고 있었지? 마교 놈들이 다 물러가고서야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지 않았느냔 말이야. 시건방진 겁쟁이 녀석 같으니라고. 사부님께선 남의 이목이 있어 그 자리에서 용서하셨지만, 그게 어디 용서될 수 있는 일이던가?" 갈웅휘가 조추수를 비난하자 뇌가명은 귀가 솔깃해져 맞장구쳤다.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 녀석은 마교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술을 핑계로 몸을 숨긴 게 틀림없어요. 우리 태행검파에 그런 녀석이 있다는 건 정말 치욕스런 일입니다." "게다가 추수는 사형에 대한 예의도 모르지. 원가장에서의 일만 해도 그래. 하늘 같은 사형에게 어떻게 주먹질을 한단 말인가? 그 녀석의 무공이 어떻게 높아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막상 적이 나타나면 술에 취해 숨어 버리는데." 갈웅휘가 원가장에서의 일을 언급하자 뇌가명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론 분노한 표정으로 짐짓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일은 우리가 나서서라도 추수가 반드시 벌을 받도록 해야 해. 이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사문의 위계 질서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야."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갑자기 갈웅휘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난 네가 약화 사매를 좋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지." 난데없이 매약화의 얘기를 꺼내자 뇌가명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약화 사매는 아름답고 발랄하니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 나도 십 년만 젊었으면 자네처럼 약화 사매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거야." 갈웅휘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빙글거렸다. 매약화의 아리따운 자태를 떠올리자 뇌가명은 갈웅휘의 말이 옳다고 여겨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형과 사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야. 말썽이 발생할 소지가 많지." 사형은 뇌가명을, 사제는 조추수를 의미했다. 갈웅휘가 이를 언급하자 뇌가명은 조추수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끓어올랐다. 이를 보며 갈웅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누가 양보를 해서 원만히 일을 해결하느냐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자넨 사형이고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지 않았나? 추수는 이제 스물다섯이야. 그럼 응당 자네가 먼저 장가를 가는 게 순리지. 그러니 당연히 추수가 약화를 양보하는 게 옳지. 그런데 괘씸하게도 그 녀석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단 말이야." 갈웅휘의 이 말이 뇌가명에겐 더없이 고마웠다. 매약화와의 관계에 대한 일에 갈웅휘가 뇌가명을 옹호하자, 그는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사문으로 돌아가면 장문께선 반드시 우릴 태사전으로 불러 경과를 물으실 거야. 그때 자네가 나서서 추수가 한 짓을 낱낱이 고하게." "제가...?" 이제껏 갈웅휘가 말한 의도를 알게 되자 뇌가명은 갈웅휘의 제안이 꺼림칙하게 여겨졌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결국 추수의 죄를 장문께 강력히 따질 사람은 나의 사부님뿐이시지. 자네도 배 사숙과 공손 사숙이 사사건건 추수의 편을 드시는 걸 보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면 다른 이들로부터 오해를 사기 십상이야. 그래서 자네더러 먼저 고하라는 걸세. 자네가 나서기만 하면 내 반드시 자네를 돕도록 하지. 그리고 나의 사부님도 추수가 한 짓을 미워하시니, 반드시 장문께 추수에 대한 치죄를 요구하실 거야." "과연 장문께서 추수를 벌할까요?" 그래도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지 뇌가명의 어투엔 여전히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갈웅휘의 어조가 더욱 은근해졌다. "물론이지. 그 녀석이 한 짓을 장문께서 알게 되면 아무리 사부 된 입장이라고 해도 변호하지 못할걸. 아니, 사부의 체면을 깎아 먹은 셈이라 오히려 미워하시게 될 거야. 그러면 자연 약화 사매의 신랑감으로 그 녀석은 제외가 되지 않겠나?" 뇌가명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할 여유를 갖도록 입을 다문 갈웅휘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했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3 장 운명의 구름은 피할 길이 없도다 제 13 장 운명의 구름은 피할 길이 없도다 불을 밝혔음에도 태사전의 내부는 어둑어둑했다. 가운데 앉은 매천악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선 탁자의 좌우엔 태행검파의 제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매천악과 가장 가까운 우측에 원가량과 곽입지가, 그리고 좌측에 배간과 공손월이 앉았고, 다음으로 서열에 따라 궁조생과 갈웅휘, 마원의, 박위 등 이 대 제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조추수는 사형제들 중 막내였으므로 매천악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야만 했다. 그의 곁엔 방운영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방두교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당시 마교의 내습을 몸소 겪은 처지라 매천악이 특별히 동석시킨 것이다. 매천악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 등 방가장의 혈겁을 겪은 일행은 침묵 속에서 매천악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추수만이 예외였을 뿐이었다. 태사전 내부의 침잠한 분위기는 아랑곳 않고, 조추수는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대전 내에 낭랑히 울려 퍼지던 사숙백들과 사부의 음성은 딴전이었다. 약 한 달 동안의 여정 내내 매약화의 생각에 잠겨 있던 조추수였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매약화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매약화의 얼굴 또한 조추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조추수에게 있지 않았다. 조추수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방운영, 바로 그녀에게 매약화는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매약화의 샐쭉한 표정에 방운영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방운영은 뜻 모를 시선을 매약화에게 주고 있었고, 이것이 매약화의 심보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따라서 매약화의 안색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화를 보였는데, 조추수는 그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매약화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조추수를 뇌가명은 괘씸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답답했는지 원가량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마교가 산서무림에서 혈겁을 조장하고 있음이 확인된 이상 본 파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게 되었네." 사색에서 깨어난 매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배간에게 질문을 던졌다. "배 사제, 자넨 그 마녀의 나이가 얼마쯤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글쎄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러나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더군요." 이때 뇌가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마녀의 나이는 서른이 넘어 보였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뇌가명에게 집중되었다. "서른이 넘었다고?" 매천악이 확인하듯 묻자 뇌가명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 마녀의 목소리와 웃음 소리를 똑똑히 들었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궁조생이 뇌가명의 말에 동조했다. "그 마녀의 음성을 기억하건대, 가명의 말대로 서른은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넌 어떻게 그리 단정을 하느냐?" 매천악은 뇌가명이 상처를 입게 된 경위를 이미 들었으나, 궁조생과 면사여인과의 대화에 대한 얘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에 궁조생은 면사여인과 잠깐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솔직히 말했다. 궁조생의 말을 듣는 매천악의 눈빛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마녀가 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예, 사부님." "흐음!" 매천악이 의미 모를 숨을 길게 내뱉을 때였다. "어?"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러느냐?" "아, 아닙니다, 사부님." 매천악의 질문을 얼버무린 궁조생은 마음속 깊은 곳을 찌르며 지나가는 괴이한 잔상(殘像)에 몸을 흠칫 떨었다. '설마 그녀일까?' 백설(白雪)처럼 희고 갸름한 얼굴에 애절한 미소를 짓던 한 여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런 궁조생의 모습에 매천악은 이상스런 눈초리를 주다가 나직이 헛기침을 하며 전내를 둘러보았다. 매천악의 헛기침은 궁조생의 사색을 여지없이 흩어 놓았다. 언뜻 정신이 든 궁조생은 어색함을 감추려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왕옥진의 눈과 마주쳤다. 왕옥진은 궁조생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궁조생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속으로 뜨끔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뒤따르는 당혹감. 이 당혹감을 덮어 주는, 약간은 힘이 결여된 듯한, 그러나 날카로운 어조가 담긴 뇌가명의 목소리에 궁조생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가 장문께 한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뇌가명이 아직 온전치 않은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대 제자가 장문에게 직언을 올리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무례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뇌가명의 발언이 못마땅한지 공손월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와는 반대로 원가량과 갈웅휘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매천악의 허락이 떨어졌다. "말해 보라." 뇌가명은 사부인 공손월의 표정을 읽고 내심 저어하는 마음이 일어 갈웅휘를 바라보았다. 갈웅휘가 염려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에 뇌가명은 다시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이번 원정에서 사백부님들과 사부님, 대사형, 여러 동문 사형제들은 생사를 같이했습니다. 원통하게도 무연 사형과 황보 사제가 마교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요. 저는 지금도 원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만, 무연 사형과 황보 사제는 사문을 위해 목숨을 사리지 않았기에 저승에 가서도 억울해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뇌가명의 말에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은 물론 매천악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그런데 동문 사형제들과 사숙백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술에 취한 채 몰래 숨어 마수(魔手)를 피하려 한 동문이 있었다면, 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매천악이 의아해 묻는 순간, 배간과 공손월이 놀라며 소리쳤다. "가명!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냐?"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추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특히 공손월의 꾸짖음은 추상같았으므로 뇌가명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때, 원가량이 배간과 공손월을 제지했다. "배 사제, 공손 사제는 가명을 나무랄 것 없네. 난 그때 추수를 용서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러잖아도 내 이를 필히 짚고 넘어가려고 했네." 비록 이제까지 사숙백들의 대화를 귀로 흘리며 매약화에게 정신을 팔던 조추수였지만, 뇌가명과 원가량의 말엔 가슴이 철렁했다. 조추수는 원가량과 뇌가명을 번갈아 보았다. 원가량이 조추수를 언급하자 매약화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원가량과 배간, 공손월 등의 표정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매천악이 언성을 높였다. "사형, 여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추수, 넌 무슨 잘못을 범했느냐?" 추수는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매천악의 시선이 뇌가명에게 향했다. "가명,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해보아라. 빠짐없이 모두 얘기하라." 뇌가명은 방가장에서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미리 수차례에 걸쳐 연습을 한 터라 그의 말은 조리있었고, 조추수의 잘못에 대해 빠진 부분이 없었다. 그의 설명을 듣는 매천악의 얼굴이 점차 굳어 갔다. 그에 따라 조추수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뇌가명이 일단 설명을 끝내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원가량이 뇌가명에게 강요하듯이 물었다. "가명, 넌 어째서 원가장에서의 일은 얘기하지 않는 거지?" "그건..." 뇌가명이 난감한 표정으로 매천악을 바라보았다. "얘기해 보거라." 굳어지던 매천악의 얼굴은 이제 오히려 평온을 찾고 있었다. 원가장에서 조추수가 뇌가명에게 주먹질한 일을 고하자, 원가량 곁에 앉아 있던 곽입지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런 막돼먹은 놈! 감히 사형을 쳐?" 매천악이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추수! 가명의 말이 모두 사실이냐?" 조추수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숙였다. 이런 조추수의 모습을 매약화가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추수! 가명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다." 매천악의 음성엔 서릿발 같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조추수는 내심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원가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막한 어조로 말했다. "장문사제, 추수의 이번 행위는 사문의 법규를 안중에 두지 않은 것이니 결코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되네." 매천악은 원가량에게 슬쩍 눈길을 주고는 다시 배간과 공손월을 바라보았다. 배간과 공손월의 난감해 하는 표정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문 그들의 모습에 매천악은 목소리에 분노를 실어 조추수를 질타했다. "추수, 네가 사문과 사부의 얼굴에 먹칠을 했구나. 네가 그리 행한 이유를 말해 보라.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넌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물론 이유없이 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약화 때문임을 어찌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는 조추수의 모습이 매천악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모양이었다. 매천악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외람되오나 소녀가 한말씀드려도 될는지요."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목소리가 매천악의 분노 어린 일성을 가로막았다. 방운영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원가량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방 소저는 외인이니 추수의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네." "물론 소녀도 외인이 타문파의 일에 간섭함은 옳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명의 은인이 공은 무시당하고 잘못만 추궁당하는 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는 없군요." 방운영은 원가량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당당했다. 그녀는 원가량을 무시하고 매천악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원가량은 뜻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방운영이 나서자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생각 같아선 호되게 나무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지라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노기를 억누르며 냉랭하게 꾸짖었다. "방 소저, 여기가 어디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려 하는가!" 어느새 냉정을 회복한 매천악이 원가량의 의도를 가로막았다. "사형, 그 동안 방 대협과 본 파와의 친분을 생각하면 굳이 방 소저를 외인이라 할 수만은 없습니다. 방 소저, 그대는 양친을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아니 과히 여장부라 할 수 있네. 지하에 계신 방 대협께서도 그대의 모습을 본다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되는군. 할말이 있으면 어서 말해 보거라." "저를 어여삐 보아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방운영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자 매천악은 흐뭇하게 웃었다. 방운영의 말이 계속되었다. "제가 마교의 무리에게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조 사형께선 마교의 고수들을 여섯이나 죽이고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셨어요.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은덕 중에서 구명지은(救命之恩)에 따를 것이 무엇이겠어요? 여기 원 백부님과 여러 숙부님들, 그리고 무당사협과 노가장의 여문량 대협이 방가장에 계셨지만, 그 많은 분들 중에서 저희 방씨 가문에게 구명의 은혜를 베푸신 분은 오직 조 사형 한 분뿐이십니다. 그의 이런 공에 비한다면 다른 잘못은 정녕 사소한 것이 아니겠어요?" 매천악은 방운영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 계집년이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구나!' 원가량은 장문에 대한 욕심이 있어 공손월을 반드시 자신의 편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는 공손월이 조추수를 편애함을 알고 자칫 매천악과 가까워질까 두려워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그는 조추수와 뇌가명의 사이를 갈라 놓으면 자연 매천악과 공손월의 사이도 소원해지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갈웅휘를 통해 뇌가명이 조추수를 비방토록 한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방운영이 나서서 조추수를 비호함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가량은 방운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런 원가량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방운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방가장을 내습한 마교의 무리 중 여덟이 죽었는데, 그 중 여섯이 조 사형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요. 전공(戰功)으로 따져도 조 사형이 단연 으뜸이 아니겠어요? 부디 장문께선 이를 고려하시어 선처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방운영이 자리에 앉자 공손월이 재빨리 거들었다. "장문사형, 방 소저의 말이 옳습니다. 공을 말하지 않고 잘못만을 거론하는 건 옳지 못합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더 이상 조추수를 핍박한다면 오히려 음해한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원가량은 속으로는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매천악 또한 원가량의 속셈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원가량에게 흠을 잡힌 조추수가 괘씸하기는 했지만, 내심은 누군가가 조추수를 변호해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방운영이 자신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는 발언을 하니 그녀가 더없이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매천악은 혹시 다른 말이 나올세라 얼른 결론을 내려 버렸다. "음, 오늘은 모두 긴 여정에서 돌아온 터라 지치고 피곤할 것이니 더 이상 이 일을 거론하지 맙시다. 또한 마교의 무리를 죽인 추수의 공이 적지 않으니, 일단 모두들 푹 쉰 다음에 추수의 공과 잘못을 논하도록 합시다." 매천악은 방운영에게 그윽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방 소저, 이제 그대는 부모와 일가 친척을 모두 잃었는데, 어디 몸을 의탁할 곳은 있는가?" "전 어려서부터 방가장에서 자라 한 번도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다른 곳에 사는 일가 친척에 대한 말씀도 없으셨지요." "흐음, 그대의 처지가 정말 딱하게 되었군. 싫지 않다면 본 파에 입문하는 게 어떠한가?" 방운영이 반색하여 벌떡 일어나 매천악에게 큰절을 올렸다. "미천한 소녀를 받아 주신다면 죽어 흙이 되어도 장문의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허허허, 그대와 같이 총명한 제자를 얻는 것은 본 파의 흥복이라 할 수 있지. 이보게, 공손 사제." 매천악의 웃는 얼굴이 공손월에게 향했다. "자넨 이번에 제자를 하나 잃지 않았나? 저 아이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 자리를 대신케 함이 어떻겠는가?" 공손월 또한 방운영을 어여삐 여겨 즉시 응낙했다. "장문사형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좋아. 허허헛!" 매천악은 즐거운 기색으로 방운영에게 말했다. "운영, 무엇 하느냐? 어서 사부님께 예를 올리지 않고?" 방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월에게 다가간 후,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잘하는 짓거리들이다!' 이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는 원가량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흥!" 냉소와 함께 원가량은 눈을 감아 버렸다. 방운영을 마뜩찮게 바라보는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흥! 저 계집은 어디서 나타나 추수를 변호한다지?' 매약화는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질투심에 살포시 발을 들어 조추수의 탁자 앞부분을 걷어찼다. 의외로 자신의 문제가 부드럽게 해결되자 안도하던 조추수는 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탁자 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조추수를 보며 매약화는 연신 욕을 해대고 있었다. '멍청이 같은 게 어디서 재주를 피워 저런 혹덩이를 달고 왔느냔 말야. 흥! 덩치만 큰 곰 같으니라구.' 조추수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매천악은 제자들을 물렸다. "무당사협은 신검삼호를 뒤쫓아 탕산(湯山)의 신검문으로 갔다고 했으니 아마 그들에게서 곧 기별이 올 것이라 생각되오. 그러나 이 일은 화급을 다투므로 내일 당장 제자를 신검문으로 보내도록 하지요.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 원 사형과 사제들은 내일 따로 여기서 모이도록 합시다." 모두가 분분히 일어나자 매천악이 배간을 불렀다. "배 사제, 자넨 잠시 남게나.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배간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태사전을 나서자, 매천악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배 사제, 추수가 마교의 고수를 여섯이나 죽였다고 했지?" "그렇지요." "추수가 그들을 어떤 수법으로 죽였는지 확인해 보았나?" 매천악의 질문에 배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요... 워낙 서둘러 시체를 처리하느라 상처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춘곡주 구화성이나 황산박룡 등고와 겨룰 땐 태행검법을 사용했는데, 검법의 변화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더군요. 게다가 검에 실린 힘이 대단하여... 솔직히 말하면 나보다도 검법의 성취가 훨씬 높은 것 같더이다." 매천악은 배간의 말에 해연이 놀라 물었다. "그 정도인가?" 이에 배간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장문사형께서 추수에게 검법을 가르치셨으니 더욱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매천악은 배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사문에 남아 있는 한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추수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고수의 지도 없이 그런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늙은이가...?' 매천악은 가끔 자신이 찾아갈 때면 항상 비릿한 조소를 보내던 냉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추수,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냐?" 마원의와 박위가 추수를 뒤따르며 물었지만 조추수는 묵묵부답, 그저 숙소를 향해 걸음을 바삐 옮길 뿐이었다. "지금 추수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니 그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아." 궁조생이 만류하자 마원의와 박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도 식사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마원의 말을 흘리며 조추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다. 그러나 마음이 어지러워 눈을 붙이지 못하고 이내 일어나 방문을 열어제쳤다. 하늘엔 만월(滿月)이 교태로운 몸짓으로 주위의 별들을 주눅들게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귓불을 스치며 아릿한 고통을 주었음에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조추수는 방을 나섰다. 동문들의 숙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엔 웃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조추수는 자신의 처지가 동문들의 웃음과는 동떨어진 느낌에 외로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외로움은 조추수의 발걸음을 동문들과 더욱 먼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가 잔잔한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퍼져 나가며 나무에 이리저리 부딪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산문을 나서던 날, 바로 그날에 보았던 매약화의 쌀쌀한 표정에 잠긴 조추수의 마음에도 아릿한 여운을 만들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연륜이 덕지덕지 묻은 커다란 나무가 그의 앞길을 막아 섰다. 추억이 어린 백양나무였다. 그는 눈을 들어 높디높은 나뭇가지의 끝을 바라보았다. '나무야, 넌 가을에게 옷을 빼앗겨 버렸구나. 난 뇌 사형에게 약화 사매를 빼앗겼으니 너와 나의 처지가 과히 다르지 않다. 하나, 넌 내년이면 다시 옷을 입을 수 있지 않느냐? 난... 한번 잃어버린 여인은 다시 얻을 수가 없으니...' 매약화를 떠올리자 전신의 맥이 쭉 빠져 버렸다. 그는 나무에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여전히 교태로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곳엔 항상 사매와 같이 왔었는데 오늘은 나 홀로 달을 바라보는구나.' 매약화를 생각하자 자신의 처지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옷자락을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바람이 조추수의 공허한 심정을 도드라지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나약해지는 감정을 감추려 연신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를 반복할 때였다. 나무 사이의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거친 숨소리도 함께 들려 왔다. 귀에 익은 숨소리였다. 조추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을 가늠하려 두리번거릴 때였다. "추수! 여기 있었군요." 몽매에도 그리던 목소리가 조추수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쌔근거리는 숨결이 희미한 여인의 윤곽으로부터 불규칙하게 새어나왔다. "약화..." 조추수는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매약화가 조추수에게 다가왔다. "당신의 방에 갔더니 없더군요. 혹시 이곳에 있지 않을까 해서 달려왔는데, 내 생각이 맞았어요."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코끝이 찡해지며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약화, 난..." 조추수가 매약화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을 건네려는 순간, 갑작스레 매약화의 입에서 원망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그날 왜 내게 오지 않았죠? 청수원에서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흥! 아버님에게 여쭈었더니 당신은 벌써 태사전에서 나갔다더군요." "그건..." 조추수가 대답하려 했으나, 매약화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날 당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 정말 뇌 사형의 말대로 당신에겐 나보다도 좋은 사람이 생겼나요?" "그럴 리가 있겠어? 내겐 이 세상의 무엇보다 사매가 가장 소중해." 조추수의 말에 매약화는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었다. 이도 잠시, 그녀의 표정이 다시 샐쭉해졌다. "알 게 뭐예요? 방운영이라는 그 아가씨는 당신을 몹시도 위해 주더군요. 흥! 마교와 싸우면서도 아리따운 아가씨의 마음을 얻었으니, 내가 모르는 다른 여인이 또 있을지도 모르죠."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는 달리 매약화의 음성은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조추수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매약화의 말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뇌 사형을 때리고 방가장에서 저지른 실수는 또 뭐예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난 아버님이 당신을 결코 용서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님의 성미를 잘 알잖아요?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나 하냐고요?" "그건..." 막상 입을 연 조추수는 말이 이어지지 않아 길게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조추수의 이런 모습에 느껴지는 바가 있었는지 매약화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고 조추수에게 기회를 주었다. "바보같이 한숨만 쉬지 말고 말해 봐요." "난...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술을 마셨던 건 사매 때문이었어. 그날, 산문을 나서던 날, 사매는 날 아는 체도 하지 않았지. 난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어. 길을 갈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오직 사매의 얼굴만이 눈앞을 가렸을 뿐이었어. 내게 냉정했던 그날 아침의 모습이 말이야. 사매! 사매는 나와 뇌 사형 중 누가 더 좋은 거지?" 매약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매가 막내 사숙의 취산장을 다녀온 이후로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난 알아. 그래, 그럴 만도 하겠지. 뇌 사형은 가문도 좋고 잘생겼으니까. 그리고 나와는 달리 말주변도 좋잖아? 그러니 사매의 마음이 뇌 사형에게 기울 만도 하지. 하지만 난 뇌 사형이 미웠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뇌 사형을 때리고 말았지. 내게 마교의 내습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어? 마교의 수괴를 죽인들 무엇 하겠어? 그렇다고 내 마음이 사매에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잖아?" 원래 말솜씨가 서투른 조추수였다. 게다가 지금은 감정이 한껏 고조되어 있기까지 했으므로 조추수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매약화는 조추수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알 듯도 했다. 그러나 워낙 뒤엉클어진 조추수의 말에 그녀는 한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뇌 사형을 사랑하다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조추수는 잠시 대답을 못 하고 매약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서 말해 봐요." "사매가 뇌 사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그날 산문에서 그토록 나에게 냉정했겠어?" 매약화가 답답한지 소리를 꽥 질렀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것과 내가 뇌 사형을 사랑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그 일이 그렇게 섭섭했다면, 왜 전날 나와의 약속을 어겼어요?" "그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말해요!" "사실 난 청수원에 갔었어. 하지만..." "청수원에 왔었다고요?" 조추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곳에 있던 날 보았나요?" 조추수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졌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 조추수가 대답을 않자 매약화는 답답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말을 않는 거예요? 어서 얘기를 해보란 말이에요, 어서!" 그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조추수는 한참을 더 망설인 끝에 겨우 자신이 보았고 고뇌했던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매약화를 그리워하던 조추수가 산문 앞에서 목격한 일, 청수원에서 매약화와 뇌가명이 대화를 나누던 일, 그리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겪어야 했던 번민들을 숨김없이 얘기했다. 말을 하는 도중 스스로 감정이 격해져 말을 더듬기도 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조추수의 모습에 매약화는 피식 웃다가 마침내 크게 소리내어 웃어 버렸다. "호호호! 당신은 정말 멍청이예요. 그렇다고 내게 말 한마디 못 하고 속으로 끙끙 앓다니. 당신과 내가 함께 지낸 해가 몇 해인 줄 알아요? 그런데도 아직도 내게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바로 멍청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조추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조추수를 조롱하듯이 말하는 그녀의 눈엔 물기가 은근히 어려 있음을 놓치지는 않았다. 매약하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낮아졌다. "추수, 기억나요? 내가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던 날 당신이 내게 선물한 목걸이 말이에요. 그때도 당신은 그 목걸이를 내게 선물하지 못하고 방에 숨어서 몰래 울고 있었지요. 내가 당신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사숙백님들과 사형제들은 모두 사매에게 값진 선물을 했는데, 내 선물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해서 울고 있었어'라고요. 그때 당신은 손수 만든 꽃목걸이에 눈물을 떨구고 있었어요. 하루 종일 방구석에 숨어서 말이에요. 추수, 당신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군요. 여전히 멍청해요." 매약화가 자신이 항상 부끄럽게 생각해 오던 기억을 떠올리자, 조추수는 부끄럼을 감추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매약화가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그 목걸이는 이제껏 내가 받아 온 선물 중에 가장 값진 것이었어요. 그 목걸이에 담긴 당신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어요? 그때의 눈물과 꽃잎은 모두 메말라 사라지고 말았지만, 당신의 마음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비록 앙상한 줄기만이 내 침상 머리맡에 걸려 있을 뿐이지만." 매약화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전신을 활활 태우는 희열이 조추수의 영혼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을 괴롭히던 번뇌가 마치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던 꽃망울인 양, 갑자기 기지개를 활짝 피며 무지갯빛 색채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약화!" 주체 못 할 감동으로 조추수의 음성은 한껏 떨려 나왔다. 매약화의 그윽한 시선이 조추수의 마음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 왔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당신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 나의 맹세를 벌써 잊었나요?" "잊지 않았어. 난 잊지 않았어!" 조추수는 매약화의 손을 와락 붙들었다.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고동치는 조추수의 감정이 손끝을 타고 매약화의 마음에 전달되었다. 매약화의 두 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미소 짓고 있는 입술을 적셨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말없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바람이 눈물을 흔들며 두 사람의 정신을 일깨웠다. 매약화는 손을 빼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버님께 우리의 결혼을 승낙해 달라고 청하겠어요." 조추수는 해연이 놀랐다. 동시에 잔잔히 피어오르는 희열이 마음을 달콤하게 적셨다. 그러나 매천악의 지엄한 모습을 떠올리자, 이내 희열은 사라지고 근심이 밀려왔다. "사부님께서 허락하실까? 난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려 이렇게 혼만 나고... 난 너무 못난 놈이야." "그런 말 말아요. 난 당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제가 아버님께 간청하겠어요. 아버님은 제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셨잖아요."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해 보였다. "약화!" 조추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매약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느덧 별빛마저 숨어 버린 하늘엔 동그란 달이 달무리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자리에 누운 조추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쯤 약화는 사부님께 말씀드렸을까? 어쩌면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여자의 몸으로 먼저 언급하기엔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내가 먼저 사부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근자에 보기 드문 세찬 바람이 창문을 훑고 지나가며 조추수의 어지러운 심경을 더욱 흩뜨렸다. 문득,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들렸다.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여인의 옥음처럼 높아지고, 한여름 밤 듣는 이의 심금을 일깨우는 여인의 통곡처럼 흐느끼기도 하더니, 어느 순간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조추수의 상념을 꿰뚫어 버렸다. 이상하게도 피리 소리가 심사를 더욱 어지럽히는지라 조추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알싸한 바람에 섞여 피리 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려 왔다. '이상도 하다. 누가 피리를 부는 걸까?' 사숙백들과 동문 사형제들을 차례로 떠올렸으나 피리를 불 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는 왕옥진의 포근한 얼굴을 떠올렸다. "사저께서 피리 부는 솜씨를 가졌던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찬바람에 몸을 흠칫 떨며 창문을 다시 닫으려 할 때였다. 피리 소리가 가경(佳境)에 접어든 듯 숨 가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뒤뚱거리며 강동거리는 장끼처럼 음이 튀기다가, 갑자기 팔짝 뛰는 토끼처럼 음이 도약하고, 종내엔 포효하며 질주하는 호랑이처럼 음률이 급히 내닫는 것이었다. 피리 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었다. 조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림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대체 어디서 들려 오는 소리지?' 조추수는 방을 나서 두리번거렸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 어둠이 만물을 휘감아 버렸건만, 피리 소리는 그 어둠을 타고 방향 모를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칠던 피리 소리는 어느새 잔잔한 호수면처럼 잦아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추수의 마음도 살포시 가라앉았다. 마침내 피리 소리가 끊어지자, 조추수는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져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이어 뒤따르는 까닭 모를 불안감. 매약화와 사부 매천악의 얼굴이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다시 자리에 누운들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조추수는 숙소로부터 멀리 걸음을 옮겼다. 때 이른 찬바람에 밤부엉이마저 얼어붙은 듯 사위는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매약화와 매천악, 죽어 간 이무연과 황보웅, 아직도 밉기만 한 뇌가명의 모습들이 난마처럼 상념을 헤집고 다녔다. 고개를 저어 보고 팔을 휘이, 휘둘러 보기도 하는 동안 조추수의 발걸음은 어느덧 청수원에 이르고 있었다. 크고 희미한 녹산의 윤곽이 어둠 속에 어슴푸레 보였다. 그가 뇌가명과 매약화와의 일을 떠올리며 쑥스런 웃음을 지을 때였다. 녹산의 뒤편으로부터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낯익은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녹산으로 다가가는 순간,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매천악의 호통 소리가 귀를 찔렀다. 조추수는 가슴이 철렁하여 자신도 모르게 근처의 나무에 기대었다. "에이!" 매천악의 짜증스런 일성과 함께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이어 녹산으로부터 한 인영이 나타났는데, 소맷자락을 휘적이는 모양으로 보아 화가 날 때 나타나는 매천악의 버릇이 분명했다. 조추수는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곧 이어 매약화의 애처로운 음성이 뒤따랐다. "아버님!" "네가 무어라고 해도 안 된다!" "추수와 난 장래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단 말이에요." "이 바보 같은 것아! 왜 그따위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다녔느냐? 근본도 모르는 아이에게 널 시집보낼 순 없다." "아버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죠? 추수는 아버님의 제자잖아요." "사랑하는 딸을 좋은 가문의 청년에게 시집보내는 건 부모 된 자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이 아비라고 다를 리가 있겠느냐?" "평소 아버님도 조 사형의 인간 됨을 칭찬하셨잖아요? 그는 마음이 넓고 착해요. 남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고 불의에 대해선 용감해요. 그런 그가 어떻다는 거예요?"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조추수의 마음속엔 격렬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싶어지는 충동을 억누르려 조추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감정이 격앙되어 전신의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매천악의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조추수에게 들렸다. "뇌가명은 어떠냐? 인물도 준수하고 총명하지 않느냐? 그도 너를 좋아하지 않느냐?" 매약화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싫어요! 그는 이기적이고 남의 약점만을 꼬집어요. 아버님은 내가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기를 바라시나요?" "요즘 들어 넌 뇌가명과 잘 어울리지 않았느냐?" "그건... 취산장에 다시 가고픈 마음에... 아무튼 그 누구도 추수를 대신할 순 없어요." "철딱서니없는 것. 어찌 이 아비의 마음을 모르느냐? 어쨌든 추수와의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 "싫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전 추수하고 결혼할 거예요. 난 추수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아요. 흑흑흑!" "화아(花兒)!" 가볍고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에이, 철딱서니없는 것!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륜지대사를 결정하려 하다니..." 한탄과 함께 소맷자락을 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매천악의 발걸음도 멀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라지고 정적만이 청수원을 맴돌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건만, 조추수의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는 쓰라린 메아리는 흩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얼굴을 싸늘히 핥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매천악의 매정한 말을 듣는 순간부터 몸 속에서 일기 시작한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고 오히려 끓어올랐다. 그 열기는 사부에 대한 분노도, 사랑에 대한 좌절도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사부의 본심을 듣고 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부가 밉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잊고 있었던 현실이 연료가 되어 타오르고 있을 뿐이라고 조추수는 생각했다. 몸이 한 조각도 남지 않고 모두 타버릴 것만 같아 조추수는 장삼을 벗어 버렸다. 바람에 장삼 자락이 날렸다. 옷고름이 제멋대로 꿈틀대더니 여인의 손길처럼 조추수의 입술을 간질였다. '그래, 난 근본도 모르고 보잘것없지 않은가? 뇌 사형은 집안도 좋고 준수하다. 그는 항상 여유가 있으니 약화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이루어 줄 수 있지. 그의 부친은 뇌가보의 보주로서 재물이 많고 무공도 뛰어나다. 하지만 난 그런 능력이 없어. 내가 어찌 뇌 사형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의 처지가 더욱 미천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귀하게 자란 약화에게 욕심을 품어 고난(苦難)한 인생을 살게 하려 하다니,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 난...' 그렇지만 아무리 근본도 모르는 미천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가까워야 할 사부가 자신을 미천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처지가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애처로운 늑대 울음 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조추수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4 장 분노는 피리 소리를 타고 흘러도 제 14 장 분노는 피리 소리를 타고 흘러도 매서운 바람이 동굴 안을 훑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추수의 머리카락도 나풀거렸다. 조추수는 동굴 한구석의 오목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었다. -마교의 무리들을 척살한 너의 공은 인정하나 사문 존장에 대한 예의를 잃은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다. 열흘간 성심동에 거주하며 너의 잘못을 반성토록 하여라. 아침 식전에 매천악이 태사전에서 남긴 말이 아직도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의외인 듯한 원가량의 표정과 공손월의 경악성, 뇌가명의 의기 양양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분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추수는 잘 알고 있었다. '사부님은 절대 나와 약화를 맺어 주지 않을 것이다.' 사부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보다 매약화와 맺어질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조추수를 괴롭혔다. 누군가가 동굴 앞에 아침과 점심, 두 끼의 식사를 가져다 주었지만, 조추수는 미동도 않았다. 문득 톡! 하니 발끝에 닿는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우연이었을까? 백양나무의 낙엽 하나가 바람에 실려 와 신발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었다. 그 낙엽이 어젯밤 백양나무 아래서 매약화와 주고받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여 조추수의 기분을 덜어 주었다. '그래, 사부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약화의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 한결같다면 평생 같은 이불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지.' 이렇게 생각하자 조추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릴 적 내가 이곳 성심동에 갇혔을 때처럼 밤이 되면 약화는 날 찾아올 거야.' 문득 조추수는 매약화의 얼굴이 그리워져 동굴 안을 서성거렸다. 유난히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끼니라도 빨리 때우면 밤이 가까워질까 여겨 아침과 점심, 두 끼를 한꺼번에 먹고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고 밤이 되어도 매약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자정이 가까워졌다. 저녁부터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불안감이 이제 현실이 되어 조추수의 실망을 부풀렸다. 조추수는 다시 동굴 한구석 오목한 곳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매약화의 얼굴과 목소리를 애써 떠올렸다. 이때, 어젯밤의 그 피리 소리가 들려 와 조추수의 슬픔을 더욱 자극했다. 피리 소리는 축시(丑時)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한 시진 이상 계속되었다. 태사전엔 매천악과 원가량, 배간, 곽입지, 공손월 등 일 대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주된 내용은 마교의 준동에 대한 대응책과 신검문에 보낼 서신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의논 끝에 공손월이 써 내려간 초고(礎稿)를 매천악이 접으며 말했다. "사형, 오늘 마원의와 박위를 신검문으로 보내 우리의 의사를 전달토록 해야겠소." "그렇네. 한시라도 빨리 신검문과 회동해서 공동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네. 마교의 기세가 대단하니 지체하면 우리도 그들의 희생 양이 될 수 있어." 매천악은 공손월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공손 사제, 자넨 언제 그런 피리 솜씨를 익혔지? 피리 소리에 실린 내력과 음률이 대단하더군." 공손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젯밤의 피리 소리 말씀입니까?" "그렇네. 자넨 평소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았나?" 원가량과 곽입지가 한마디씩 했다. "자네의 피리 솜씨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더군." "원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니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하고 숨이 가빠지기도 하며 심지어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기도 하더군요. 정말 대단했어요." 문득, 공손월이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어젯밤과 그저께 밤의 피리 소리에 본 파의 제자들 중 피리의 명인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매천악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자네가 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전 금(琴)은 서툴게나마 탈 수 있지만, 피리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매천악 등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보통 일이 아니다!' 잠시 침묵하던 매천악이 먼저 입을 열었다. "피리 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네. 자네가 분 것이 아니라면... 외인(外人)이 본 파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말인가?" "피리 소리는 이틀 동안 들렸어. 그리고 내가 알기로 본 파의 제자들 중에 그런 피리 솜씨를 가진 자가 없으니..." 원가량이 말꼬리를 흘리자 모두들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설마 마교가...?' 원가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장문, 어서 신검문에 서찰을 보내게!" 마원의와 박위가 신검문으로 출발한 후 매천악은 전제자들에게 경계령을 내렸다. 제자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매천악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가장의 혈겁을 목격했던 이들은 은연중에 마교의 내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는 두려워했다. 나신이 궁조생에게 물었다. "대사형, 이틀 밤 동안 들려 온 피리 소리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 외에 이상한 일은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경계령을 내리시니 모두가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글쎄, 함부로 짐작할 일이 아니야." 궁조생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나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금 궁조생의 가슴은 근심으로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 피리 소리다. 오대산에서 막두철과 황산삼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날 해가 질 때까지 태행검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해가 지고 자정이 되자 그 피리 소리는 어김없이 들려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은 저마다 피리 소리를 이상스럽게 생각하기는 했으되 마음속에 묻어 두었으나, 매천악의 가시적인 조치가 있고 난 후인 이날 밤은 모두가 방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몰려 나왔다. 궁조생은 밖으로 나오자 제자들이 삼삼오오 몰려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괴이하게도 피리 소리는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 오는 듯했다. 그 누구도 피리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다. 삼 대 제자들을 꾸짖는 소리에 궁조생이 고개를 돌리니, 갈웅휘가 제자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질타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가르침을 잊었느냐? 검을 수련하는 자는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까짓 피리 소리에 경거망동을 한대서야 어떻게 본 파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그가 우격다짐으로 삼 대 제자들을 밀치자 하나둘 흩어지며 제각기 방으로 돌아갔고, 숙소 주위의 공터엔 이 대 제자들만이 남게 되었다. 왕옥진이 궁조생에게 다가와 물었다. "대사형, 피리를 부는 자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몹시 두려워하고 있어 통제하기가 쉽지 않아요." "흥! 이게 다 제자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 아니겠느냐?" 어느새 두 사람에게 다가온 갈웅휘가 톡 쏘듯이 말했다. 현재 태행검파에 있는 삼 대 제자들은 모두 매천악의 직계였다. 즉, 그들은 궁조생과 마원의, 박위 등의 제자들이었으므로 갈웅휘의 말엔 사실상 궁조생을 비난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궁조생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 않고 주위에 모여든 나신과 뇌가명 등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흐트러지면 삼 대 제자들은 더욱 동요하게 돼.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 쓸데없는 일은 일으키지 말고 합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 명심하도록 하게. 그리고 나 사제, 자넨 오늘 나와 함께 산 주위를 돌며 경계토록 하세." 궁조생이 쓸데없는 일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말은 갈웅휘에게 내린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었다. 갈웅휘로 인하여 사형제들 간에 말썽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주지시킨 것이다. 갈웅휘는 싸늘히 냉소하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가명, 넌 아직 몸이 온전치 못하니 들어가 쉬도록 해라. 나 사제, 가세." 궁조생이 나신과 함께 연무장 쪽으로 향하자 왕옥진이 뒤따르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피리 소리는 아직도 바람을 타고 태행검파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름대로 방향을 가늠하며 산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낙엽 밟는 소리와 피리 소리가 한데 엉켜 더욱 묘한 감흥을 자아냈다. 피리 소리엔 무슨 마력이 깃들여 있는지,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평소보다도 두 배 이상의 힘이 드는 듯했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숲속을 헤매기를 한 시진여, 마침내 견디다 못한 왕옥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사형, 잠시 쉬었다 가요." 그녀는 연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궁조생과 나신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잠시 얼굴을 마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왕옥진이 몸을 으슬으슬 떨며 입을 열었다. "소용없는 짓 같아요. 어디로 가든 피리 소리는 여전해요. 더 가까이 들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더 멀리 들리지도 않고." "평소보다 체력의 소모가 극심하군요. 아무래도 피리 소리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내공이 깃들여 있는 모양입니다." 나신의 말에 궁조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피리를 부는 자는 고심(高深)한 내공의 소유자일 걸세. 하나 주눅이 들어선 안 돼. 소리의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심기를 흩뜨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세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피리 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흐느끼듯 떨려 나오더니 이내 소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왕옥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젠 더욱 피리의 임자를 찾을 길이 없게 되었네요." "숙소로 돌아가지. 여기 더 머물 필요가 없어." 궁조생이 몸을 일으키자 나머지 두 사람도 덩달아 일어났다. 한식경이 지나 세 사람은 산문에 이르는 돌계단에 이르렀다. 계단을 오르며 멀리 산문이 있음 직한 곳을 바라보던 궁조생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 궁조생은 나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사형, 왜 그러십니까?" 나신이 소리쳐 불렀을 때 궁조생은 이미 이십여 계단을 앞서 오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신이 계단을 뛰어오르는데, 뒤따르던 왕옥진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나신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넌 또 왜 그러느냐?" "산문에 등이 없어요." 매천악이 경계령을 내리면서 밤에는 산문에 등을 걸고 번을 서도록 했음을 이제서야 떠올리며 나신도 놀라고 말았다. 두 사람이 산문에 이르렀을 때 궁조생은 산문 옆 고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가볍게 떨고 있었다. "아!" 나신과 왕옥진이 이구동성으로 경악성을 터뜨렸다. 고목의 삼 장 높이쯤에 매달린 두 구의 시신이 희끄무레하게 눈에 띄었다. 갑자기 궁조생의 입에서 발작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 사제! 어서 장문께 이 사실을 고하게. 어서!" "이, 이...!" 매천악은 횃불 아래 드러난 네 구의 시신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의 길게 늘어진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네 구의 시신은 신검문에 보냈던 마원의와 박위, 그리고 산문을 지키던 삼 대 제자들이었다. 마원의와 박위 두 사람의 가슴엔 넉 달 전 고목에 매달린 채 발견되었던 추독과 마찬가지로 검이 꽂혀 있었다. "분명 그 마녀의 짓이로군." 원가량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의 시선은 마원의와 박위의 미간에 고정되어 있었다. 비록 희미한 불빛 아래였지만 미간에 새겨진 가느다란 혈선의 흔적은 너무나 또렷했다. "젠장! 그 마녀가 이번엔 본 파를 제물로 삼을 셈이로군." 거칠게 튀어나온 배간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쓸데없는 소릴랑 말게! 제자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나?" 제자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나 어느새 냉정을 회복한 매천악이 배간에게 일침을 놓았다. 일파의 장문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궁조생에게 시선을 돌려 단호한 어조로 명했다. "즉시 시신들을 태사전 앞으로 옮겨라. 그리고 본 파의 모든 제자들을 깨워 태사전과 집무전, 청빈전을 경계토록 하여라." "예, 사부님!" 궁조생이 제자들을 인솔하여 시신을 옮기자, 매천악과 일 대 제자들은 태사전으로 바삐 이동했다. 걸음을 걷는 도중 매천악, 원가량, 배간, 곽입지, 공손월 등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긴장감이 그들의 전신을 휘감으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태사전에 들어온 매천악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런 매천악을 원가량 등은 침묵으로 주시했다. 매천악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다섯 명의 사형제들 중에서 무공과 지혜를 따지면 당연 매천악이 으뜸이었다. 지혜로 말하자면 스스로 자부하는 원가량이 미치기 힘들었고, 무공으로 말하자면 자질이 뛰어난 공손월도 매천악에게는 감히 견주지 못했다. 실로 문무를 동시에 겸한 인물이 매천악이었던 것이다. 매천악을 싫어하는 원가량도 이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이상, 아무도 그를 방해하려 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일 각 이상 지속되었다. 이 정적을 깨뜨린 것은 전내에 있는 그 누구도 아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낸 궁조생이었다. 그는 태사전에 들어오자마자 부복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제자들을 모두 배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시신도 태사전 앞으로 옮겨 왔습니다. 지금 마원의와 박위의 사인을 검토하시겠습니까?" 매천악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사인은 더 볼 필요도 없다. 넌 제자들을 독려하여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라." "예, 사부님." 궁조생은 지체 않고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궁조생이 막 태사전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을 때였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매천악이 눈을 뜨며 궁조생을 다급히 불렀다. "잠깐, 조생아!" 궁조생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매천악이 즉시 추가적인 분부를 내렸다. "넌 지금 두 명의 삼 대 제자들을 이끌고 성심동으로 가서 추수를 보호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궁조생이 물러가자, 원가량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긴박한 때에 사문의 죄인을 보호하려 한단 말인가?" 매천악이 태연한 신색으로 응대했다. "지금 우린 단 한 명의 고수라도 더 필요한 때입니다. 사형도 알다시피 이 대 제자들 중 추수만한 고수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추수는 황산파의 막두철 등 마교의 인물들을 여럿 죽였으니, 그들이 기필코 죽이려 들 것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차라리 추수로 하여금 성심동에서 나와 본 파를 위해 헌신토록 하여 죄를 사하도록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공손월이 매천악의 말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처를 호소하자, 원가량이 벌컥 화를 내며 공손월을 꾸짖었다. "아니 될 소리! 자넨 어째서 자꾸 추수를 감싸려 드는가? 장문이 내린 처벌을 그렇게 쉽게 번복하면 체통이 서겠나?" 성심동은 내부 공간이 직경 삼 장 정도에 달하는,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었다. 더구나 동굴 내부엔 침상은 물론 이불도 없어 춥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성심동에 갇히고서도 매약화의 모습을 그리다 어젯밤을 꼬박 새웠던 터라 몹시 피곤했는지, 오늘밤은 자정이 되지 않아 추위에 떨면서 자신도 모르게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잠결에 아스라이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선잠에서 깬 것은 낯익은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추수, 잠들었느냐?" 궁조생이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다. 조추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에 궁조생의 모습이 보이자 조추수는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사형!" 궁조생은 손에 든 횃불로 동굴 안쪽을 비추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널 보호하라고 날 보내셨다." "사부님께서요? 그리고 보호라니요?" 조추수는 궁조생의 말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을 성심동에 보낸 것은 매약화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사부의 의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추수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을 터인데 궁조생을 보내 보호하려 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너 식사를 하지 않은 게냐?" 궁조생이 입구에 놓여 있는 차디찬 밥과 소채를 가리켰다. 문득 뱃속에서 쪼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첫날은 매약화를 만날 기대에 식사를 했지만, 매약화가 나타나지 않자 식욕을 잃어 그 이후론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추수가 계면쩍게 웃으며 밥그릇을 주워 들었다. 조추수가 쑥스러움을 감추려 젓가락을 놀리며 식어 버린 밥과 소채를 우격다짐으로 입에 밀어 넣을 때였다. 궁조생이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마원의와 박위가 죽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추수의 입에서 밥알과 채소가 흘러나와 그릇에 떨어졌다. "추독이 죽었던 그 나무에 똑같은 수법으로 죽어 있었어. 그 마녀가 나타난 거야." "마 사형, 박 사형도...?" 밥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자아냈다. "사부님은 혹시나 네가 마수에 목숨을 잃을까 걱정하시는 게지." 조추수는 궁조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멍청하게 선 채 중얼거렸다. "박 사형과 마 사형이 죽었다고요? 그들이 추 사형을 죽이고서도 모자라 박 사형과 마 사형을 죽였다고요?" 조추수의 커다란 체구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렸다. "추수! 진정하거라!" 조추수의 눈에서 살광(殺光)이 일었다. "그 마녀가 사형들을 죽였단 말입니까?" 벼락같은 목청이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진정하거라. 사부님께서 그들을 응징할 계책을 세우실 거다." "마교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어요!" 격분에 못 이긴 조추수가 동굴 밖으로 나가려 하자 궁조생이 가로막았다. "사형, 비키세요!" 조추수가 뿌리치자 궁조생의 몸이 휘청였다.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는지라 궁조생은 조추수의 뺨을 때렸다. "바보 같은 소리! 넌 사부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몸이란 걸 잊었느냐?" "그렇다고 이대로, 이대로..." 궁조생이 악을 쓰며 조추수를 만류했다. "사부의 명을 거역한다면 네가 본 파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네가 사형들의 복수를 운운할 자격이 있겠느냐? 마음을 가다듬고 사부님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이에 조추수는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교가, 그 마녀가 사형들을 죽였는데 이대로 참으란 말입니까? 전 그렇게 못 해요. 내 그놈들을, 그놈들을... 으흐흐흐!" 격분을 참지 못한 조추수의 주먹이 동굴벽을 강타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입구의 돌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조추수의 주먹은 벽에 손목까지 박혀 버렸다. 궁조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추수에게서 떨어졌다. '무서운 힘이로구나!' 피리 소리는 나흘째, 닷새째 밤에도 어김없이 태행산 곳곳에 울려 퍼졌다. 이미 두 명의 이 대 제자가 죽은 터라 삼 대 제자들은 모두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언제 마교의 고수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은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었다. 피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지 엿새째 되던 날 동철비가 찾아왔다. 태사전에 들어선 그는 매천악을 보자마자 인사를 생략한 채 물었다. "귀파에 들어서니 경계가 삼엄한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질문을 하면서 그는 원가량과 배간, 곽입지, 공손월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오 인의 시선이 동철비에게 쏟아졌다. 모두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자 더욱 궁금해진 동철비가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공손월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 마녀가 태행산에 나타났소이다." 공손월은 표정뿐만 아니라 어투도 몹시 텁텁했는데, 이는 조추수를 모략하려 한 동철비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철비의 안색이 확 구겨졌다. '제기랄!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왔구나.'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마교의 실력을 이미 겪은 동철비는 두려움이 왈칵 솟았다. '그 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었을 때에도 형편없이 유린당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욱 열악하니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동철비는 이런 생각을 뒤로하며 공손월에게 물었다. "마녀가 언제 태행검파에 나타났소이까?" 공손월이 입을 열기 전에 매천악이 대신 대답했다. "엿새 전이라오." 매천악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동철비의 안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매천악의 얘기가 끝나자 그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매 장문! 아무래도 이번 사태는 그 정씨(程氏)..." "어험!" 갑자기 매천악이 다급히 기침을 하며 동철비의 말을 막았다. 이에 동철비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차! 이들은 그 일을 모르지 않는가?' 매천악과 동철비의 어색한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낀 원가량이 동철비에게 채근했다. "동 대협, 하시던 말씀을 계속하시구려." "아, 아니외다. 내가 잠시 다른 일과 혼동했구려." 동철비의 얼굴엔 당황함이 역력했다. 원가량은 속으로 냉소하며 매천악을 바라보았다. 원가량이 보기에 매천악은 억지로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곤혹스런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흥! 둘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의심을 가진 이는 원가량뿐만이 아니었다. 곽입지와 공손월도 매천악과 동철비에게서 수상한 기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배간만이 불안한 기색으로 나머지 다섯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원가량과 배간, 곽입지, 공손월 등이 나간 후, 동철비는 매천악과 단 둘이서 오랫동안 밀담을 주고받았다. 물론 원가량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매천악이 사형제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는 심각한 사실이 있다는 의심이 모두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매천악에 대한 의심이 일기 시작하자 원가량은 지난 일을 돌이키며 추론하기 시작했다. '동철비는 곡윤의 장원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거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친구의 죽음이 애통하다고 해도 그런 공포감에 사로잡히기까지야 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 일련의 혈겁에 대해 어떤 단서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되지. 게다가 그는 자신의 집에 들른 후 곧장 본 파로 오겠다고 했지. 이는 그가 본 파에도 마수가 미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마녀가 혈겁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마교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엔 매천악과 동철비가 관련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원가량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매천악, 과거 너의 잘못된 행위로 본 파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었다면, 흐흐흐, 네가 어찌 장문으로서의 자격이 있겠느냐?' 곡윤의 장원에서 두려움에 떨던 동철비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사실은 곧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밤이면 어김없이 들려 오는 피리 소리에 조추수는 동굴이 무너질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흥분을 이기지 못해 휘두른 주먹에 동굴의 곳곳이 깊게 파이기 시작했다. '사형들의 복수를!' 조추수는 이를 악물고 천심장의 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복수심에 휩싸인 조추수에게 밤과 낮의 구별은 무의미했다. 천심장의 내력이 실린 장력이 벽을 강타하면 벽면의 형체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부분을 손으로 살포시 쓰다듬으면 마치 모래처럼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천심장을 쓰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자국의 깊이는 더해 갔다. 때때로 지르는 조추수의 괴성에 궁조생은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장시간 침묵하는 경우가 궁조생에겐 더욱 우려스러웠다. 물론 침묵의 시간은 조추수가 천심장의 내공을 연마하는 시간이었다. 궁조생은 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조용할 때면 혹시 조추수가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덧 조추수가 동굴에 갇힌 지 열흘이 지나갔다. 묘하게도 조추수가 성심동에 갇힌 지 아흐레 되던 날 밤을 마지막으로 피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추수, 사부님께서 네가 성심동에서 나올 것을 허락하셨다." 궁조생의 들뜬 말에 조추수는 성심동 밖으로 나섰다. 햇빛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털북숭이 그 자체였다. 궁조생이 기뻐하며 조추수를 포옹했다. "경거망동 않고 잘 참았다. 추운데 고생이 많았어!" 궁조생과는 달리 조추수의 얼굴엔 기꺼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멍하니 풀어진 그의 두 눈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약화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 포옹을 풀며 조추수가 물었다. "사형, 약화 사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심동에서 나오자마자 내게 묻는 말이 고작 그것이냐?" "..." '정에 너무 얽매인 탓에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이 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있구나!' 조추수에 대한 안타까움에 궁조생은 내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 엄히 명하신 터라 그 동안 사매는 태사전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다." 매약화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연이어 떠오르는 매천악의 지엄한 표정. -근본도 모르는 아이에게 널 시집보낼 순 없다. 그날 밤 매천악의 야멸찬 말이 자꾸만 귓전을 울리며 조추수를 괴롭혔다. 더 이상의 피해 없이 피리 소리가 그치자 태행검파의 제자들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반해 매천악과 원가량 등 수뇌부들은 오히려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군. 그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이 그냥 물러가다니, 대체 무슨 속셈일까?" 중얼거리는 사람은 원가량 혼자였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마교 놈들이 쓰는 술수는 추호의 인정이 없고 난측(難測)하니 한시도 방심해서는 아니 되오."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동철비의 말이었다. 하나 그의 내심은 안도로 가득 차 있었다. 태행검파에 도착하고서 마교의 무리가 주위에 있음을 알고는 감히 혼자서 태행산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동철비였다. 그러던 차에 피리 소리가 그쳤으니 그 기쁨이 오죽하겠는가? 동철비가 매천악을 찾아온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에게 태행검파의 안위 따위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공손월이 동철비의 말을 받았다. "동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징조가 잠잠한 이때가 더욱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방가장에서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교는 언제, 어떤 귀계(鬼計)로써 우리를 해치려 할지 모르니까요." 동철비와 매천악, 원가량, 배간, 곽입지, 공손월 등 여섯 명이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였다. 궁조생이 태사전으로 들어오며 매천악에게 예를 올렸다. 매천악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사부님의 명대로 추수가 성심동을 나왔습니다." "음, 알았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예, 사부님." 궁조생이 몸을 돌려 나가자 매천악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지난 열흘 동안 그 마녀는 성심동은 물론이고 본 파의 경내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이때였다. "나 사제, 무슨 일로 이렇게 급하게 뛰어오는가?" 궁조생의 놀람에 찬 음성이 들렸다. 이어 거칠게 문을 열어제치는 소리와 함께 나신이 태사전으로 뛰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신에게 쏘아졌다. 배간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그러나 나신은 배간의 꾸짖음을 아랑곳 않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부님! 저희 집에, 나가장에..." 나신의 안색은 누구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창백했다. 그의 심상찮은 기색에 배간이 놀라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마교의 무리가 저의 아버님께 통첩을 보내 왔습니다. 사흘 후 저희 일가의 목숨을 가지러 오겠다고..." "무엇이라고?" 배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천악을 위시한 나머지 사람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나신의 부친인 나철백(羅鐵栢)은 수십 년 전부터 매천악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이랑도(二郞刀)를 즐겨 썼는데, 무공은 그리 뛰어난 편이 못 되었다. 대신 인물 됨이 후덕하여 강호의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다. 산서무림의 명문인 태행검파에 나철백은 자신의 맏아들인 나신을 제자로 받아 주도록 매천악에게 부탁했는데, 나가장이 배간의 집과 멀지 않은 고평 지역에 있었으므로 배간의 문하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매천악 또한 나신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배간이 황망한 표정으로 매천악에게 말했다. "장문사형, 나철백은 장문사형과 친분이 두텁고, 나신은 저의 제자이니 이는 바로 본 파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장으로 가서 그를 돕는 것이..." 원가량이 배간의 말을 잘랐다. "배 사제, 이는 그리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방가장에서의 일을 벌써 잊었나? 그들은 이번에도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려는 술수를 쓰고 있는 게야." 동철비가 원가량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소이다. 지금 우리가 전력을 다해도 마교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인데, 만약 힘을 분산하면 마교는 지체 않고 태행검파를 덮칠 것이오." 배간이 벌컥 화를 내며 동철비에게 소릴 질렀다. "동 대협은 외인이니 본 파의 일에 간섭 마시오!" 동철비의 얼굴이 붉어지며 인상을 찡그렸다. 배간은 원가량에게 시선을 돌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나가장의 겁난을 모른 체할 셈입니까? 나가장과 본 파와의 친분은 산서의 무림동도들이 훤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모두 우리더러 마교가 무서워 옴짝달싹도 못했다고 손가락질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원래 배간은 겁이 많은 편이라 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나이 육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대제자인 나신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친자식처럼 가르치고 길러 오던 나신에게 화가 미치게 되자 마교에 대한 두려움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가량이 냉소했다. "그까짓 세인들의 이목(耳目)이 본 파의 안위보다도 중요한가?" 원가량의 냉정한 태도에 치미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배간이 반박하려 하자, 매천악이 엄중한 어조로 말문을 막았다. "배 사제는 진정하게. 이는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냐. 원 사형의 말씀대로 이는 사문의 존망(存亡)이 걸린 문제일세. 그러니 심사숙고하여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만 하네." 매천악은 눈을 돌려 나신에게 물었다.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조금 전 저희 집안의 무사가 당도하여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마교의 통첩은 언제 전달되었지?" "이틀 전이었습니다." "흐음! 이틀 전이라면 피리 소리의 주인공이 아직 태행산에 있었을 때로군." 매천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마 마교는 나가장뿐만 아니라 본 파도 같이 노리고 있는 것 같소. 어쩌면 지금도 태행산에 마교의 무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오." 원가량이 즉시 말을 받았다. "장문사제의 말이 옳네. 따라서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은 마교의 의도를 따르는 결과밖에 되지 않네." "그러나 나가장의 위험을 모른 체할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하니 참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매천악은 배간에게 난감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매천악의 말이 애매하므로 원가량이 약간은 짜증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매천악과 원가량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나신은 초조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는 배간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애걸했다. "사부님, 저의 부친과 모친께서 모두 나가장에 계십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어찌 여기서 한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문의 사정이 어려움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원하진 않습니다. 다만 저 혼자라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생사를 같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배간이 즉시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너 혼자 가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이냐? 무작정 네가 스스로 사지에 뛰어들기를 부모님이 원하시겠느냐? 기다려 보거라.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나 혼자라도 나가장으로 가서 도울 터이니." 이어 그는 결연한 의지를 실어 매천악에게 말했다. "장문사형! 사형께선 평소 친인에 대한 의리가 두터우셨습니다. 그러나 일파의 장문으로서 사문이 위험에 처한 지금 함부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일이니, 소제는 구태여 장문의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저만이라도 나신과 더불어 나가장으로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매천악은 배간의 요청에 답변을 못 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나철백과 매천악과의 관계는 다른 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각별한 데가 있었다. 다만 이는 남에게 말할 바가 못 되어 마음속에 감추고 있을 뿐이었는데, 지금 그 관계가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문의 안위를 책임진 장문으로서 결코 나가장에 원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간은 물론 원가량과 곽입지, 공손월, 동철비 등은 숨을 죽이고 매천악의 입을 주시했다. 매천악이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였다. 궁조생이 태사전으로 들어서며 크게 말했다. "사부님, 신검문의 홍희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신검문에서?" 매천악이 반색하여 몸을 일으켰다. "어서 안으로 뫼시어라." 홍희가 들어오자 전내의 모든 이들이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마교의 위협에 고심하던 차라, 산서무림 최대의 문파인 신검문의 등장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홍희는 전내의 모든 인물들과 두루 인사를 나눈 후 매천악의 바로 앞 좌석에 앉았다. 매천악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몇 달 전 본 문을 방문하신 후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다시 찾아 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저를 그토록 생각해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제가 다시 매 장문을 찾아뵌 것은 본 문의 문주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희는 태사전 내의 인물들을 차례로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귀파에 무슨 중대한 일이 발생했습니까? 저번과는 달리 경계가 삼엄하더군요." "바로 보셨소. 실은..." 매천악은 최근 태행검파에서 일어난 일과 나가장의 통첩에 대한 소식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랬었군요." 얘기를 끝까지 듣고서 대답하는 홍희의 얼굴엔 놀람과 감탄이 가득했다. "허어, 저희 문주님의 신안(神眼)이 정녕 놀랍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방가장의 소식을 접한 문주님께선 조만간 태행검파와 고평의 나가장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문주님의 둘째 아드님이신 위지천 공자와 열 명의 고수들을 고평으로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둘째 공자께선 고평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모두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중 배간의 음성이 가장 컸다. 특히 무릎을 꿇고 있던 나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홍희의 말이 계속되었다. "또한 저희 문주님께서 가까운 시일 내에 귀파를 방문하시겠다는 말씀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매천악과 원가량이 깜짝 놀라며 동시에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저희 문주님께선 힘이 합쳐지지 않고 시간을 끌게 되면 반드시 마교의 손에 멸하고 말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산서무림의 전력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으신 말씀이오. 그리고 정말 고마우신 말씀이오. 귀문주의 현명한 결정으로 인해 이제껏 우리가 앓아 오던 고민이 일시에 해결되었소이다. 하하하..." 근자에 들어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은 매천악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나 배간이 벌떡 일어나 매천악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장문사형, 이제 신검문주가 태행산으로 오고 있으니, 나가장에 지원을 보낼 여력이 생긴 셈이 아닙니까? 나가장의 일이 시급하오니 한시라도 빨리 절 보내 주십시오." 매천악이 웃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신검문주가 온 것이 아닐세. 만약 잠시나마 생긴 힘의 공백을 타고 마교가 본 파를 내습한다면, 그땐 속수무책(束手無策)이 아니겠나? 게다가 신검문의 고수가 나가장으로 향했으니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닌 듯하군." 배간이 즉시 반박했다. "마교의 실력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검문의 고수가 나가장에 합류한다고 해도 중과부적입니다. 게다가 나가장과는 관계가 없는 신검문에서도 돕는데, 우리가 돕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홍희가 배간의 말에 동조했다. "배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가장의 겁난이 확실한 이상 아무래도 본 문에서 파견한 고수만으론 역부족인 듯합니다. 매 장문께서도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신검문주 위지광이 위지천을 나가장으로 보낸 것은 만약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지, 마교가 반드시 나가장에 나타나리란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교가 나가장에 나타난다면 위지천의 목숨이 위태로우리라는 우려감이 홍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에 그는 태행검파의 힘을 빌리면 위지천에게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배간의 의견에 동조한 것이다. 매천악은 속으로 배간에게 욕을 퍼부었다. '머저리 같은 놈! 한낱 정에 얽매여 대사를 그르치려 하다니!' 신검문의 고수가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나가장이 무사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기에 매천악은 태행검파의 고수들을 나가장에 파견하길 꺼렸던 것이다. 매천악의 속을 모르는 배간이 또다시 채근했다. "일단 저는 무조건 나가장으로 갈 터이니 장문사형께선 또 다른 제자의 파견 여부를 결정해 주십시오." 원가량은 매천악의 속셈을 헤아리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도 태행검파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한지라 은연중에 매천악의 뜻에 동조하고 있었다. 하나, 홍희와 배간 때문에 고수의 지원을 막을 명분이 없어졌는지라, 원가량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장문, 배 사제의 청대로 하세. 신검문주가 곧 온다고 하니 그간의 틈이야 우리 손으로 지키지 못하겠는가?" 곽입지와 공손월마저 원가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천악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조추수가 태사전에 나타났다. 그는 태사전에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조아리며 부르짖듯이 말했다. "마 사형과 박 사형이 마교의 손에 죽었습니다. 두 분 사형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 어찌 분이 풀릴 수 있겠습니까? 절 나가장으로 보내 주십시오. 반드시 사형의 원한을 갚고야 말겠습니다!"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읍소(泣訴)하는 조추수의 목소리엔 비분 강개(悲憤慷慨)함이 가득했다. 조추수의 갑작스런 등장에 일시 어리둥절해 하던 매천악이 노하여 엄히 꾸짖었다. "내가 널 부르지 않았거늘, 허락도 없이 함부로 태사전에 발을 들여놓다니...! 이제 성심동에서 갓 나온 녀석이 어찌 이토록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썩 나가지 못하겠느냐?" 매천악의 호통에도 조추수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에 매천악이 탁자를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원가량이 급히 만류했다. "무조건 나무랄 일은 아닐세. 죽음을 두려워 않고 동문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기특하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추수는 무공이 높으니 이 기회에 자신의 죄를 사하고 공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것일세."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겐가?" "그건..." 매천악은 일시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원가량이 재빨리 말했다. "생각해 보게. 배 사제는 나신의 사부로서 반드시 나가장으로 가야만 하네. 그런데 그들만으론 마교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야. 따라서 우린 또 다른 고수를 대동케 해야 하는데, 누가 갈 수 있는가? 본 파가 위험에 처한 이상 나나, 곽 사제, 공손 사제는 사문의 수장(首長)으로서 자리를 함부로 비울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추수라면 적합하지. 추수의 무공은 나보다도 뛰어나네. 그러니 그를 보내자는 것이네." 원가량은 동의를 구하듯 좌중의 인물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곽입지와 배간이 고개를 끄덕이자, 원가량은 매천악이 결국은 자신의 뜻에 따르게 되리라 확신했다. 공손월은 조추수를 사지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원가량의 말이 이치에 닿는지라 반박하지 못했다. 매천악은 뜻하는 바가 있어 조추수만은 나가장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제 원가량으로 인해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는 치솟는 화를 주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속을 긁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동철비였다. "원 대협의 의견이 참으로 고명하오." 문득 매천악이 원가량에게 대답하는 대신 궁조생을 소리쳐 불렀다. 궁조생이 들어오자마자 매천악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생! 넌 추수와 함께 배 사숙을 도와 나가장으로 출발하도록 하라. 지금 당장!" 배간이 매천악에게 크게 읍을 하며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사형.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배간을 따라 나가는 궁조생과 조추수를 바라보는 매천악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런 매천악의 모습을 보며 원가량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천악과 힘겨루기를 해온 그에게 매천악을 추종해 온 배간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조추수의 경이로운 무공은 원가량에게 대단히 무거운 부담을 주고 있었다. 원가량은 마교의 힘을 가늠해 보며 나가장으로 가는 배간과 궁조생, 조추수가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신검문의 힘을 빌려 마교를 물리치고 나면 태행검파의 장문 자리는 내 것이 되리라.'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5 장 천륜(天倫)은 모질어도 피할 수가 없 제 15 장 천륜(天倫)은 모질어도 피할 수가 없구나 홍희, 배간, 궁조생, 나신, 네 사람은 정신없이 탁자 위의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마치 말 한마디 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조추수는 젓가락을 깨죽거리며 이들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나가장으로 향하는 길에 주루에 들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배간, 궁조생, 나신, 조추수, 네 사람이 태행산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검문주의 아들인 위지천의 안위가 걱정된 홍희가 같이 동행할 것을 요구해 일행은 다섯이 되었다. 왕옥진이 한사코 동행하려 했지만, 여인이라는 이유로 매천악이 만류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배웅하는 왕옥진의 모습을 외면한 채 떠난 배간과 궁조생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조추수는 젓가락을 놓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층에서 내려다본 대로(大路)엔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行人)들로 가득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인간 세상의 활기(活氣)를 증명하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귀로 흘리며 조추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매천악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태행산을 떠나온 일행은 말을 바삐 몰아 저녁 무렵엔 이곳 진성(晋城)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조추수의 뱃속은 아우성이었지만, 입은 음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비록 동문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나가장행을 자원했지만, 정작 길을 가는 내내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매약화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성심동에 갇혀 지내면서 수없이 번뇌한 끝에 사부가 결코 매약화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조추수였다. 이제 그에겐 부부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서로의 사랑만은 변치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물론 이 바람이 조추수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위안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조추수가 찾은 묘하고도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해법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마음가짐이 주게 될 괴로움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생각이 이르면 조추수로서도 두렵기 그지없었다. 살아 있는 한 한 여인을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그 여인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비극적인가? 또한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매약화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휘감았고, 이것이 조추수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했다. 차라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동안, 매약화가 조추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죽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난 이번에 기필코 사형들의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원한을 갚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리하면... 내가 사문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사부님의 나에 대한 생각도 조금이나마 바뀌지 않을까? 어쩌면 약화와 나의 관계를 인정해 주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를 하실지도 모르지. 아차! 내가 또 약화를 생각했구나. 난 나쁜 놈이다. 사문이 어려운 이때에도 정에 얽매여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다니...!' 조추수가 매약화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머리를 한번 세차게 내젓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할 때였다. "배 사숙님! 여기 계셨군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배간이 반색했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매휘양과 그 뒤로 여러 명의 무사들이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오고 있었다. 매휘양은 배간에게 읍을 하고 홍희와 인사를 나눈 후 동행한 무사들 중 한 사람이 당겨 온 의자에 앉았다. "여기서도 나가장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전 아버님께서 분명 본 파의 고수를 파견하시리라 예상하고 수하를 시켜 탐문했지요." 광운보(廣雲堡)는 진성 밖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광운보는 산서무림에선 신검문과 태행검파를 제외하면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한 세력이었다. 매휘양은 십팔 년 전 광운보주 모유량(毛遊亮)의 딸과 결혼했고,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저의 장인께선 최근의 사태에 우려를 금치 못하시고 계십니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본 파와 합류하여 마교를 상대하시려는 모양입니다." "그거 잘되었군. 모 보주는 무공이 높고 세력이 크니, 도와 주신다면 커다란 힘이 될 거야." "그런데 진성을 지나시면서 왜 광운보에 들르지 않으시고...?" "아! 워낙 서두르다 보니 경황이 없어 네가 광운보에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어." "하긴..." 매휘양은 배간의 심정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 사제, 심려가 크겠군." "염려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지만 걱정 말게. 나도 자네를 따라 나가장으로 갈 걸세. 우리가 힘을 뭉쳐 대적한다면 아무리 마교라 한들 어쩔 수 있겠는가?" 매휘양의 말에 배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우리와 동행하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이번 길은 위험하기 그지없어. 넌 장문의 아들이니 함부로 행동해선 안 돼. 장문의 명없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버님께선 제게 배 사숙님과 결코 동행해선 안 된다고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이번 일은 바로 사문의 일이 아닙니까? 나가장의 어려움을 알고도 돕지 않는다면, 제가 어찌 태행검파 장문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신검문의 고수가 합류할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마교의 고수들 대부분이 나가장에 나타나면 일행 중 살아남을 이가 없으리라고 배간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장문의 아들이 사지(死地)에 들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매휘양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사코 일행과 동행하려 했다. 한동안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배간은 매휘양의 동행을 허락하고 말았다. 매휘양은 주루에 나타난 이후로 배간과 나신에게는 말을 걸었으나, 궁조생과 조추수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특히, 조추수에게는 좋지 못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배간과 나신은 평소 매휘양과 궁조생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지금은 나가장에 대한 걱정으로 이런 매휘양의 태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추수와 궁조생이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 때였다. "와-아!"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창 밖으로부터 들려 왔다. 조추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맞은편 주루의 입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곧 이어 주루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나오더니,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주루 밖으로 튕겨 나왔다. 그는 몹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검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바닥에 엎어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배간이 음식을 집어먹으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조추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조추수는 창 밖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맞은편 주루에서 싸움이 일어났나 봅니다. 하나, 둘, 셋, 으흠! 저 주루 안에 대단한 고수가 있는가 보군요. 벌써 여섯 명이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있으니." "싸움이야 늘 있는 일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어서 식사를 하고 출발하도록 하자." 홍희는 강호의 경력이 오래되어 남의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고수가 있다는 조추수의 말에 무심코 밖을 내다보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섯 명의 무사들 중 넷이 벌떡 일어나며 주루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그들을 훑어보던 홍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아닌가? "이게 웬일이냐?" 그는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문을 통해 길가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보시오, 홍 대협!" 배간이 소리쳐 불렀을 땐, 홍희는 이미 길에 쓰러져 있는 두 명의 무사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잠시 쓰러진 무사를 살피던 그가 조추수 일행의 귀에 분명히 들릴 정도로 호통하며 맞은편의 주루 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마 저들은 신검문의 사람들인가 봅니다." 궁조생의 말에 배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모른 체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도 어서 가보자꾸나." 배간이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을 놓고 창 밖으로 뛰어내리자,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다. 홍희가 맞은편 주루 안으로 들어서자, 이리저리 부서져 널브러진 탁자들이 발에 걸렸다. 주루 정중앙에 위치한 탁자엔 면사여인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녹색 장삼을 걸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위지천은 신검문의 여덟 고수와 함께 백의청년 한 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위지천은 지극히 낭패한 모습이었다. 위지천은 금색 장포에 금색 요대를 둘러 마치 부잣집의 귀한 공자와 같은 차림이었는데, 소매와 바짓자락이 길게 찢어져 너덜거렸고 얼굴엔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모두들 손을 멈추시오!" 홍희의 일갈에 싸움이 일시 멈추었다. 위지천이 뒤돌아보더니 반색하며 싸움권을 벗어나 다가왔다. 나머지 신검문의 무사들도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백의청년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지 한걸음 물러나 뒷짐을 진 채 홍희를 바라보았다. "이공자(二公子), 어찌 된 일이오?" "홍(洪) 외숙(外叔)!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들이 괘씸하게도 아버님을, 아버님께 무례한 언동을..." 위지천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백의청년이 비아냥거렸다. "흥! 신검문주가 천하제일의 얼간이라는 사실은 무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따위 실력으로 스스로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 칭할 수 있단 말인가?" "뭣이라고?" "하하하하하!" 백의청년은 홍희의 시뻘게진 얼굴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대소를 터뜨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홍희가 등에서 검을 빼 들었다. 조추수 일행이 주루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입구에 선 조추수는 그 두 사람 중 백의청년을 보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대는 보 형이 아니오?" 동시에 배간과 궁조생이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터뜨렸다. "너, 너희는...!" 그들은 보구천과 그 뒤의 두 사람을 본 순간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매휘양은 배간과 궁조생의 표정을 보며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숙?" 보구천이 조추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답했다. "오! 조 형이구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조추수는 보구천이 반가이 대하자 기쁜 마음이 일었으나, 동철비가 한 말을 상기하고는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그대가 마교의 인물이란 게 사실이오?" 홍희와 위지천이 놀라며 동시에 소리쳤다. "마교라고?" 매휘양 또한 마교의 인물은 처음 보는지라 당황하여 검을 뽑아 들었다. 보구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사실이오. 난 황산의 천도봉에서 왔다오." 심원의 객잔에서 서로 힘을 합하여 동철비를 물리쳤을 때, 조추수는 그의 대장부다운 기질에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보구천이 동문들을 죽인 마교의 인물임이 확인되자 그 호감이 일시에 적대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조추수는 보구천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흥! 그랬었군. 그때 그대가 마교의 인물인 줄 알았다면 난..." 이때 배간이 다급히 소리쳤다. "홍 대협! 어서 뒤로 물러나시오!" 배간의 절박한 음성에 홍희가 언뜻 놀라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궁조생과 배간은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서 사색(死色)이 되어 있었다. "어서 물러나란 말이오, 어서!" 마치 절규를 하는 듯한 배간의 모습에 홍희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위지천의 소맷자락을 끌며 배간에게 다가갔다. 이 두 사람을 따라 신검문의 여덟 고수도 물러났다. 배간의 황망한 모습에 탁자에 앉아 있던 노인과 보구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싱글거렸다. 홍희가 다가갈 때까지 배간과 궁조생은 잔뜩 경직되어 면사여인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홍희는 면사여인에게 눈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시오?" "저, 저 여인은..." 검으로 면사여인을 가리킨 배간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갑자기 소름 끼치는 불안감이 홍희의 뇌리를 강타했다. '설마...?' 그 불안감은 배간의 말로 인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 마녀이외다. 방 대협을 죽인 바로 그 마녀외다!" "아!" 홍희와 위지천을 비롯해 그들의 정체를 모르던 이들은 모두 대경 실색하고 말았다. 조추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루에 들어오자마자 면사여인의 맞은편에 앉은 인물이 황산박룡 등고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의 정체는 알아보지 못했다. 방가장에서 면사여인이 살겁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면사여인이 마원의와 박위를 죽인 장본인임을 알게 되자 주저 않고 검을 뽑았다. 태행산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죽음을 다짐한 그였다. 그에겐 마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조추수가 이글이글 불타 오르는 복수심을 못 이겨 앞으로 달려들려 할 때였다. 등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간을 가리키며 냉랭하게 말했다. "방가장에서 운 좋게 살아났으면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일이지 죽을 줄도 모르고 우릴 찾아오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놈들이구나." 눈앞의 적들을 모두 죽여도 원한이 사그라지지 않을 조추수였다. 그는 등고의 비웃음을 듣자마자 분기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닥쳐라! 이 마두(魔頭)야!" "추수, 안 된다!" 배간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으나 조추수는 이미 도약을 한 후였다. 조추수와 등고 사이엔 보구천이 있었다. 당연히 그를 먼저 공격해야 했으나 심원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어 그를 해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추수는 보구천을 뛰어넘어 등고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보구천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유엽도로 조추수의 검을 가로막았다. 쨍! 검과 도가 격렬히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조추수는 보구천의 유엽도에 가로막혀 일단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보구천 또한 뒤로 크게 한걸음 물러났는데, 그는 인상을 가볍게 찌푸리고 있었다. 좀 전의 충격으로 손목이 저려 왔기 때문이다. '이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 하겠는걸.' 보구천은 심원에서 조추수의 검법을 견식한 바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 만만치 않아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반면, 조추수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검을 들어 보구천을 천천히 겨누었다. "그대가 나를 가로막을 셈인가?" 산발한 머리 사이로 빛나는 조추수의 안광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조추수의 눈빛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보구천도 호기가 솟아 지지 않고 말을 받았다. "하하, 그대의 검법이 대단함을 알고 있으니, 이 기회에 한번 겨루어 보아야겠소." 평소의 조추수 같으면 영웅적 기질이 있는 보구천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구천의 호기는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는 조추수의 살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검봉이 부르르 떨리고 조추수의 안광은 더욱 파랗게 변해 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기는 가경(可驚)스러웠다. 조추수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배간과 홍희, 궁조생 등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였다. "천아, 도를 거두어라." 교태롭고도 위엄 어린 음성이 보구천과 조추수 사이의 팽팽한 공기를 갈라 놓았다. 이제껏 말 한마디 않던 면사여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보구천은 무인 특유의 호승심으로 조추수와 겨루려 하던 차에 면사여인이 만류하자 불만스런 표정이 되었다. "사고, 그와 겨루게 해주십시오." 면사여인은 보구천의 요청을 단호히 묵살해 버렸다. "넌 그의 적수가 못 돼!" "사고, 그와 전 겨루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보구천이 승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면사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조추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의 이름이 조추수냐?" 그녀는 조추수의 용모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마녀! 네가 나의 이름을 어찌 알고 있느냐?" 면사여인의 질문에 조추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면사여인은 조추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어 궁조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마음속까지 꿰뚫는 것 같은 그녀의 시선에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했다. "호호호호호!" 갑자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 소리엔 심후한 내공이 실려 있었다. 배간과 홍희 등은 가슴이 진탕되어 얼굴을 찌푸렸다. 조추수 또한 그녀의 내공에 가슴이 일렁임을 느끼고 재빨리 천심장의 내공을 돋우며 소리쳤다. "마녀, 무슨 수작이냐?" 웬일인지 조추수의 일갈에 그녀가 웃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은가?" 마치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듯한 어투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 배간의 심정은 당장에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면사여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일행을 죽이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희와 위지천, 그리고 매휘양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면사여인은 산서무림에서 잇단 혈겁을 일으킨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마녀였다. 자신들의 목숨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오직 조추수만이 그녀의 오만한 말에 분노하여 달려들었다. "죽어랏!" 조추수의 검에서 검기가 일며 면사여인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이 일검은 사전에 기를 잔뜩 모아 찌른 것이라 속도가 빠르고 실린 힘이 대단했다. 조추수는 이 일검이 사전 동작 없이 급작스럽게 내지른 공격이라 상대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면사여인의 무공은 조추수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검이 그녀에게 이르기도 전에 그녀의 신형이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조추수가 검을 회수하는 순간, 우측에서 부드러운 경력이 밀려왔다. 그 부드러운 힘은 조추수가 움직일 만한 모든 방위를 감싸고 있었고, 속에 감추어진 힘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조추수는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이게 무슨 수법인가?' 조추수가 신형을 겨우 가다듬었을 때, 면사여인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다소곳이 서 있었다. 조추수는 이 한 수만으로도 자신이 면사여인을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면사여인에게 검을 던졌다. 면사여인이 살짝 허리를 틀어 검을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추수는 몸을 날렸다. 그녀와의 거리가 일 장으로 좁혀지자 두 팔을 휘둘렀다. 이 일장엔 천심장의 내공이 잔뜩 실려 있었다. 면사여인은 다가오는 조추수를 보며 피하지 않고 웃었다. 소맷자락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옥수(玉手)가 드러나며 조추수의 손을 마주쳐 갔다. "호호, 이 정도의 실력으론 내게..."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여유있게 조추수의 장력을 밀치던 그녀가 화급히 놀라 뒤로 물러나며 천심장을 피했다. "천심장? 네가 내게 천심장을 쓰다니!"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을 귀로 흘리며 다시 일격을 가하려던 조추수는 갑자기 눈에서 불꽃이 튀는 충격을 받으며 비틀거렸다. 어느새 면사여인이 조추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조추수는 상대가 어떤 수법을 써서 뺨을 때렸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면사여인을 쳐다보았다. 뺨에서 전해지는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는 자신의 무공이 초라하게 생각되었다. '사숙조님은 천심장이 천하의 절학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지금의 난 너무나 무기력하구나. 마교의 무공이 이다지도 무섭단 말인가?' 조추수는 이미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반면, 면사여인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조추수를 다시 공격했다. 한편, 일행 중 무공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조추수가 면사여인에게 맥없이 당하자, 배간과 궁조생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마저 한 올 남김없이 사라져 맥이 빠져 버렸다. 하나 이도 잠시, 면사여인이 정신을 놓고 있는 조추수를 공격하자 궁조생이 깜짝 놀라 면사여인에게 덮쳐 갔다. "추수! 위험하다!" 배간도 지체 않고 면사여인을 공격했다. 어차피 조추수가 면사여인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면사여인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조추수는 일격을 당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조추수를 제압한 면사여인은 자신을 덮쳐 오는 궁조생과 배간을 힐끔 쳐다보고는 나직이 냉소했다. 이어 그녀의 신형이 번득였다. 궁조생의 장검을 스쳐 지나는 그녀의 손이 정확히 궁조생의 풍부혈을 강타했다. 궁조생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동시에 그녀는 왼쪽 소매를 휘둘러 배간의 검을 감아 버렸다. 배간은 검을 치켜 들어 그녀의 소맷자락을 베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넓디넓은 소매는 마치 쇠로 만들어진 것처럼 끄떡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철수공(鐵袖功)?' 그가 해연이 놀랄 때, 면사여인의 손짓에 따라 그의 검이 손에서 벗어났다. 연이어 그녀의 우장이 배간의 가슴을 강타했고, 배간은 피를 뿜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한편, 궁조생과 배간마저 마녀에게 달려들자 나머지 일행은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녀와 등고, 그리고 보구천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배간과 궁조생이 달려든 이상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냥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나머지 일행의 행동을 부추겼다. "쳐랏!" 매휘양은 광운보의 무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며 자신도 면사여인을 공격했다. 동시에 나신과 홍희, 위지천, 그리고 신검문의 고수들이 분분히 달려들었다. "흥! 가소로운 놈들. 너희는 내가 상대하마." 이제까지 탁자에 앉아 있던 등고가 일어나 매휘양과 광운보의 무사들 틈으로 몸을 날렸다. 보구천 또한 신검문의 고수들 사이로 끼여들고 있었다. 주루는 삽시간에 검광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처 밖으로 피하지 못한 객들은 이층 난간에서 불안한 눈으로 일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궁조생과 배간을 제압한 면사여인은 뒤로 물러나 격전을 주시했다. 조추수 일행은 보구천과 등고 두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홍희만이 보구천과 겨우 접전을 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등고의 손에 차례로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천아! 그리고 등고! 이들을 죽이지는 마라." 잠시 동안 사태의 추이를 보던 면사여인이 소리치며 뛰어들었다. 그녀가 지나가며 손을 움직일 때마다 무사들이 쓰러졌다. 그녀의 신법은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았다. 오른쪽에서 상대를 제압하는가 하면 어느새 왼쪽에 나타나 무사 두어 명을 쓰러뜨렸다. 그녀가 뛰어든 지 두세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홍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가 보구천과 겨루고 있는 홍희에게 다가가 그를 일장에 쓰러뜨리자 주루 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일찌감치 면사여인의 일장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배간은 그녀가 수많은 고수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하고선 다시 한 번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아아! 누가 저 마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신검문과 본 파가 힘을 합한다고 한들, 저 마녀와 조천주를 이겨 낼 것 같지가 않구나. 큰일이다, 큰일이야! 이제 본 파도 액겁에서 벗어날 길이 없겠어...' 일행이 모두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면사여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조추수와 궁조생을 가리켰다.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가자." 이어 신음하며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 배간과 나신, 매휘양 등을 노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라 너희를 죽이진 않겠다. 정녕 내 손에 죽고 싶거든 나가장으로 오너라." 보구천과 등고가 각각 조추수와 궁조생을 안고 면사여인을 따라 주루 밖으로 나섰다. 이미 상대의 손에 패한 일행은 세 사람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비통한 심정으로 조추수와 궁조생이 잡혀가는 것을 구경해야만 했다. 주루 밖에서 말 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또다시 주루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일행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층에서 누군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점점 커졌다. 일행 중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위지천이었다. "외숙부님, 전 신검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주워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신검문으로 돌아가다니!" "숙부님도 마녀의 무공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나가장에 간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목숨만 하나 더 얹어 주는 꼴이 되지요." 이는 신검문의 위신을 깎아 내리는 말이라 홍희가 다급히 만류했다. "문주님께선 이공자에게 나가장을 도우라는 명을 내리셨네. 이공자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셈인가?" 위지천은 이미 면사여인의 무공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무슨 용기로 사지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위지천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홍희를 외면했다. "아버님도 제가 무모한 싸움을 하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대들도 나를 따라 신검문으로 돌아간다. 지금 당장!" 위지천은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 밖으로 나섰다. "이공자!" 홍희가 다급히 소리치며 위지천의 뒤를 쫓았다. 신검문의 나머지 고수들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주루의 일층엔 태행검파의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다. 배간이 한탄했다. "마녀의 무공이 무서우니 신검문마저도 우릴 외면하는구나..." 나신은 처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겐 당장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 누구보다도 더욱 암담했다. 매휘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간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마녀는 왜 추수와 궁 사형을 데려갔을까요?" "글쎄,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구나." "흥! 마녀가 추수에게 하는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마녀는 추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그 녀석은 마교와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소리! 넌 사제를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트집만 잡으려 하느냐? 그들이 조생을 잡아갔으니, 넌 조생도 마교와 내통했다고 말할 셈이냐?" 배간의 호통에 매휘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쳇! 그 녀석도 한통속일지 알게 뭐람?' 이때 위지천을 따라갔던 홍희가 주루 안으로 돌아와 배간에게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배 대협, 미안하오. 이미 상황이 기울었는지라 이공자의 결심을 바꿀 수가 없구려." "무슨 말씀을...! 오늘 저희 때문에 고생하신 것만으로도 제가 오히려 죄송스럽게 생각해야지요." 홍희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배간의 말에서 원망하는 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도 더 있어 봐야 이로울 바가 전혀 없으리라 생각하여 짐짓 모른 체 읍을 한 후 다시 주루를 떠났다. 홍희마저 가버리자 배간은 비참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이제 자신과 나신은 죽음이 뻔히 보이는 사지로 가야만 하지 않는가? 배간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힘없이 말했다. "신검문이야 어찌했든 우리만이라도 나가장으로 가자." 배간과 나신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면사여인에게 일격을 당한 가슴이 저려 와 배간은 나직이 신음성을 토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부님, 상처가 심하십니까?" "강호를 주유하다 보면 이까짓 상처는 다반사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어서 가자." 배간은 나신의 염려를 일소하며 길을 채근했다. 그런데 매휘양이 움직이지 않고 입을 벙긋거리며 머뭇거리자 배간이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거냐?" 매휘양은 가볍게 기침을 한 후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숙! 아무래도 우리끼리만 나가장에 가는 건 무모한 일 같습니다." 매휘양의 말뜻을 모를 배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에 지극히 상심한 배간은 매휘양의 비겁한 태도에 대한 분노보다는 오히려 체념의 마음이 더욱 앞서 매휘양을 나무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배간은 질책 대신 땅이 꺼져라 탄식을 쏟아 냈다. "눈앞에 보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인물이 몇이나 되겠느냐? 내 너를 탓하진 않겠다. 게다가 넌 장문의 아들이니 사문을 위해서라도 몸을 살펴야겠지. 난 나가장으로 갈 터이니 넌 장문께 오늘의 일을 소상히 알리도록 하여라." 말을 마치자마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주루를 나가는 배간과 나신을 바라보며 매휘양은 부끄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개죽음을 당하러 갈 수는 없잖은가? 중요한 것은 살아남아서 동료의 복수를 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스스로 위안하면서 매휘양은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6 장 산천(山川)은 바뀌어도정한(情恨)은변 제 16 장 산천(山川)은 바뀌어도 정한(情恨)은 변치 않으니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하얀 광선과 펄럭이는 소리가 궁조생의 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아릿하게 드러나는 하얀 천막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막사 안을 따듯하게 데워 주고 있었다. 문득 뒷머리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이 고통이 자신의 처지를 일깨워 주었다. '아차! 난 마녀의 일격에 정신을 잃었지.' 궁조생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은 낙엽을 긁어 모아 담요로 덮은 잠자리였다. 곁엔 조추수가 평온한 신색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휘이이! 요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천막이 심하게 요동쳤다. 이에 입구 쪽 천막이 벌어지며 직사 광선이 쏟아져 들어왔다. 궁조생이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본 순간, 그 광선에 휩싸여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앉아 있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가냘픈 몸매와 얼굴에 늘어뜨린 순백색의 면사. "그, 그대는?" 궁조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더듬었다. 검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검의 감촉 대신 담요 아래서 바스러지는 낙엽의 연약한 비명만이 그의 바람에 응답했다. 격하게 고동치는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면사여인은 궁조생에게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궁조생의 경악성에 면사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햇빛에 익숙지 않은 궁조생의 눈은 그녀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군요." 옹달샘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청량하게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궁조생의 경직된 몸을 이완시켰다. 이상한 일이었다. 동문들과 산서무림의 숱한 고수들의 목숨을 앗아 간 마녀를 앞에 두고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갑작스런 변화에 궁조생 자신이 의아해졌으나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오늘에야 이렇게 당신과 회포를 풀게 되었으니...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또다시 들려 온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던 것이다.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낯설지가 않은 걸까?' 궁조생은 속으로 면사여인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여인의 말에 응대하지 못했다. 이때였다. 태사전에서 매천악에게 방가장에서의 일을 얘기할 때 떠올랐던 여인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 것은... "그, 그대는, 설마...?" 마치 커다란 바위에 부딪힌 듯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너무나 놀란 탓에 벌어진 궁조생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면사 위로 드러난 여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저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시나요?" "그대는 정(程) 소저(少姐), 정 소저가 아니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대는 분명..." "호호호...!" 울부짖듯이 터져 나온 궁조생의 물음에 면사여인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조추수의 얼굴과 마원의, 박위, 추독의 영상이 서로 뒤얽히며 궁조생의 머릿속이 노랗게 물들어 갔다. * * * "신검문의 고수들은 돌아가고 배 사제와 나신, 두 사람만 나가장으로 갔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그럼, 넌 왜 사숙을 따라가지 않고 여기로 왔느냐?" 매천악의 노성이 태사전을 울렸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매휘양은 부친의 갑작스런 호통에 당황하여 눈치를 살폈다. "그, 그건..." 매휘양이 변명하려 하자 매천악은 탁자를 손으로 치며 호통했다. "듣기 싫다! 사숙이 사지로 뛰어드는데, 너 혼자서 도망쳐 오다니, 너 같이 비겁한 놈이 내 아들이란 말이냐?" 화가 지나쳐 성질을 이기지 못한 매천악이 탁자 위의 벼루를 집어 들었다. 벼루의 먹물이 튀어 소매와 가슴 옷자락을 적시며 탁자 위에 뚝뚝 떨어졌다. 공손월이 황망히 일어나 매천악을 만류했다. "사형! 휘양을 나무랄 일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승산없는 싸움에 가담하여 죽느니, 정황을 정확히 알리는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원가량도 보기에 민망했는지 공손월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네. 휘양은 눈앞의 감정보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판단을 내린 것이니, 오히려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있네." 두 사람이 만류하자 매천악은 억지로 노기를 누르며 숨을 씩씩거리다가 자리에 도로 앉았다. "꼴보기 싫으니 물러가도록 해라! 못난놈.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내 손으로 널 죽일 것이니 그리 알아라!" 매휘양은 겁에 질려 황급히 인사를 한 후 도망치듯이 태사전을 빠져 나갔다. 매휘양이 나가자 공손월은 심려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녀가 조생과 추수를 왜 잡아갔을까?" 원가량과 곽입지는 공손월의 혼자말을 알아들었지만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입을 꽉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천악만이 묘한 눈빛을 발하며 볼을 실룩이고 있을 뿐이었다. * * * 매서운 바람이 낙엽을 휩쓸어 허공으로 띄워올렸다. 낙엽을 따라 그녀의 면사도 나풀거렸다. 그녀의 동그스름한 턱과 붉은 입술이 선정적으로 궁조생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살짝 드러난 오뚝한 코에 드리운 상처. 그 상처를 궁조생은 이제껏 잊을 수 없었다. 아마 평생의 시간이 흘러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궁조생은 생각했다. 이십 년 전 어느 초가을의 그날. 황혼이 어스름하게 천지를 뒤덮을 때 궁조생은 그녀를 처음 만났다. 궁조생은 산길을 가다가 신음 소리에 이끌려 길 옆의 숲속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다섯 살 남짓한 남동생을 안고서 길 옆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희디흰 손은 나뭇가지에 긁혀 피투성이였고, 신발이 벗겨진 왼발은 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원래의 형체를 잃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신음이라 생각했던 소리는 울음 소리였다. 아이의 얼굴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그녀는 터질 듯한 가슴을 추스르며 울고 있었다. 아이는 숨이 막혀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려 그녀의 가슴을 축축이 적실 뿐이었다. 그런데... 인면도화(人面桃花)라고나 할까? 그녀를 가까이서 보는 순간 궁조생은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에 사로잡혀 버렸다. 마구잡이로 찢겨 나간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얼굴을 뒤덮고 있는 흙덩이도, 어스름해져 가던 어둠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려군(程麗君)이었다. 열여덟 꽃 같은 나이에 시집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부모를 잃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이십대의 청년이 가질 수 있는 불 같은 협의지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녀에 대한 열정(熱情)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궁조생은 그녀의 어려움을 도울 뿐만 아니라 힘이 부쳐 그녀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생사(生死)마저도 같이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 긴 밤을 그녀와 같이했다. 숲속을 지나며, 간간이 나타나는 정체 모를 복면인들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궁조생은 죽음을 두려워 않고 앞장섰다. 마침내 날이 밝아 더 이상 그들의 손을 벗어나기 어려움을 알았을 때, 바로 그때 그녀가 결연하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간, 우린 모두 적에게 발각되어 죽고 말 거예요." "그럼 어쩌겠단 말이오?" "제가 저들을 유인하겠어요. 그 동안 당신은 추수와 포위망을 벗어나도록 하세요. 이 아이는 우리 정씨 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핏줄이니 부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무공도 변변찮은 그녀가 어떻게 복면인들의 마수를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궁조생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어찌 그녀가 스스로 사지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궁조생은 발작적으로 소리쳐 그녀를 만류했다. "안 될 말이오!" 궁조생은 차라리 자신이 죽더라도 그녀를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않고 애잔한 눈길로 궁조생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달려들며 궁조생의 품에 안겼다. 동시에 궁조생의 면전에 다가오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 전신을 휘감는 짜릿한 전율에 궁조생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입으로 전해 오는 보드라운 감촉에 전신의 신경이 녹아 내린 듯 의식이 아련해져 갔다. 영겁(永劫)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이 멀어지며 차가운 바람이 콧잔등을 스칠 때, 궁조생은 그녀의 코에 새겨진 상처를 보았다. 이제 겨우 딱지가 앉아 옥 같은 피부와 너무나 선명히 대조되던 그 검붉은색의 흔적이 궁조생의 의식 깊은 곳에 뚜렷이 각인되어 버렸다. 당시 그녀의 눈이 어떠한 감정의 빛을 띠고 있었는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상처 입은 콧방울과 보드라운 느낌의 입술만이 눈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앙증맞은 입술이 교묘하게 벌어지며 궁조생의 정신을 일깨웠다. "우리 남매의 목숨을 구해 주신 당신께 드릴 건 이것밖에 없군요." 비틀거리며 궁조생에게서 멀어져 가던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부디... 동생을 잘 보살펴 주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긴 머리를 휘날리며 휘청휘청 뛰어가던 그녀의 뒷모습만이 지난 세월 동안 궁조생의 무의식 속에 남아 그의 감정을 지배해 오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궁조생이 한 일로 받은 대가 중에서 가장 컸던 것이 바로 그녀의 입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궁조생은 벅찬 감동에 숨이 멎는 듯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여인인가? '하지만 이 여인은 수많은 고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의 동문들을 죽였다. 난 태행검파의 제자로서 동문들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는가?' 이 현실이 궁조생을 괴롭혔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다시 만나길 기원했던 여인이건만, 그녀는 모든 이가 증오하는 마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녀와 난 적이다. 장부가 한낱 정 때문에 사문의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궁조생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 소저... 아니, 이젠 세월이 흘렀으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녀도 어느덧 사십이 다되었으니, 당연히 부군과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한 궁조생이었다. 그녀가 그윽한 눈길을 궁조생에게 주었다. "당신은 결혼을 했나요?" "하지 않았소."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날 소저라고 부르세요." "그대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소?" "당신은 어째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요?" '그건 당신 때문이었소'라는 대답을 궁조생은 차마 뱉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 대신 궁조생은 마음을 모질게 하여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왜 그토록 잔혹한 혈겁을 일으켰소? 그리고 내 동문들의 목숨을 앗아 간 이유가 무엇이오?" 잠시나마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일순 싸늘하게 굳었다. 면사 너머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도 냉랭하게 변했다. "난 그 사람들에게서 옛날의 빚을 받아 낸 것뿐이에요." "그게 무슨...?" 되물으려던 궁조생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그럼 이제껏 그대가 죽인 사람들이 그때의 그 복면인들이란 말이오?" "호호호!" 그녀가 교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담긴 처절한 원한과 뜻 모를 회한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궁조생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참 동안 계속되던 웃음을 그친 그녀가 말했다. "그뿐인 줄 아세요? 그대의 가증스런 사부, 매천악도 그 중 일인이에요." 궁조생이 놀라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요?" "그렇소. 나의 사부님은 언제나 인의를 존중했을 뿐, 불의를 행하신 적이 없소. 항상 남에게 예의로써 대하고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들이 사부님을 유면검(柔面劍)이라 부를 리가 있겠소?" "그렇겠죠. 순진하기만 한 당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는 것이랍니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조생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궁조생의 뇌리를 맴돌며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녀가, 분명 그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 피맺힌 한을..." 그녀의 목소리에 궁조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지난 이십 년 동안 단 하루라도 꿈속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어요. 끔찍한 그날 밤의 일이...!"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다.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날 밤 아버님은 피투성이가 되어 우리 남매를 도주시키며 말씀하셨죠. 우리 일가를 몰살한 장본인은 매천악과 위지광이라고 말이에요." "그대의 부친이 잘못 아신 거요. 나의 사부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을 리가 없소."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궁조생의 말은 거의 발악에 가까웠다. "흥! 당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아요. 이제 곧 그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 "그렇다면 그대는 왜 당시 내게 추수를 맡겼소? 태행검파의 제자인 내게!" "그때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죠. 당신은 당신의 사부가 매천악임을 말하지 않았고, 전 매천악이 태행검파의 장문임을 몰랐어요. 당시만 해도 전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는 규방의 여인이었으니까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궁조생 또한 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천근의 바위가 궁조생의 가슴을 짓눌렀다. 세찬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밀치지 않았다면, 아마 궁조생은 견디지 못하고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났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의 이야기는 궁조생을 견디기 힘들게 했다.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궁조생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당신은 너무나 많은 살겁을 저질렀소. 구예와 이각, 휘월산장의 관무목, 방두교, 곡윤뿐만 아니라 당신은 그들의 일가족마저 죽여 버렸소. 당신은 무공을 모르는 여인들과 아이들마저 죽여 버렸소.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죽였단 말이오?" 궁조생은 날카로운 어조로 힐난했다. 그러나 이는 그녀를 꾸짖기보단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로 그녀의 주장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더욱 컸다. 그는 사부가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몰아붙여서라도 그녀가 한 말이 거짓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눈앞의 여인에 대한 애정과 사부에 대한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궁조생의 이러한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그녀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 못 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그들은 나의 부모님과 여동생, 삼촌과 숙모님들, 사촌 동생들을 모두 죽였어요. 우리 집안을 도와 일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처자식마저 모두 죽였어요. 그들은 무슨 죄가 있어 죽었나요?" 면사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궁조생은 그녀가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해줄 거예요. 그들이 나의 가족들을 죽였던 것처럼 나도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일 거예요. 그들이 우리 집안의 사람들을 죽였던 것처럼 그들 집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예요!" 그녀의 가슴에 사무친 한을 느낀 궁조생은 숨이 턱 막혔다. 문득 이십 년 전 숲속에 쓰러져 어린 동생을 안고 애처롭게 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한과 고통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여겨져 무슨 말이든 해서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지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그럼 그댄 나도 죽이겠구려. 난 태행검파의 사람이니." "..." 일순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리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인간은 아니에요. 당신은 나와 추수의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 내 어찌 당신을 죽일 수 있겠어요?" "조 형, 이제 정신이 드시오?" 낭랑한 음성이 조추수의 의식을 재촉하며 깨웠다. 흐릿한 시야가 밝아지며 또렷이 나타나는 얼굴에 조추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대는...!" 조추수의 면전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자는 보구천이었다. 조추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보구천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걸 찾고 있소?" 보구천이 내민 것은 조추수의 검이었다. 조추수는 보구천을 노려보았다.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보구천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추수는 만면에 노기를 띠며 냉소했다. "흥! 그대는 내가 잡혀온 몸이라고 깔보는 것이오?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잘못 생각했군." 보구천이 물었다. "무얼 잘못 생각했단 말이오?" "비록 그대가 마교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호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란 말이오." "하하하!" 조추수의 말에 보구천이 대소하더니 검을 던졌다. 조추수는 그가 검을 넘겨줄 줄은 몰랐는지라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보구천이 웃음을 거두며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어제 저녁엔 사고께서 만류하시는 바람에 겨루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소. 따라오시오." 그가 천막 밖으로 나가자 조추수는 잠시 머뭇거리며 검을 살펴보았다. '난 검을 쓰고서도 마녀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야.' 자신이 천막 안에 누워 있었던 걸로 보아 이곳은 마교의 임시 거처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녀는 왜 날 죽이지 않고 잡아왔을까? 그리고 나를 잡아왔으면 포박을 하지 않고 왜 이렇게 자유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이지?' 조추수는 마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꺼림칙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보구천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조 형! 왜 나오지 않소? 나와 겨루기가 두려운 거요?" 조추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보구천은 조추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한 마녀의 말에 자극을 받아 조추수와 겨루려 함이 틀림없었다. 보구천의 언행이 꼭 어린애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마교의 인물답지 않단 말이야.' 하나 지금은 마음을 가벼이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조추수는 자신이 지금 마교의 수중에 떨어져 있음을 상기하자 이내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밖으로 나섰다. 조추수가 누웠던 천막은 그리 크지 않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온 천막 입구엔 두 명의 장춘곡 무사가 번을 서고 있었다. "여기로 오시오." 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니 직경 오 장 가량 되어 보이는 공터에서 보구천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구천이 서 있는 공터엔 십수명의 장춘곡과 금응방 무사들이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백발이 성성하고 고희(古稀)를 넘긴 듯한 노인이 공터 옆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비록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차림이 평범한 노인이었지만, 그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조추수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조추수는 노인을 예의 주시하며 천천히 공터로 걸어갔다. 보구천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벌써 허리의 유엽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조추수가 공터에 들어서자 그가 유엽도를 흔들며 소리쳤다. "조 형! 어서 검을 뽑으시오." 이어 그는 백발노인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조(趙) 장로(長老)님, 조 형과의 비무를 공정히 판정해 주십시오." "허허, 알았다. 어서 너희들의 재롱이나 구경하자꾸나. 어서 겨루어 보거라, 어서." 노인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조천주였다. 그는 연신 싱글거리며 보구천과 조추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추수가 머뭇거리기만 할 뿐 검을 뽑지 않자 보구천이 다시 소리쳤다. "조 형! 왜 검을 뽑지 않으시오?" "내가 왜 그대와 겨루어야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어제 당신과 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당연히 겨루어야 하지 않겠소?" 보구천은 조추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조추수가 냉소하며 대꾸했다. "흥! 난 이미 그대들에게 포로가 된 몸이오. 그런 나를 상대로 겨루려는 건 내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요?" "무슨 말씀...? 오직 그대와 자웅을 겨루고 싶을 뿐이오." "난 그대와 겨루고 싶지 않소. 내가 그대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지 않소?" 조추수는 검을 가슴에 안은 채 팔짱을 꼈다. 절대 검을 뽑지 않겠다는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보구천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조 형! 그댄..." 이때, 바위에 앉아 있던 조천주가 대소하며 보구천의 말을 잘랐다. "으하하하... 됐다, 됐어. 그만 하거라." 바위에서 일어나 공터로 걸어 들어온 조천주가 묘한 눈길로 조추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누군지 아나?" 비록 마교에 잡힌 몸이었지만 조추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대들은 마교의 살인마들이 아니오?" "허허허, 살인마들이라... 여기 잡혀와서도 큰소리를 치다니, 정말 정씨 집안의 핏줄이 대단하긴 대단하군. 려군도 그렇고 너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으니 말이야." 조천주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조추수가 물었다. "당신은 무슨 헛소릴 하는 거요?" "허허허, 곧 알게 될 거다. 하지만 넌 너무나 닮았단 말이야. 성격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그것 참!" 조천주는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누굴 닮았다는 거야?' 조추수가 조천주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고심할 때였다. "보 사형! 사부님이 오세요. 빨리 도를 거두세요."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오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소년이 눈에 띄었다. 조추수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소리쳤다. "넌, 그때 심원의..." 소년은 심원에서 동철비의 손에 생을 마친 고죽검 유권의 아들 유검학(劉劍學)이었다. 유검학은 조추수에게 다가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전에 심원에선 은공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 뵙게 되었으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예의바른 유검학의 모습에서 조추수는 오히려 어색함을 느꼈다. "무공을 익힌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보다... 보 형을 사형이라 부르다니, 그럼...?" 조추수의 물음에 유검학이 헤헤 웃었다. 보구천이 대신 대답했다. "나의 사고께서 검학(劍學)을 제자로 받아들이셨다오." 보구천의 말에 조추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네가 그 마녀의 제자가 되었단 말이냐?" 유검학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의 사부님은 마녀가 아니에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마녀의 손에 죽었거늘!" 이때, 조추수를 꾸짖는 싸늘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추수! 넌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면사를 한 궁장여인이 공터에 뛰어내렸다. 이와 동시에 조추수는 검을 뽑아 그녀를 베어 가고 있었다. "이 마녀, 죽어랏!" 지금 조추수에겐 눈앞의 마녀를 죽이든지 아니면 자신이 죽든지 둘 중 하나라는 마음뿐이었다. 태행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이를 수없이 다짐했기 때문에 검을 휘두르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면사여인이 가볍게 몸을 움직여 피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정녕 신묘했다. 조추수는 그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 일장을 당한 기억이 있는 터라, 조추수는 그녀가 피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후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조추수의 검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리고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찌르고 베기를 반복했다. 공손월에게서 전수받은 장강유사 초식을 시전한 것이다. "대단한 검법이로군!" 조천주가 조추수의 검법에 감탄성을 터뜨렸다. 돌연한 검법의 변화에 면사여인도 가볍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조추수의 검은 멈추지 않고 상대의 전신을 계속해서 찌르고 베는 것이어서, 그녀는 일순 검망(劍網)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검을 피했다. 아무리 조추수의 검을 피해도 공격이 멈추질 않자, 면사여인은 마침내 허리의 패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좋아! 네가 검법을 제대로 익혔구나." 이어 그녀의 신형이 일 장 가량 치솟더니 교묘하게 회전하며 조추수를 찔러 오는 것이었다. 일순, 그녀의 짧은 패검이 한 자 이상 늘어난 듯이 길게 보였다. 그 검봉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일곱 개의 검화(劍花)를 만들었다. 그 검화는 묘하게도 조추수의 검을 모조리 봉쇄하며 조추수의 요혈을 찔러 오고 있었다. 장강유사의 검법을 계속 펼치면 그녀의 검에 찔리고 말 형편이라 조추수는 재빨리 뒤로 굴러 그녀의 검에서 벗어났다. 그의 전신이 흙먼지로 누렇게 변하자 보구천이 크게 웃었다. 몸을 일으킨 조추수가 신형을 비틀거리자 승부는 이미 났다고 보구천은 생각했다. 그런데 곧 이어 일어난 결과에 보구천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허리를 숙이고 비틀거리던 조추수의 검이 어느새 면사여인을 찌르고 있었고, 그녀는 다급히 검을 거두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가 물러남에 따라 조추수의 비틀거리는 걸음이 그녀를 따랐고, 연이어 예측할 수 없는 각도에서 조추수의 검이 그녀의 전신을 노렸다. 교룡둔장의 기기묘묘한 동작에 보구천은 좀 전의 비웃음을 잊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절묘한 초식이로군. 정말 절묘해!" 보구천의 감탄을 자아낸 교룡둔장 초식도 면사여인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대여섯 번의 공격이 지나자 검법의 변화를 파악한 그녀가 조추수의 검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매서운 공격에 조추수는 연달아 일곱 걸음을 물러난 끝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면사여인의 검은 이미 조추수의 미간 한 치 앞에 이르러 있었다. "분하다! 내 너의 상대가 되지 못하다니... 어서 죽여라!" 이제 죽은목숨이라 생각한 조추수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한데 면사여인은 한참이 지나도록 조추수를 찌르지 않았다. 의아해진 조추수가 슬그머니 눈을 뜨니 검은 오간데없고, 면사여인과 궁조생이 함께 서 있는 게 아닌가? 조추수가 놀라 소리쳤다. "아니? 사형이 어찌 이 마녀와 같이 있는 겁니까?" 조추수의 물음에 궁조생은 말이 없었다. 대신 면사여인이 조추수에게 말을 건넸다. 조금 전 그와 검을 겨루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날 마녀라고 불러도 넌 그래서는 안 된다." "무슨 수작이냐? 내가 어째서 널 마녀라고 부를 수 없단 말이냐?"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이, 조추수는 눈앞의 마녀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의 입에서 말 한마디가 나오면 나올수록 그의 분노 또한 한 치, 두 치 깊어졌다. 그러나 곧 이은 궁조생의 말은 조추수의 분노를 산산이 날려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더 없는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추수, 말을 삼가라. 이분은 너의 누님이시다." "...!" 일순 조추수는 멍해져서 궁조생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궁조생의 말을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형, 방금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궁조생은 대답 대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추수가 다시 물었다. "사형, 제가 방금 잘못 들었겠지요? 저 마녀가 저의 누님이라니... 그렇지요?" 궁조생은 면사여인, 즉 정려군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어떻게 조추수에게 현실을 납득시켜야 할까 고민했다. 정려군이 조추수에게 '내가 네 누님이다'라고 말한다면 조추수가 쉽게 믿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궁조생은 조추수를 어려서부터 지극한 애정으로 가르쳤다. 물론 그 애정의 근원은 정려군에 대한 사모지심(思慕之心)이었다. 그러나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라난 조추수에 대한 애정은 정려군에 대한 사랑과는 별도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친형제간의 끈끈한 사랑과도 같았다. 오로지 궁조생만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 왔던 조추수에 대한 신뢰(信賴)로 점철된 사랑이었다. 따라서 궁조생은 아무리 가혹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추수가 알아야만 하는 진실이라면 결코 숨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부와 지난 이십 년간을 그려 온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고, 또 현실을 믿고 싶지 않더라도, 조추수에겐 결코 진실을 은폐하려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조추수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천륜(天倫)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어떻게 추수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우선 내가 지금의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궁조생은 정려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마음도 격정에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추수!" 어떻게든 조추수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궁조생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한 말이 있었지? 이십 년 전, 내가 널 처음 구했을 때, 바로 그때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조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가슴속에선 운명이라는 철퇴가 심장을 마구 치고 있었다. 그는 사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사형은 마녀가 나의 누님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분명히 나의 누님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전신의 힘이 빠져 몸을 비틀거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장막이 시야를 스멀스멀 좁혀 오는 가운데, 궁조생과 정려군의 모습만이 더욱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궁조생의 이어지는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때 헤어진 너의 누님이 한 분 있었다고 했지?" 조추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님의 이름은 정려군이었다. 그리고 지금 너의 눈앞에 있지. 오늘에야 너희 남매가 상봉을 한 것이다, 이십 년 만에!" 조추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애써 진정하려 했지만, 팔다리가 눈에 띌 정도로 후들거렸다. 문득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정려군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반쪽의 옥패였다. 그녀가 옥패를 조추수에게 건네 주었다. 겨우 잠잠해져 가던 조추수의 심장이 다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추수, 이 옥패는 우리 정씨 가문의 장자(長子)에게 계승되던 신물이란다. 원래 네 것이었으니 이제 돌려주마." 조추수는 떨리는 손으로 옥패를 받아 들었다. 그 반쪽의 청색 옥패엔 '화(禾)'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조추수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참지 못할 격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조추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당신이, 당신이 나의 누님이라니, 난 믿을 수 없어!" 조추수의 처절한 육성이 바람을 타고 나무와 산을 휘감으며 메아리쳤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7 장 지나온 세월만큼 원한 또한 깊어라 제 17 장 지나온 세월만큼 원한 또한 깊어라 "옥패에 새겨진 글자는 우리 가문의 성(姓)을 나타낸단다." 조추수가 간직하고 있던 반쪽의 옥패와 정려군이 건네 준 반쪽의 옥패는 정확히 일치하여 하나의 둥근 옥패가 되었다. 그 옥패에 새겨진 글자는 '정(程)'자였다. 이제서야 조추수 아니, 정추수(程秋愁)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옥패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다. 옥패를 쥔 정추수의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 태행검파의 제자다. 그리고 나의 누님이라는 이 여인은 나의 동문들을 죽인 마녀다. 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나? 아니, 이 여인이 정말 나의 누님일까?' 정추수는 현재 자신 앞에 당면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궁조생이 인정한 이상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정려군의 말이 계속되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표국을 운영해 왔단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집안의 보운표국(寶雲局)은 산서 제일이었다. 아버님은 표국을 운영하여 얻은 재물로 부를 축적하시기보단 항상 어려운 이들을 도왔지. 그래서 사람들은 아버님을 인의대협(仁義大俠)이라 칭송했단다. 그런데..." 정려군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떨려 나오기 시작했다. 정추수는 고개를 숙인 채 옥패를 만지작거리느라 그녀의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아버님께서 마흔세 번째 생신을 맞이하던 날 밤, 우리 집안은 비극을 맞고 말았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산서무림의 고수 아홉 명이 생신을 축하하러 왔는데, 그들이 갑자기 살인마로 돌변할 줄 누가 알았겠니? 그들은 비열하게도 겉으론 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척하다가 아버님께서 대취한 틈을 타 일제히 공격했단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지. 그때 어머님과 너의 작은 누나였던 려상(麗祥)도 그들의 마수에 죽고 말았단다." 그녀는 격정에 치우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정추수는 가문의 혈사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세월 동안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왜 자신은 혼자 버려져야만 했는지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알고 싶어 했지만, 막상 자신이 증오하던 마녀가 그의 누님임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서 가문의 비사를 듣게 되자 부정하고픈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자신의 부모와 혈친이 원통하게 죽었다면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 했다. 정추수는 힘줄이 불거지도록 옥패를 꽉 움켜쥐었다. "그들이 왜 우리 집안을 공격했단 말입니까?" 정려군의 눈에서 원독의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흥! 그건 장한진경(長恨眞經) 때문이었지. 그들은 우리 집안 대대로 비전(秘傳)되어 오던 장한진경을 노렸던 거야." "장한진경? 그것이 무엇이기에 우리 가족을 모두 죽이려 했단 말입니까?" 한숨을 토하는 정려군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백팔십 년 전 무림엔 검도쌍마(劍刀雙魔)라는 초절정고수가 있었다. 당시 그 두 분은 각각 검과 도로써 무패(無敗)의 신화를 쌓았는데, 그 쓰는 수법이 잔인하여 검마(劒魔)와 도마(刀魔)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별호를 얻었지. 하지만 무공만은 지극히 고강하여 무림에서 적수가 거의 없었단다. 그 중 검마는 훗날 대별산(大別山)에 은거하여 노가장을 세웠고, 도마께선 신분을 감추시고 보운표국을 세우셨단다. 즉 도마께선 너의 육대 조부란다." 정려군의 얘기를 들으며 궁조생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도 검도쌍마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어 왔던 터라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고수였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듣기로 검마는 후손이 있으되, 도마는 홀연 무림에서 사라진 이후로 맥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추수의 집안이 바로 도마의 후손이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구나.' 정려군의 말이 계속되었다. "검도쌍마는 딱 한 번 서로 무공을 겨루었는데, 일주야(一晝夜)를 싸웠어도 승부를 내지 못했단다. 무림인들은 두 사람의 무공이 백중지세라고 생각했지. 흥!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드러난 결과였을 뿐이야. 조부께선 검마와 겨룰 때 전력을 다하지 않으셨어. 사람들은 조부님께서 도만을 쓰는 걸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조부님은 검에 더욱 능통하셨단다. 만약 조부님이 검을 쓰셨다면 승리는 당연히 조부님의 것이 되었을 거야."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에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토록 놀라운 무공을 계승했다면 그대의 부친께선 어떻게 흉수들에게 살해당하셨소? 그런 무공이라면 충분히 물리치고도 남음이 있었을 터인데." "흥!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들 친우(親友)의 웃음 속에 숨겨진 비수는 막기가 힘든 법이에요.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정려군이 나직이 탄식했다. "저의 육 대 조부께선 임종 전에 당신의 무공을 세 권의 책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셨죠. 그러나 당신의 무공은 너무 살기가 짙은지라 자손에게 익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 이후론 장한진경의 무공을 익힌 이가 없었어요. 저의 부친께서도 선조의 유훈에 따라 진경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요. 그러니 술에 취한 상태에서 흉수들의 암습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겠어요?" "소저의 얘기는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오. 내 듣기로 그대의 부친께선 표국을 운영하면서도 산서제일의 고수로 이름을 떨쳤다고 했소. 다만 이십 년 전 의문의 혈겁을 당해 살해된 사실만이 전해졌을 뿐, 그 내막을 알지 못했는데..." 문득, 탄식조로 말을 하던 궁조생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나요?" 정려군의 물음에 궁조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수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궁조생의 기색이 너무나 이상했으므로 정추수도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형,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다, 아니야!" 대답을 회피하는 궁조생의 뇌리엔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정려군의 얘기가 계속되었다. "당시 우리 일족을 멸하려 했던 흉수는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들은 구예, 이각, 관무목, 방두교, 곡윤, 동철비, 나철백, 그리고..." "그랬었군요. 그래서 그들을 죽였군요." 정추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를 보면서 정려군이 냉랭하게 말했다. "흥! 그뿐인 줄 아느냐? 신검문주와 가증스런 너의 사부, 매천악도 흉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럴 리가...?" 정추수의 손에 쥐여져 있던 옥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매천악이 가문 혈겁의 흉수라는 말은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정추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신이 나의 누님이라는 말도 믿기 어려운데, 이젠 나의 사부님이 가문의 원수라니... 날더러 그 말을 믿으란 말이오?" 정추수의 얼굴은 불신과 경악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정려군의 음성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고 있었다.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이건 아버님께서 임종 전에 남기신 말씀일 뿐더러 내가 구예와 이각으로부터 확인하기도 한 사실이란다. 매천악과 신검문주 위지광은 우리 가문의 장한진경을 노리고 혈겁을 자행한 것이었지. 당시 아버님은 세 권의 진경을 각각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계셨는데, 난을 당하자 너와 나를 피신시키며 내게 한 권의 진경을 주셨단다. 그리고 나머지 두 권은 이미 흉수들에게 빼앗겼다고 말씀하셨지." 정려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신의 표정이 역력한 정추수에게 다가왔다. "잃어버린 두 권의 진경엔 각각 천심장과 육 대 조부께서 강호를 주유할 때 이름을 떨쳤던 광명패월도법(光明覇月刀法)이 실려 있었어. 난 당시 널 궁 대협께 의탁했는데, 매천악이 태행검파의 장문인 줄 몰랐기 때문이었어. 훗날 이 사실을 알고 난 네가 이십 년 전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지. 보구천으로부터 네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난 그때 추수라는 너의 이름을 듣고는 내 동생일 거라고 확신했어. 그리고 막두철이 너의 검에 상처를 입고 돌아와선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때 그의 사인은 검에 의한 상처가 아니라 천심장에 의해 심장이 갈라져 죽은 것임을 알고는 더욱 놀랐지. 추수, 넌 어떻게 천심장을 익혔지?" 정추수는 정려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실타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천심장은 사숙조님께서 나에게 가르치셨다. 이 여인은 천심장이 수록된 진경은 흉수들이 탈취했다고 했는데, 그럼 사숙조님도 그때 흉수 중의 한 명이란 말인가? 사부님뿐만 아니라 사숙조님까지? 그럼 사숙조께선 왜 내게 천심장을 가르치셨지? 분명 사숙조께서는 나의 출신내력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내게 천심장을 가르친단 말인가? 이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런 생각에 조추수는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정말 그럴싸하오. 하지만 당신의 말엔 빈틈이 많소. 내가 정녕 정씨 가문의 아들이고, 사부님이 멸문의 흉수라면, 사부님께서 날 제자로 맞아들였을 리가 없지 않겠소? 왜냐하면 아버님과 사부님은 친분이 두터웠다고 당신이 말했으니까 나의 얼굴도 알고 있었지 않겠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사부님은 날 보자마자 죽였을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사형? 분명하지요? 그러니까 사부님은 날 조추수라고 부르신 게 아니겠습니까? 나의 성은 조씨가 분명하지요?" '흥! 마녀야, 네가 무슨 수작으로 날 현혹하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그리 호락호락할 줄 알았더냐?' 정추수는 자신이 눈앞의 여인이 한 말에 대한 허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이은 궁조생의 한숨 섞인 대답이 이런 정추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내가 널 처음 데려왔을 당시 사부님은 네가 인의대협 정범(程凡)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보셨단다." "그게 정말입니까?" 궁조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부님께선 널 보시자, 보운표국의 멸문을 말씀하시며 이후 연약한 너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정씨라는 성을 숨기고 조씨 성을 쓰도록 하셨지. 그리고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내게 당부하셨어. 난 그때 이후로 네게조차 너의 성이 정씨임을 말하지 않았단다." 지나간 진실을 얘기하는 궁조생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그가 한 말은 바로 사부의 죄악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말의 미련이 남는 듯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사부님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내게 그런 명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머릿속엔 무서운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매천악의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였다. 궁조생의 말을 듣고 난 정추수는 사부에 대한 믿음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나의 출신내력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문득, 청수원에서 매천악이 매약화에게 자신을 근본도 모르는 미천한 놈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사부는 나의 출신내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약화에게 거짓을 말하여 나와 갈라 놓으려 했다. 이제야 사부님이 약화와 날 맺어 주지 않으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고 해도 그는 나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정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눈물은 가문의 비극 때문에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매약화와 맺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슬픔이 표출된 것이었다. 매천악의 자애스런 얼굴이 일그러지며 악마와 같이 변해 갔다. 그 속에 매약화의 사랑스런 얼굴이 피어올랐다. 이미 죽어 버린 사형들, 마원의와 박위, 추독의 얼굴이 흔들리듯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마녀라고 저주했던 여인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갑자기 매천악의 위선에 대한 심한 혐오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가슴속으로부터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정추수는 울부짖었다. "난... 난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겁니까? 대체 누굴 믿어야 합니까?" * * * 유시(酉時) 말, 모두가 숙소로 돌아갔을 무렵, 매휘양은 부름을 받고 매천악의 방으로 갔다. 오전에 꾸지람을 들은 기억이 남아 있어 매휘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방문에서 인기척을 내었다. "아버님, 휘양이옵니다." "들어오너라." 매천악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일단 안도를 하며 매휘양은 살며시 방문을 밀쳤다. 매천악은 둥근 탁자에 앉아 막 서신을 접어 봉투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는 매휘양이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낮엔 내가 화를 내어 놀랐지?" "아버님께서 이유없이 화를 내시진 않으셨겠지요." 매휘양의 대답에 매천악은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내가 지시한 대로 훌륭하게 행동했다. 아들이 사지에 뛰어들기를 바랄 아비가 어디 있겠느냐? 원 사형과 곽 사제의 눈이 있어 그랬던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지 말아라." 부친의 의도를 알게 되자 매휘양은 비로소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 "그런데 약화는 어떠냐? 정신을 차렸느냐?" "아직... 의식을 잃었는데도 입으론 계속 추수, 그 녀석을 찾더군요." 오전에 매휘양은 매약화에게 조추수가 마녀에게 잡혀간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소식을 듣는 순간, 자지러지게 놀라더니 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매천악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흐음, 약화의 정이 그렇게나 깊었더냐?"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으니 정이 각별할 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추수에게 시집보낼 순 없지 않습니까? 이번 기회에 아예 추수, 그 녀석을 생각지 말도록 못을 박아 버리시죠." 매휘양은 부친이 추수와 약화를 맺어 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부친의 의도만은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추수를 서슴지 않고 그 녀석이라 부른 것이다. "아니다, 아직은 그래선 안 된다. 좀더 시간을 갖고 약화를 설득해 봐야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문득 매휘양이 근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 마녀의 무공이 고강하기 이를 데 없으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갑자기 매휘양의 두 눈에서 신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엔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흥! 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 이십 년 전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선 벌써 이 일을 예측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매휘양이 놀라자 매천악은 득의 만만한 표정이 되었다. "예측하다 뿐이겠느냐? 이제 이 일이 내 뜻대로 마무리되면 난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매천악의 호언에 매휘양은 눈이 휘둥그래진 채 말을 못 했다. 이제껏 부친의 이런 광오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천악은 탁자 위의 봉투를 집어 매휘양에게 내밀었다. "휘양, 내일 널 광운보로 보내기 위해 하산시킬 터이니, 넌 산을 내려가는 즉시 신검문주에게 이 서찰을 전하도록 하여라. 한시라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매휘양이 방문을 밀치고 나가자, 매천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 의미 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그 마녀는 조생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난 추수와 조생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조생은 내가 죽으라 하면 기꺼이 죽을 녀석이다. 그리고 추수는... 약화를 잊지 못해 반드시 사문으로 올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 * * "사형! 난 지금 태행산으로 가겠습니다." 궁조생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을 알고도 태행산으로 가겠다니!" 궁조생뿐만 아니라 정려군도 정추수의 말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의 면사가 크게 흔들렸다. "안 될 말이다. 이제 네가 돌아간다면 매천악은 기필코 널 해치고야 말 것이다." 정추수의 마음은 이미 확고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은... 내게 남아 있는 의문이 너무 많습니다. 그 의문들을 떨치지 못하는 한, 난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려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바보 같으니! 명확한 증거가 있는데 의문이라니!" 그녀는 정추수가 아직도 현실을 완전히 믿지 않고 난데없이 사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나 그녀가 어찌 정추수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정추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상내력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매약화에 대한 사랑뿐이었다. 자신도 몰랐던 과거가 그녀와 정추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전부였다.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쩌면 그 벽을 허물 수 있을지도 모를 진실을 찾고자 할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냉겸을 만나야만 했다. 냉겸은 정추수에게 가문의 비전무공인 천심장을 가르쳤다. 또한 정추수의 신상내력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정추수는 그에게서 정려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의 공통점과,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 희망을 안겨 줄지도 모르는 상이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부님은 날 이십 년 동안이나 길러 주셨다. 어쩌면 사부님이 날 제자로 받아들여 길러 주신 것은 진심으로 날 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누님이라는 이 여인이 사부님을 흉수 중 일인으로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난 이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 정추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매약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반드시 사문으로 돌아가 확인해야만 한다고 다시 한 번 결심하는 정추수였다. 정추수는 이를 악물고 정려군을 바라보았다. "난 아직도 당신을 누님이라고 부를 수 없소. 내가 직접 사문으로 돌아가 진실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결코 당신을 나의 누님으로 인정할 수 없소. 물론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난 당신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결코 내게서 누님이라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진정 나의 누님이라면 나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날 보내 주어야만 하오." 정려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직도...? 아직도 날 믿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렇소." 정추수의 냉정한 대답에 정려군의 교구가 파르르 떨렸다. 이때, 정추수를 비꼬는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렸다. 눈을 감고 구석진 곳에 비켜 앉아 이제까지 세 사람의 대화를 듣던 조천주였다. "정말 먹통 같은 놈이로구나. 이만큼 얘기해 줘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지.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이 용하다, 용해!" 정추수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소리쳤다. "당신이 나의 일에 웬 간섭이오?" "허! 이놈 정말 대담하구나. 내게 큰소리라니. 넌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당신이 누구인지 내 알 바 아니오. 누구든지 내가 하고자 하는 뜻을 막을 순 없소." 정려군이 정추수를 다급히 꾸짖었다. "네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감히 무림의 대선배님께 무례를 범하다니! 조 장로님, 제 동생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정려군의 사과에 조천주는 나직이 냉소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에게 정추수 또한 냉소로 응대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궁조생이 시선을 끌기 위해 정추수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돌아간다면 사부님께선 반드시 널 해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구나." 정추수가 물었다. "사부님께서 이곳에서의 일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사부님은 단지 저와 사형께서 마교의 손에 잡혀간 것만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절 해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말을 꺼내려던 궁조생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쩌면 너와 정 소저와의 관계를 아시고 계실지도 모르지.' 문득 궁조생은 매천악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사부님이 진정 너의 가문을 멸한 흉수라면 오늘의 일을 예상하고 계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정려군이 길게 탄식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은 한번 결심한 일은 결코 되돌리는 법이 없으셨다. 넌 외양(外樣)뿐만 아니라 성격마저도 아버님을 빼 닮았으니, 내가 만류한들 소용이 없겠구나." 이에 궁조생이 정려군에게 물었다. "정 소저, 당신은 추수를 태행산으로 보낼 셈이오?"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아직 날 믿지 않는데, 강제로 붙들어 둘 순 없잖아요?" "하지만..." 난감한 표정을 짓던 궁조생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 네가 정녕 사문으로 돌아가겠다면 나와 같이 가도록 하자. 어차피 나 또한 사문으로 돌아가야만 하니까." * * * 태행산 기슭에 이른 정추수는 산 중턱을 바라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산 중턱의 태사전엔 사부인 매천악이 있을 터였다.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따듯하게 대해 줬던 공손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나가장에 있을 배간을 생각하자 근심이 가시지 않았다. 정려군은 오늘밤 나가장의 나철백으로부터 혈채를 받아 낼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배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정추수와 궁조생은 정려군에게 배간을 살려 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해 버렸다. 그녀가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배간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는가? 가슴을 짓누르는 여러 가지 상념을 떨치려 정추수는 고개를 치켜 들었다. 어느새 해는 서산에 지고 사위는 어둑어둑해졌다. 정추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궁조생이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사부님께 사실을 확인할 셈이냐? 사부님께 묻는다면 네가 신상내력을 알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하는 격이 된다. 그렇게 되면, 만약..." "사형이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알겠습니다. 전 사부님을 뵙는 게 아니라 먼저 사숙조님을 뵈올 작정입니다." 궁조생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장문의 명에 의해 산의 정상에 머물고 있는 냉겸을 만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조차도 냉겸을 본 적이 없었다. "사숙조님을? 네가 사숙조님을 아느냐?" "그렇습니다. 사숙조님께서 제게 천심장을 가르치셨고, 또 나의 신상내력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분이라면 저의 의문을 풀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난 사부님께 네가 정 소저와 같이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넌 사숙조님으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거든 즉시 산을 떠나 누님에게로 돌아가도록 해라." 냉겸이 거처하는 동굴로 가는 정추수를 보며 궁조생은 전신을 조여 오는 갈등에 머리를 내저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태행검파의 제자다. 난 사부님과 사문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추수는 나와 이십 년을 친형제처럼 지내 왔다. 더구나 추수는 정 소저의 동생이 아닌가? 이제 추수와 내가 적이 된다면 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궁조생은 연신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누르며 어느새 산문을 지나고 있었다. 마교의 수중에 떨어졌던 궁조생이 돌아오자 태행검파의 제자들은 모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중 궁조생의 애제자인 국진은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겼고, 다른 제자들은 서둘러 매천악에게 알렸다. 궁조생이 태사전에 들렀을 때엔 매천악과 원가량, 곽입지, 공손월뿐만 아니라 동철비까지 모두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문의 존장에게 예를 올리는 궁조생을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마녀의 손에 잡혀간 궁조생이 무사히, 더구나 이렇게도 빨리 풀려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성질 급한 원가량이 먼저 물었다. "넌 어떻게 마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느냐?" "그녀가 풀어 주었습니다." "풀어 주었다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원가량은 몹시 놀란 모습이 되었다. "그 마녀가 왜 널 풀어 주었느냐? 그리고 추수는 어찌 되었느냐?" 질문하는 매천악의 얼굴엔 당혹과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의 표정을 보며 궁조생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사부님은 마녀가 날 풀어 준 이유를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궁조생이 대답을 않자 원가량이 재촉했다. "무얼 생각하느냐? 어서 말해 보아라." "그녀는 제가 이십 년 전에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어 절 해치지 않았지요. 그 여인은 이십 년 전 멸문당했던 인의대협 정범의 여식이었습니다." "그 마녀가 인의대협의 후손이라고?" 모두가 대경하며 소리쳤다. 다만 동철비만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안면 근육을 실룩이며 매천악을 바라보더니 이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궁조생은 매천악의 안색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동철비의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정려군이 말한 아홉 명의 흉수 중에는 동철비의 이름도 있었기 때문이다. 궁조생은 매천악과 동철비, 두 사람을 주시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사부님도 아시겠지만, 추수의 누님이기도 하죠." 궁조생의 '이제 사부님도 아시겠지만'이란 말엔 매천악에 대한 추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원가량과 공손월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문득 원가량이 안색을 굳히며 매천악에게 물었다. "장문사제, 그대는 궁조생이 말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는가?" 매천악은 원가량에게 대답하는 대신 궁조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사전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매천악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묵묵히 궁조생을 응시하던 매천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마녀가 인의대협의 딸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소. 하지만 추수가 인의대협의 아들임은 제자로 받아들일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의외로 매천악이 순순히 시인하자 궁조생은 야릇한 기분이 되었다. 원가량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자넨 추수의 성이 정씨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왜 그를 조추수라고 불렀나?" 매천악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 일은 추수를 위해서라도 영원히 비밀로 묻혀지기를 바랐는데..." 그는 괴로운 듯이 말꼬리를 흘리며 동철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 대협, 그대가 당시의 일을 설명해 주시겠소?" 중인의 시선이 동철비에게 쏠렸다. 동철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지난날의 비사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일에 대한 경위를 정확히 말하자면 이십이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오. 당시 연쇄적으로 여인이 간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흉수는 여자라면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았는데, 이 년 동안 열여섯 명의 여인이 간살당했소. 아마 이 사건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동철비의 말에 곽입지, 공손월은 고개를 끄덕였고 원가량은 말을 덧붙였다. "잘 알고 있소. 당시 난 사건 소식을 접하고 흉수를 찾아 헤매었지만 헛수고였소. 나 이외에도 많은 고수들이 흉수를 찾아 헤맸소이다. 하지만 이 년 후엔 더 이상의 간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 버린 것으로 알고 있소." "맞습니다. 거기까진 강호의 많은 동도들이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 이면엔 비사가 있었소. 실은 사건이 발생한 지 이 년이 다되어 갈 시점에 흉수가 밝혀졌었다오." 모두가 놀라 소리쳤다. "그게 사실이오?" "그렇소." 원가량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우린 왜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 당시 이 사건으로 산서무림 전체가 떠들썩했는데 말이오." 동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소이다. 사실 당시 흉수에 의해 간살당한 여인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오. 그 중엔 나의 누이동생도 끼여 있었소." "저런!"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동철비는 몹시 씁쓸한 표정이 되었고, 다른 이들은 그런 그를 동정하여 한마디씩 했다. "나의 누이동생뿐만 아니라 이미 고인이 된 방 대협과 곡 대협 등의 누이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소. 치욕스런 일이라 모두 쉬쉬했을 뿐이라오. 우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모른 체하면서도 암암리에 범인을 탐문했소. 그리고 결국 신검문주에 의해 범인의 꼬리가 잡혔소. 놀랍게도 그 범인은 보운표국의 인의대협 정범이었소." "그럴 수가 있나? 설마 그가...?" 매천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경악성을 터뜨렸다. 특히 정려군에게서 보운표국의 혈겁을 들었던 궁조생이 받은 충격은 남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동철비의 말이 계속되었다. "처음엔 우리도 신검문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소. 그러나 보운표국에서 몰래 내다 버리는 간살당한 시신을 목격하고서 신검문주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소. 이건 워낙 엄청난 일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었소. 당시 인의대협은 우리 산서무림의 자랑이었기 때문이오. 결국 우린 매 장문과 신검문주의 주도하에 인의대협에 대한 처리 문제로 고심하기 시작했소. 그리고..." 동철비는 말끝을 흐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힘든지 매천악을 바라보았다. 이에 매천악이 침울한 음성으로 동철비의 말을 받았다. "나와 신검문주, 그리고 일곱 명의 고수들이 합심하여 인의대협을 죽였소. 대신 산서무림의 명예를 위해 그의 악행은 묻어 버리기로 하고 말이오. 우린 정범에게 자결할 것을 권했지만, 그와 그의 일가가 악행을 숨기기 위해 우리를 죽이려 드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피비린내나는 살겁이 벌어졌다오."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매천악은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일은 생각할수록 끔찍하오. 하나 묘한 게 세상 사는 일인지 내가 태행산에 돌아온 다음날 조생이 한 아이를 데려왔소. 놀랍게도 그 아인 정범의 아들이었소. 생각하건대 정범은 행한 악행이 있어 죽었지만, 그의 어린 아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이에 난 다른 이가 알게 되면 추수를 해칠까 저어하여 성을 조씨로 바꾸고 제자로 맞아들인 것이오. 다행히 추수는 충직하게 자라났건만, 이제 와서 정범의 딸이 나타나 혈겁을 자행하다니, 이것도 하늘의 뜻일는지..." 매천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연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지난 이십 년간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된 원가량 등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궁조생은 망연하게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내가 경망되이 사부님을 의심한 거야. 추수의 부친은 스스로 지은 죄과를 치른 것에 불과했어. 하지만 이미 혈겁은 시작되지 않았는가? 정 소저는 자신의 부친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데,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그리고 진실을 말한들 그녀가 믿기나 하겠는가?' 이때 동철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방 형과 곡 형은 그 마녀의 손에 억울하게 죽었소. 그들은 단지 희대(稀代)의 음적(淫賊)을 죽인 것에 불과하거늘, 이제 그의 딸이 나타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있으니, 정범은 죽어서까지 무림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셈이오." 정범의 악행을 알게 된 이상 동철비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다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원가량과 곽입지는 동철비를 따라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문득 공손월이 매천악에게 물었다. "이제 추수가 마녀의 동생임이 밝혀졌습니다. 사형께선 앞으로 추수를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글쎄..." 매천악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원가량이 싸늘히 말했다. "생각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제 그놈은 본 파의 제자로 생각해선 안 돼. 마녀의 동생이라 앞으로 해가 될 게 뻔하니 죽여야 해!" 공손월이 반박했다. "추수는 이제껏 사문과 사부를 위해 충직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가 비록 마녀의 동생이라고는 하나, 혈겁은 그의 누나가 일으킨 것이지 추수의 짓은 아니잖습니까? 추수는 이제껏 커다란 과실이 없었으니, 그를 죽이려는 것은 너무나 매정한 처사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한낱 정에 얽매여 사문의 앞날을 망치려 하는가?" 원가량이 호통하여 공손월의 말문을 막으려 하자 매천악이 만류했다. "됐습니다, 사형. 추수는 눈앞에 있지도 않은데 벌써 그런 일로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어 그는 궁조생을 보며 물었다. "조생아, 난 지금 추수가 어찌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매천악의 어투가 아주 부드러워 조추수의 행방을 솔직히 얘기하고픈 마음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정추수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이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거짓을 고했다. "추수는 지금 그의 누나와 같이 있습니다." "그래?" 매천악이 묘한 눈길로 궁조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궁조생은 마치 마음속을 들킨 듯하여 목을 움츠렸다. "추수가 누나와 같이 있단 말이지?" 궁조생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며 매천악은 이미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궁조생의 귀를 자극했다. 궁조생은 마음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 매천악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런 그의 귀로 매천악의 나직하면서도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지금은 본 파의 흥망이 걸린 시점이라 무엇보다도 사문의 힘을 최대한 결집(結集)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그래서 난 지금 산의 정상에서 은거 중이신 냉 사숙의 협조를 구할 생각이오." "냉 사숙을?" 원가량을 비롯한 모두가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소. 냉 사숙은 본 파의 최고 원로이자 누구보다도 뛰어난 고수시오. 그러니 그분의 협력을 얻는 것이야말로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오." 원가량이 냉소하며 말했다. "흥! 냉 사숙은 삼십 년 전부터 사부님과 사이가 나빠진 후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사문의 일엔 일체 관여를 않으셨네. 그런 분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겠나?" "지금은 본 파와 산서무림의 사활이 걸려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서까지 거론하여 분열을 일으킴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손월은 매천악의 뜻에 동조하면서도 우려를 금치 못했다. "장문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숙께서 과거의 앙금을 털고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실지..." "비록 우리에게 감정을 가지고 계실지라도 사문의 존망이 걸린 만큼 우리 모두 그분을 찾아가서 간청한다면 청을 뿌리치지는 않으실 걸세." 매천악의 뜻은 확고했다. 원가량 등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언제 냉 사숙을 뵐 예정인가?" 원가량의 물음에 매천악이 주저 않고 답했다. "지금 당장입니다." 원가량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 당장?"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 빠를수록 좋습니다." 말을 마친 매천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성큼 옮기며 궁조생을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궁조생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이다. 지금쯤 추수가 냉 사숙조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터인데...' "조생, 너도 따라오너라." 이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매천악은 태사전을 나섰다. 원가량, 곽입지, 공손월은 매천악의 돌연한 행동에 어리둥절했지만, 장문의 결정이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8 장 욕심이란 기호지세(騎虎之勢)와 같아 제 18 장 욕심이란 기호지세(騎虎之勢)와 같아서 "흠! 결국 나타났구나.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어..." 나이답지 않게 힘이 잔뜩 깃들인 냉겸의 목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침상에 걸터앉은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쳐 보였다. 그는 연신 가래 섞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정추수는 고개를 들어 냉겸을 직시했다. "이제 사숙조님께서 알고 계신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숙조님께선 어떻게 세 권의 장한진경 중 한 권을 얻으셨습니까?" "난..." 말을 꺼내려다 목이 메이는지 냉겸은 침상 머리맡에 놓인 그릇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낡아빠진 소매로 입술을 닦은 후 냉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얘기를 시작했다. "난 지난 사십여 년을 한 가지 염원으로 살아 왔다. 그건 가증스럽게도 자신의 야욕을 위해 동문을 짐승 죽이듯이 도륙했던 악마를 반드시 징벌하겠다는 원한이었지. 이백여 년 전 본 파의 시조이신 낙월검객께선 삼십 년 이상 무림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비무를 했지만 패한 적이 없었다. 그분은 나이 육십이 넘어 태행산에 은거하여 다섯 명의 제자를 두었고, 말년에 태행검법을 창안하시어 후세에 전하셨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이후 태행검법을 제대로 익힌 이가 나타나지 않아 태행검파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 무림에서 태행검파란 이름은 잊혀져 가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훌륭한 인재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지. 그런데 하늘의 보살핌이라고나 할까? 나의 사부님이셨던 문일정(門一晶)께선 네 명의 제자를 얻으셨는데, 그 중 세 명이 실로 보기 드문 기재였지. 그들의 이름은 가인후(柯燐厚), 곡우성(曲雨晟), 그리고 반조(潘照)로, 나의 사형들이었다. 이 세 분들은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고 천성이 부지런하여 마침내 태행검법을 대성하고 조사께서 남기신 태행팔변의 여덟 초식을 연구하여 마침내 쉽게 연마할 수 있는 주해법(註解法)을 찾아내셨다. 당시 대사형이었던 가 사형과 곡 사형이 각각 세 초식, 그리고 반 사형께서 두 초식의 해법을 얻으셨어. 바야흐로 본 파가 무림에 이름을 떨칠 기반을 얻게 된 것이지." 여기까지 얘기한 냉겸은 숨이 차는지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물을 마셨다. 처음엔 냉겸이 정추수의 의도와는 달리 엉뚱한 사문의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내심 곤혹스러웠지만, 태행팔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사문의 비극이 그들로 인해 일어날 줄 누가 상상했겠느냐? 사부님께선 임종이 가까워지자 장문의 자리를 가 사형께 전하려 했지. 그리고 나머지 사형제들은 그런 사부님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청천 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사형이 누군가에 의해 암습을 당해 죽고 만 거야. 당시 모두가 비통해 했지만, 흉수를 알 수 없어 결국 장문의 자리는 곡 사형이 계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야. 십 년이 지나 대사형을 죽인 범인이 밝혀졌는데, 그는 다름 아닌 곡 사형이었어. 그는 본 파의 장문 지위를 계승하고 태행팔변을 익혀 천하무림에 이름을 떨칠 목적으로 대사형마저 죽여 버린 인면수심(人面獸心)이었던 거야. 결국 이를 안 반 사형은 분노하여 곡 사형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나도 반 사형을 도와 곡 사형을 죽이려 했단다. 그 싸움의 결과 반 사형은 죽고 나와 곡 사형은 중상을 입고 쓰러졌지. 난 그 길로 이곳 동굴에 은거하면서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고, 곡 사형은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매천악에게 장문의 자리를 넘겨주고는 죽어 버렸어." 감회 어린 표정으로 여기까지 얘기한 냉겸은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분노한 표정이 되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바람에 이빨이 없는 잇몸이 입술 밖으로 드러나 오히려 애처로워 보였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한을 품고 살 이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 비극은 우리의 대에서 일어난 불상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하면서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어. 그건 매천악이 자신의 사제였던 역기환(易起煥)과 공야직(公冶直)을 죽이려 한 거야. 난 몰래 숨어 매천악과 그들 사이의 얘기를 들었는데, 실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 곡 사형이 가 사형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반 사형과 내가 곡 사형의 비행을 알게 된 것 또한 매천악의 흉계였던 거야. 결국 매천악은 자신이 장문이 되기 위해 사부와 사숙백들의 목숨을 이용한 거야. 그리고 배간과 역기환이 매천악을 도왔던 거지. 그 동안 자신의 행위를 번민하던 역기환은 그날 밤 공야직에게 털어놓았고, 공야직은 역기환을 대동해 매천악을 추궁한 것이었지." "아!" 정추수는 사문의 처참한 비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매천악의 간악함을 듣는 순간, 정려군의 말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럼...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냉겸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날 밤 매천악과 배간은 자신들의 흉계를 숨기기 위해 계교를 써서 역기환을 죽였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공야직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 버렸지. 공야직이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내가 도왔기 때문이야. 난 분노하여 매천악과 배간을 죽이려 했지만, 일 년 전의 중상이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던 터라 결국 매천악에게 제압당하고 말았어." 정추수는 매천악에 대한 분노가 일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부님이, 사부님이 그런 인간이었다니..." "하아!" 땅이 꺼질 듯한 냉겸의 한숨이 정추수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갑자기 냉겸이 눈물을 흘렸다. "난 그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난 당시 매천악에 대한 원한으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난 매천악에게 태행팔변 중 나머지 다섯 초식의 검보를 숨겨 놓았다고 말했지. 그놈이 장문이 되려 한 이유는 결국 무림에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 그러기 위해선 태행팔변의 검법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야. 그리고 난 그의 이런 욕심을 이용한 것이고... 과연 그는 날 죽이지 못했다. 대신 그날부터 검보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했어. 당연히 난 거부했지. 그러자 그놈은 또 다른 사악한 흉계를 꾸몄다. 그건 당시 산기슭에 살던 나의 딸을 강제로 배간에게 시집보낸 것이었어. 그리고선 검보를 내놓지 않으면 내 딸을 죽이겠노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한 거야." 냉겸의 말을 듣자니 매천악의 행악이 점점 도를 더해 가는지라 분노가 지나쳐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흥! 그러나 내가 검보를 준다고 해도 나와 딸의 목숨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난 이 초식의 검법을 가르쳐 주며 나머지 세 초식은 내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천수를 다하게 되면 임종 전에 건네 주겠다고 약속했지. 매천악은 내가 자신의 악행을 평생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했어. 이후 난 이곳에서 그의 감시하에 살게 되었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나의 상세가 극심해 그냥 내버려두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할 만했다는 점과 무엇보다 매천악은 동문들의 의심을 살까 저어하여 내게 다른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덕분에 난 몰래 상처를 치료한 후 비교적 자유스럽게 매천악을 감시할 수 있었지." 말을 하면서 격정을 이기기 힘들었는지 냉겸은 침상에서 일어나 동굴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매천악의 간악한 욕심과 흉계는 그 후로도 끊임이 없었다. 그는 보운표국의 인의대협이 옛날 도마의 후예임을 알고 접근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마침내 도마가 남긴 세 권의 진경을 인의대협이 소장하고 있음을 알고 음모를 꾸며 보운표국을 습격한 거야." "그랬었군요. 결국 장한진경 때문에 난 고아가 되었고 나의 누님은 마녀가 된 것이로군요." 분노가 지나치면 오히려 냉정해지는 것일까? 정추수는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 되어 냉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간간이 매약화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올 뿐이었다. "난 매천악에게 복수할 결심으로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흉계를 알고 몰래 보운표국으로 그를 따라갔지. 하나 그를 돕는 고수들이 여덟 명이나 더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결국 난 인의대협을 돕지 못하고 그저 숨어서 그의 최후를 지켜봐야만 했지. 그들은 너의 일가를 마치 짐승을 잡듯 도륙해 버렸다. 그리고 추수, 너의 모친은 매천악의 검에, 부친은 신검문주 위지광의 검에 죽고 말았지." '사부님과 신검문주가 나의 부모님을 죽였단 말이지?' 무표정해진 정추수의 마음에선 이제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매천악과 위지광이 장한진경을 찾는 걸 알고 그들의 뜻을 막으려, 나 또한 몰래 진경을 찾았다. 그리고 운이 좋아 그들의 시선을 피해 가며 한 권의 진경을 얻을 수 있었지. 그게 바로 네게 전수해 준 천심장의 무공이었어." 문득, 냉겸은 침상으로 다가와 머리맡의 바닥을 조심스럽게 헤집었다. 보드라운 흙이 파헤쳐지며 기름종이로 둘둘 만 두루마리 하나가 나왔다. 기름종이를 풀자 폭이 한 자 반에 이르는 양피지가 나왔는데, 길이가 일 장 하고도 다섯 자에 이르렀다. 냉겸이 양피지를 정추수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얻었던 진경이다." 정추수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받았다. 가문의 유품이라 생각하니 만감에 눈물이 어렸다. 양피지의 맨 우측엔 장한진경이란 주삿빛 글자가 쓰여 있었고, 그 다음으로 천심장이란 글씨에 이어 천심장의 내공구결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바로 이 물건 때문에 우리 일가가 처참한 변을 당했단 말인가? 난 이십 년간을 사부에게 속아 살아 왔고, 나의 누님은 손가락질받는 마녀가 되어야 했단 말인가?' 주체 못 할 눈물이 흘러 진경 위로 떨어졌다. 이런 정추수의 모습에 냉겸은 연신 혀를 차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진경을 얻었듯이 매천악과 위지천, 두 사람도 힘을 합해 한 권의 진경을 찾았어. 아마 신검문주 위지광이 스스로 천하제일검이라고 과시하면서 제법 행세를 하게 된 건 네 가문의 무공을 익힌 덕분일 게다." 정추수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하지만 저의 사부님은 예나 지금이나 무공에선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사부님이 특별히 다른 무공을 사용한단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흥! 넌 아직도 매천악을 사부라고 부르느냐? 매천악의 흉심(凶心)은 범인(凡人)이 감히 짐작할 바가 못 된다. 그는 필시 위지광에 못지않은 무공을 숨기고 있을 게다." 냉겸은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매천악은 음흉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다. 그가 널 죽이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필시 다른 음흉한 계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오늘날과 같은 일을 예상하고 나머지 진경을 얻기 위해 널 살려 두었는지도 모르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십 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측한다는 건..." "그런 소리 말아라. 난 그놈의 흉계를 겪었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시 너의 집안을 멸문시킬 때 너와 너의 누이가 도망치자 매천악과 위지광,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자들은 반드시 찾아서 죽이려 했어. 흥! 그때 내가 너희 남매를 은연중에 돕지 않았다면, 조생 그 녀석의 변변찮은 무공으로 어떻게 너의 남매를 보호할 수 있었겠느냐? 그리고 너와 너의 누이가 헤어져 도망칠 때에도 너의 누이가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왔지. 아마 너의 누이를 만나 물어 보면 암중에 도왔던 자가 있었음을 알게 될 거다.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정추수는 냉겸이 자기 남매를 구했음을 알게 되자 고마운 마음이 일어 절을 했다. "사숙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냉겸은 의외로 싸늘히 냉소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흥! 난 그 당시 너희 남매에게 호감을 가지고 도운 게 아니니 고마워할 것 없다. 다만 너희를 살려 주면 반드시 복수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매천악에겐 적이 더 늘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아무튼 매천악은 당시 세 권의 진경 중 한 권밖에 얻지 못했다. 그 한 권마저 위지광과 나누었겠지. 그는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 한 권의 진경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겠지. 그래서 조생이 데려온 널 죽이지 않고 키운 게다. 그는 나머지 진경은 너의 누이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음이 분명해. 따라서 그는 너의 누이가 훗날 복수를 할 거라고 판단했겠지. 그렇다면 널 살려서 잡아 두면 훌륭한 인질이 되지 않겠느냐? 이게 매천악이 널 죽이지 않고 제자로 맞아들인 이유다." 냉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추수의 분노는 커져 갔다. '사부는 나의 부모를 죽인 것만으로도 부족해 날 끝까지 이용하려 했단 말인가? 그토록 믿고 존경했던 사부가 결국은 나의 한 점 살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이용해 먹으려는 악마였단 말인가? 진정 그러하단 말인가?' 이제까지 쌓이고 쌓이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정추수는 바닥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제까지 내가 믿어 왔던 사부의 진면목이 거짓과 위선이었다니! 내 부모님의 목숨과 위선 속에 잃어버린 나의 지난 삶은 누구에게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흑흑흑!" 이에 냉겸이 정추수를 질타했다. "너의 삶은 결코 보상받을 수 없다. 하지만 너의 원한은 갚아야지. 반드시 네 손으로 매천악을 죽여 네 부모의 묘소 앞에 그 피를 뿌려야만 한다. 그것만이 너의 가문에 얽힌 혈한(血恨)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또한 나의 원한을 갚는 길이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난 너와 너의 누이를 구해 준 은인이다. 난 네게 천심장을 전수해 주었다. 그러니 넌 나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 매천악을 죽여라. 반드시 죽여라!" 정추수의 울부짖음과 냉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굴을 요란하게 울리며 메아리를 만들었다. 매천악의 음성이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매천악을 뒤따르는 궁조생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쩐 일인지 매천악은 동철비까지 대동한 채 경공을 사용하여 산정으로 올랐다. 이에 원가량과 곽입지, 공손월, 궁조생 등도 경공을 사용해야만 했다. 괴괴(怪怪)한 달빛에 의지하여 달리느라 손과 얼굴이 나뭇가지에 긁혀 따끔거렸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는가?" 원가량이 불만을 토했지만 매천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매천악의 태도에 궁조생은 의심이 일었다. '혹시 사부님은 추수가 냉 사숙조님에게 들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궁조생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러하다면 매천악은 얼마나 심기가 깊은 인물인가? 어쩌면 자신의 섣부른 믿음을 후회하게 만들었던 동철비의 이야기마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일행이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 모두는 정추수의 울부짖는 소리와 냉겸의 고함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추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릿한 절망감이 궁조생의 몸을 관통했다. 매천악이 일행을 돌아보며 확인하듯이 물었다. "추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희미한 불빛이 비쳐 나오는 동굴 입구로 모아졌다. 매천악이 소리쳤다. "추수! 그 안에 있느냐?" 두 사람은 일순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하나 이도 잠시, 냉겸은 급히 두루마리를 말아 정추수의 품에 쑤셔 넣으며 나직이 말했다. "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자리를 빠져 나가야 한다. 훗날 원한을 갚고 나거든 동굴 앞에 있는 죽은 나무의 밑을 파보아라. 나의 말을 명심하여라!" 매천악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추수! 네가 그 안에 있는 걸 알고 있다. 어서 나오너라!" 냉겸이 정추수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나에 대한 정은 갖지 말아라. 추호도 주저해선 안 된다. 내가 신호하거든 넌 필사적으로 달아나야 한다. 알겠느냐?" 냉겸의 말이 너무 간절했으므로 정추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가자." 냉겸은 침상 어귀에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동굴 앞 공터엔 매천악과 원가량, 곽입지, 공손월, 동철비, 그리고 궁조생이 빙 둘러서 있었다. '사형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말한 걸까?' 일단 의심을 했으나, 궁조생의 우려하는 표정을 보고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냉겸과 정추수, 두 사람을 바라보는 매천악은 회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천악은 바로 안색을 굳히며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추수, 네가 어찌 냉 사숙과 같이 있느냐?" 원가량이 매천악의 말을 이어 손가락질하며 호통했다. "이제 네가 마녀의 동생임을 모두가 알게 되었는데도 감히 태행산에 혼자 오다니, 네가 간이 이만저만 부은 게 아니로구나." 정추수는 매천악의 얼굴을 보자 역겨운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당신은 나의 부모님과 친척들을 모두 죽이고 가문의 보물을 훔쳤소. 난 당신의 파렴치한 행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오." "추수,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내가 네 집안의 보물을 훔치다니?" 매천악의 천연덕스러움에 정추수는 더욱 노기가 치솟았다. "사숙조님으로부터 당신의 악행을 모두 들었소. 내 이제 당신을 사부로 생각하지 않겠소." 정추수의 곁에 서 있던 냉겸이 매천악을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흥! 매천악! 너의 죄악은 이미 다 드러났다. 이제 남은 건 하늘의 심판뿐이니 마음을 가다듬고 속죄하여라." 원가량이 냉겸의 말을 이상히 여겨 물었다. "냉 사숙, 그게 무슨 말씀이오?" 매천악은 냉겸이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추수, 네가 너의 누이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네 가문의 참변에 관여한 것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거기엔 차마 말못할 사연이 있었으니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흥! 당신에게 무슨 할말이 남았단 말이오?" 정추수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자 궁조생이 나섰다. "추수! 이십 년 전의 일엔 정말 부득이한 사연이 있었음을 내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어 그는 태사전에서 동철비와 매천악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정추수에게 들려 줬다. 정추수는 매천악을 증오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궁조생에게는 아직도 끈끈한 사형제간의 정이 남아 있어 가만히 경청했다.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정추수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친이 행한 악행을 듣는 순간, 불신과 당혹으로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정추수가 소리쳐 부정하자 동철비가 분노가 담긴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의 누이동생도 너의 아비에게 처참하게 죽었다. 그뿐인 줄 아느냐? 나뿐만 아니라 너의 누이에 의해 죽은 방두교나 곡윤도 당시의 피해자였다. 그들의 여동생도 네 아비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당시 네 집안의 혈겁에 참가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 손에 많은 생명이 죽었음은 부정하지 않지만, 너의 부친은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죄악을 감추려 한 너의 일족 때문에 피치 못하게 살겁을 저질렀던 것이야. 그런데 지금 너의 누이는 어떤 짓을 하고 있느냐? 응당 받아야 할 대가에 대한 복수랍시고 무차별한 살생을 저지르고 있으니, 너희 집안은 이제 복마전(伏魔殿)이요, 너희는 악마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너는 대대로 이은 죄악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 궁조생의 말에 이어 동철비까지 가세하자, 정추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미스러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방금 동철비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매천악이 크게 탄식하며 안타깝게 말했다. "추수, 비록 과거의 은원이야 어떠했던 간에 난 지난 이십 년 동안 널 진심으로 사랑하며 가르쳐 왔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너와 무슨 상관이겠느냐? 난 너의 착한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난 네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단다." 매천악의 표정과 말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정추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이제까지 들은 이야기가 모두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때 들려 온 냉겸의 대갈일성이 정추수의 정신을 일깨웠다. "간악하구나, 매천악. 지금에 이르러서도 말로써 현혹하려 하다니! 네가 도마가 남긴 정씨 집안의 장한진경을 노려 그런 혈겁을 조장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매천악의 안색이 홱 변하더니 그가 냉랭히 대꾸했다. "사숙, 우린 사숙을 믿고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려 찾아왔는데, 어찌 그런 매정한 말씀을 하시오?" "흥!" 냉겸은 싸늘히 코웃음치고는 손을 들어 동철비를 가리켰다. "저 멍청한 녀석도 너와 위지광의 간악한 음모에 휘말린 희생자에 불과하겠지. 이십 년 전 있었던 간살 사건이야말로 너의 야욕을 위해 네가 꾸민 일이 아니더냐? 어리석은 녀석! 넌 너의 누이동생을 겁간한 놈에게 속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너도 죽어서 지옥행을 면치 못할 것이다." 냉겸이 비웃으며 손가락질하자 동철비는 대로하여 소리쳤다. "이 늙은이가 무슨 망령이냐? 매 장문과 난 삼십 년 지우로서, 그 친분을 천하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네가 날 현혹하려느냐?" "아하하하!" 냉겸이 가소롭다는 듯이 대소하며 원가량과 공손월을 둘러보았다. "잘 들어라. 매천악은 자신의 야욕을 위해 너의 대사백과 둘째 사백, 그리고 너의 사부까지 음모에 빠뜨려 죽였다." 매천악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닥치시오! 아무리 사숙이라지만 언동이 너무 지나치시오." 냉겸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너의 사형제였던 역기환을 죽였고 공야직을 죽이려 했다." 냉겸의 말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원가량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거 역기환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공야직이 실종된 사건은 결국 공야직이 역기환을 죽이고 달아난 것으로 종결되었는데, 냉겸이 거론하자 원가량은 의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원가량은 지체 않고 매천악에게 물었다. "장문사제, 그게 정말인가?" 매천악이 얼굴을 붉히며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때의 일은 사형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냉겸이 싸늘히 냉소하며 말했다. "정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공야직을 찾아보거나 배간을 닦달해 보아라. 배간은 매천악을 도운 공범이니 다그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원가량은 두 사람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나, 장문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원가량으로선 냉겸의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곽입지와 공손월 또한 옛일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 당시 공야 사형이 역 사형을 죽이고 잠적할 이유가 없어 의문이 많았다. 이제 와서 냉 사숙이 이를 거론함은 정말 어떤 음모가 있었던 걸까?' 매천악은 사형제들이 보내는 의혹의 눈초리를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사숙께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혈겁과 중요한 관계가 있는 추수와 같이 있고, 또 날 모함하여 우리 사형제들을 분열시키려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난 본 파의 장문으로서 사문에 해를 끼치는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비록 당신이 사문의 존장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망언(妄言)을 계속하면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냉겸은 매천악의 어투에서 살기를 느꼈다. 이에 위험한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고 정추수에게 속삭였다. "내 지금 매천악을 공격하겠다. 넌 그 틈을 타서 이 자리를 빠져 나가야 한다." "하나, 사숙조님. 제가 어찌..." "바보 같은 소리! 너는 대사를 그르칠 셈이냐?"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옥신각신하자 매천악은 정추수가 탈출하려 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걸음 나서며 냉소했다. "추수! 넌 여기서 빠져 나갈 생각을 말아라." 순간, 냉겸이 정추수를 한 손으로 밀치며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거라!" 그는 어느새 검을 뽑아 매천악을 찔러 가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매천악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비틀어 검을 피하면서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뽑았다. 두 사람 모두 태행검법의 달인들이라 순식간에 십여 초를 겨루었다. 냉겸이 밀치는 바람에 정추수는 두어 걸음 밀려났으나, 냉겸을 두고는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원가량과 곽입지, 동철비가 정추수의 앞길을 막아 버렸다. 공손월과 궁조생은 차마 정추수를 가로막을 수 없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매천악과 냉겸의 대결은 삼십여 초가 지나자 냉겸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냉겸이 정추수에게 태행검파의 비사를 말했을 때 그의 세 사형이 기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냉겸 또한 그들 못지않은 기재였다. 그의 태행검법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고, 태행팔변의 검법을 모두 터득하고 있었다. 매천악은 다섯 초식밖에 터득하지 못하였으므로 태행검법으론 냉겸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매천악은 연신 뒤로 밀려나며 소리쳤다. "무엇 하시오? 어서 사숙의 공격을 저지하지 않고!" 그러나 원가량과 곽입지, 공손월 등은 감히 냉겸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원가량이 소리쳤다. "난 감히 사숙께 검을 겨눌 수가 없네." 곽입지와 공손월의 표정 또한 원가량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매천악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좋아, 두고 보자!' 돌연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매천악의 검이 유난히 빨라지며 순식간에 십이 검을 찌르고 베어 들어갔다. 공손월보다도 훨씬 더 숙련된 장강유사의 검초였다. 그의 검엔 필생의 공력이 담겨 있어 냉겸은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이 틈에 매천악은 싸늘히 웃으며 허리띠를 풀었다. 그 허리띠는 어느새 기이한 모양의 검으로 변해 있었다. 검신은 종잇장보다 얇아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흐늘거릴 정도였다. 검신의 폭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가늘어 보였으며, 검인(劍刃) 주위는 검었고, 검신은 은백색을 띠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검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천악이 그 기형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검신이 달빛을 받아 은빛을 번득이며 짙은 살기를 뿌렸다. 냉겸이 소리쳤다. "추수, 그의 검을 잘 보아라. 필시 네 가문의 무공을 펼칠 터이니." 그의 이 말은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철비는 물론이고 원가량과 곽입지, 공손월조차도 태행검파에 이런 검이 있음을 알지 못했기에, 냉겸의 말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매천악이 괴이하게 웃으며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태행팔변중에 장강유사의 초식이었다. "사숙의 눈엔 이 검법이 태행검법이 아닌 다른 유파의 검법으로 보이시오?" "흥! 네가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해도 겨루어 보면 밝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 과연 그럴까?" 짙은 살기가 묻은 웃음과 함께 매천악의 신형이 움직였다. 매천악의 검이 장강유사의 초식을 따라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백색의 검신이 묘하게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냉겸은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런데 냉겸으로부터 한 자 가량 떨어진 곳까지 날아오던 매천악의 기형검이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닌가? 돌연한 변화에 대경한 냉겸이 화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허벅지에 화끈한 감촉이 전해지고 난 다음이었다. 냉겸이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물러나는 동안 매천악의 기형검이 번득이며 냉겸의 오른쪽 허리를 베어 왔다. 냉겸이 검을 들어 허리를 보호하자, 이번에도 기형검의 모습이 사라지며 왼쪽 허리를 깊숙이 찔러 버렸다. "크-헉!" 냉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추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사숙조님!" 그가 매천악에게 다가가자 냉겸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검법을 보았으면 어서 몸을 피하거라." 정추수가 불과 두어 걸음을 다가가는 동안, 냉겸은 또다시 어깨에 상처를 입고 비틀거렸다. 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정추수가 부르짖었다. "사숙조님! 안 됩니다. 제가 어찌..." 정추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냉겸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정추수는 이미 매천악의 기괴무비(奇怪無比)한 검법을 보았는지라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검초인 교룡둔장을 시전했다. 그의 비틀거리는 자세를 보며 매천악이 스산하게 말했다. "추수! 네가 감히 사부인 내게 검을 들이댄단 말이냐?" 말과 동시에 그의 기형검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교룡둔장의 초식으로 매천악을 공격해 들어가는 정추수의 행동은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매천악은 이 초식을 정추수보다 훨씬 정통하게 익혔기 때문이다. 매천악은 정추수의 검을 손쉽게 피하며 예의 괴이한 검초를 휘둘렀다. 은백색의 검광이 목을 노리며 번득이더니 어느새 정추수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정추수가 검을 회수하며 다시 내지르는 순간, 다시 왼쪽 어깨에 깊숙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하나, 정작 정추수는 이 정도의 상처는 감수하고 있었다. 정추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검을 거두는 척하다가 교룡둔장의 초식으로 계속하여 검을 내질렀다. 이런 정추수의 마음가짐을 예상하지 못한 매천악은 그만 팔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비록 상처가 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기른 제자의 손에 상처를 입자 매천악은 불같이 노했다. "이놈!" 범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다시 정추수에게 일검을 내질렀다. 정추수가 입은 두 군데의 상처는 깊었다. 특히, 허벅지의 상처는 매우 깊어 선혈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추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치켜 들었다. 그러나 매천악의 공격은 정추수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정추수가 검을 들어 막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매천악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눈에 커다랗게 들어왔다. 그 미소가 정추수의 마음을 갈가리 찢는 듯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정추수가 목숨을 연명하길 체념할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옷자락을 와락 잡아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냉겸이었다.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나는 정추수의 눈에 냉겸의 등을 뚫고 나오는 가느다란 검봉이 또렷이 보였다. '사숙조님!' 정추수가 놀라 입을 벌리는 순간, 냉겸이 피를 토하며 처절히 외쳤다. "네가 나와 같이 죽을 셈이냐?" 냉겸은 심장 부위에 검을 찔린 채 두 손으로 매천악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사력을 다한 힘에 매천악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매천악은 검을 쥔 채 발로 냉겸을 걷어차 떨어뜨리려 했다. 그때마다 냉겸의 몸이 들썩거렸다. "어서 가라! 어서 가! 네가 죽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 어서 가!" 처절한 음성이 터져 나오는 냉겸의 입에선 검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숙조니-임!" 정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근본을 알려 주고 천심장을 전수해 주었던 냉겸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절대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삶의 의지가 그를 강하게 자극했다. '사숙조님, 반드시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습니다!' "야아아아-!" 정추수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공터 밖으로 달려갔다. 동철비가 정추수를 가로막으며 크게 소리쳤다. "넌 오늘 여길 빠져 나가지 못한다!" 한 쌍의 건곤권이 서로 교차하며 정추수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편, 매천악의 기이한 검법에 냉겸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원가량은 냉겸의 말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매천악의 검법은 외양이 태행검법과 유사해 보이지만, 어둠에 가려 검의 변화가 보이지 않으니 지금으로선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중간에 변화하는 그의 자세를 보면 확실히 태행검법의 검로와는 차이가 많다. 그는 다른 검법을 억지로 태행검법으로 위장하려 한 것이 분명해.' 냉겸의 죽어 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는 냉겸이 불과 수초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선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이제 사숙이 죽었느니 가능성은 추수뿐이다. 추수의 도움만 받는다면 매천악의 비열함을 천하에 공개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무림동도들의 지원으로 내가 장문 지위를 획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왜 이제껏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쌓아 왔던가? 바로 오늘과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원가량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추수는 원가량과 동철비의 사이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직도 냉겸을 떨치지 못한 매천악이 소리쳤다. "추수를 반드시 잡아야 하오." 동시에 냉겸의 사력을 다한 부르짖음도 같이 터져 나왔다. "추수! 반드시 살아서 복수해야 한다!" 매천악의 명에 정추수를 가로막으려던 원가량은 급히 생각을 바꾸어 신형을 멈추었다. '지금 추수가 우리에게 잡히면 매천악의 먹이가 될 뿐이지. 그러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나의 목표가 달성되기 위해선 일단 추수가 무사히 도망쳐야 한다.' 마음이 결정되자 원가량은 즉시 검을 거두며 물러났다. 이때, 동철비가 정추수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잇따라 곽입지가 정추수를 가로막으려 하자 원가량은 즉시 그를 가로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어리둥절해 하는 곽입지에게 원가량이 나직이 말했다. "내 뜻한 바가 있으니, 추수를 여기서 내보내야겠어. 사제는 내 말을 따르도록 하게." 곽입지는 원가량의 속셈을 몰라 궁금했으나, 이제껏 그를 도와 왔으므로 이의없이 따랐다. 공손월과 궁조생은 애초에 정추수를 가로막을 생각이 없었다. 특히 공손월은 동철비가 다리를 절룩이는 정추수의 앞을 막자, 발끝으로 바닥의 돌을 차 동철비에게 날려보내기까지 했다. 정추수는 이미 부상을 당한 몸이라, 동철비는 두려워 않고 그의 정면을 막아 섰다. 그런데 갑자기 날카로운 기운이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게 아닌가? 그는 당황하여 급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틈을 타 정추수는 동철비의 옆을 스쳐 지나며 공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동철비는 정추수의 신형이 산비탈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이때 냉겸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곧 이어 매천악이 동철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둠 속을 잠시 노려보던 그는 갑자기 궁조생에게 다가가 뺨을 힘껏 때렸다. "네가 나의 명을 거역해? 어째서 추수를 막지 않았느냐?" 매천악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냉겸을 떨쳐 내면서도 장내의 상황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궁조생에 대한 그의 이 체벌은 원가량과 곽입지, 그리고 공손월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조생! 추수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빠른 속도로 도망갈 수 없다. 넌 지금 즉시 사문의 전제자를 동원해서 추수를 쫓도록 해라. 어서!" 매천악은 궁조생에게 명을 내린 후 원가량과 곽입지, 공손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형과 사제들도 반드시 추수를 잡을 수 있도록 협조를 해주시오." 원가량이 따지듯이 물었다. "자넨 사문의 존장인 냉 사숙을 죽였으니,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매천악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사형! 사숙께서 장문인 날 죽이려 한 것을 이 자리에서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오? 이건 부득이한 일이었소." 이번엔 공손월이 물었다. "장문사형, 왜 추수를 잡으려 하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가? 추수는 본 파의 제자이면서도 마녀의 동생일세. 추수가 마녀에게 간다면 이후 어떤 악행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본 파의 위신이 어찌 되겠는가? 추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잡아야 해. 그리고 추수가 있어야만 마녀를 쉽게 제압할 수 있어!" 곁에 있던 동철비가 결연하게 소리쳤다. "매 장문의 말씀이 옳소이다. 나도 귀파를 도와 반드시 그 녀석을 잡도록 하겠소." 제 목 : [장한백설] 2 권 제 19 장 한번 내딛으면 누구도 돌이킬 수 없� 제 19 장 한번 내딛으면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 비분 강개(悲憤慷慨)한 마음으로 달리길 얼마나 했을까? 오른쪽 다리에서 전해 오던 통증이 사라진 건 벌써 오래 전이었다. 억지로 다리를 끌며 달리느라 신발은 이미 너덜거렸다. 발가락이 바닥에 뭉개어져 발톱이 빠져 버렸다. 허벅지의 상처로부터 피가 많이 흘러나와서인지 정신이 흐릿해지기도 했다. 정추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숲속의 전경이 어지럽게 흔들거리며 희끗희끗했다. 앉아 있을 힘조차 없어 정추수는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공터를 빠져 나오는 순간에 들었던 냉겸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매천악의 그 괴이한 검초가 정추수의 가슴속에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건 태행검법이 아니었다. 사숙조님의 말씀이 옳았던 거야. 사부는 우리 가문의 진경을 얻었음이 분명해. 난 사숙조님과 가문의 원한을 갚아야만 한다. 반드시!' 매천악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살아야 한다. 여길 빠져 나가 누님에게로 가야 한다.' 정추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원가량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놈은 다리를 다쳤으니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거다. 나의 뜻을 수월하게 이루기 위해선 추수를 반드시 잡아야 해.' 매천악은 정추수에게서 입은 왼팔의 상처를 치료할 틈도 없이 태행산을 뒤졌다. 매천악의 경공은 태행검파의 제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른 제자들과 멀리 떨어져 달리고 있었다. 숲속을 살피며 달리기를 한 시진여, 결국 그는 일정한 방향으로 부러진 나뭇가지와 바닥에 흘린 피를 발견했다. 달빛만이 겨우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 주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안광은 정추수가 남긴 미세한 흔적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정추수가 달아난 방향을 확인한 매천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리를 다친 조추수가 그의 손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과연 다시 반 시진 가량 달려간 끝에 결국 나무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정추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나의 손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그가 정추수가 주저앉은 장소와 불과 나무 몇 개의 간격을 두고 접근했을 때였다. 갑자기 칼날 같은 기운이 수소음심경의 청령혈(靑靈穴)로부터 발흥하여 심장을 향해 치닫는 게 아닌가? '억! 이게 웬일이냐?' 매천악은 갑작스런 체내의 변화에 신형을 멈추었다. 이어 진기를 모아 이 이상한 기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매천악이 느끼고 있는 이 기운은 바로 천심장 기운이었다. 매천악이 정추수의 검에 상처를 입은 곳은 청령혈이었다. 당시 매천악은 상처가 깊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는 그가 천심장을 몰랐기에 범한 실수였다. 천심장은 무기의 접촉을 통해서도 상대를 격살할 수 있는 무서운 효능을 갖고 있었다. 정추수는 매천악을 공격할 당시 천심장을 극도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 기운이 검을 통해 매천악의 청령혈에 침투한 것이다. 다만 정추수는 검에 천심장 기운을 싣는 요령을 알지 못했기에, 매천악의 상처에 침입한 천심장 기운은 매우 약했다. 그러나 한 시진 이상 경공을 전개한 탓에 진기의 소실이 커지자, 상처에 잠복한 천심장 기운이 수소음심경을 타고 발동한 것이다. 매천악은 불과 몇 발걸음 앞에 있는 정추수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하고 운공요상(雲功療傷)에 전념해야만 했다. 그가 운공요상에 돌입한 지 한식경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추수의 경악성과 다른 이의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매천악이 살짝 눈을 뜨니 검에 의지해 겨우 몸을 일으킨 정추수와 그 앞에 음침하게 웃고 있는 원가량이 보였다. '으흠! 결국 추수를 잡게 되었구나.' 매천악은 천심장의 기운을 몰아 내느라 정추수를 잡지 못하여 안타깝던 차에 원가량이 나타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곧 이어 전개된 상황은 매천악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정추수가 검을 들자 원가량이 재빨리 물러나며 말했다. "난 널 잡아서 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원가량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정추수는 의심을 풀지 않고 냉랭히 물었다. "이제 전 마교의 주구가 되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가량은 검을 물리고는 짐짓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흥! 본 파는 대대로 무림의 안녕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해 왔다. 그러나 매천악이 선조의 유지를 저버리고 악마와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 내가 매천악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알았는데, 피해자인 널 벌할 이유가 있겠느냐?" "..." 정추수는 안색을 굳힌 채 말없이 원가량을 노려보았다. 원가량은 인상을 부드럽게 펴며 달래듯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협조만 한다면 내 기필코 매천악의 만행을 무림에 알려 응당의 대가를 받도록 하겠다. 어떠냐? 나를 돕겠느냐?" 정추수가 싸늘히 웃으며 대꾸했다. "왜 솔직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장문의 자리가 탐난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내심을 꼬집자 원가량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흥! 어쨌든 넌 가문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느냐? 여기서 매천악의 손에 잡히면 가문의 복수는커녕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말 것이다. 어찌하겠느냐? 빨리 대답해라. 머지않아 이곳으로 본 파의 제자들이 몰려올 것이다." 정추수가 달리 선택할 길은 없었다. 일단은 살아야만 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만 해준다면 원 사숙을 돕도록 하지요." 정추수의 결단에 원가량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다. 남아일언(男兒一言)은..." "중천금(重千金)이오!" "너는 부상을 입은 몸이라 몸을 숨기면서 도망갈 여력이 없다. 내가 제자들을 다른 방향으로 유인할 테니, 넌 곧장 남쪽으로 가도록 해라. 오십 리 가량 가면 반곡(盤谷)이 나온다. 그곳에서 내일 정오까지 기다려라. 알겠느냐?" "좋습니다. 나 또한 원한을 갚아야 하니 반드시 당신을 기다리도록 하지요." 정추수의 대답에 원가량은 즉시 북쪽으로 사라졌다. 상황이 의외의 방향으로 급전하자, 정추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비감이 몰려와 탄식했다. "이제 난 사문을 떠날 수밖에 없구나. 나를 길러 준 사부가 가문의 원수임을 알았으니, 더 이상 그에게서 배운 무공은 쓰지 않겠다. 하긴 이 검법을 사용한들 사부의 기이한 검법을 이길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추수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바닥에 깊숙이 꽂고는 자리를 떠났다. 매천악은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원가량을 일검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운공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추수가 떠난 지 두 시진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천심장의 기운을 소충혈(少衝穴)을 통해 겨우 몰아 낼 수 있었다. 진기의 흐름이 원활해지자 매천악은 정추수가 있던 자리로 가서 땅에 꽂힌 검을 뽑아 들었다. "흥! 원가량, 내 일찍이 그대의 속셈을 알았지만 동문의 정을 생각해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다. 그런데 아직도 망령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 해? 어리석게도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는 정추수의 검을 묘한 눈길로 살피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흐... 이 검이면 원가량, 그대의 목숨을 앗아 가기에 안성맞춤이지." 다량의 출혈로 인해 정추수는 의식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를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 준 것은 매천악에 대한 원한이었다. '잘된 일이다. 사부는 날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존장과 동문들의 목숨마저 자신의 야욕을 위해 희생시켰다. 이제 내, 원 사숙을 통해 사부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동문에 의해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을 그에게 돌려주리라.' 의식이 흐릿해질수록 매천악에 대한 원한은 더욱 타올랐다.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먼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험준한 산을 넘어 내려오던 정추수는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산비탈을 굴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바위와 나무가 몸 곳곳에 둔중한 충격을 선사했다. 그러잖아도 겨우 몸을 지탱하던 정추수는 전신에 전해지는 충격과 고통에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조추수의 귓가에 가물가물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반곡 안, 그곳은 그대의 집 반곡의 기름진 땅, 그대가 곡식 심어 거둘 땅이로세 반곡의 맑은 샘, 그대의 손발을 씻고 목을 축일 물 반곡은 험한 곳, 누가 그대의 땅을 탐내어 뺏고자 할 수 있으리 깊고 그윽한 데다가 넓어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 구불구불 굽이돈 골짜기가 들어가는 듯하면서 되돌아 나오는 곳 아, 반곡에서 노니는 즐거움이여! 그 즐거움, 누리고 누려도 다함이 없어라 盤之中維子之宮 盤之土維子之稼 盤之泉可濯可湘 盤之阻誰爭子所 窈而深廓其有容 而曲如往而復 嗟盤之樂兮 樂且無央 '나의 집안은 물건을 탐하는 자들로 인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부모님과 누이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반곡은 사람들의 다툼이 없는 곳이라 하니, 이런 곳에 나의 집이 있었다면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을 터인데, 난 이렇게 생사를 점칠 수 없는 처지에서 인생의 괴로움만을 맛보고 있지 않는가.' 언뜻언뜻 마음에 와 닿는 노랫가락이 자신의 처지와 대조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정추수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은 자그마한 샘물가에 누워 있었다. 늦가을의 추위에 이기지 못한 싯누런 풀들이 이리저리 흐트러져 정추수의 몸을 살짝 덮고 있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자그마한 바위엔 하얀 문사건을 두른 서생 차림의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이 육십이 갓 되었을까? 가지런히 늘어뜨린 희끗한 수염과 수려한 이목구비로 인해 마치 세속을 벗어난 선인(仙人)처럼 보였다. 그는 정추수의 탄식 소리에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더니 더욱 목청을 높였다. 범과 표범은 발걸음 않고 교룡마저 깊이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으니 이는 귀신이 그대를 수호하려고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모조리 꾸짖어 막음일세 맑은 물, 여문 곡식 먹고 마시며 오래오래 마음 편히 지내니 부족함이 없는 세상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나도 수레에 기름 치고 말을 배불리 먹여 그대 따라 축복받은 반곡으로 가 이 생명 다하도록 함께 소요할 거나 虎豹遠跡兮 蛟龍遁藏 鬼神守護兮 呵禁不祥 飮且食兮壽而康 無不足兮奚所望 膏吾車兮 吾馬 從子于盤兮 終吾生以 '교룡마저 깊이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으니[蛟龍遁藏]라... 이는 태행팔변의 초식 이름이 아닌가? 또한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모조리 꾸짖어 막음일세 [呵禁不祥]라는 것도 태행팔변의 초식 이름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본 파의 태행팔변을 알고 노래를 지어 부르는 걸까?' 기이한 생각이 들어 정추수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와 어깨의 극심한 통증에 움직이기가 몹시 어려웠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며 겨우 몸을 가누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엔 샘물이 가득하여 넘쳐 흐르고 있었고, 초목은 무성하고 사위는 고요했다. 눈을 들어 주위 산세를 살핀 정추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골짜기는 두 개의 산에 빙 둘러싸여져 있으니, 반곡이란 이름에 딱히 어울리는구나.' 정추수가 몸을 일으키자 노인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이 노래가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지 않느냐?" 정추수는 노인이 어떤 의도로 묻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의 탈속한 모습에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고, 또한 노래에서 받은 느낌이 있어 주저 않고 대답했다. "노선배님의 노래를 듣자니 선경에 든 듯한 느낌이 듭니다만, 저의 처지와는 심히 상반되어 마음이 더욱 아파 올 따름입니다." 정추수의 대답에 노인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나이도 젊은 놈이 말속에 인생의 비감이 어리다니... 바람직하지 못하다. 네 나이 땐 처지를 아랑곳 않고 의지를 관철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게야." 노인의 질책하는 말에 정추수는 일순 머쓱해졌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결례를 깨닫고 감사의 말을 올렸다. "경황이 없어 제가 예를 잃었습니다. 저의 생명을 구해 주신 노선배님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전 태행검파의 조..." 정추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노인이 의아하여 물었다. "왜 너의 이름을 밝히려다 마느냐?" "저의 신세가 너무 서러워 그렇습니다. 전 사문에서 도망치는 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껏 모시던 사부는 저의 가문의 원수가 되었으니 이제 무공을 익힌 근본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되었느냐?" "사연이 길어 지금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아무튼... 전 정추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선배님께선 어떻게 태행검파의 태행팔변을 알고 계신지 무척 궁금하군요." "네가 태행팔변을 아느냐?" "제가 배운 검법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호오! 태행팔변을 벌써? 매천악에게서 배웠느냐?" "저의 사부... 매 장문을 아십니까?" 정추수는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여 매천악을 사부라고 부르지 않고 매 장문이라 불렀다. 노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알다 뿐이겠느냐? 난 네 이름이 정추수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노인의 말에 정추수는 해연히 놀라 물었다. "어떻게 절 아십니까?" 갑자기 노인이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네가 태행산으로 돌아간 후 려군은 근심을 떨치지 못했지. 마침 조 장로를 대신해 려군을 돕기 위해 온 내게 청을 하더구나. 널 매천악의 손에 희생되지 않도록 살펴 달라는 것이었지." "그럼 노선배는 바로 마교의..." "그렇다. 내가 바로 회회교의 낭아조(狼牙爪) 공야직이다." "그랬었군요." 정추수는 정려군의 깊은 애정을 느끼자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이제 정려군이 천하에 남은 자신의 단 하나뿐인 혈육(血肉)임을 생각하자 갑자기 그녀가 그리워졌다. 공야직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난 매천악의 사제가 되기도 하지." "아! 그러고 보니..." 정추수는 냉겸이 동굴에서 한 말을 떠올리며 공야직을 새삼 주의 깊게 살폈다. 정추수의 이런 모습에 공야직이 물었다. "나의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예, 냉 사숙조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냉 사숙께서? 매천악에게 죽은 줄 알았는데, 그분이 아직 살아 계셨느냐?" 공야직이 놀라며 묻자 정추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린 냉겸의 처절한 비명이 다시금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정추수가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냉겸과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 공야직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으음! 난 그분 덕에 매천악한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매천악 그놈이 동문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잔악한 짓을 서슴지 않다니, 그놈의 악행은 끝간데를 모르겠구나." 공야직은 분노에 치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애써 노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한동안 정추수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일 다경의 시간이 흐르자 공야직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난 매천악에게서 겨우 살아난 후 무림 각지를 전전했는데, 결국 그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어느 산중에서 사경(死境)을 헤매게 되었단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한 인물이 날 발견하고 치료해 주었는데, 그분은 회회교의 장로였어. 난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분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전수받고 이제껏 회회교를 위해 일해 왔지." 문득 공야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매천악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회회교의 힘을 빌려 태행검파를 친다면 사문을 능욕하는 셈이 되어 차마 그러지 못했지. 매천악이 미웠지만, 어쨌든 태행검파는 날 길러 준 사문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난 울분을 삭이며 원한을 잊으려 했단다. 그런데 이십 년 전 전대 교주께서 한 여아를 데리고 와서 제자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려군이었어. 려군의 원한을 알게 된 순간, 난 매천악의 흉악함에 다시 한 번 치를 떨어야 했지. 그리고 이는 매천악을 필히 멸하라는 하늘의 계시라 생각하고 훗날 려군의 복수를 돕기로 작정했지. 그런데 묘하게도 려군의 동생이 이제까지 태행검파에서, 그것도 매천악의 손에서 커왔다니, 실로 하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공야직의 얘기를 들으며 정추수는 새삼스럽게 매천악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추수가 일어나자 공야직이 놀라 물었다. "몸은 괜찮으냐?"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지만, 정추수는 내색 않고 대답했다. "사숙님께서 돌봐 주신 덕에 견딜 만합니다." 공야직이 대소했다. "껄껄! 난 단지 널 이곳에 데려다가 눕혀 정신이 들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널 돌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애써 고통을 참는 정추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반곡은 당(唐) 나라 덕종(德宗) 때의 공신 이원(李愿)이 은거하던 곳이다. 좀 전에 내가 읊었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라는 시는 창려(昌黎) 한유(韓愈)가 이곳 반곡에 은거하려는 이원에게 술을 권하며 지은 시로 저기 앞쪽에 있는 석각(石刻)에 새겨져 있지. 본 파의 조사이신 낙월검객께선 말년(末年)에 반곡에서 머물면서 태행팔변을 창안하셨는데, 태행팔변의 초식 중에 가금불상이나 교룡둔장과 같은 이름은 바로 이 한 편의 시구에서 따오신 거야. 그분은 검법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통하시어 풍류를 아셨다더군.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동문들끼리 상잔(相殘)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조를 뵐 낯이 없게 되었어." "전 공손 사숙님으로부터 장강유사와 교룡둔장, 가금불상의 세 초식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태행검파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제겐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쯧쯧! 어쩌자고 뛰어난 인재는 태행검파에서 견디질 못하고 사라져야만 하는지. 이게 다 태행검파에 내려진 복운(福運)인가 보다." 문득 혀를 차던 공야직의 얼굴이 경직되는 듯하더니, 갑자기 정추수를 데리고 계곡의 비탈진 곳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공야직의 손에 이끌려 가며 정추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숙님?" "누군가가 반곡에 들어왔어." 과연 공야직의 말대로 두 사람이 몸을 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원가량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원 사숙입니다. 전 그와 오늘 정오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지금 나타나는군요." 잠시 후 정추수와 공야직이 있던 자리에 원가량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추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추수! 어디에 있느냐?" 그는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정추수의 이름을 대여섯 번 더 불렀다. 정추수가 대답하려는 순간, 공야직이 급히 입을 막았다. 정추수가 의아한 눈길로 공야직을 바라보자 공야직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곧 이어 원가량의 경악성에 시선을 돌리던 정추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가량의 면전엔 어느새 매천악이 서 있었던 것이다. "자넨 여기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원가량의 목소리는 놀람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매천악은 원가량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반문했다. "사형은 어찌 이곳에서 추수를 찾으시오?" "그건... 추수의 행적을 뒤쫓다 보니까 여기까지 이어져 있었다네." 어물거리며 구실을 찾는 원가량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나도 그놈의 행적을 따라 여기까지 왔지요." "그랬었군." 원가량의 어색한 대답에 매천악은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소리쳐 부른다고 그놈이 나타나겠소?" "그건 그렇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둘이서 직접 이 반곡 안을 둘러봅시다. 난 이쪽을 찾아볼 테니 사형께선..." 매천악은 손을 들어 원가량의 등뒤를 가리켰다. "저기, 커다란 고목 두 그루가 있는 저곳이 숨을 만하니 그쪽을 찾아보시지요." 원가량은 매천악의 손길을 따라 뒤돌아보았으나 눈에 띄는 나무가 없었다. "어디 말인가?" "저기 산 중턱의 바위 옆에 있는 나무가 보이지 않습니까?" "글쎄, 어디... 억!" 원가량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는 두 손으로 화끈한 통증이 전해지는 가슴을 가렸다. 차고 날카로운 감촉과 함께 붉디 붉은 피가 손을 흠뻑 적시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등뒤에서 매천악의 나직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원가량은 무너지려는 신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뒤돌아섰다. 눈앞에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는 매천악이 보였다. "네, 네가...?" 원가량은 눈을 한껏 부릅뜨고 입을 벌렸으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매천악의 검은 원가량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매천악이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띠었다. "사형이 추수를 이용하여 나를 음해하려는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았소?" 매천악이 원가량과 정추수의 밀담을 몰래 엿들은 사연을 모르는 원가량은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네가 어찌, 어찌 그것을..." 경악하여 몸을 부르르 떨던 원가량은 힘없이 쓰러지더니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엎어진 원가량의 시신을 발로 차서 뒤집어 죽음을 확인한 매천악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훈계하듯 소리쳤다. "흥! 감히 나의 뜻을 방해하는 놈은 누구라도 용서치 않는다. 거기 숨어 있는 추수,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그곳에 숨어 있는 걸 알고 있다. 썩 나오거라!" 매천악의 시선은 정확히 정추수가 숨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원래 매천악은 정추수가 근처에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게다가 매천악의 기습적인 독수에 원가량이 당하자 정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는데, 매천악은 이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매천악에게 발각된 정추수는 가슴이 철렁하여 공야직을 바라보았다. 공야직이 안심하고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정추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추수가 다가오자 매천악은 오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매천악의 가공할 검법을 경험한 정추수는 대여섯 걸음의 간격을 두고 멈추어 섰다. "사부, 이제 날 어쩔 셈입니까?" "흥! 아직도 날 사부라고 부르느냐? 기특한 놈이로구나. 하긴 네 녀석의 심성(心性)은 보기 드물게 착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넌 진작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매천악은 더 이상 자신의 본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정추수를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추수의 얼굴이 분노로 상기되었다. "기왕지사(旣往之事)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더 이상 당신을 사부로 여기지 않겠소. 그러나 궁금한 것이 있으니 말해 주셔야겠소." 매천악은 정추수가 이미 손안에 들어온 새라고 여겨 여유를 갖고 응대했다. "무엇이냐?" "왜 나를 죽이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소?" "흥! 원래 나와 신검문주가 원했던 건 세 권의 장한진경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건 한 권뿐이었어. 나머지 두 권의 행방을 알 길이 없으니 어찌 미련이 남지 않겠느냐? 당시 정가장에서 살아남은 이는 너와 너의 누이, 단둘이었다. 우리는 너희들이 나머지 두 권의 진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지. 그러던 차에 네가 나의 손에 들어왔으니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었겠느냐? 다만 너에게 진경이 없음을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너의 누이가 진경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복수를 위해 나타나리라 확신했다." 과연 냉겸의 말 그대로였다. 정추수는 매천악의 깊고 깊은 흉심에 치를 떨었다. 매천악은 의기 양양한 모습으로 말을 계속했다. "과연 나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단 말이야. 이제 너의 누이가 마녀가 되어 나타났으니 난 너를 인질로 삼아 협박할 것이다. 하나뿐인 동생의 목숨이 걸렸는데, 장한진경을 내놓지 않고 배기겠느냐? 으하하하하..." 스스로의 기분에 고취되었는지 매천악은 온몸을 흔들며 통쾌하게 웃었다. 이때, 싸늘한 냉소와 함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매천악의 귀를 때렸다. "아직은 좋아하기 이르다, 매천악!" "누구냐?" 다른 이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매천악은 깜짝 놀라 정추수가 숨어 있던 나무를 노려보았다. 짤막한 냉소가 들려 나온 후, 공야직이 눈에 살기를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매천악은 공야직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대경하여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넌 공야직이로구나!" "흥! 아직 내 얼굴을 잊지 않고 있었군." 매천악은 입을 꾹 다문 채 공야직을 바라보았다. 공야직 또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소란스러웠던 반곡에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정추수는 이 정적 속에 은은히 일고 있는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매천악이 입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살아 있었군." "물론이다. 너 같은 놈을 두고 어찌 먼저 죽을 수 있겠느냐?" 음성은 나직했지만 공야직의 얼굴엔 노기가 가득했다. 문득 매천악은 떠오르는 바가 있어 크게 소리쳤다. "그렇군. 마교의 낭아조 공야직이 바로 너였구나." "하하하! 그렇다. 지난날 넌 살인멸구(殺人滅口)하여 자신의 죄악을 덮으려 했지만 난 죽지 않았다. 게다가 넌 장한진경을 얻고 정씨 일족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그의 후손이 복수를 하게 되었으니, 이게 다 죄 많은 너를 벌하려는 하늘의 뜻이다." "흥! 잠꼬대 같은 소리 말아라. 마교에 공야직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설마 너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내 그때 널 살려 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잘되었다. 오늘 너를 죽여 끝을 마무리 짓겠다." 매천악은 허리에서 괴이한 연검(軟劍)을 꺼내 들었다. 정추수는 안색이 크게 변하여 소리쳤다. "공야 사숙! 저 검을 조심하십시오. 변화가 막측하여 방어하기 몹시 힘이 듭니다." 매천악은 정추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야직을 덮쳐 가고 있었다. 태행팔변의 검초였다. 햇빛을 받은 연검은 눈이 부실 만큼 번득였다. 그러나 이제 곧 그 모습을 감추고 공야직에게 해를 입히리라는 정추수의 짐작과는 달리 매천악의 연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빛나는 검신이 사라지고 한 줄기 가느다란 검은 선이 나타났는데, 실뱀의 몸뚱이처럼 제멋대로 휘어지며 공야직의 요혈을 노렸다. 그 검은 선은 직각으로 구부러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완전히 접혀지기도 하여 변화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끝은 반드시 공야직을 노리고 있었다. 검은 선은 다시 햇빛을 번득이는 은빛 검신으로 돌변하고, 다시 선으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정추수는 비로소 매천악의 검이 사라지는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공격할 적엔 검신으로 달빛을 반사시켜 노출시킨 다음, 돌연 검을 기울여 검인만이 상대의 시야에 들도록 하면, 한밤중이니 당연 검은색의 검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매천악의 연검은 밝은 햇빛 아래에선 그 장기를 발휘할 수 없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검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공야직은 매천악이 시전하는 검법이 분명 태행팔변임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장강유사와 교룡둔장, 가금불상의 초식을 익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천악이 장강유사를 펼칠 때면 연검이 괴이하게 요동치며 들어오기 때문에, 공격 부위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내 낭아조를 수련하고 나서 이렇게 고전(苦戰)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매천악에게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이게 바로 도마의 무공인가?' 공야직의 소매는 아래로 늘어뜨리면 손가락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길었다. 그 이유는 평소 낭아조의 특성을 숨겨 남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낭아조는 손가락과 손등을 감싸도록 특별히 제조된 은백색의 쇠붙이였다.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관절마다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손바닥은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손가락과 손목에 의지해 고정되도록 제조되었다. 손등을 감싼 부분은 적의 병기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래 공야직이 사용하고 있는 낭아조의 초식을 창안한 자는 소림사의 속가제자(俗家弟子)였다고 한다. 그는 소림사의 용조수(龍爪手)를 배워 익혔는데, 속가제자라는 이유로 그 진전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어 낭아조라는 형태의 무기를 개발했고, 용조수 중에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초식만을 위주로 새로이 금나수법을 창안했다. 그것이 바로 칠십이 식의 낭아조 수법이었다. 낭아조의 변화는 일반 무림에 전래된 금나수법에 비해 변화가 심오하고, 또한 상대를 노리는 수법이 치명적이었다. 낭아조 공야직이라는 이름은 무림의 고수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이름이었다. 그의 명성은 음풍노조 조천주에 뒤지지 않았으며, 마교를 위해 세운 전공 또한 혁혁했다. 따라서 매천악의 검법이 신묘한 탓에 처음엔 공야직이 공격을 못 하고 수비에 급급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 변화에 익숙해져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매천악의 연검은 가벼운 병기여서 낭아조의 손등 부분에 부딪혀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으므로, 공야직의 운신은 점점 영활해지기까지 했다. 어느새 두 사람이 겨룬 지 오십 초식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쯤 매천악은 공격보다는 수세가 많아져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공야직의 공격을 피하며 뒤로 슬쩍 물러나 정추수를 힐끔 쳐다보더니 모종의 결심을 한 듯 갑자기 기합성을 크게 질렀다. 동시에 그의 검법이 일변했는데, 정추수가 보기에 태행검파의 검법이 아닌 처음 보는 검법이었다. 매천악의 이 한 수는 태행팔변보다 더욱 위력적이어서 공야직은 급히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틈을 타 매천악이 반곡의 입구로 내닫는 게 아닌가? 정추수가 놀라 그를 쫓으려 하자 공야직이 소리쳐 만류했다. "그만두어라! 그 몸으로 그를 따라잡아 봐야 소용없다." 공야직의 말대로 지금의 정추수는 매천악을 쫓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공야직이 거친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지난 이십 년간 이렇게 힘든 싸움은 처음이다. 매천악의 무공이 이토록 높을 줄이야!" 정추수가 몹시 안타까운 듯 발을 굴렀다. "그의 검은 밤중에 마주하면 보이질 않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반드시 그를 제압했어야 하는 건데...!" 정추수의 말에 공야직이 어? 하고 놀라더니 이내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렇구나. 밤이면 그의 검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재간으론 그를 이기기가 힘들겠어. 과거 검도쌍마의 무공이 무적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휴우! 앞으론 매천악과 밤에 마주치는 일은 반드시 피해야겠구나." 공야직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내저었다. 매천악이 도망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긴장된 상황에서 벗어나자, 정추수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왜 그러느냐?" "저, 전..." 공야직의 놀란 음성이 정추수의 귓전에 흘러 들어왔지만, 정추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제2권 끝 >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0 장 추악한 음모는 인륜을..... 제 20 장 추악한 음모는 인륜을 속일 수 있고 "위지 형, 때맞춰 잘 오셨소." 매천악은 이제까지 그를 눌러 온 고뇌를 떨쳐 버리며 한껏 웃었다. 매천악의 방 중앙에 놓여진 원형 탁자엔 동철비와 매천악, 그리고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수염과 눈썹까지 하얗게 센 육십대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그에 상응하는 두툼한 입술, 불그스름한 볼. 호안(虎顔)을 한 그의 얼굴은 나이답지 않게 패기가 가득했다. 신검문주 위지광.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산서무림에선 천하제일검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아니오. 내가 이렇게 나선 건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소이다. 이미 우리를 도왔던 많은 고수들이 죽었으니 그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되었소." "그야 위지 형이 폐관(閉關) 중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잖소? 그대의 허물이라 할 수는 없소." 매천악과 위지광, 두 사람의 인사치레를 말없이 바라보던 동철비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마녀와 마교가 언제 이곳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판국인데, 지금 예의나 차리면서 시간을 허비할 셈이오?" "이런! 동 형께선 어지간히도 급하신 모양이오, 하하하!" 동철비와는 달리 시종 여유를 잃지 않는 위지광이었다. 동철비가 버럭 화를 내었다. "위지 형은 호랑이의 간이라도 빼먹었소? 우리와 함께했던 동지들 중에서 이미 다섯이 죽었고 나철백마저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오. 마교의 세력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고, 우리의 동지들은 줄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우리의 종말이 뻔하지 않소이까?" "그리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동 형. 지금 마교는 소림, 무당, 그리고 노가장과 세를 겨루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소. 아마 이곳에 나타난 마교의 고수는 이제껏 확인된 인원이 전부일 것이오. 우리가 힘을 합 하면 충분히 대적할 만하오." "위지 형은 마녀의 무공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했소? 게다가 마교의 조천주까지 합세했는데, 누가 그를 막을 수 있겠소?" 위지광이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으시오?" "동 형은 나와 매 장문의 무공을 너무 얕보는 것 아니오? 비록 이제껏 매 장문과 나의 명성이 중원무림을 울리지는 못했지만, 조천주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은 되니 과히 염려 마시오." 위지광의 자신만만한 어투에 동철비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긴 하다. 어젯밤 매 장문이 냉겸을 죽일 때 사용한 검법은 가공할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 조천주와 겨루어 볼 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어떻게 그런 무공을 익혔을까?' 문득 냉겸이 죽기 전 한 말이 떠올랐다. -저 멍청한 녀석도 너와 위지광의 간악한 음모에 휘말린 희생자에 불과하겠지. '설마 냉겸의 말대로 매 장문과 위지 문주는 장한진경을 얻기 위해 우릴 이용한 것이란 말인가?' 갑자기 닥쳐 드는 무서운 생각에 동철비는 위지광과 매천악의 표정을 세세히 살폈다. 과연 매천악도 위지광의 말에 미소로 화답하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철비의 속마음을 모르는 매천악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위지 형의 말대로 우리가 힘을 합하면 마교의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오. 게다가 내겐 그들을 일거에 소탕할 계책이 있으니 더욱 말할 필요가 없소이다." 위지광과 동철비가 동시에 물었다. "무슨 계책이오?" 매천악은 대답 대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태사전의 대청엔 곽입지와 공손월, 무당사협, 진국충, 신검삼호, 홍희, 위지천, 그리고 위지광의 장남인 위지혁이 숙연하게 앉아 있었다. 위지혁은 위지천과 생김이 비슷한 불혹(不惑)의 중년인이었다. 문득 무당사협의 제양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귀파의 조추수는 자질과 무공이 뛰어나 훗날 태행검파의 명성을 크게 떨치리라 생각했는데..." 누구보다도 정추수를 아끼던 공손월이 탄식했다. "본 파의 복이 없음을 탓하는 수밖에요. 그보다도..." 공손월은 말을 하다 말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원 사형께선 이른 아침 추수를 찾으러 나가신 이후로 돌아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경륜이 풍부하신 분인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장문께서 멀리 반곡까지 수색을 하라 명하시었으니 곧 소식이 오겠지." 곽입지는 말과는 달리 근심을 떨칠 수가 없는지 연신 손바닥을 부벼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공손월은 우울함 속으로 빠져 들었다. '사문을 빛낼 인물은 추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기대했는데, 이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하늘의 뜻이 어찌 이리도 가혹하단 말인가?' 정추수가 마녀의 동생임이 밝혀지자 뇌가명은 뛸 듯이 기뻤다. 마음의 힘을 얻은 탓일까? 그토록 아프던 허리의 통증이 가시는 듯하더니 반나절이 못 되어 몸을 움직여도 괴롭지 않게 되었다. '추수, 그 녀석은 사매와 영영 맺어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구나. 그렇다면 사매와 맺어질 수 있는 사람이 나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숙소를 벗어나 동문들을 찾았다. 궁조생, 갈웅휘, 왕옥진 등은 어젯밤 이후로 정추수를 찾느라 모두 사문을 떠나고 없었다. 그는 삼 대 제자를 통해 공손월이 태사전에 있음을 알고는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사전에 들어서는 순간, 문득 매약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추수가 나가장으로 출발한 날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매약화였다. 당연히 뇌가명은 그 동안 그녀를 볼 기회가 없었다. '이 기회에 약화로 하여금 추수를 완전히 잊도록 만들어야겠다.' 뇌가명은 의기 양양하게 공손월이 있는 대청을 지나쳐 이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천악의 거처엔 삼 대 제자 두 명이 번을 서고 있었다. 뇌가명이 의아하여 물었다. 평소 태사전 내엔 삼 대 제자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왜 여기에 있느냐?" 삼 대 제자 한 명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장문께선 지금 안에서 신검문주와 담소 중이십니다." 뇌가명은 찔끔하여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매천악의 방을 살그머니 지나쳤다. 그가 매약화의 방으로 가려 하자 삼 대 제자가 만류했다. "장문께선 이층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난 잠시 약화 사매를 만나고 나갈 터이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거라." "하지만..." 뇌가명이 눈을 부라리자 삼 대 제자는 감히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잠시면 되니까 잠자코 있거라." 성큼 걸음을 옮겨 매약화의 방으로 가는 뇌가명을 삼 대 제자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뇌가명이 매약화의 방문 앞에 이르니 나직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매약화의 울음 소리가 분명했다. 뇌가명은 갑자기 불쾌한 마음이 일었다. '아직도 추수, 그 녀석을 잊지 못하여 우는 것인가?' 뇌가명은 이런 생각이 들자 정추수가 더욱 미워졌다. '흥! 이제 약화 사매인들 어찌하겠는가? 그놈은 필히 죽여야 할 반도가 되었는데.' 뇌가명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볍게 방문을 두드렸다. 기다려도 응답이 없자, 뇌가명은 다시 방문을 두드리며 나직이 매약화를 불렀다. "약화, 나 가명이야. 들어가도 될까?"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뇌가명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맞은편에 있는 침상 하나와 방 가운데의 탁자와 의자,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화장대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구조였지만, 여인의 지분 냄새가 확 풍겨 오는지라 뇌가명은 일순 움찔했다. 길게 늘어진 휘장 사이로 보이는 침상엔 매약화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흐느끼고 있었다. 뇌가명은 나직이 기침하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했음에도 매약화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사매, 하루 종일 울고 있는 거야?" 뇌가명의 물음에 매약화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이에 옳다꾸나 싶어 뇌가명은 다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사매, 내가 왔으니 기분을 풀고 왜 우는지 얘기를 해봐." 뇌가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불이 홱 제쳐지며 매약화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무척 초췌해져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눈은 표독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뇌 사형은 무엇 때문에 절 찾아왔어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뇌가명은 놀라 물었다. "왜 그래? 내가 사매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어?" 뇌가명은 매약화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매약화는 정추수가 뇌가명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여 번민했음을 알고는 뇌가명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게 되었다. 게다가 정추수가 마녀의 동생으로 매천악과는 양존할 수 없는 관계임이 밝혀지자, 그에 대한 애정이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간절하게 되어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비로소 매약화는 정추수와 결혼하려는 그녀의 의사를 매천악이 매정하게 뿌리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추수와 맺어질 수 없는 현실이 못내 안타까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기이하게도 정추수에게 괴로움을 준 장본인인 뇌가명이 더욱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정추수를 생각하며 하루 종일 울었는데, 정추수가 그리우면 그리울수록 뇌가명에 대한 미움도 자꾸만 커져 갔다. 그러던 차에 뇌가명이 찾아와 말을 걸었으니 그녀가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매약화는 여전히 표독하게 뇌가명을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당신이 뭔데 내 방에 찾아오느냔 말이에요!" 냉정하기만 한 매약화의 말에 은근히 화가 난 뇌가명의 어투가 경직되어 나왔다. "사매가 걱정되어 찾아온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흥! 걱정은 무슨! 뇌 사형이 날 찾아온 이유를 모를 줄 알아요? 당신이 아무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날 꼬드겨도 어림없어요. 난 당신 같은 사람에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구요. 어서 나가요!" 매약화의 모욕적인 말에 뇌가명도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사매! 추수, 그 녀석은 마녀의 동생임이 밝혀졌어. 이젠 추수와 우린 서로 죽여야만 하는 사이가 됐으니, 그 녀석 때문에 이렇게 마음 상할 필요가 없잖아. 난 진심으로 사매를 위하고 있는데 왜 사매는 내게 화를 내는 거야?" 매약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악을 썼다. "나가요! 어서 나가!"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은 위태해 보일 정도였다. 뇌가명은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발을 한번 구르고는 몸을 돌렸다. 이때, 방문이 왈칵 열리며 호되게 꾸짖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명! 넌 어찌하여 명을 어기고 여기에 있는 거냐?" 뇌가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방문엔 매천악이 노기를 가득 품고 서 있었던 것이다. "넌 장문의 명이 안중에도 없느냐? 아니면 저 아이들이 네게 나의 명을 전하지 않았더냐?" 매천악은 그의 방을 지키고 섰던 삼 대 제자 두 명을 가리켰다. 두 명의 삼 대 제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노기 충천한 매천악의 모습에 뇌가명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잠시 눈이 멀어 장문의 명을 어겼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꼴도 보기 싫다. 어서 썩 나가거라!" 매천악의 호통에 뇌가명은 지체 않고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그의 꼴사나운 모습에 매약화는 야멸차게 냉소하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침상에 누워 버렸다. 매천악은 허겁지겁 사라지는 뇌가명을 한 번 노려본 후, 매약화에게 다가가 침상에 걸터앉았다.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매천악이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의아한 매약화는 이불을 살짝 들쳐 보고는 도로 덮어 버렸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보며 매천악이 웃으며 말했다. "껄껄껄!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아 걱정했는데, 아직도 목소리가 쟁쟁한 걸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흥!" 매약화는 말 대신 코웃음로 응대했다. 문득 매천악이 길게 탄식했다. "추수에 대한 너의 정이 이토록 깊은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매천악의 말에 매약화는 이불을 들쳤다. 매천악의 얼굴엔 낙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매약화는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 아버님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추수와 난 절대 맺어질 수 없겠죠." 기운 빠진 그녀의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매천악의 입에서 매약화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추수를 잊지 못할 것 같구나. 휴우! 난 하나뿐인 귀한 딸을 잃고 싶지 않으니, 추수가 잘못에 빠지지 않고 사문에 귀의한다면 너와 맺어 줄 생각이다." "정말이에요?" 매약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매천악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일어난 일련의 혈겁은 추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 그의 누나가 한 일을 추수에게 전가함은 옳지 못하지. 게다가 추수는 네가 사랑하는 정인(情人)이 아니더냐? 나 또한 오랫동안 애지중지하며 길러 온 제자를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다. 추수가 돌아온다면 난 그의 과거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일 생각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아버님...!" 매약화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매천악은 매약화를 살포시 끌어안고 어깨를 다독거렸다. "어떻게든 추수가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꾸나." 술시(戌時)가 지나 자시가 가까워 올 무렵,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궁조생이 태사전으로 허겁지겁 달려들어왔다. 경황없이 대청으로 들어온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매천악과 곽입지, 공손월, 무당사협은 물론 신검문주 위지광과 나머지 신검문 고수들의 시선이 궁조생에게 모아졌다. 상석에 앉은 매천악이 화급히 물었다. "추수는 찾았느냐?" "사부님, 추수는 찾지 못했고..." 갑자기 궁조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의 이런 모습에 불길함을 느낀 공손월이 다그쳐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대답을 못 하고 우느냐? 어서 말해 보아라." 궁조생은 무릎을 꿇고 오열하며 대답했다. "추수는 찾지 못하고 반곡에서 원 사백부님의 시신만... 흑흑흑!" "무엇이...?" 매천악과 곽입지, 그리고 공손월은 대경 실색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매천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치며 궁조생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 원 사형이 왜 죽었단 말이냐?" "그건... 원 사백부님의 시신을 지금 태사전 앞에 모시고 왔사오니..." 궁조생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매천악은 대청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곽입지와 공손월, 그리고 신검문주와 무당사협이 밖으로 나섰다. 매천악은 제자에게서 횃불을 빼앗아 들며 바닥에 눕혀진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원가량은 무슨 원통함이 있는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상의는 심장 부위로부터 피가 번져 흠뻑 젖어 있었다. "사형!" 뒤따라 나온 곽입지가 원가량의 시신을 부둥켜안았다. 그는 연신 원가량을 부르며 시신을 흔들어대더니 고개를 들어 궁조생에게 물었다. "누가 원 사형을 죽였느냐?" "그건... 제가 반곡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신 후라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대답하는 궁조생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곽입지가 소리쳤다. "다만 무엇이냐?" 이때 삼 대 제자 한 명이 검을 들고 다가왔다. "원 사백조님의 가슴에 꽂힌 검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가 검을 내밀자 궁조생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매천악이 그 제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래? 그 검을 이리 가져 오너라." 삼 대 제자로부터 검을 받아 든 매천악은 불빛에 검을 비추었다. 그리고는 안색이 대변하여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의 모습에 곽입지와 공손월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장문사형?" 매천악은 대답 대신 검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검을 받아 들어 살피던 두 사람도 경악성을 지르고 말았다. 곽입지가 분노하여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이 짐승 같은 놈! 아무리 쫓기는 몸이 되었다고 해도 이십 년 동안 몸담아 왔던 사문의 존장을 해치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신검문주가 매천악에게 다가와 물었다. "매 장문, 대체 누구의 검이기에 곽 대협이 저토록 분노하는 것이오?" 매천악이 비통하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저 검은 나의 제자 추수의 검이라오. 부끄러운 일이오. 정녕 부끄러운 일이야. 내가 덕이 없어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려..." 공손월은 멍하니 검신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태행검파(太行劍派) 조추수(趙秋愁)'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추수는 이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거늘,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공손월은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더라도 정추수가 사백부를 해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중인들의 뒤편에서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사람이 있었다. 매약화였다. "아니? 약화야!" 매천악이 화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 쓰러진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벌써 기절해 있었는데,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매약화는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제자에게 물어 원가량이 죽었음을 알고 놀라 이층에서 내려왔는데, 정추수가 원가량을 죽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영영 맺어질 수 없는 원수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상심하여 기절해 버린 것이다. 이를 보며 무당사협의 이봉이 탄식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로군. 건실해 보이던 청년고수가 이젠 사문의 존장을 죽인 패륜아가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얄궂은 게 세상살이로고..." 그의 말에 제양과 혁승, 희견이 혀를 차며 애석해 했다. 그러나 동철비는 이봉의 말에 불만을 토로했다. "흥! 무슨 말씀이오? 그 녀석의 행위를 보지 못했소? 내 일찍이 그 녀석이 마교 놈과 어울려 우리 일을 방해할 때부터 이리 될 줄 알아보았소이다. 게다가 방가장에서는 술을 처먹고 추태를 부리지 않았소? 결국 색마 놈의 씨앗이니 커서 다를 바가 무엇이겠소? 그놈은 악마의 화신이 분명하오!" 무당사협은 동철비의 감정 섞인 말에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반박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돌연 곽입지가 광분하여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추수, 그놈은 이미 마녀와 뇌동(雷同)하여 악마가 되었소. 결코 그놈을 살려 두어선 아니 되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녀석만큼은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오!" 방문 앞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궁조생의 마음은 뒤얽힌 실타래처럼 어지럽기만 했다. 정추수가 원가량을 죽였음이 밝혀진 이상 반드시 죽여야 할 사문의 공적이 되고 말았다. 궁조생으로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정추수의 검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만약 추수가 내 앞에 있다면, 그리고 그를 죽여야 한다면 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도저히 그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추수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의 누이, 정려군에 대한 사랑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이미 가능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건만, 그래도 정려군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궁조생이었기에 생각할수록 근심은 깊어 가기만 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산중의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순간 궁조생은 몸을 흠칫 떨었다. 단지 바람의 차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둠의 한 켠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왕옥진이었다. 비록 어둠에 잠겨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느낌만으로도 그녀임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까닭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와, 왕 사매?"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간신히 추스르며 입을 열자, 그녀가 살그머니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도, 그녀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걸음걸이였다. 불과 두어 걸음 거리로 좁혀질 때까지 궁조생은 그녀에게서 어떤 움직임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냥 스르르 미끄러져 온다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하게 빛을 발하며 궁조생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궁조생에게서 이는 단 하나의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녀의 이런 모습이 귀기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궁조생은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사매, 늦은 시간에 웬일이지?" 왕옥진은 입술을 꼬옥 다문 채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궁조생은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왕옥진이 다가서면 궁조생은 한걸음 물러나길 몇 번이나 했을까? 어느새 두 사람은 궁조생의 방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뒷걸음질치다가 엉덩이에 탁자가 걸리면서 궁조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매, 내게 무슨 할말이 있는 거야?" 궁조생의 물음에 왕옥진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입술을 꼬물거렸다. 무언가 할말이 있으나 차마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궁조생이 다시 물었다. "할말이 있어 찾아왔다면 왜 말을 않는 거지?" 왕옥진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일렁였다. 다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자리하더니 이윽고 왕옥진의 입술이 열렸다. "오 년 전 우리 사이에 오간 혼담을 사형은 거부했었죠? 만약 제가 사형께 청혼을 한다면 이번에도 거절할 건가요?" 궁조생은 일순 숨이 멎는 듯했다. 왕옥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궁조생을 억누르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오 년 전 두 사람의 혼담을 거부했을 때,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두고두고 궁조생의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떨치지 못할수록,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내색 않고 그녀를 대할수록 자괴감은 더욱 깊어졌지만, 정려군에 대한 사모지정 또한 더욱 깊어만 가고 있었다. 지금 왕옥진의 눈망울과 말속엔 긴 세월 동안 쌓여 온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궁조생의 정려군에 대한 정 또한 그녀의 바람에 못지않았다. 궁조생은 차마 왕옥진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대답을 종용했다. "어째서 대답을 못 하시나요?" 궁조생의 입은 여전히 꾹 닫힌 채 묵묵부답이었다. 왕옥진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마녀 때문이지요? 얘기 다 들었어요." "..." 왕옥진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뒤돌아섰다. 그녀가 방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막 방문을 나서려던 그녀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녀는 다시 궁조생을 돌아보았다. "사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궁조생은 입을 열었으나 그 뒷말을 하지 못했다. 담뿍 고인 눈물에 어린 원망이 궁조생의 목소리를 얼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이제껏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아 왔는데, 당신은 한 번도 내게 마음을 주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내게 달콤한 말을 할 때에도 결국 당신의 머릿속엔 그녀만이 있었군요. 그렇지요?" 왕옥진은 울면서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열려진 방문을 통해 밀려오는 찬바람이 궁조생의 가슴을 매몰차게 휘저었다. '결국은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었고 이제 그 순간이 왔을 뿐이다. 사매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정 소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씻을 수는 없지 않는가?' 궁조생은 애써 자신을 위로했지만 왕옥진의 눈물 어린 하소연이 그의 귀를 떠나지 않았다. 쓰라린 마음은 자탄(自歎)의 한숨이 되어 나왔다. '그러나 나 하나를 바라보며 젊은 청춘을 묻어 버린 사매의 인생은 누가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얀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매천악이 모든 제자들에게 출전 준비를 지시했을 때, 일행은 배간과 나신의 죽음을 접했다. 모두가 분노한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마녀에 대한 분노와 함께 정추수에 대한 분노 또한 한층 깊어졌고, 그만큼 궁조생의 수심(愁心)도 두께를 더하여 갔다. 특히 왕옥진의 절규는 처절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부와 사형을 동시에 잃은 셈이라 슬픔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증오의 화신이라도 된 듯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마녀를 죽이겠어요.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요!" 그 절규(絶叫) 속에는 궁조생의 마음을 앗아 가버린 정려군에 대한 원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1 장 귀재(鬼才)의 음모는.... 제 21 장 귀재(鬼才)의 음모는 사부를 속일 수 있지만 "이 녀석,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걸걸하면서도 약간은 앳된 목소리가 정추수의 귓전을 울렸다. "...?"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허연 수염에 붉게 달아오른 매부리코와 유난히 큰 입술, 장난기 가득한 두 눈이 정추수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정추수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노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노인은 정추수가 누운 모포에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잠버릇이 무척이나 고약한 녀석이로군. 그까짓 상처에 헛소리까지 해가며 무려 여섯 시진 동안을 자다니 말야." 노인의 익살스런 표정과 말에 정추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일어났다. 어깨와 다리의 상처 부위에서 욱씬거리는 고통이 전해졌다. 얼굴을 살짝 찡그리자 노인이 다시 한소리했다. "고까짓 상처에 인상을 쓰다니, 엄살이 심한 녀석일세." 입만 열면 신경 거슬리는 말을 하는 노인에게 정추수가 물었다. "노인장은 처음 뵙는 분인데 어떻게 저를 아시는지...?" 질문을 하면서 생각하니 자신이 정신을 잃은 반곡에는 공야직밖에 없었는지라 눈앞의 노인이 더욱 수상하게 생각되었다. "이놈, 눈치가 그리도 없느냐?" 노인의 호통에 찔끔한 정추수가 되물었다. "그럼... 노인장은 마교의...?" "네 이놈! 마교라니? 누가 그딴 말을 입에 담으라더냐?" 갑작스런 노인의 호통에 정추수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화를 내십니까?" "몰라서 묻느냐? 네 누이가 본 교의 사람이고 너 또한 남이 아닌데, 마교라고 말하면 스스로 얼굴에 똥칠하는 격이 아니냐? 그만한 사리 분별도 못 하니 장가나 갈 수 있겠느냐? 계집의 이름이나 부르지 않았으면 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지." 갑자기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약화라는 계집은 너와 어떤 사이냐?" 노인의 어투와 표정은 물속을 헤집는 망둥이처럼 삽시간에 제멋대로 변했다. 정추수로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가 묘한 표정으로 매약화의 이름을 언급하자 정추수는 속으로 부끄럼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약화의 이름을 불렀는가 보구나.' 대답이 없자 노인이 채근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그 계집과는 어떤 사이냐?" 정추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노인네로군.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양반이 왜 남의 연사(戀事)에 관심을 갖는 걸까?' 정추수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노인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네가 하도 꿈속에서 약화라는 계집을 찾기에 궁금해서 물어 본 것뿐이니." 일단 이상하게 생각하니 어색하게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더욱 수상하게 들렸다. 외양과는 달리 음성은 소년의 그것처럼 맑고 깨끗한 것이었다. "전 분명 공야 사숙과 같이 있었는데 사숙님은 보이지 않고 노인장께서 계시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노인장의 존함(尊啣)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오호... 공야 늙은이가 너의 사숙이라? 아하, 그랬었지! 나이를 먹다 보니 기억이 희미해져 깜박했군. 이것 참, 늙으면 어쩔 수 없다니까." 노인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외양은 분명 육십이 훨씬 넘어 칠십은 되어 보였는데, 나이에 걸맞게 마땅히 썩거나 누렇게 변해 버렸어야 할 이빨이 유난히도 희었다. 이에 더욱 수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정추수의 눈길이 점점 묘해지자 노인은 일순 당황한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정색하여 말했다. "노부의 이름은 알 필요 없다. 다른 이들은 날 천면객(千面客)이라 부르지. 껄껄, 나의 본 모습을 본 이는 극히 드문데 넌 나의 얼굴을 보았으니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야." 말투는 늙은이가 분명하되 목소리와 행동이 어린애와 같으므로 정추수는 혼란스러워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허어! 그놈 참 크구먼." 감탄과 함께 노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정추수에게 바짝 다가와 키를 맞추었다. 정추수는 웬만한 거한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노인의 키도 정추수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덩치 또한 정추수에 못지않아 정추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정추수 주위를 한바퀴 돌기도 하고 팔다리를 만져 보기도 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정추수의 어깨를 툭 쳤다. "좋아, 좋아. 무릇 덩치가 큰 사내는 마음도 넓기 마련이지. 너라면 나와 얘기가 좀 통할 듯도 하구나." 노인의 언행을 종잡을 수 없어 정추수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데, 노인이 이런 정추수를 재미있다는 듯이 보며 말했다. "어젯밤 공야 늙은이가 널 데려왔는데 시퍼렇게 질린 얼굴에 축 처진 몸이 시체나 다름없더군. 하나 내가 널 치료하여 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야."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어깨와 다리엔 붕대가 정성스럽게 감겨 있었다. "절 치료해 주신 것도 모르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못했으니 죄송하기 이를 데 없군요." 공손한 정추수의 말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됐다, 됐어. 너에게 공치사를 듣자고 한 일이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그보다도..." 노인이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정추수가 물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물론 있기는 하지.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하면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는지... 그게 걱정이란 말이야." "무슨 일이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도 노인은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결심이 섰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래도 넌 덩치가 커서 제법 사내다운 구석이 있을 것 같으니 내가 말하겠다." 노인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정추수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덩치와 장부의 기질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노인은 말과 행동이 범인과는 상당히 다르구나.' "난 말이야, 한 가지 묘한 버릇이 있는데... 처음 얘기를 나눈 사람과는 반드시 무공을 겨루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게다가 넌 천심장이란 오묘한 무공까지 지니고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내 말뜻을 알겠나?" 의외의 말에 정추수는 멍해져서 물었다. "그럼 제게 비무(比武)를 하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자넨 역시 사내다운 구석이 있어 내 말을 금방 알아듣는군." 손뼉을 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노인을 보며 정추수는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 노인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노선배님은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인데 제가 감히 손을 쓴다는 것은 좀..." "그래서 비무를 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비무라면 굳이 못 할 것도 없지만 예의가 아닌지라..."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예의를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네가 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예의가 아니란 말이다!" 정추수는 노화를 터뜨리며 펄쩍 뛰는 노인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승낙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추수가 비무를 위해 천막을 벗어나려 하자 노인이 놀라며 정추수의 행동을 제지하는 게 아닌가? "어? 이봐! 무엇 하려는 거야?" "비무를 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이런, 쯧쯧! 어디 지금 당장 비무를 하자더냐?" "그럼 언제...?" "난 무림을 활보한 지 사십 년이 넘은 대선배인데, 너와 마주하여 겨룬다면 어디 체면이 서겠느냐? 정식으로 겨루면 널 제압하는 건 한 손만으로도 쉬운 일이니 재미가 없지."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신지요?" "넌 여기에 있다가 내가 나간 한참 후에 나오도록 하여라. 그리고 날 발견하면 틈을 봐서 몰래 기습을 하도록 해라. 그 천심장인가 뭔가를 써서 말이다." 노인은 하는 말마다 정추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정추수로서는 도저히 그 진위(眞僞)를 알 길이 없었다. "대체 노선배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군요. 제가 암습을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비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생각해 보거라. 서로에게 승산이 있어야 진정한 비무라고 할 수 있지 결과가 뻔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적어도 방심한 틈을 타서 네가 기습을 해야만 혹여라도 네게 승산이 있을 수 있단 말이다." 노인의 말을 가만히 음미하자니 정추수의 무공을 무시하는 뜻이 역력했다. 정추수는 내심 불쾌해져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노선배님께선 절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천심장은 지독하기 짝이 없어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 마는 무서운 수법입니다. 이런 절학을 고작 암습이나 하는 곳에 쓴다면 어떻게 선조님께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자존심은 있단 말이로군." 노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정추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오른손을 들어 정추수에게 겨누었다. "이 한 수를 보면 내 말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말과 동시에 그의 우장이 가볍게 원을 그렸다. 순간, 바닥으로부터 측백나무 이파리 하나가 둥실 떠오르더니 정추수의 주위를 맴도는 게 아닌가? 정추수는 나뭇잎과 함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무형의 경력을 느끼자 공력을 북돋워 나뭇잎이 가슴 앞을 지나는 순간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다. 그러나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되는 양 나뭇잎은 정추수의 손을 스치듯 빠져 나가더니 놀라운 속도로 주위를 한바퀴 회전하며 가슴으로 쇄도해 왔다. "앗!" 정추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혀 피했지만, 나뭇잎은 어느새 정추수의 심장 부위에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껄껄껄!" 노인은 정추수의 혼비백산한 모습에 대소했다. 정추수는 등줄기를 촉촉이 적시는 식은땀을 느끼며 옷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내었다. 놀랍게도 나뭇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엔 그 모양 그대로 옷이 뚫려 구멍이 나 있었다. 정추수는 다시 한 번 경악성을 내질렀다. "회회장력(回回掌力)이라는 것이지. 너의 천심장력에 비해 어떠하냐?" 빈정거리는 노인의 어투에도 불구하고 정추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제 나의 말에 수긍할 수 있겠지?" 정추수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좋아, 그럼 내 말대로 기회를 봐서 기습을 하란 말이야. 내 말대로 할 테지?" 정추수가 다시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다짐하듯이 말하곤 휑 하니 천막 밖으로 나갔다. "기습할 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나 또한 사정을 두지 않을 테니까 다치기 싫으면 날 곤경에 빠뜨리란 말이야." 노인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정신이 혼란스러워진 정추수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천막 안으로 노인의 머리가 쑥 들어오며 다시 한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한 가지 잊을 뻔했군. 넌 나중에 지금 나와 만났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잉, 머저리 같은 놈! 잠시 후에 날 만나게 되더라도 생전 처음 만나는 것처럼 행동하란 말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 필요 없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겠느냐?" 노인의 언행이 기괴망측(奇怪罔測)하므로 정추수는 어쩔 도리가 없음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머리가 다시 사라졌다.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경망스럽고 아이 같은 노인의 행태를 떠올리며, 정추수는 그가 인세에 보기 드문 기인이라 여기면서도 우스운 생각이 들어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노인의 놀라운 무공을 상기하곤 심각한 표정으로 구멍 뚫린 옷을 들췄다. 나뭇잎이 닿은 부분은 회회장력의 여파로 가루가 되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몸에는 상처 하나 없으니 노인의 장력은 그 심오함에서 정추수와 비교되지 않았다. '대체 마교엔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 걸까?' 한편으로는 노인에 대한 오기가 치밀기도 했다. '좋아. 기습을 종용할 정도로 날 무시한다, 이거지?' 노인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구천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어? 벌써 정신이 들었군요, 정..." 갑자기 그가 묘한 표정이 되어 말을 잇지 못하는지라 정추수가 물었다. "보 형, 왜 말을 하다가 마시오?" "당신은 사고의 동생이니 이젠 말을 함부로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가 곤혹해 하는 이유를 알자 정추수는 좀 전의 일을 잊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보 형은 대범한 줄 알았는데, 그까짓 호칭 문제로 고민하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본 교는 상하(上下)의 위계 질서가 엄격하여 지키지 않으면 심한 문책을 받습니다. 난 감히 규율을 어길 용기가 없으니 당연히 존칭을 해야지요." "난 귀교의 사람이 아니므로 얽매일 필요가 없을 듯하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고는 본 교의 지엄하신 분이고 당신은 사고의 동생 분이시니 당연히 본 교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숙부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형제 칭호를 하던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정추수는 심히 난감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그저 난 보 형이라 부르고 보 형은 날 정 형이라 부르면 될 것이오." 보구천이 정색하며 정추수의 말을 일축했다. "큰일날 말씀이십니다. 행여라도 사고나 장로님께서 아시는 날이면 전 초주검이 될 것입니다. 부디 저를 위해서라도 절 무슨 형이니 하고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보구천의 언행이 너무 진지해 정추수는 더 이상 말하기가 거북해졌다. 보구천은 이미 결심이 섰는지 정추수의 기색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지금 사고께선 여기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기다리십니다. 숙부님께서 정신이 드셨으면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정추수를 존칭하는 보구천의 어투는 완강했다. 정추수는 겉으론 표현을 못 하고 속으로 혀를 차며 보구천을 따라 나섰다. 날은 이미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산 중턱 밝은 불빛이 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보구천이 말했다. "지금 본 교에서 지체 높으신 분이 와 계십니다. 사고께선 숙부님을 그분께 소개하시려는 겁니다." 불빛은 보기보다 먼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식경 이상을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모닥불 주위로 정려군과 공야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과 마주하여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조금 전 정추수에게 비무를 종용했던 노인이 분명했다. 정추수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보구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럴 일이 있다오." 정추수는 쓰디쓰게 웃으며 공터로 걸음을 내딛었다. "추수, 정신이 들었구나." 공야직과 자칭 천면객이라던 노인과 담소를 나누던 정려군이 반색하며 일어나 정추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깊은 정과 우려를 정추수는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누나임을 부정하던 정추수였지만,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정려군의 부드러운 음성을 접하자 새삼스럽게 혈육의 정이 솟구쳐 마음이 울렁거렸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생각이 짧고 우둔하여 누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네게서 누님이란 말을 들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절반은 풀리는 듯하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려군은 면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복숭아의 고운 자태를 머금은 도톰한 볼과 상큼한 입술, 무엇보다도 초롱초롱 일렁이는 두 눈은 보는 이의 넋을 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자신을 누님이라고 불러 준 정추수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혈육을 찾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피를 부르는 마녀라고만 알고 있었던 정려군이 이토록 감격스러워하자 정추수는 미안한 마음을 더욱 가눌 길이 없었다. 정려군이 정추수의 손을 잡으며 공야직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공야직이 껄껄 웃으며 일어났다. "오누이가 만나 회포의 정을 풀어야 할 터이니 우리가 자리를 비켜야겠군그래." 정려군이 살포시 웃으며 응대했다. "장로님도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제 동생 때문에 몸소 수고하셨으니 은혜가 백골난망(白骨難忘)이옵니다. 추수야, 너의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니?" "사숙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이후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정추수의 사의(謝意)에 공야직이 대소했다. "지금의 처지야 어찌 됐든 너와 난 같은 문파 출신이 아니더냐? 우린 한 식구라 할 수 있으니 위험을 보면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지금은 같은 교(敎)의 사람이 되었으니 더 더욱 말할 필요가 없어." 공야직이 흐뭇해 하는 모습을 보자 정추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정려군이 정추수에게 천면객을 소개했다. "추수야, 이분은 본 교의 봉공(奉公)으로 계신 천면객(千面客) 단리목(段里穆) 노선배님이시다." 천면객은 좀 전과는 달리 싸늘한 안색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정추수는 이를 기이하게 여겼지만, 그가 천막을 나가기 전 한 말이 떠올라 모른 체 인사했다. "후배 정추수, 노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정추수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읍을 하자 단리목은 미미하게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좀 전에는 희로(喜怒)를 분간할 수 없도록 경망스럽게 굴더니, 이젠 무겁기가 태산과 같구나. 참으로 괴이한 노인네로군.' 경이롭게 생각하다가 정추수는 문득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말한 바가 있으니 나의 독수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정추수는 표나지 않게 은근히 천심장의 기운을 북돋우었다. 이런 정추수의 기색을 모르는 정려군은 정추수의 소매를 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려 했다. 이 순간, "받으시오!" 정추수는 일성을 토하며 정려군의 손을 뿌리치고는 단리목에게 덮쳐들었다. 정추수와 단리목과의 거리는 일 장이 채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추수가 한 번 도약하며 천심장력을 뿌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장력이 단리목의 가슴에 이르렀다. "무슨 짓이야?" 정려군과 공야직, 보구천 등 세 사람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 것은 동시. 단리목은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그는 뒤로 넘어졌고, 천심장력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가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단리목이 바닥을 구르며 몸을 일으키자, 정추수는 다시 쌍장(雙掌)으로 단리목의 가슴을 후려쳤다. 몸을 추스를 틈을 주지 않는 공격이었다. 단리목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우장을 뻗어 정추수의 장력을 봉쇄했다. 그의 우장에서 강맹한 기운이 일며 천심장과 부딪쳤고, 순간 정추수는 그 장력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걸음 밀려났다. 단리목은 정추수와 자신의 장력이 부딪치는 여력을 이용하여 몸을 허공에 띄워 신형을 추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정추수의 장력에선 아무런 반발력이 없고, 부딪치는 순간 실낱 같은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단리목은 다시 한 번 휘청이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정추수는 두 번의 격돌로 자신이 우세를 점했는지라 빙그레 웃으며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정추수는 만약 자신이 미리 소리치지 않고 공격을 했다면 지금쯤 단리목은 쓰러져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으리라 생각하며 득의 양양해졌다. 이때야 비로소 정려군과 공야직, 보구천 등이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며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정려군의 호통에 정추수는 오히려 대소하며 단리목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노선배? 저의 천심장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지요?" 단리목이 한 말을 상기하여 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웬걸? 단리목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지더니 노성을 버럭 지르는 게 아닌가? "이 무례한 놈! 감히 내게 암수를 써?" 그의 옷자락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공야직이 황급히 만류했다. "봉공께선 진정하십시오. 여기엔 필경 사유가 있을 터이니." "사유는 무슨 사유? 저놈은 날 죽이려 한 것이 분명하거늘!" 공야직이 만류하는 동안 정려군이 물었다. "추수! 어째서 봉공을 공격했느냐?" "그건 저분이 저더러 암습을 하라고 해서..." "뭐라고?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봉공께서 널 언제 보았다고 그런 말씀을 하셨겠니?" "아닙니다. 분명 노선배께선 조금 전 절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봉공께선 오늘 오후 이곳에 오신 후로 쭉 나와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널 만날 수 있었단 말이냐?" 정추수는 이때까지도 단리목이 장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문득 정려군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단리목에게 다가갔다. 단리목은 노기를 누르지 못해 연신 수염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봉공 어른, 아무래도 이상한 내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려군의 말에 단리목은 억지로 노기를 누르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무슨 내막이 있단 말인가?" "추수는 조금 전 봉공을 만났다고 하는군요." "무슨 소리? 난 이제껏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질 않았거늘... 어?"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리목은 놀란 표정이 되더니 정추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가 날 기습한 이유를 자세히 말해 보아라." 정추수는 이제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제가 천막에서 정신을 차리자 노선배님께서 저더러 기습을 하여 무공을 겨루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단리목이 전혀 모르는 듯한지라 정추수는 의심이 들어 천막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세세히 고했다. "무어? 그럼..." 갑자기 단리목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구(無垢), 이 녀석!" 정려군과 공야직, 그리고 보구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추수가 보구천에게 물었다. "저분께서 왜 저러시오?" 보구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숙부께서 천막 안에서 본 사람은 봉공이 아니라 봉공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단리목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등고! 구화성! 용문원!" 세 개의 인형이 재빠르게 공터에 나타나 단리목 앞에 허리를 숙이며 읍을 했다. "무구, 이 녀석은 어디에 있느냐?" 단리목의 추상같은 물음에 세 사람은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매었다. "구화성! 무구는 어디에 있지? 어서 말하라!" "예, 그게, 저..." "왜 대답을 못 하느냐? 어디에 있느냐? 등고! 용문원! 너희들이 말하라." 등고, 구화성, 용문원. 그들은 무림에서 이름을 떨친 지 오래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정추수는 단리목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 사람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세 사람이 긴장하여 땀을 흘리는 모습이 뚜렷이 보일 정도였다. 문득 구화성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봉공! 저를 죽여 주십시오. 소교주(少敎主)께서 한 시진 전부터 보이지 않는지라 수하를 풀어 찾고 있습니다만..." 구화성은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연이어 등고와 용문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세 사람의 뺨을 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단리목이 여전히 씩씩거렸다. 공야직이 나서 단리목을 만류했다. "봉공, 참으십시오. 소교주가 이런 말썽을 벌인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 저들만 탓할 일이 아닙니다." "흥!" 단리목은 공야직의 체면을 생각하여 마지못해 참는 듯하다가 다시 세 사람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어서 소교주를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도록 하라!" 등고, 구화성, 용문원, 세 사람이 살았다는 듯이 몸을 날려 공터를 빠져 나간 후, 불현듯 단리목 또한 공터 밖으로 달려가려 하는지라 공야직이 막으며 물었다. "봉공께선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내가 직접 무구를 잡으러 가야겠네." "등고 등 세 사람이 직접 나섰는데, 봉공께서 몸소 수고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녀석의 재간이 신출귀몰한데 저들이 잡을 수 있겠나?" 말과 함께 땅을 박차던 단리목이 갑자기 몸을 비틀거렸다. 공야직이 놀라 부축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봉공?" 단리목은 공야직에게 대답하는 대신 미간을 찌푸리며 정추수에게 물었다. "네가 조금 전에 쓴 수법이 무엇이냐?" "천심장입니다." "음..." 단리목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이를 보며 정려군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천심장은 치명적인 수법이라 견디기 힘들 터인데..." 사정을 알게 된 정추수도 걱정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또한 근심을 떨치지 못하고 정려군에게 말했다. "제가 봉공을 도와 천심장 기운을 몰아 내도록 할까요?" "아서라. 봉공께선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 그런 일을 했다간 경을 칠 것이다." 이때 공야직이 다가오며 한탄하듯이 말했다. "소교주의 장난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니 걱정이로군." 정추수가 물었다. "대체 봉공의 제자 분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정려군과 공야직, 두 사람이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에 보구천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교주님의 독자로 이름은 무구라고 하지요. 이제 나이 열다섯으로 봉공께서 사 년 전부터 제자로 거두어 가르치셨는데, 장난이 심하여 곤란을 겪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보구천의 말에 정추수가 해연히 놀라 소리쳤다. "이제 겨우 열다섯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만,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가... 천막 안에서 내게 보인 무공 실력은 이미 고수 중의 고수였는데, 어떻게 열다섯의 나이로 그런 무공을...? 게다가 그의 덩치는 나에 못지않았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구려." 보구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하! 소교주의 무공을 이미 견식했군요. 숙부께서 놀라실 만도 하지요. 그는 나이는 어리지만 천품(天品)을 타고나 성취 속도로 따진다면 고금에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지요. 무공이 숙부님이나 저의 수준을 넘은 지 이미 한 해가 넘었고, 아마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교주님의 무공을 능가하여 천하제일고수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교주님을 위시하여 본 교의 모든 원로들이 장차 천하무림을 일통하실 분이라 여기고 기대를 걸고 있지요." 듣자니 놀랍기 그지없는지라 정추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만 장난을 하는 데 피아(彼我)와 아래위를 가리지 않아 모두들 이를 우려하고 있지요. 특히 봉공 어르신의 역용(易容)과 변장술(變裝術)을 배운 이후론 더욱 장난을 예측할 수 없어 모두들 혀를 내두르기만 할 뿐 감히 저지하려는 사람이 없는 실정입니다." "흥! 그렇다고 해도 오늘은 사부를 장난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경을 치고 말 것이야. 그건 그렇고..." 아미를 찌푸리던 정려군이 정추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수, 내일은 옛집을 찾아가 아버님께 제를 올릴 것이니 마음을 경건히 하여 준비하도록 해라." "옛날 살던 집으로 간단 말입니까?" 어릴 적 기억이 거의 없는 정추수로선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일이었다. "그래. 나철백의 수급을 얻었으니 제단에 바쳐 아버님의 영혼을 위로해 드려야지." "나철백? 그럼 저의 사형과 사숙께선 어찌 되었습니까?" 정추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묻자 정려군은 코웃음치며 냉랭히 말했다. "흥! 배간이라는 그 작자 말이냐? 분수를 모르고 대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지. 당시 나가장에 있던 자들은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았다." "한 명도...?" 정려군의 손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배간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힘이 빠져 버렸다. "누님께선 어찌하여 그토록 잔인하게 목숨을 앗아 가시는 겁니까? 원흉(元兇)들의 목숨만 앗아 가면 될 일이지 어찌..." "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십 년 전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고 살겁을 저지른 줄 아느냐? 갓 태어난 젖먹이마저 그들의 손에 죽었는데 더 이상 말하여 무엇 하겠느냐?" 그녀의 매몰찬 어조에 정추수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내심 한탄했다. 비록 배간이 매천악을 도와 사문에 해악을 끼쳤다고는 하나 그는 정추수를 귀여워하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정추수에겐 좋은 감정이 아직 남아 있어 그의 죽음이 못내 안타까웠다. 게다가 나신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이제 남은 건 매천악과 위지광, 그리고 동철비뿐이다. 내일 아버님께 제를 올리고 난 다음엔 신검문을 칠 것이다. 흥! 동철비는 매천악과 같이 있으니 위지광을 죽인 다음 둘을 한 번에 죽이도록 하지." 정려군의 목소리와 표정은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니 누님이라는 정겨움보다는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러나 하나뿐인 혈육에게 거리를 둘 수는 없는 일. 정추수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비마표국의 유 국주는 우리 가문의 혈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왜 그를 죽였습니까?" "흥! 원래 산서무림의 표국은 우리 보운표국 하나뿐이었다. 이후로도 산서무림엔 우리 가문 이외의 표국이 있어선 안 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정려군에게서 정추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편협된 누님의 성격으로 인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덧없이 사라질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내가 누님을 설득하여 죄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내색 않고 정추수는 다시 물었다. "사부... 아니, 매천악이 사용한 검법은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저로선 도저히 상대할 방도가 없을 듯한데 누님께선 어떻게 그의 검법을 누르시겠습니까?" "그 얘긴 공야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다. 매천악이 사용한 검의 형태를 보아서 장한진경의 패월도법(覇月刀法)을 익혔음이 분명하다. 육 대 조부께서 천하를 주유하실 때 낮엔 광명도법(光明刀法)을 쓰셨고 밤엔 패월도법을 쓰셨는데, 이는 각각의 도법이 지닌 특성 때문이었단다. 광명도법은 넓은 도신을 이용해 햇빛을 반사시켜 상대의 시력을 마비시키는 효용을 가지고 있고, 패월도법은 종잇장처럼 가늘고 좁은 도신을 이용하여 상대의 시각을 혼미케 하여 공격 위치를 가늠치 못하게 하는 효용을 가지고 있지." "과연 그랬습니다. 매천악이 저의 사숙조님을 죽일 땐 달빛을 받은 은백색의 검신이 드러나다가도 한 순간 어둠 속에 사라지며 의외의 부위를 공격하곤 했지요. 전 그의 일검조차도 받아 내지 못했어요. 그런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더구나 사숙조님의 말씀대로라면 위지광이 광명도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높고요." "호호호! 매천악이 패월도법을 익히고 위지광이 광명도법을 익혔다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느냐? 낮엔 매천악을 상대하고 밤엔 위지광을 상대하면 되지."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순순히 응할 리가 없겠죠." "물론 그렇겠지. 하나 걱정할 것 없다. 난 선조께서 남기신 장한검법(長恨劍法)을 익혔으니 광명패월도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난 그들 무공의 특성을 알고 있고, 그들은 장한검법의 특성을 모르니 승부는 애초에 결정난 것이 아니겠느냐?" 정려군의 자신에 찬 말에 정추수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매천악이 정려군의 손에 죽게 된다면 자신은 매약화와는 영영 원수가 될 것임을 생각하자 가슴이 욱죄어 왔다. 정추수의 수심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으므로 정려군이 물었다. "무슨 근심이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정추수는 자신의 근심을 얼버무리려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누님께선 제자를 거두셨더군요." "검학이를 말하는 거로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정려군이 활짝 웃었다. "구천으로부터 네가 검학을 구해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내 동생이 검학의 목숨을 구했으니 얼마나 공교로운 일이냐? 아마 이것도 인연일 것이라 생각되어 제자로 받아들였단다. 잠시 가르쳐 보니 총명하여 검법의 이치를 쉽게 깨우치더구나. 난 그 아이에게 장한검법을 전수할 생각이란다." "잘된 일이군요. 그런데 검학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추수의 질문에 정려군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귀를 기울이던 공야직이 대소했다. "사숙께선 왜 웃으십니까?" 정추수의 물음에 보구천이 대신 대답했다. "오늘 소교주가 이곳에 온 후로 검학은 그와 어울려 놀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얌전하던 아이가 소교주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악동이 되어 버렸지 뭡니까? 아마 지금도 소교주와 어디선가 장난을 궁리하고 있을 겁니다." 정려군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무구, 그 녀석이 순진한 아이까지 버려 놓는단 말이야. 내 반드시 그 녀석의 버릇을 고치고야 말겠어!" 이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운공요상을 하던 단리목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봉공께선 상세가 어떠하십니까?" 단리목은 정려군의 우려에 대꾸하지 않고 정추수를 힐끔 보더니 투덜거리듯 말했다. "천심장이라 했던가? 정말 지독한 수법이로군그래. 그저 장력끼리 부딪쳤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이거 수삼 일은 요상해야겠는걸."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새겨지며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드는 정추수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어 봉공 어르신께 피해를 끼쳐 드렸군요." "됐다, 됐어. 어린놈의 실수에 화를 내봤자 내 체면만 깎일 뿐이니 상대하고 싶지 않다." 단리목이 쌀쌀맞게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을 때였다. "이거 놓으라구! 도망가지 않겠다는데 왜 믿지 않는 거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등고, 구화성, 용문원, 세 사람에게 포위된 두 사람이 공터로 걸어오고 있었다. 단리목과 똑같은 생김의 봉무구와 유검학이었다. 등고와 용문원이 봉무구의 양손을 잡고 있었는데, 봉무구는 신경질적으로 두 사람을 뿌리치려 했다. 그에 반해 유검학은 멀찍이서부터 정려군의 화가 난 표정을 보며 불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단리목은 자신의 모습으로 변장한 봉무구의 행색을 보자 더욱 노기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이놈! 네가 사부를 능멸하고도 큰소리를 치느냐?" 단리목이 벌떡 일어나 호통하자 그제서야 찔끔하여 잠잠해지는 봉무구였다. 그는 끽소리도 못 하고 얌전히 모닥불까지 걸어왔지만 단리목이 두려운지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이에 단리목이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손을 들어 봉무구의 뺨을 치려 했다. 가까이서 보니, 단리목과 봉무구의 생김은 차이점이 없어 마치 자기가 자신의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정추수는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봉무구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단리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봉무구로 인해 흥분하게 되자 완전히 몰아 내지 못한 천심장 기운이 다시 발동한 것이다. "에이!" 단리목은 잠시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소매를 휘저으며 공터를 벗어나 숙소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봉무구의 눈빛이 반짝였다. 단리목의 상처가 심상치 않아 보이므로 정려군이 공야직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봉공 어르신의 용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요." 공야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자 정려군은 봉무구에게 한마디 훈계를 했다. "넌 오늘 사부님의 생명을 담보로 장난을 쳤으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검학, 넌 날 따라오너라." 두 사람과 유검학이 단리목의 뒤를 따라가자 봉무구는 헤헤 웃더니 두 팔을 힘껏 뿌리쳤다.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등고와 용문원이 용력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너희들은 병약하신 사부님이나 호위해 드려라. 난..." 등고와 용문원, 구화성에게 인상을 쓰던 봉무구는 어느새 실실 웃는 얼굴이 되어 정추수를 바라보았다. "헤헤, 숙부님의 천심장은 정말 대단하군요. 사부님께서 저렇게 상처를 입은 모습은 처음 봐요." 봉무구의 하는 양을 보자니 정추수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이에 정추수는 얼굴을 굳히며 싸늘히 말했다. "흥! 노선배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헤헤, 숙부님께선 화를 푸세요." 봉무구는 말을 하면서 두 손으로 얼굴에서 수염이며 하얀 눈썹, 그리고 얼굴과 코에 붙인 것들을 주섬주섬 뜯어 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십여 세의 생기발랄한 얼굴로 변했다. 정추수는 내심 봉무구의 변장술에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하나, 봉무구의 버릇이 너무 나쁘다고 여겨 굳힌 안색을 풀지는 않았다. 봉무구가 배실배실 웃으며 정추수의 손을 잡았다. "숙부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세요." 보구천이 냉소하며 물었다. "네게 무슨 사정이 있단 말이냐?" "사부님께선 오늘 이곳으로 오자마자 내일 황산으로 떠나신다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어요? 때마침 정 숙부님의 천심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은 터라 사부님께서 천심장에 상처를 입으시면 치료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사고, 사형들과 며칠을 더 머무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런 거죠." "내가 천심장에 대한 얘길 괜히 했구나, 괜히 했어." 보구천이 화난 표정으로 혀를 찼으나 봉무구는 아랑곳 않고 웃으며 말했다. "헤헤, 나의 계책이 멋지게 맞아떨어졌으니 내일 황산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요. 이제 여기서 신검문과 태행검파 녀석들을 재미있게 혼내주는 일만 남았어요." 봉무구의 말에 정추수와 보구천이 어이없어하는데 뒤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흥! 어림없는 소리다, 무구. 넌 이곳에 남아서 봉공이 상처를 완전히 치료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라." 어느새 되돌아온 정려군이 봉무구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봉무구가 깜짝 놀라 말했다. "사고! 어찌 그런 말씀을...?" "시끄럽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교주께 오늘 일을 알려 단단히 혼을 낼 터이니 그리 알아라!" 정려군의 엄한 꾸짖음에 봉무구는 울상이 되어 버렸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2 장 정상(頂上)에 더욱 높이...... 제 22 장 정상(頂上)에 더욱 높이 오르려는 자가 정씨 일가의 보운표국은 양성(陽城) 밖 이십여 리 가량 떨어진 필수(泌水) 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새벽 일찍 고평 지역의 한 산을 출발한 정추수와 정려군, 보구천, 유검학, 등고, 구화성, 용문원 등은 다음날 정오 무렵 보운표국의 옛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야직은 단리목의 상세를 염려하여 일행과 합류하지 않았고, 봉무구는 정려군의 엄한 명에 의해 단리목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옛집을 찾은 정추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말이 보운표국의 옛터이지 장원의 자취는 흔적도 없었다. 드높이 자란 누런 풀숲과 나무들 사이로 간간이 담장이며 집의 흔적이 겨우 눈에 띌 정도였다. 유난히도 추운 늦가을의 매서운 바람이 정추수의 허망한 마음을 뒤흔들었다. 옛적엔 웅장함을 자랑했을, 담장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지나자 사람의 발걸음에 놀란 다람쥐며 토끼들이 후닥닥! 숨을 곳을 찾기에 분주했고, 가끔은 늑대인지 들개인지 모를 짐승들이 풀숲을 의지해 달아나곤 했다. 실로 짐승들과 귀신들이 제 집인 양 차려 지낸 지 오래된 황폐한 곳이라, 어느 곳이 전각이었고 어느 곳이 창고였으며 어느 곳이 축사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정려군이 길을 훤히 알기라도 하는 듯 풀숲을 이리저리 헤집으니, 이내 발길로 다듬어진 흔적이 밴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일 각쯤 걸어가자 제법 다듬어진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서 걸음을 멈춘 정려군이 말했다. "이곳이 우리 집안의 조사당(祖師堂)이었단다. 이십 년이 지나 이곳을 찾았지만 시신은커녕 뼈마저 짐승들이 모두 물어 갔는지 부모님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단다." 정려군의 음성이 울먹이며 떨려 나왔다. 왈칵 솟으려는 눈물을 감추려 정추수는 고개를 숙였다. "이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제단을 마련하고 위패를 세우게 되었으니 한스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구나." 그녀가 가리키는 곳엔 네모 반듯한 대리석이 이층으로 놓여 있었다. 그녀가 유검학에게서 짐을 받아 들어 보자기를 푸니 자그마한 신주(神主)가 나왔다. 신주엔 '현고정범부군지신위(顯考程範府君之神位)'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신주를 제단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더욱 원통한 일은 선조님들의 위패가 모두 불타 버려 다시는 모실 길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주에 이어 향로와 과일이 올려진 제단 주위는 풀숲만이 무성하여 쓸쓸함을 더해 주었다. 바람이 일자 마른 풀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음산한 소리를 자아내었다. 정려군은 등고에게서 목합을 건네 받아 열었는데, 그 안엔 피 묻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가득한 노인의 머리가 소금에 절여져 있었다. 그녀는 그 머리를 꺼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부릅떠진 두 핏발 선 눈동자가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그 커다란 두 눈이 시야를 가리며 정추수의 의식을 하얗게 물들여 갔다. 자신은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향을 태우고 불타는 지전(紙錢)이 바람을 따라 허공에 흐트러져 시야를 가득 메울 때까지 정추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부모의 얼굴이며 전혀 생각나지 않는 옛집에서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를 리 없었다. 그저 눈물만이 하염없이 흐를 뿐이었다. 정려군의 흐느끼는 소리도 정추수의 귓전을 타고 흐를 뿐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머리 숙여 곡을 하던 정려군이 안광을 번득이며 고개를 들었다. 정려군과 정추수, 두 사람 뒤에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던 등고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려군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살기다! 많은 고수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어!" 정려군의 말에 다른 이들이 흠칫 놀라며 몸을 긴장시켰다. 정추수가 정신을 가다듬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모두 한곳으로 모여라!" 정려군의 명에 일행이 원진(圓陣)을 치자 곧 이어 동쪽의 풀숲 사이로 여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하하하! 제를 지낼 시간은 주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으렷다!"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친 이는 신검문주 위지광이었다. 그의 뒤로 신검삼호와 홍희, 위지혁, 위지천 등이 기세 등등하게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서쪽에선 매천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매천악의 뒤로 곽입지와 공손월, 궁조생, 갈웅휘, 왕옥진, 뇌가명 등이 흉흉한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특히 곽입지와 갈웅휘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이를 갈며 정추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무당사협과 동철비가 서 있었다. 북쪽에선 매휘양이 태행검파와는 복장이 다른 무사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운보의 무사들이었다. 사면(四面)의 매복(埋伏)에 의해 일행이 도주할 수 있는 길은 모두 차단되어 있어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려군은 포위한 자들을 한바퀴 둘러본 후 냉막하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올 줄 미리 알고 있었군." 매천악이 눈에 기광(奇光)을 뿌리며 말했다. "네가 살겁을 저지른 후 반드시 우리 동료들의 목을 베어 갔으니, 그 사용처가 뻔하지 않느냐? 네가 나철백의 목을 베어 이곳에 오리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 "흥! 대단하시군. 하긴 그 정도는 되니 이십 년 전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었겠지." 위지광이 소리쳤다. "헛소리! 음모가 아니라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너희는 가문의 죄과를 반성하지 않고 수차례 혈겁을 일으켰으니 오늘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정려군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다수로써 우릴 제압하겠단 말이지? 하나, 너희들에게 그럴 만한 실력이 있을까?" "그건 곧 알게 될 것이다." 싸늘하게 답하며 위지광이 손을 내밀어 위지천으로부터 검을 건네 받았다. 검집이 없는 그 검은 검신의 길이가 넉 자가 넘었고, 검신의 폭이 어른의 손바닥보다도 넓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의 태양빛이 넓은 검신에서 은광(銀光)으로 반사되어 강렬히 내뿜어져 눈을 바로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위지광이 그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주체 못 할 광망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마침 하늘도 우리를 돕는 듯하니 너흰 이곳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런 위지광의 모습에 정려군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과연 네가 장한진경의 광명도법을 익혔구나!" "아하하하!" 위지광이 대소(大笑)하며 정려군을 덮쳐 갔다. 등고와 구화성, 용문원이 그를 제지하려 하자 정려군이 패검을 뽑아 마주쳐 가며 소리쳤다.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정려군의 가녀린 몸이 위지광의 사방을 뒤덮는 검광 속으로 뛰어들었다. 위지광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괴이한 파공음과 함께 은광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정추수 등은 눈이 부셔 위지광이 검법을 시전하는 모습을 직시할 수가 없었다. 이는 정추수 일행뿐만 아니라 매천악, 무당사협 등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려 했지만, 누가 어디를 공격하는지, 누구에게 승산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간간이 휘황찬란한 은광을 뚫고 청색의 검기가 솟구치곤 하여 관전하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두 신형이 격돌했다간 물러나고, 다시 어우러지길 수십 번 하여도 승패가 나지 않았다. 대결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문득, 손에 땀을 쥐며 결투를 바라보는 정추수에게 보구천이 다가와 속삭였다. "숙부님, 형세가 매우 불리합니다. 지금 저들은 위지광과 사고의 대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일단 한꺼번에 달려들면 우리가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차라리 선제 공격으로 탈출구를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나 흉흉한 살기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북쪽엔 고수가 적어 보이니 한 순간에 그곳으로 닥치면 길이 열릴 듯합니다." 북쪽엔 매휘양이 일단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과연 태행검파의 사람들도 아니고 위협적인 고수 또한 없어 보였다. 정추수는 망설이지 않고 보구천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럼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 동시에 행동하도록 합시다." 보구천은 즉시 등고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매천악은 이런 보구천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흥! 저놈들이 이곳을 빠져 나갈 궁리를 하는 게로군. 곽 사제! 공손 사제! 내가 추수를 사로잡을 테니 그대들은 제자들을 인솔하여 한 놈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게. 가능하면 신검문과 무당사협의 힘을 빌려 다른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게." 매천악은 허리에 감고 있던 검을 풀어 들며 정추수에게 느릿하게 다가갔다. 정추수는 매천악으로부터 도망치면서 검을 버린 후 다시는 검을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 지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한 쌍의 육장(肉掌)뿐이었다. 천심장의 기운을 두 손에 잔뜩 모으던 그의 눈에 서서히 다가오는 매천악의 모습이 보였다. '틀렸다. 사부는 우리의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있구나.' 기습적인 탈출이 글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추수는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구천과 다른 일행 또한 매천악의 태도에서 내심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어차피 그른 일이라면 내가 사부를 막아 다른 이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도록 해야겠다.' 정추수는 잔뜩 경계하며 매천악을 마주보고 섰다. 매천악이 얼굴 가득 조소를 띠며 말했다. "추수, 난 널 해치고 싶지 않다. 순순히 나의 말을 따른다면 다른 동료들의 목숨은 살려 주겠다." 이미 사부의 음흉한 수법들을 듣고 확인한 정추수였다. 매천악의 말은 정추수에게 믿음을 줄 수 없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흥! 믿지도 못하면서 왜 날 사부라고 부르느냐?"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는 매천악의 표정에 정추수는 노기가 끓어올라 소리쳤다. "내 이제 당신을 사부라 부르지 않겠소." "으하하하! 진작 그랬어야지." 매천악은 살기가 뚝뚝 흐르는 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음산하고 날카로운 예기가 이 장의 거리를 무색케 하며 정추수에게 섬뜩한 공포심을 일깨워 주었다. 정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패월도법의 무서움이 새삼스럽게 정추수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때였다. "아버님! 추수를 해치지 마세요." 애절한 외침과 함께 가냘픈 신형이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바보같이! 무슨 짓이냐?" "사매!" 매천악과 정추수가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두 사람 사이엔 매약화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원수가 된 사부와 자신이 사랑하는 원수의 딸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비록 사부와 생사를 결할 상황이었지만 막상 매약화를 보자 정추수는 반가움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때 정추수의 뒤에서 한 인영이 벼락같이 내달아 매약화를 덮쳐 갔다. "앗!" 정추수와 매천악이 동시에 그 인영을 제지하려 몸을 날렸다. 매약화를 덮친 인물은 보구천이었다. 그는 불리하기만 하던 상황에서 매약화가 나타나자 매천악을 곤경에 빠뜨릴 절호의 기회라 여겨 매약화를 사로잡으려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습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기습을 하면 시간적으로 매천악에 비해 유리할 것이고, 정추수 또한 그를 도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매약화에 대한 정추수의 마음을 전혀 몰랐기에 내린 오판이었다. 매천악에 앞서 정추수가 보구천의 뒤를 공격해 온 것이다. 천심장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보구천은 소스라치게 놀라 매약화를 포기하고 몸을 틀었다. 이 순간 매천악의 검이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보구천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매천악의 쾌속한 검법은 보구천에게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정추수는 엉겁결에 매약화를 덮치는 인영을 공격했으나 이내 보구천임을 알아보곤 장력을 회수했다. 그런데 매천악의 검에 보구천이 위험에 빠지는 게 아닌가? 정추수는 보구천의 옆을 스치며 천심장을 연거푸 세 번이나 후려쳤다. 이어 매천악의 검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매천악은 보구천을 공격하느라 정추수의 공격에 대해선 무방비 상태였다. 또한 천심장의 기운에 쓰라린 경험을 한 적이 있어 황급히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일련의 동작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매약화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한 순간의 살기 어린 공방이 끝나자, 세 사람은 매약화를 중심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일 장씩 떨어져 있게 되었다. 보구천은 정추수가 자신을 공격한 이유를 몰라 소리쳐 물었다. "숙부님은 왜 날 공격하신 겁니까?" "그녀를 건드리지 마시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단호히 말하는 정추수의 모습에 보구천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하! 내가 실수를 했구나. 숙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어.' 보구천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매천악은 매약화의 안위가 염려되어 속이 탔으나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움직일 때 정추수와 보구천이 동시에 매약화에게 달려들면 막을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천악이 다급히 소리쳤다. "약화! 어서 이리 오너라." 매약화는 움직이지 않고 매천악에게 애원했다. "아버님은 추수에게 개심(改心)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 지금 상황을 보고서도 그따위 소릴 하느냐?" "그날 밤 추수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거짓이었나요?" "어찌 그리 꽉 막힌 소리를 하느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추수를 설득할 수 있겠느냐?" 정추수 또한 자신과 일행의 목숨보다도 약화의 안위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매약화가 물러가길 간절히 원했다. "약화! 어서 그대의 부친께 가시오." "싫어요.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아버님은 당신을 죽일 거예요. 그럴 수 없어요." '저 바보 같은 것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어 가는구나.' 매천악은 속으로 답답함을 금치 못하며 위지광과 정려군의 대결을 곁눈질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아직도 팽팽했다. 위지광의 검법이 넓은 공간을 휩쓸고 있음에도 정려군은 신묘한 몸놀림으로 그 속을 헤집고 있었다. '지금은 낮이라 난 마녀의 적수가 되기 힘들다. 게다가 그녀는 경신술이 귀신과 같으니 도망가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막기가 힘들지. 다른 녀석들을 모두 다 죽여도 마녀가 도망가면 만사가 헛되고 만다. 마녀를 잡기 위해선 반드시 추수를 손안에 넣어야 해.'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미묘했다. 자신이 움직이면 보구천이나 정추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몰랐으므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등뒤의 곽입지와 갈웅휘가 움직이려 하자, 이내 등고와 유검학 등 네 사람이 달려들 태세여서 함부로 거동하기가 어려웠다. 매천악은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약화, 난 지금 추수를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네가 이곳에 있으면 오히려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이리 오도록 해라. 내 저들에게 항복을 권하겠다." 매천악의 말에 매약화는 마음이 동했다. 게다가 정추수가 어서 매천악의 곁으로 가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그녀는 다짐받듯이 물었다. "정말인가요, 아버님?" "물론이다. 내가 언제 네게 거짓말을 하더냐?" 매천악의 확연한 대답에 매약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정추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엔 정추수에 대한 염려와 갈망이 가득했다. 지금 그녀를 보내면 찾아올 결말이 무엇인지 정추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더욱 서러움이 치밀어 등을 돌리는 약화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입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약화! 행복하게 살아야 해.' 끝내 정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보구천은 정추수의 하는 양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저 여인이 위험에서 벗어나면 매천악이 우릴 살려 둘 리가 만무하다. 바보같이 사랑에 눈이 멀어 목숨을 포기하려 하다니...' 보구천은 이 순간 정추수가 원망스러워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한편, 매약화를 중심으로 한 대치를 바라보고 있는 곽입지와 갈웅휘는 원가량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공손월이 이를 만류했다. "지금 약화의 목숨을 앗아 갈 셈이오?" 궁조생 또한 정추수의 안위를 염려하여 갈웅휘와 왕옥진을 만류하고 있었다. 덕분에 곽입지와 갈웅휘는 이를 갈면서도 정추수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남쪽에 위치해 있던 무당사협과 동철비는 이런 매천악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도울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위지광과 정려군의 결투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특히 동철비는 매약화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매천악을 보며 속으로 냉소하기까지 했다. '매천악은 제자를 죽이려 하고, 딸은 그 제자를 살리려 몸을 돌보지 않으니 잘되어 가는 집안이로군.' 동철비가 이렇게 냉소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란 바로 매천악과 위지광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정려군과 겨루고 있는 위지광의 검법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어서 관전하는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냉겸의 말대로 두 사람이 정씨 집안의 무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번 의심이 일자 동철비는 두 사람을 철저히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혈겁의 원흉인 정려군만 죽으면 두 사람과 결별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지금 매천악이 약간의 곤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완벽하게 포위된 이상 정추수 일행이 빠져 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로서는 구태여 도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체된 시간으로 인해 정추수 일행은 천우신조를 얻게 되었다. 매약화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여 매천악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으-악!" 북쪽의 매휘양이 거느린 무사들의 행렬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그 사이로 세 개의 신형이 뛰쳐나오며 정추수의 곁에 내려섰다. "공야 사숙!" "장로님!" 정추수와 보구천이 반색하여 소리쳤다. 그들은 공야직과 봉무구, 그리고 장춘곡의 학창홍이었다. 난데없이 공야직이 나타나자 매천악은 안색이 대변해 재빨리 매약화의 손을 끌며 뒤로 물러났다. 공야직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놀란 사람이 또 있었다. 곽입지와 공손월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부르짖었다. "공야 사형! 살아 있었군요." "아하하하! 정말 오랜만이로군, 사제들. 이게 얼마 만인가? 벌써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 공야직은 비록 크게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엔 깊은 회한이 어려 있었다. 이때 매천악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흥! 마교의 낭아조 공야직이 바로 그다. 사제들은 정에 이끌려 그에게 동정심을 품지 말아라." "그게 정말입니까?" 곽입지와 공손월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흥! 내가 누구 덕에 마교의 인물이 되었느냐?" 매천악을 노려보며 살기를 뿌리는 공야직의 말에 곽입지와 공손월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반면, 매천악은 내심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공야직이 입을 놀릴 시간을 주면 나의 행각이 모두 탄로나게 된다. 그에게 틈을 주어선 안 되지.' 결정을 내리자 매천악의 조치는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내공을 돋우어 소리쳤다. "무당사협, 신검삼호 여러분! 마교의 고수들이 나타나 일이 어렵게 되었소. 모두 일거에 물리치도록 합시다!" 그러잖아도 갑자기 나타난 인물들 때문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던 그들이었다. 매천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검삼호와 무당사협이 일거에 달려들었다. "과연 교활하구나, 매천악!" 매천악의 속셈을 간파한 공야직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생각 같아선 매천악을 직접 도륙하고 싶었지만 무당사협과 신검삼호의 합공에 밀려 우선 몸을 보호해야만 했다. "비겁한 놈들! 떼거지로 몰려들다니..." 일곱 명이 한 사람을 공격하자 봉무구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는 거구에 힘을 잔뜩 실어 상대를 공격했지만 얼굴 표정은 희희낙락했다. 일단 이들이 격돌하자 상황은 삽시간에 돌변했다. 곽입지와 갈웅휘가 정추수에게 달려들었고, 등고와 구화성, 용문원이 가세하자 동철비, 공손월과 궁조생이 다시 싸움판에 끼여들었다. 일시 흐트러졌던 전열을 가다듬은 매휘양도 휘하 무사들을 독려하며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장내엔 난전(亂戰)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 학창홍이 품속에서 호각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곧 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화답하는 호각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학창홍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박도를 휘둘러 유검학을 위협하고 있는 광운보의 무사 둘을 처치하고는 지체 않고 동철비를 공격했다. 공야직의 무공은 대단했다. 무당사협이 그를 합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태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당사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등고와 구화성, 용문원 등은 신검삼호와 격돌했고, 보구천이 공손월을 상대하여 손을 묶어 놓는 사이 봉무구가 매천악에게 달려들었다. 정추수는 한때 자신의 사숙이었던 곽입지를 상대하게 되자 심히 난감했다. 반연 곽입지와 갈웅휘는 일거수일투족마다에 짙은 살기를 품고 요혈을 공격했다. 자연 정추수는 수비에 급급하게 되었다. 게다가 궁조생과 뇌가명까지 합세하자 정추수는 이내 싸울 의욕을 잃고 말았다. 궁조생은 정추수를 공격할 의도가 아니라 여차하면 도울 생각이었지만, 그의 등장만으로도 정추수의 전의를 상실케 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친형제와 같은 궁조생에게 살수를 쓸 수 있겠는가? 정추수는 곽입지와 갈웅휘의 독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목숨을 걸어 가면서까지 서로를 죽일 만큼의 원한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추수가 소리쳤다. "비록 제 신세가 기구하여 사문을 여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정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곽 사숙님과 갈 사형은 어째서 날 이리도 핍박하는 것입니까?" 갈웅휘는 살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증스러운 놈! 사부님의 시신에 네 검이 꽂혀 있었거늘 발뺌하려 하다니!" 정추수는 이 말에 매천악의 음모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었구나. 그때 원 사숙을 찌른 검이 나의 것이었어.' 새삼스럽게 매천악의 음흉함에 치가 떨렸다. "그건..." 정추수는 갈웅휘에게 원가량이 죽게 된 경위를 말하고 싶었지만, 곽입지와 갈웅휘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검은 끊임없이 정추수의 요혈을 노리고 있었다. 이때 뇌가명이 정추수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을 했다. "장문께선 금수(禽獸)의 아들인 널 키워 주셨다. 넌 이 은혜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텐데 사매의 환심을 사려 장문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실로 금수만도 못한 놈이다!" 사실 정추수의 마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파문(破門)도 아니고 가문의 원한도 아니었다. 오직 매약화와의 이별이 정추수의 애를 끊을 지경이었는데, 뇌가명이 이를 건드리자 화가 불같이 솟았다. 더욱이 뇌가명이 정추수의 부모를 금수에 비교했음에랴! 정추수의 입에서 노호(怒虎)와 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뇌가명! 네가 어찌 나의 부모님을 금수라 칭하느냐?" 정추수의 소맷자락이 어깨 부위까지 펄럭였다. 동시에 그의 쌍장에서 천심장의 기운이 해일(海溢)같이 일며 뇌가명에게 밀려갔다. 정추수는 성심동에서 나온 이후 수염을 깎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구레나룻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무성하여 마치 야생의 맹수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맹수의 형상과 호랑이 같은 호통에 뇌가명은 간담이 서늘하여 즉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뇌가명은 마치 봄바람처럼 밀려오는 천심장의 기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한 순간의 방심이 뇌가명의 명을 재촉했다. 광풍 노도(狂風怒濤)와 같은 정추수의 기세에 놀란 곽입지와 갈웅휘, 그리고 궁조생이 정추수의 측면을 공격하여 제지하려 했으나 천심장력은 이미 뇌가명을 강타한 후였다. 뇌가명은 일시 어? 하는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렸고, 정추수는 세 사람의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곽입지와 갈웅휘가 정추수를 다시 공격할 때, 뇌가명은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한번 이성을 잃은 정추수는 더 이상 동문의 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공격해 오는 곽입지와 갈웅휘가 오로지 적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는 다시 천심장의 기운을 북돋우며 두 사람의 검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추수의 태행검법에 대한 조예는 곽입지의 경지를 훨씬 앞서고 있었다. 따라서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허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곽입지와 갈웅휘가 정추수를 향해 검을 내지르면 정추수는 어느새 사각으로 파고들어 두 사람에게 장력을 휘둘렀다. 자신들의 공격이 무기력함을 깨닫자, 곽입지와 갈웅휘는 안색이 핼쑥하게 변하여 정추수의 장력을 멀찌감치 피하기에 급급했다. 뇌가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광경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궁조생은 쓰러지는 뇌가명을 안았으나 이내 그가 즉사했음을 알고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곽입지와 갈웅휘가 정추수의 장력에 의해 위험을 맞이하자 즉시 그 사이로 뛰어들어 정추수의 장력을 맨몸으로 받으려 했다.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공격하던 정추수였지만, 궁조생의 육탄공세를 보자 대경 실색하여 장력을 회수했다. 아무리 분노가 하늘을 찌른들 친형과 같은 궁조생을 해칠 수는 없었다. 물러나는 정추수를 보며 궁조생이 처연하게 소리쳤다. "추수! 넌 정녕 마음이 변한 것이냐? 넌 원 사백부님을 죽였고 지금은 뇌 사제마저 죽였으니 이젠 날 죽이지 못할 이유도 없겠구나!" 궁조생의 울부짖음에 정신이 든 정추수는 자신의 손으로 동문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난..." 뇌가명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누가 그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목과 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뇌가명의 모습이 정추수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조생! 넌 아직도 과거의 정에 얽매여 있느냐? 저 녀석에게 동문의 정이 어디 있겠느냐?" 곽입지의 외침이 정추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는 곽입지와 갈웅휘를 보면서도 정추수는 더 이상 싸울 의욕이 나지 않았다. 한편, 봉무구와 겨루는 매천악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굴은 분명 십여 세의 동안인데 덩치는 어른보다도 큰 이상한 인간이 나타나 그와 대등하게 겨루고 있으니, 어찌 경악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매천악은 검을 사용하고 있으되 봉무구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봉무구의 손에서 이는 신묘한 경기가 매천악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압박해 오는데, 도무지 어디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봉무구의 몸놀림은 덩치와는 정반대로 빠르기 그지없어 매천악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매천악은 태행팔변과 연검의 신묘한 변화에 의지하여 봉무구의 공세를 겨우 차단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천악은 봉무구의 공격을 봉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뇌가명의 시신이 보였다. 무당사협은 공야직과 어울려 조금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신검삼호도 등고, 구화성, 용문원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진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홍희를 위시한 위지혁과 위지천이 이끄는 신검문의 무사들이 가세하여 수적인 우세를 점하는 듯했으나, 호각 소리와 함께 나타난 마교의 고수들로 인해 오히려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더구나 매휘양이 이끄는 광운보의 고수들은 마교의 고수들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매약화의 안위는 매천악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왕옥진이 매약화를 보호하며 마교의 무사들과 겨루고 있었지만 위태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매천악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위지광과 정려군의 대결이었다. 패월검법을 수련한 매천악은 광명도법의 특성도 잘 알고 있었다. 광명도법은 넓은 도신으로 햇빛을 반사시켜 상대의 시각을 마비시킴으로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무공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정려군에겐 그것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초식이 거듭되면 위지광이 불리할 것이 뻔하다. 저 마녀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 상태로 가다간 우리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서 철수하는 게 현명하겠다.' 결심이 서자 매천악은 내공을 실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듯 위지광도 휘파람으로 화답했다. 이를 신호로 매천악은 기합을 한번 내지르며 연검을 연달아 다섯 번 내질렀다. 매천악의 검이 갑작스럽게 신속해지며 전신 요혈을 위협하자, 봉무구는 회회장력을 거두며 뒤로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이 늙은이가 이제껏 전력을 다하지 않았구나.' 봉무구가 놀라는 사이 매천악은 왕옥진과 매약화가 고전하고 있는 곳으로 날아가 마교 무사 둘을 일검에 베어 버렸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도록 하자." 매천악에게 손을 이끌리며 풀숲으로 들어가는 순간, 매약화는 고개를 돌려 정추수를 바라보았다. 정추수는 신호를 기점으로 물러나는 곽입지와 갈웅휘, 그리고 궁조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추수! 제발 죽지만 말아요.' 매약화는 뿌예지는 눈을 소매로 훔치며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저들을 쫓을 필요 없다." 한 사람의 적이라도 더 죽이려 뒤쫓는 수하들을 만류하며 정려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검문과 태행검파의 고수들이 일시에 빠져 나가자 장내엔 공허한 바람만이 휘돌았다. 제단 주위의 그리 넓지 않은 공터엔 십여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공야직이 다가오자 정려군은 허리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장로님께서 적시에 나타나 주시지 않았다면 저희 남매는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장로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식구끼리 이 정도의 도움으로 감사할 필요는 없지."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공야직은 나직이 웃으며 적도의 시신을 발로 걷어차고 있는 봉무구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게 다 소교주 덕분이지. 봉공께서 상처를 치료하려 해도 소교주의 방해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거든.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때 부리는 소교주의 심통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견디다 못한 봉공께서 나에게 소교주를 데리고 뒤따르도록 부탁하신 게지. 봉공께선 너의 귀교(歸敎)를 독촉하는 교주의 전언(傳言)을 가지고 왔지만, 네가 원한을 갚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한 배려도 하신 게야. 날더러 소교주를 데려간 김에 너를 도와 한시라도 빨리 원한을 갚을 수 있도록 하라는 당부까지 하셨어. 자신의 상처를 핑계로 돌아오는 길이 늦어졌노라고 교주께 품할 심산이신 게야." "아아, 봉공께선 제게 커다란 은혜를 베푸신 셈이군요." 문득 공야직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의 힘이 만만치 않은걸." "흥! 그러나 결국은 우리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게 그렇지가 않아. 우린 황산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더 이상 힘을 모을 수 없지만 저들은 힘을 더욱 비축할 수가 있지. 산서무림에선 위지광이나 매천악의 세력이 곳곳에 미쳐 있으니 앞으로 일이 어렵게 되었어." 공야직의 염려를 정려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내심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던 차였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등고를 불렀다. 등고가 다가오자 정려군이 명했다. "그대는 수하 서넛을 이끌고 달아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하라." 공터를 떠나는 등고를 보며 공야직이 나직이 말했다. "만약 외부에서 적을 돕는 세력이 보태어지면 우린 즉시 산서무림을 벗어나야 해. 그러잖아도 본 교는 소림, 무당을 상대하느라 여분의 힘이 없는 형편이야. 자칫 우리가 해를 입게 된다면 이건 개인적인 비극일 뿐만 아니라 본 교의 전력에 큰 차질을 주게 돼. 부모의 원한보다는 역시 교의 일이 우선되어야겠지." 정려군은 자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십 년을 기다려 왔는데, 아직도 때가 아니란 말인가? 이제 원수는 셋이 남았을 뿐인데.' 정려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런 정려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공야직이 위로했다. "그래도 아홉의 원수 중 여섯을 죽였지 않느냐? 그들의 목숨을 일시 연명해 주는 셈치고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원흉 두 명은 아직 살아 있지요."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겠느냐?" 공야직의 말에 정려군은 정추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혈육이 살아 있음을 상기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정추수는 망연한 표정으로 뇌가명의 시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뇌가명의 칠공에선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려군이 다가와 정추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무얼 그리 슬퍼하느냐?" "제가 동문 사형을 죽였어요." "바보 같으니. 넌 이제 태행검파의 제자가 아닌데 괴로워할 필요가 있느냐?" 문득 뇌가명의 죽음에 처연해 하던 궁조생의 얼굴이 떠올라 정추수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했다. "사형제간의 정을 어찌 한 순간의 마음가짐으로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정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려군이 나직이 한탄했다. "그렇게 정이 많아서야 앞으로 어떻게 험난한 강호무림을 살아 갈 수 있겠느냐?" 이때 보구천이 정려군에게 다가왔다. "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이곳에선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니 저쪽으로..." 정추수를 힐끔 쳐다보는 보구천에게서 정려군은 정추수와 관련된 일이리라 짐작했다. 한쪽 구석으로 가서 보구천의 귓속말을 듣던 정려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냐?" "격전 내내 지켜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분명..." 정려군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이때 적의 동태를 살피러 나간 등고가 허겁지겁 돌아왔다. "그대는 어찌 벌써 돌아왔는가?" 정려군이 의아해 하며 묻자 등고가 즉시 대답했다. "저들은 강 건너편에 모여 불을 피워 놓고 있습니다. 우리들을 감시하며 포위할 생각인 듯합니다. 서쪽 양성 방향으로도 일단의 움직임이 있는데, 아마 우릴 감시하는 자들 같습니다." 공야직이 당혹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들에겐 또 다른 원군이 곧 올 것임에 틀림없군." "저의 실수예요. 저들이 힘을 합치기 전에 먼저 움직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 이미 여섯 명의 원수를 죽이느라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어. 저들이 힘을 모을 시간으로는 충분했지. 오히려 이제서야 움직인 저들이 늦었다고 할 수도 있어." "절 위로하실 필요 없어요. 신검문주의 무공이 과거에 비해 강해졌다는 것을 깊이 숙고했다면, 그가 혈겁의 원흉이었음을 진작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신검문을 먼저 쳤더라면 오늘처럼 곤란을 겪지는 않았겠죠." "이미 후회해도 늦었으니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해야지." 공야직이 말하는 대책이라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정려군은 잘 알고 있었다. 정려군은 황산 천도봉을 떠나며 교주 봉천생과 약조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마교의 고수들을 반년 동안 빌려 주는 대신, 산서무림에서 돌아오면 봉천생을 도와 정사의 대결을 준비키로 한 것이었다. 반년의 시한은 벌써 지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회회교의 봉공으로 있는 천면객이 정려군을 이곳까지 찾아와 한시라도 빨리 황산으로 돌아오라는 교주의 엄명을 전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십 년 만에 겨우 기회를 잡아 산서무림으로 돌아와 원수를 갚게 되었다. 지금 저들을 죽이지 못하고 간다면 언제나 기회가 다시 올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돌아가면 사형은 내가 다시는 사사로운 일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 이렇게 물러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그녀였다. 공야직이 나직한 기침으로 생각에 잠긴 정려군을 일깨웠다. 무작정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지라 정려군은 조건부로 공야직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오늘밤을 여기서 지새고 내일 경과를 보기로 하지요. 뚜렷한 방책이 나오지 않으면 장로님의 말씀대로 황산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살아 있으면 원한을 갚을 날은 언제고 오는 법이다." 갑자기 살을 엘 듯한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먼 하늘로부터 시커먼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공야직은 하늘의 변화를 주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가 오려는가...?"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3 장 보다 많은 자취를..... 제 23 장 보다 많은 자취를 남기게 되느니 "비가 올 것 같으니 장막(帳幕)을 쳐라." 위지천에게 명을 내리는 위지광에게 동철비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소? 저들이 바로 표국을 벗어나 잠적해 버린다면 허사가 아니오?" "천만의 말씀! 저들은 저곳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위지광의 자신에 찬 말에 동철비가 물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오?" "첫째, 마녀는 눈앞에 원수를 두고 물러나려 하진 않을 것이오. 둘째, 일부러 수하들을 풀어 저들을 감시케 했는데, 아마 저들도 동태를 발견했을 것이오. 우리의 이목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판단한다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위지광의 말이 일리있다고 생각하여 동철비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제껏 불쾌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던 매천악이 입을 열었다. "동 형, 난 그대에게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소이다." "왜 그러시오?" "오늘 내가 딸애의 일로 곤란에 처했을 때, 그대가 도왔더라면 추수를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오. 그랬더라면 이렇게 쫓기듯 물러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동철비에게 한 말이었지만 매천악의 시선은 무당사협에게로 돌려졌다. 은근히 무당사협을 탓하는 행동이었다. 이봉이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그때 상황은 아무래도 매 장문과 따님, 그리고 제자 간의 문제라 생각되어 나서기가 곤란했소이다." 이봉과는 달리 제양과 희견, 혁승 등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동철비도 과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매 장문께서 어렵지 않게 해결하리라 믿었소이다. 당시 그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으니 어찌 그리 생각되지 않겠소? 나머지 마교 놈들이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소?" "흥! 추수는 이미 본 문의 반도가 되었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시잖소? 그런데도 이 대협께선 나와 제자 간의 문제라 말씀하시다니, 가당치 않소이다. 그리고 동 형, 우리가 마녀의 일행을 치기 전에 무어라고 다짐했소? 속전속결(速戰速決)로 후환을 남기지 않음이 최선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는데, 그대의 방관으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소이다. 이제 저들을 치기 어려워졌으니 그만큼 우리의 위험이 높아진 것 아니겠소?" 매천악이 신랄하게 따지자 동철비도 버럭 화를 내었다. "그렇게 속전속결이 중요했다면 매 장문은 왜 딸의 목숨을 핑계로 그대의 제자를 죽이지 않았소? 그 잘난 제자를 죽이지 못할 만큼 딸의 목숨이 위태로웠소?" 동철비가 정추수를 아직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은 매천악이 일부러 정추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빗대어 말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매천악은 이를 금방 알아차리고 분노하게 되었다. "그대는 어째서 아직도 추수 그 녀석을 나의 제자라고 하시는 거요? 내가 사문의 반도라고 했던 말을 벌써 잊으셨소?" 동철비는 싸늘히 코웃음치며 응대했다. "흥! 말씀은 매끄럽게 잘하시는군. 그럼 그대가 당신 딸에게 한 말은 무엇이오? 추수를 죽일 생각이 없다고 한 말 말이오." 매약화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을 동철비가 언급하자 매천악은 일시 대꾸하지 못했다. '이 늙은이가 그 말을 들었구나.' 당시 동철비와 매천악이 있던 거리는 삼 장이 넘었다. 그렇게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동철비가 매천악의 말을 들었다면, 이는 동철비가 매천악의 언행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는 뜻이 되었다. '이놈이 날 의심하기 시작했구나.' 매천악의 깊은 흉중(胸中)에서 살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매천악의 마음을 모른 채, 동철비는 매천악이 달리 대꾸를 못 하자 연신 냉소하며 고개를 돌렸다. '매천악! 냉겸의 말대로 너와 위지광이 진경을 얻기 위해 동료들을 속였다면 너희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니냐? 지금은 마녀 때문에 너를 돕는다만,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난 너와 같이할 이유가 없다.' 잠시 이들 사이에 침묵이 자리했다. 매천악과 동철비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위지광이 두 사람을 달랬다. "자, 자! 지금 서로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오. 비록 마녀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직도 기회는 있소이다. 이제 본 문에서 증원군이 오고 매 장문을 도울 여러 고수들이 온다면 저들을 잡는 건 시간 문제에 불과하오." 위지광은 매천악과는 달리 여전히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매천악은 이런 위지광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패월도법으로는 낮에 위지광을 이길 수 없다. 이대로라면 난 산서무림에서조차 그의 그늘에 가려 영영 이인자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위지광을 누르고 무림최고의 고수가 되기 위해선 나머지 장한진경을 꼭 얻어야만 해.' 매천악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군이 오면 위지광은 반드시 마녀와 추수를 죽이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만다. 그 전에 진경을 얻어야만 한다.' 매천악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뇌리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지며 하나의 계략이 떠오르고 있었다. 공손월은 침통함을 금치 못했다. 황보웅에 이어 뇌가명마저 죽었으니 그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를 더욱 괴롭히는 건 뇌가명을 죽인 이가 정추수라는 점이었다. '이 대 제자들 중 추수를 가장 믿었거늘... 추수, 넌 정녕 동문의 정마저 잊어버린 것이냐?' 억센 바람에 옷자락이 흩날렸다. 그의 한숨을 따라 수염도 나풀거렸다. 이때 곁에 서 있던 곽입지가 격하게 말했다. "나의 제자들이 의정문의 고수들을 이끌고 오면 추수, 그 녀석을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네." 능천 지역에 위치한 의정문은 곽입지의 부친이 남겨 준 유산이었다. 곽입지는 현재 의정문의 문주였다. 비록 그리 크지는 않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갈웅휘가 곽입지의 말을 받았다. "그놈은 이미 인성을 잃어버린 악마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문의 존장과 동문을 죽인 그놈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곽입지와 갈웅휘의 흉중은 정추수에 대한 살기로 가득했다. 이미 그들에게 사문의 안위 따위는 뒷전이었다. 오직 정추수를 죽이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정추수에 대한 원한을 불태우는 그들 뒤로 왕옥진과 매약화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매약화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평소의 왕옥진이었다면 이런 매약화를 위로하려 했으련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엔 아직도 위지광과 겨루는 정려군의 모습이 선했다. 가녀린 몸매로도 오히려 위지광을 핍박하던 그 놀라운 무공은 왕옥진의 질투심을 더욱 자극했다. 사부님을 죽인 원수, 그러나 그보다도 궁조생의 마음을 앗아 간 연적(戀敵)이기에 왕옥진은 더욱 살심을 굳혔다. 저 멀리 강물을 넘어 폐허가 된 보운표국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궁조생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하늘을 어둠으로 뒤덮으려는 먹장구름이 더욱 가까워지며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하늘은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무구, 정말 대단하던걸. 너의 무공은 최고야, 최고!" 유검학은 봉무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봉무구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헤헤! 늙어 허리가 꼬부라질 날이 멀지 않은 늙은이를 상대로 진다면 말이 안 되지. 암, 천하의 봉무구가 그런 늙은이한테 질 리가 있겠어?" "그런데 매천악을 상대로 쓴 수법이 뭐지? 참으로 신기한 무공이던데." 유검학은 어깨의 붕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으나 봉무구의 놀라운 무공을 생각하자 이상스럽게도 쑤셔 왔다. 자신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무명의 무사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니 창피한 생각마저 드는 유검학이었다. 봉무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으스대며 말했다. "회회장력이라는 무공이지. 아마 너도 사고께 배우게 될걸?" "회회장력?" "으흠! 우리 회회교의 비전무공이야. 아무나 익힐 수 없는 무공인데 넌 곧 배우게 될 터이니,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 "나도 배울 수가 있다고?" "물론이지. 넌 사고의 하나뿐인 제자이고 사고께선 본 교의 무공에 정통하시니 너도 당연히 배우게 되겠지. 이것만 익히더라도... 흠! 흠! 천심장인가 뭔가 하는 무공을 익힌 정 숙부보다 고수가 될 수 있을걸. 그런데... 정 숙부는 어딘가 모자라는 사람 같단 말이야.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내 사부님을 고생시킬 정도의 무공이라면 대단한 건데, 어째서 아까는 맥도 추지 못하고 도망만 다닌 거지?" 봉무구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유검학의 눈길이 돌아갔다. 정추수는 일행과 동떨어져 시선을 하늘에 고정시킨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텁수룩한 수염과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이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와 입술은 조금도 미동 않고 하늘을 향해 있었다. 잿빛 하늘이 정추수의 눈동자에 투영되었다. 정추수의 마음도 음습(陰濕)하게 젖어들었다. '사매는 진정으로 날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몸을 던지면서까지 날 위하려고 했어. 그런 그녀에게 난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문의 원한도 아니고 누님도 아닌, 바로 약화 사매이다. 그녀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나일까, 아니면 사부님일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약 약화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나라면 난 죽어서는 안 되겠지. 내가 죽지 않으려면 사부님이 죽어야 한다. 그럼 그녀의 슬픔이 크겠지. 만약 약화가 사부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럼 난 그녀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걸까? 그럼 누님의 슬픔은? 내게 사부와 누님 중 누가 더 소중할까? 당연히 누님이다. 사부님은 나의 원수다. 그러나 그는 약화의 부친이다. 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난 약화를 잃고 싶지 않고 누님도 잃고 싶지 않아. 그런데 현실은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마저 주지 않고 있어.' 갑자기 그와 매약화 사이에 거대한 벽이 들어섰다. 그 벽에선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한 얼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매천악의 얼굴이었다. 또한 그것은 곽입지와 갈웅휘의 얼굴이었다. 뇌가명이었고, 배간의 슬픔에 젖은 영상이었고, 많은 죽어 간 사람들의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정추수에게 넘을 수 없는,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을 만들고 있었다. 문득 도화(桃花)처럼 하얀 꽃잎 한 조각이 정추수의 눈을 희롱하며 나풀나풀 코끝에 내려앉았다. 솜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묘한 감각이 정추수를 허상(虛想)에서 깨어나게 했다. 어느새 주위엔 눈송이들이 부끄럼 많은 여인처럼 살포시 땅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유검학과 봉무구는 정추수를 이상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이와는 달리 정추수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정려군이었다. 그녀는 보구천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매약화에 대한 정추수의 사랑이 우려할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저 아이의 정이 이토록 깊으니 여기서 계속 시간을 끌며 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마음의 병을 얻어 폐인이 될 수도 있겠어.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공야 장로님의 말씀대로 황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추수와 훗날을 위해서 좋겠어.' 정려군이 내쉬는 한숨에 눈송이가 밀려나갔다. 저 멀리 수하들을 독려하여 장막을 치는 보구천의 모습이 보였다. '추수가 구천처럼 대범하고 정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공야직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눈이다, 눈!" 그는 너울거리는 눈송이를 움켜잡으려 팔을 휘두르는 유검학과 봉무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는 유검학과 봉무구의 환호성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 주는 듯했다. 예년과는 달리 유달리 추운 날씨 탓일까? 때 이른 눈발이 복잡한 인간지사(人間之事)가 어린 대지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장막의 펄럭임에 따라 매약화의 그림자도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매약화는 부친을 따라 이곳에 왔고 원하던 대로 정추수와의 해후를 맞았다. 그러나 정작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원수와도 같은 대립뿐이었다. '모두가 추수를 죽이려 하고 있어. 곽 사숙을 위시해 모두가 원 사백부를 죽인 추수를 용서하려 하지 않으니, 아버님이 문파의 수장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정추수를 보고 싶은 마음에 동행하자는 부친의 제의를 기꺼이 따랐지만, 정추수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게 되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세상에 다시 있겠는가? 그리움과 근심으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연신 한숨만 내뱉는 매약화였다. 이때 들려 오는 나직한 기침 소리에 매약화는 급히 눈물을 훔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매천악이 장막 안으로 들어오더니 매약화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며 가볍게 혀를 찼다. "또 울고 있었던 게로구나, 쯧쯧..." 딱하게 여기는 음성에 매약화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매천악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네게 할 말이 있어 왔으니 좀 앉거라." 매약화가 맞은편에 앉자, 매천악은 살며시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이 아비는 네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이 사랑의 열병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은 내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란다. 하나 난 일파의 지존(至尊)으로서 함부로 행동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구나." 매천악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매약화는 이내 알 수 있었다. 정추수에 대한 연정 때문에 부친마저 고심하고 있음을 알자, 그녀는 자책하는 마음이 일어 억지로 감추려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야 말았다. 매천악은 매약화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도통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니 이러다간 내가 딸을 잃고야 말겠구나." 부친의 정에 매약화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해 흐르는 눈물을 따라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난 추수를 어릴 적부터 길러 왔기에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단다. 그 아이의 어질고 순박한 마음씨를 보노라면 아끼는 마음이 절로 일 정도였단다. 어떤 때에는 휘양보다 추수가 내 아들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 그러나..." 매천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길게 탄식했다. 매약화는 부친이 정추수의 얘기를 꺼내자 흐느낌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추수가 정범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 어찌 마음 편할 날이 있었겠느냐? 그 비밀을 숨겨 오면서도 언제 탄로날지 몰라 일부러 그에게 매정하게 대한 적도 많았지. 이는 모두 내가 남의 이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네가 추수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너의 결심을 만류하며 추수를 근본도 모르는 아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란다." 매천악이 청수원에서 매약화의 청을 단호히 거부했을 때 원망하는 마음이 크게 일었고 지금도 그 마음이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막상 매천악의 해명을 듣게 되자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을 듯도 했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을 생각하자 매천악의 진심도, 자신의 바람도 모두가 부질없게 여겨졌다.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무엇 하나요? 추수는 이미 사문의 공적이 되어 사숙님도, 사형들도 모두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널 찾은 거란다." "그래서 절 찾으셨다고요?" "그렇단다." "전... 아버님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문득 매천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고뇌 어린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막사 안을 서성이던 매천악은 모종의 결심이 섰는지 걸음을 우뚝 멈추며 입을 열었다. "넌 추수가 죽으면 아비의 말에 순종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겠느냐?" 의외의 질문에 매약화는 화들짝 놀라며 도리질했다. "그럴 수 없어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럼 내가 추수나 마녀에게 죽어도 원한을 잊고 추수에게 시집가서 살 수 있겠느냐?"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버님께선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매천악은 매약화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넌 오늘밤 추수와 더불어 이곳에서 멀리 달아나도록 해라." 일순 매약화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매천악이 이런 결정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매약화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며 물었다. "아버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물론이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매약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금 매천악이 한 말은 장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매약화의 마음을 훤하게 알기라도 하는 듯 매천악이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난 지금도 갈등을 하고 있단다. 하나 문중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자식에 대한 정에 비하겠느냐? 네가 상심하여 죽는 꼴을 볼 자신이 없어 내린 결정이니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추수와 멀리 떠나도록 해라. 아무도 모를 곳으로 말이다." 스스로도 괴로운 듯 매천악은 소매를 떨치며 뒤돌아섰다. 매천악의 진심을 알게 되자 매약화는 부친의 깊은 정에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버님!" 매천악의 등을 껴안는 매약화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매천악은 매약화의 손을 다독거리며 계속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참 동안을 울던 매약화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추수를 만나죠? 지금 서로를 죽이려 대치하고 있으니 그를 만날 수가 없잖아요?" 매천악이 싱긋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추수에게 보낼 편지를 쓰면 조생을 통해 전달할 수 있을 게다." "대사형에게 편지를...?" "그래. 조생은 마녀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으니 결코 해침을 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던 눈발은 어느덧 그쳐 가고 있었다. 먹장구름이 채 걷히지 않은 탓에 유시(酉時)가 되자 사위는 벌써 어두워졌다. 정추수를 성토하는 곽입지와 갈웅휘의 음성을 뒤로하고 궁조생은 장막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마교의 고수들을 증오했고, 또한 정추수를 철천지원수인 양 비난하고 있었다. '신검문의 고수들과 동철비는 그렇다고 쳐도 이젠 동문들과 사숙들도 추수를 기필코 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보운표국을 감시하며 자신만만해 하던 위지광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제 뇌가보와 광운보, 그리고 신검문을 돕는 여러 고수들이 도착하면 정 소저와 추수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아아!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정 소저와 추수가 이곳을 빠져 나가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어,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매천악이 궁조생의 막사에 들어온 건 바로 이때였다. "사부님!" 궁조생이 깜짝 놀라며 일어서자 매천악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나직이 말했다. "너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날 따라오너라." 매천악은 일행이 모여 있는 장막들을 스쳐 지나며 일 마장 가량 걸어갔다. 매천악은 커다란 측백나무가 있는 바위 아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바위와 나무엔 흰 눈이 곱다시 쌓여 있었다. 때 이른 눈 때문인지 나뭇가지엔 미처 떨어지지 못한 단풍들이 눈을 털어 내려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매천악은 품속에서 한 장의 붉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이 편지를 추수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추수에게... 말입니까?" 엉겁결에 봉투를 받으면서도 궁조생은 매천악의 의도를 몰라 되물었다. "음! 넌 마녀와 정분이 깊으니 그녀가 널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궁조생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대치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적진으로 가라는 매천악의 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서신이기에...?" 매천악이 탄식하며 말했다. "네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건 약화가 추수에게 보내는 서신이란다." "...!" 매천악의 대답을 듣는 순간 궁조생은 숨이 턱 막혀 옴을 느꼈다. 봉투를 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궁조생의 이런 모습에 매천악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궁조생의 입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뇌리엔 매천악의 음흉한 속셈이 그려지고 있었다. "저, 전..." "왜 말을 더듬는 것이냐?" "저, 전...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할 수 없다고? 네가 나의 말을 거역하다니...!" 매천악이 화를 내자 궁조생은 무릎을 꿇으며 결연히 소리쳤다. "어찌 계책으로 추수를 유인하려 하십니까, 사부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추수에게 약화의 서신을 전하라 하심은 추수를 유인하여 사로잡으려는 계책이 아니십니까? 아무리 상황이 불길하다고는 하나, 한때나마 추수는 사부님의 제자였는데 어찌 이리도 매정한 수를 쓰십니까?" 애절하게 소리치는 궁조생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는 정추수를 가여워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 동안 죽도록 믿고 따라 왔던 매천악에 대한 실망과, 그럼에도 그를 사부로 따라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슬퍼 흘리는 눈물이었다. 매천악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쳤다. 그러나 이내 신색을 회복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가 왜 날 의심하며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이 편지를 전하라 함은 약화와 추수를 이 싸움터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궁조생은 그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매천악이 냉겸을 죽이던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사숙도 죽였는데 제자인들 죽이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궁조생은 사부에 대한 두려움마저 일어 자신의 신세가 더욱 처량하게 여겨졌다. 궁조생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반응이 없자 매천악은 크게 탄식했다. "네가 나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 나라고 어찌 추수를 아끼는 마음이 없었겠느냐? 그리고 약화를 아끼는 마음은 더욱 크다." 매천악은 들썩이고 있는 궁조생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침울해졌다. "난 아비 된 자로서 약화가 마음 고생을 하다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생각해 보아라. 추수를 사랑하는 약화의 마음이 간절하니 맺어지지 못하면 필히 죽고 말 것이다. 아니, 이번 싸움에서 내가 살지 마녀가 살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냐? 우리가 진다면 약화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추수가 살지 못할 것이니, 약화 또한 죽고 말 것이다. 내 아비 된 자로서 어찌 딸의 뻔한 죽음을 방관만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난 추수와 약화를 이곳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여 두 사람만은 행복한 장래를 맞이하게 하려는 것이야." 정추수를 사랑하는 매약화의 마음은 궁조생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매천악이나 정추수 둘 중 하나는 기필코 죽게 될 작금의 상황에선 매약화도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 사부님의 말씀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길이 없구나.' 궁조생은 고개를 들어 매천악을 바라보았다. 매천악의 고뇌하는 모습에 궁조생의 마음이 흔들렸다. "진정... 약화와 추수를 위하여 그런 결심을 하신 겁니까?" 궁조생이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는 듯하자 매천악은 씁쓸히 웃었다. "내가 어쩌다가 네게서 신임을 잃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이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뒤편에서 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매약화였다. 그녀는 궁조생의 팔을 부여잡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대사형! 아버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저 또한 추수와 만나서 얘기하고픈 생각이 간절합니다. 제발 저의 편지를 전달하여 추수와 연분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세요." 매약화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궁조생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궁조생으로 하여금 내키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난 또다시 한 가닥 가능성을 믿고서 사부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구나. 추수의 목숨을 담보로 한 채.' 궁조생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하며 몸을 일으켰다. "사부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추수에게로 가서 편지를 전하고 약화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형, 부탁드릴게요. 제발 꼭..." 매약화는 어느새 궁조생의 두 손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궁조생의 손등을 때려 마음을 더욱 구슬프게 했다. 궁조생은 애써 매약화를 외면하며 매천악에게 물었다. "하나, 제가 이 편지를 추수에게 전달하자면 마교 고수들의 이목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일부러 추수를 불러 전달하고자 하면 그들이 의심할 것이니..." 매천악이 궁조생의 말을 잘랐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넌 그곳에 가거든 공야직과 마녀에게 이쪽의 상황을 솔직히 말하면서 대책을 세우라 일러라. 그리하면 그들은 널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추수에게 서신을 전할 기회는 네가 굳이 만들려 하지 않아도 된다. 기회는 절로 올 것이니." "무슨 뜻이온지요?" "구태여 알 필요는 없다. 서신을 전할 때 약속 장소를 알려 주도록 해라. 보운표국 북쪽으로 이십여 리를 가면 폐찰(廢刹)이 있는데, 그곳으로 자정까지 나오도록 일러라." 궁조생은 매천악이 흉중에 품고 있는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서신을 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차마 매천악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궁조생은 허리를 숙인 채 뒤돌아섰다. 그의 등뒤로 매천악의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오는 즉시 내 처소로 오너라." 눈은 그쳤지만 매서운 바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눈이 쏟아 내는 비명 소리가 사박사박 따라왔다. 눈물을 글썽이던 매약화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궁조생에게 번민을 가중시켰다. '사부님의 심기는 너무 깊어서 나로서는 감히 측량할 길이 없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이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가 없으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점차 흐트러지는 구름 사이로 별들이 언뜻언뜻 빛을 발했다. 그 별빛이 눈 속으로 들어와 정려군과 정추수의 모습을 그려 내었다. 자신이 전해 줄 편지가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최명부(催命符)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사부의 명을 쫓아가는 자신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다. 야속하기만 한 것이 시간의 흐름이런가? 더디게 가면 좋으련만 저 멀리 보이는 보운표국으로 가는 동안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흐르는지, 원망스런 한숨을 토하며 궁조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싸늘한 비웃음을 던지는 달이 구름을 가르고 있었다. 달과 별빛이 격전지의 흔적을 흐릿하게나마 비쳐 주었다. 궁조생이 보운표국에 이르자 말라 비틀어진 풀숲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와 궁조생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누구냐?" 두 자루의 도신(刀身)이 번득이더니 어느새 궁조생을 겨누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구분될 만큼 알록달록한 옷은 그들이 장춘곡의 무사임을 알려 주었다. 궁조생은 가볍게 양손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밝혔다. "난 궁조생이라 하오. 귀교의 정려군 소저를 만나러 왔소이다."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도를 거두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들이 풀숲을 헤치며 사라지자 궁조생은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주위를 에워싸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일 각의 시간이 흐르자 궁조생에게 도를 겨누었던 두 사람 대신 정려군과 정추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서 궁조생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라 두 사람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정겨운 손길을 내미는 정추수의 따듯한 정이 궁조생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했다. "사형, 어떻게 여길 오셨습니까?" "너와 정 소저에게 할 말이 있어 왔단다." 궁조생은 정추수의 손에 이끌려 낮에 격전을 치렀던 그 공터로 갔다. 풀숲이 베어진 공터 주위로 장막들이 들어서 있었고, 여기저기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훨훨 춤을 추는 모닥불 너머로 공야직이 궁조생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매천악의 제자, 궁조생이냐?" "그렇습니다, 사숙님." 궁조생은 격전 중에 곽입지와 공손월이 한 말을 기억하고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난 이미 사문을 떠나 회회교에 몸을 의탁했다. 수십 년 전부터 태행검파와는 연을 끊고 살아 왔으니 날 사숙이라 부를 필요는 없다." 쌀쌀하기 그지없는 공야직의 어투였지만 궁조생은 개의치 않았다. 근자에 들어 궁조생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심지어 냉겸이 매천악을 비난하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매천악이 냉겸을 죽이는 장면까지 목도한 터라 공야직의 태도엔 사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었다. 과연 그러했다. 궁조생이 신검문과 태행검파를 도울 세력이 누구누구며 언제 이곳에 당도할 것이지를 고한 후, 공야직이 회상하듯 들려 준 과거지사는 궁조생의 마음 깊은 곳까지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 궁조생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원가량을 죽인 범인이 정추수라 알고 있는 그에게 반곡에서의 일은 그로 하여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백지 상태로 만들고 말았다. 궁조생은 제멋대로 경련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억만겁은 족히 될 만한 죄악이 그의 전신을 꼼짝할 수 없는 굴레로 얽어 놓았다. 울분을 모두 토하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사부 매천악을 저주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겐 사부를 욕하거나 배반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맹세해 온 일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많은 성현들과 철학이 만든 사상과 관념은 사부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를 그에게 씌워 놓았다. 차라리 자신이 인성(人性)을 잃어버린 악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면 매천악과 정려군, 그리고 정추수 사이에서 이토록 번민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까?" 궁조생의 이 질문은 공야직 또한 지난 세월을 지내면서 고심해 온 것이었기에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건... 욕심을 떨치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겠지. 매천악은 너무나 그릇된 욕망을 가슴에 품었어. 그것이 그로 하여금 사문과 사부를 배신하고 동문을 배신하고 제자를 이용하도록 종용한 거야."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면 공야직과 정려군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문의 원한을 갚는 일조차도 인습(人習)이 만든 악업(惡業)이 아니겠는가? 문득 매천악이 두려워졌다. 이전에는 그를 사부로서 두려워했지만, 이젠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을 효웅(梟雄)으로서 두려워하게 되었다. 품안에 있는 매약화의 서신이 천근 무게처럼 압박해 왔다. '이 서신에는 사부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계략이 숨어 있을 것이다. 정 소저의 목숨을 앗아 가고 추수와 약화의 사랑을 가차없이 앗아 갈 무서운 계략이 담겨 있을 것이다.' 매천악의 지엄한 얼굴이 다가왔다. 매약화의 눈물 어린 호소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나, 만에 하나라도 추수와 약화가 맺어질 수 있다면? 나와 정 소저는 맺어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반드시 맺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부의 흉계와 매약화의 사랑 속에서 궁조생은 중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불타는 나무껍질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톡톡 튀어오르는 소리에 궁조생은 정신을 수습하며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공야직은 연민인지 질책인지 모를 눈빛으로, 정려군은 연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리고 정추수는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며 궁조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제 제가 드릴 말씀은 끝났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과거가 어떠했든 전 더 이상 서로를 죽이려 피를 흘리는 참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부디 자중하시어 속히 이 자리를 피하시길 바랍니다." 궁조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리라 결심한 그였다. '난 지금 사부를 배신하는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차마 서신을 추수에게 전할 수가 없구나.' "궁 대협!" 등을 돌려 가려는 그를 정려군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뭔가 애타는 듯한 그녀의 몸짓이 궁조생의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만 같은 모습.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지그시 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제가 황산으로 돌아가면 언제 당신을 만날 수 있을는지 기약할 수 없군요. 부디 보중하시길..."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의 인사였다. 그러나 궁조생에게는 천금보다도 값진 그녀의 마음이 비쳐졌다. '내가 그녀를 이십 년 동안 그리워한 대가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억제된 인사말을 했듯이 궁조생도 웃음을 절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되리라고 궁조생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라기보단 간절한 희망이었다. 그것만이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을 끝으로 다시는 그녀를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정추수와의 형제지정도 잊으리라 다짐하면서 궁조생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나 정추수는 그런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사형,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궁조생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기회는 절로 올 것이니. 매천악이 남긴 말이 폐부를 으스스하게 적셨다. 궁조생이 처음 왔을 때부터 정추수가 내비치던 애처로운 갈망이 더욱 짙어졌음을 궁조생은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었던가? 사부님은 이런 추수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인가?' 전신을 엄습하는 한기에 궁조생이 몸을 흠칫 떨 때, 정추수는 정려군에게 사정조로 말하고 있었다. "절 이십 년 동안 보살펴 주신 사형이십니다. 이제 단둘이서 마지막 작별의 정이라도 나눌까 합니다." 정려군이 고개를 끄덕여 응낙하자 정추수는 종종걸음으로 궁조생의 손을 끌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정려군이 슬며시 그 뒤를 따르려 했다. "려군, 어디로 가려는 건가?" 공야직의 물음에 정려군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추수는 지금 애정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궁 대협과 단둘이 자리를 하려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난 그 아이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겠어요. 원수의 딸에게 마음을 빼앗겨 실의에 빠진 삶을 살게 된다면, 전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셈이 되지요." "그러는 넌 궁조생을 사랑하지 않느냐?" "..." 뼈아픈 일침에 정려군은 일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그래도 전 제 몸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려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갔다. 비록 자취만 남은 표국이라고 하나 바람과 외기(外氣)를 막는 위용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탓일까? 공터에선 비교적 잔잔하던 바람이 표국 밖으로 나서자 거세게 밀려왔다. 잠복하고 있는 고수들을 뒤로 멀리했을 즈음 정추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형, 약화는 아픈 곳 없이 잘 있습니까?" "..." 묵묵히 서 있는 궁조생. 그 위로 초췌한 매약화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약화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는 없을까요?" 궁조생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살갗을 엘 듯한 바람이건만 오히려 열기가 얼굴을 감싸는 건, 매천악에 대한 불신과 정추수와 매약화의 애틋한 사랑 사이에서 맴도는 갈등 때문이었다. 여전히 대답없는 궁조생을 보며 정추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 밤이 가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이제 제가 누님을 따라 산서무림을 떠나면 언제나 약화를 만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 못 보게 될지도 모르죠.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단 한 번만..." 정추수의 고민이 제 것인 양 궁조생은 마음이 아려 왔다. 처음으로 사부의 명을 거역하려 모질게 마음을 먹었건만, 정추수는 그러한 결심을 막는 걸림돌이 되어 궁조생을 세차게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궁조생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사부님은... 사부님은 정녕 무서운 분이시지."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냐!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분이시다, 사부님은..." 궁조생이 의미하는 바를 정추수는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관심은 오직 매약화에게 있을 따름이었고, 사부의 무서움이란 떨어지는 낙엽이 일으키는 진동보다도 미미한 것이었다. '매약화를 만날 수만 있다면'이라는 정추수의 갈망은 궁조생에게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니, 그러하기에 곤혹스러워지는 궁조생이었다. '서신을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궁조생에게 있어 사부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너무나 커다란 짐을 지워 주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정추수의 바람을 뿌리치고 돌아서려 했는데, 결국 정추수는 그런 궁조생을 가로막고야 말았다. '사부는 여기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친들 매천악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으리란 절망감이 어둠처럼 주위를 휘감았다. 부디 한 가닥 희망이 들어맞기를 바라며 궁조생은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미약한 별빛 아래에서도 정추수는 그것이 매약화의 마음만큼이나 붉은 봉투라는 걸 이내 알아보았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무엇입니까, 그건...?" 궁조생은 내키지 않는 듯 봉투를 잠시 쥐었다가 정추수에게 내밀었다. 정추수는 머뭇머뭇 주저하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나에게 서신을 보낼 사람이라면 약화밖에 더 있겠는가?' "난... 이 서신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긴장되어 침을 삼키는 정추수의 귓전으로 궁조생의 말이 흘러들었다. "약화가 제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던가요?" 고개를 가로젓는 궁조생. 그의 모습에서 정추수는 까닭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럼 이건 누구의 서신입니까?" "약화 사매의 서신이긴 하되 사부님께서 네게 전하라고 하셨지." "사부님께서!" 궁조생의 대답을 듣는 순간, 순간적으로 엄습하는 무서움에 정추수는 전신을 떨었다. 매천악이 냉겸을 죽였을 때 느꼈던 분노와 원한은 이 짧은 시간의 흐름 동안 만에 사그라져 버렸고, 사부를 죽여야만 한다는 운명과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자행할 사람이 바로 매천악이라는 현실이 그에게 떨칠 수 없는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궁조생이 매천악을 언급하자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두려움이 자신도 모르게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추수는 흔들리는 자신을 진정시키려 이를 악물었다. "사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직도 난 네게 사부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터져 나오는 탄식을 떨치려 두어 걸음을 나서는 궁조생을 따르며 정추수가 채근했다. "사형,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동안 묵묵히 정추수를 응시하던 궁조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북쪽 이십여 리 밖에 있는 폐찰(廢刹)로 자정까지 나오라고 말씀하시더구나. 그쪽으로 약화를 보낼 터이니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셨군요. 그러셨군요..." 석상처럼 망연히 서서 같은 말을 반복하던 정추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부님께선 절 사지로 끌어 내려 하시는 거로군요." "추수!" "사부님께선 저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약화가 부른다면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계신 겁니다." 정추수가 흘리는 눈물은 궁조생의 눈물을 불렀다. 궁조생은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정추수의 손을 부여잡았다. "난 이제껏 널 친동생처럼 사랑해 왔고, 네 누이 또한 내 마음속에 자리한 연인이었다. 그러나 난 사부님에게서 은혜를 입어 살아 온 몸이라 사부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구나. 난 사부님을 믿고 싶다. 처음으로 사부님의 명을 거역하고 네게 사부님의 뜻을 전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난 사부님을 믿고 싶었단 말이다..." 궁조생의 말은 흐느낌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아라. 사부님께서 아무리 야욕에 눈이 멀었다고 하나 설마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려 하시겠느냐? 약화는 지금 너로 인해 얻은 마음의 병으로 죽으려 하고 있다. 네가 죽으면 약화도 필히 죽고 말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부님께서 설마 딸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널 해하고자 하시겠느냐? 또한 사부님께서 너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더라면 훗날 화근이 될 것임을 알고도 어찌 이십 년 동안이나 길러 주셨겠느냐? 이는 필히 너를 사무치게 사랑하는 약화를 위하는 마음에서 행하시는 것이라 믿고 싶구나." 하지만 궁조생 스스로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추수도 잘 알고 있었다. 궁조생이 매천악을 믿는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변명하면 할수록 불신에 대한 그의 괴로움도 커져 가고 있다는 것을. 더구나 자신 때문에 매약화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약화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정추수는 오열하고 말았다. "전 부모님의 얼굴을 모를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떻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그에 반해 지금 약화가 날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으니, 어찌 부모의 복수가 약화를 사랑하는 내 마음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전 가문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숙조님을 죽인 사부님이 밉기는 하지만, 제가 사부님을 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 한 분뿐인 누님의 간절한 염원 때문입니다." '추수는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아이라는 걸 잊고 있었구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분명한 만큼 정이 많아 결국엔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걸, 한번 준 정은 거둘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어. 그리고 사부님은 이런 추수의 성정(性情)을 이용한 것이고.' 궁조생은 숨이 막혔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궁조생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힘은...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요, 매천악의 강렬한 욕망이었다. 한 사람의 야망과 매정한 수단으로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자신의 눈엔 아직도 어리기만 한, 그러면서도 인정과 사랑, 가문의 원한이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는 사제의 고뇌가 제 것인 양 느껴져 궁조생 또한 오열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지만 누님에 대한 사랑이나 가문의 도의(道義)보단 사매의 사랑이 제겐 더욱 소중합니다. 사매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그녀를 위해서라면 저의 목숨 따위야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사부님의 계략이라 할지라도 사매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제가 사부님의 손에 죽게 된다 하더라도 사매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추수!"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바람이 울었고, 이에 몸을 맡긴 앙상한 나뭇가지가 따라서 몸부림쳤다. 한식경 동안 마음속의 앙금을 씻어 내리던 눈물을 훔치며 정추수가 말했다. "사형, 자시에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지금 사형과 같이 가면 의심받을 것이니 먼저 가십시오. 반드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나 또한 사부님께 돌아가면 간청을 드리겠다. 너와 약화의 사랑을 이용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궁조생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두어 걸음을 가다가 되돌아보곤 했다. 정추수는 하얀 눈에 가려 희미한 점이 되어 가는 궁조생을 망연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약화! 그대가 날 사랑하고 내가 그대를 사랑하니, 이 세상에서 더 얻을 바가 무엇이겠어?" 정추수는 붉은 봉투를 꼬옥 쥐어 품에 안으며 정려군이 기다리고 있을 공터를 향해 걸어갔다. 정추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직후, 궁조생이 멀어져 간 발자국과 정추수가 남긴 발자국이 어우러진 곳에 나직한 한숨과 함께 가냘픈 신형이 아른거렸다. 정려군이었다. "어리석은 것. 어찌하여 원수의 딸을 잊지 못해 목숨을 저버리려 한단 말이냐." 한참을 괴로워하며 서성이던 그녀는 문득 싸늘한 광망을 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매천악, 네가 드디어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마는구나."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4 장 지나온 자취를..... 제 24 장 지나온 자취를 어찌 가릴 수 있으리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이라 했던가? 하지만 새의 자취가 험한 산에서만 끊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바람이 모든 생명을 날려 버린 탓일까? 생명의 움직임은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숨어 버렸다. 고요하고 맑기만 한 하늘과는 달리 땅에선 모닥불의 불꽃이 바람의 재촉에 난마(亂麻)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찢어질 듯 펄럭이는 장막 안에선 위지광과 매천악, 그리고 동철비가 술병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오늘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위지광은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셔 버리고는 내려놓았다. "마녀는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오." 위지광을 따라 동철비도 잔을 들었다. 그의 손은 긴장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저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큰 재앙이 되어 나타날 것이오." "하하하핫! 너무 소심하시오, 동 형은!" 위지광은 어깨를 흔들며 대소했다. "이미 세는 우리에게 기울었소이다. 우리를 응원하는 고수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으니, 저들은 결코 여길 벗어나지 못하오. 새벽 동이 틀 때까지만 저들을 묶어 놓을 수 있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오." 동철비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술을 들이켰다. 위지광의 자신 넘치는 언행은 동철비에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산서무림을 지배해 온 패자다운 면모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기백은 매천악의 웅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매천악은 시종일관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위지광의 일거일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위지광이 패자다운 호기를 보일수록 그를 누르고자 하는 매천악의 욕망도 비례하여 커져 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정려군과 정추수 일행은 자신들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단 그들의 종적이 드러난 이상 그들은 산서무림에서 매천악의 시야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위지광 또한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저토록 자신하는 것이다. 그의 뜻대로 된다면 난 그를 영영 이기지 못하게 될 게야. 그 전에 추수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 이후라면 마녀의 무공과 심계가 아무리 대단한들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그는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원가량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만 아니었다면 매천악은 벌써 정추수를 손에 쥐고 정려군에게서 원하는 물건을 얻어 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때 추수를 나가장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생각할수록 원가량이 더욱 괘씸해졌다. '흥! 주제넘게 욕심을 부렸으니 그 꼴이 될 수밖에.' 매천악은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이 남아 있으니.' 이를 악무는 순간, 빈 술잔이 매천악의 악력을 이기지 못해 산산조각 나 버렸다. 위지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매 장문?" 공야직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신검문주가 매천악과 같이 나타난다면 우리의 뜻을 이루기 힘들 것이야." "궁 대협의 말에 의하면 우린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해요. 그들이 힘을 합해 우리를 칠 의도라면 굳이 이런 계책을 쓸 필요가 없겠죠." 확신에 찬 정려군에게 공야직은 묘한 눈빛을 주고 있었다. "려군, 넌 궁조생을 굳게 믿고 있구나." "장로님께선 궁 대협을 의심하십니까?" "지금은 어렵고도 미묘한 상황이다. 그 누구의 말이든 일단 의심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군." "..." 궁조생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정려군을 우려해서 한 말임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기에 속이 뜨끔하여 일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보구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장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매천악은 흉계가 깊은 자라 어떤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습니다. 섣불리 판단하여 행동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정추수로부터 매천악이 저질러 온 만행을 들은 터라 그의 음험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양심을 버린 자라면 그 어떤 흉계도 서슴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사부와 사숙들을 죽인 매천악이야말로 계략의 싸움에 관한 한 진정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이 점이 공야직과 보구천으로 하여금 정려군의 계책을 꺼리게 했다. 정려군은 이런 두 사람의 심려는 아랑곳 않고 싱긋 웃었다. "장로님께서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요. 하나 매천악에겐 결정적인 약점이 있답니다." 정려군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두 사람을 차례로 응시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약점이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이지요." 공야직과 보구천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욕심이라고?" "그래요. 욕심이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요. 매천악이 우리 가문을 멸한 이유는 진경을 얻기 위해서였어요. 아마 이번에도 매천악은 추수를 사로잡아 절 협박하여 진경을 얻을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요. 그는 욕심이 많아 진경을 위지광과 나누려 하진 않을 터이니 그와 측근만이 나타날 거예요." "과연 그럴까?" 공야직의 우려 섞인 물음에 정려군은 단호히 응대했다. "물론이에요. 따라서 나와 몇몇 고수만으도 충분합니다. 장로님께선 일단의 고수들을 이끌고 매천악과 신검문주와의 사이를 차단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위지광 또한 교활한 인물이라 매천악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나타날지 모르니,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요. 그럴 경우 장로님께선 그들을 막아 시간을 벌어 주시면 돼요. 매천악만 죽는다면 신검문주 혼자서는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요." "하나, 만약..." 공야직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망설여지는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만약 매천악과 위지광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일행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험에 처해질 터였다. "지금 본 교는 한 명의 고수가 아쉬운 때야. 교주께선 많은 고수들이 이곳에 뼈를 묻는 것을 원하시지 않아." 정려군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부모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물러선다면 언제 다시 복수를 기약할 수 있단 말인가? 정려군은 시선을 코끝에 고정한 채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추수를 포기해서라도 물러나도록 하겠어요." 이 대답에 공야직과 보구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고는 정녕 무서운 분이시다.' 보구천은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정려군의 속내를 알 수 있으랴. 정려군은 지금 이 순간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만약 나의 예측이 틀린다면, 추수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추수는 결코 도망치려 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가문의 복수가 중요하다고 하나 내 어찌 추수를 두 번씩이나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 되면 나 또한 살지 않으리라.' 공야직은 정려군이 정추수를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 위험한 계책이야. 자칫하면 추수뿐만 아니라 여러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정려군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공야직은 내키지 않는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휘양, 넌 내 처소에 남아 있다가 위지 문주가 날 찾거든 적의 동향을 살피러 갔다고 전하거라." 허리의 검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매천악에게서 매휘양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버님?" 매천악은 아들을 돌아보았다. "자시가 지나면 모든 게 나의 뜻대로 될 것이다." 뜻 모를 대답에 눈을 멀뚱거리는 매휘양에게 매천악은 신비로운 미소를 보냈다. "위지 문주와 동 대협이 눈치채지 않도록 몰래 곽 사숙과 웅휘를 불러오너라."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홍진(紅塵)을 경멸하는 일그러진 달 또한 구름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궁조생이 고개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허연 입김이 공기 중에 궤적을 남겼다. '어쩌면...' 매천악이 뒤를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걸음걸음마다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뽀드득거리는 발걸음 소리마다 가슴을 졸인 지도 반 시진이 넘었다. 서두르는 궁조생을 따르느라 매약화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마는 매약화. "대사형, 아직 시간이 이른데 어찌 이리도 서두르시나요?" 견디다 못해 투정처럼 내뱉는 매약화의 말에 궁조생은 대답 않고 손을 끌어 일으켰다. 멀지 않은 곳에 사찰이 있었다. '추수는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다.' 정추수와 매약화는 어떻게 하든 빠른 시간에 만나 지체 않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궁조생은 생각했다. 매천악이 반드시 사찰 주위에 잠복하여 정추수를 노릴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출발할 때 매천악은 일행이 머무는 곳에 있었다. 그는 신검문주와 동철비, 무당사협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다. '사부님은 신검문주 몰래 이 일을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과 매약화가 주위의 이목을 속이고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매천악이 그토록 조심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마저도 궁조생을 안심시키기 위한 매천악의 깊은 술수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궁조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설명 않고 무작정 재촉하는 궁조생에게 두어 번 더 투덜거리던 매약화는 사찰이 지척에 이르자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녀의 눈엔 긴장과 기대로 인한 설렘이 어리기 시작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검은 발자국이 사찰 입구의 드문드문 쌓인 눈 위로 늘어서 있었다. 그 발자국은 거센 바람에도 미처 지워지지 않고 보운표국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매약화를 만나기 위해 온, 정추수가 남긴 자취가 분명했다. 매약화도 이를 알아본 듯 벌써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사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거라." 궁조생의 손길에 떠밀리며 매약화가 물었다. "대사형은?" "난 주위를 살핀 후 곧 들어가겠다." 매약화는 다 허물어져 가는 사찰 입구로 들어섰고, 궁조생은 신속하게 신형을 움직이며 주위를 돌았다. 자신과 매약화, 그리고 정추수의 것이라 짐작되는 발자국 외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궁조생은 나직이 안도하며 사찰의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예전엔 대웅보전(大雄寶殿)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건물 앞에 포옹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보고 싶었노라고 속삭이며 볼을 비비는 두 사람. 하나 궁조생은 그들의 해후를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추수! 사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이곳을 뜨도록 하자." 비록 격정을 이기지 못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궁조생의 목소리를 의식하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졌다. 달아오르는 볼을 감싸며 매약화가 물었다. "대사형, 이곳엔 아무도 없는데 이토록 서두를 이유가 있나요?" "이곳은 의정문의 무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을 것이야. 그들의 눈에 띄면..." 그렇게 되면 그들의 행적이 매천악에게 지체없이 보고될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매천악의 손아귀에서 두 사람을 벗어나게 하고픈 궁조생으로선 촌음(寸陰)의 시간이라도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약화는 궁조생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정추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약화의 손을 꼭 쥐었다. "사매, 사형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자." 매약화는 자세한 영문을 모르고 다시 이끌려 가야만 했다. 세 사람은 사찰을 벗어나 북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궁조생은 자신이 도착한 직후 멀리 가지만 앙상한 나무 위에서 사찰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자, 그는 바로 매천악이었다. 사찰 주위 일 마장 이상의 거리에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궁조생 일행을 보며 매천악은 땅으로 내려섰다. 동시에 좌우로 두 명이 떨어져 내렸다. 곽입지와 갈웅휘였다. 매천악은 궁조생 일행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사, 오 리 내엔 마교의 인물들이 없는 모양이다. 추수는 혼자 온 게 틀림없어."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의 원한을 되새기며 원독의 광망을 내뿜는 갈웅휘가 증오를 표출하는 소리였다. 매천악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다짐을 해두었다. "감정에 사로잡혀 추수를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녀가 살아 있는 한 너의 원한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알겠느냐?" "제가 어찌 장문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마녀가 죽고 나면 추수는 내 손으로 친히 죽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물론이다! 이제 방해될 자가 없으니 추수를 따라잡도록 하자." 매천악은 거친 숨을 내쉬는 갈웅휘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매천악 일행이 자리를 떠난 후, 멀리서 서서히 움직이는 세 개의 인형이 또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매천악이 사라져 간 방향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휘양! 장문께선 어디로 가신 거지?" 두 번째 똑같은 질문이었다. 항상 부드럽게 제자를 대하던 공손월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할 나위 없는 위압감을 매휘양에게 주고 있었다. 매휘양은 두 번째 똑같은 대답을 했다. "적의 동향을 살피러 가셨습니다." "언제 가셨지?" "한 시진쯤 되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려 나왔다. "내게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고 가셨단 말이냐? 적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문께서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더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공손월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했다. "그럼 넌 어째서 한 시진이 지나도록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네가 날 우롱하려는 게냐?" "그건..." 공손월의 기세에 눌려 매휘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공손월의 추상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누구와 같이 갔느냐?" "과, 곽 사숙님과 갈 사형이 동행했습니다." "약화는? 그리고 조생은 왜 자리에 없는 것이지?" 계속되는 질문에 매휘양은 점점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건..." "어서 말하라!" "약화는 궁 사형을 따라갔습니다." "그 두 사람은 어디로 갔느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런 바보 같은 대답이 어디 있느냐?" 매약화와 궁조생이 어디로 갔는지, 매천악이 왜 갑작스럽게 곽입지와 갈웅휘를 대동하고 출발했는지, 매휘양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그저 매천악이 시키는 대로 했고,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장문께선 무슨 생각으로 자리를 비웠느냔 말이야! 무슨 생각으로..." 애꿎은 매휘양에게 화풀이하던 공손월은 문득 기이한 생각이 들어 높아진 목소리를 자제하며 물었다. "장문께선 어디로 가셨느냐?" 매휘양은 모든 동문들에게 오만했지만, 그것은 장문의 지위에 있는 부친의 후광을 업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처럼 사숙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자 매휘양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전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부친의 의도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아는 바를 그대로 대답했다. "강을 건너가신 것 같습니다." "강을 건넜다고?" 자신만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을 몰래 대동하여 떠났다는 사실이 공손월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약화와 조생이 어디론가 떠났단 말인가? 그들이 왜? 그들이 몰래 이곳을 벗어날 이유가 무엇인가?' 매천악이 냉겸을 죽인 일이 있고 나서부터 공손월은 매천악을 믿지 않았다. 모두를 놀라게 한 그 괴이한 검법과, 공야직을 수십 년 만에 대면한 순간에 단 한 마디의 말조차 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던 매천악의 석연찮은 행위가 끊임없이 공손월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문득, 냉겸이 죽기 전 매천악을 꾸짖던 말을 상기했다. -네가 정씨 집안의 장한진경을 노려 그런 혈겁을 조장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어쩌면 냉 사숙의 말이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부님과 동문들을 죽인 이가 장문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다. 갑자기 중풍이라도 맞은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진정 장문이 진경을 얻고자 정씨 일족을 멸했다면, 그리고 그 괴이한 검법이 정녕 도마가 남긴 무공이라면, 그는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을 인면수심임에 틀림없다. 곽 사형과 웅휘는 추수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품고 있지. 그리고 추수는 약화를 사랑하고 있다. 어쩌면...!' 매천악이 정추수를 위험에 빠뜨릴 음모를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때 생각에 잠긴 공손월의 어깨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공손 대협, 무슨 일로 그리 언성을 높이셨소?" 시원한 용모의 이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는 순간, 지금 즉시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손월의 뇌리를 스쳤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비록 추수가 자신의 제자를 죽인 반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매천악의 손에 희생되게 할 수는 없다고 공손월은 생각했다. "이 대협, 그대는 날 좀 도와 주셔야겠소이다." 이를 굳게 문 공손월의 턱에 선명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장문이 이 불행한 사태를 주도한 원흉이라면 응당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공손월은 뇌가명의 목숨을 앗아 간 정추수를 아직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님!" "사부님!" 이슥한 숲이 둘러싼 공터에 선 세 사람은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뛰느라 격렬하게 기복하던 가슴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매천악 뒤로 곽입지와 갈웅휘가 검을 빼어 들고 있었다. 한 순간 칠흑 같은 정적이 이들 사이에 자리했다. '결국은 사부의 계략이었군. 혹여 사부님께서 마음을 돌리시길 기대했는데...' 물론 그 가능성이야 만분지 일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대면하게 되니 정추수는 다시 한 번 찾아드는 배반감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매약화와 함께 할 미래도 살기 띤 검에 부서지는 달빛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궁조생의 심정 또한 정추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제자인 나는 사부님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군. 그저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에 불과했어.' 무엇보다도 다시는 사부를 믿지 못하게 되리란 사실이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궁조생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사부님, 어찌하여 이곳에서 저희를 가로막으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담겨진 격정은 누구라도 쉽게 느낄 수 있을 만큼 파동치고 있었다. 매천악이 초연하게 대답했다. "추수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다." 매약화가 정추수를 몸으로 가리며 나섰다. "아버님께선 저와 추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매약화는 자신과 추수를 위하겠노라고 한 매천악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정추수에게 편지를 썼고, 두 사람이 만나 보금자리를 찾을 희망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냉엄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전개된 마당에 이르러 그녀는 부친으로부터의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그녀에게 매천악이 던지는 한마디 말은 무정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두가 본 파의 존망과 너와 추수를 위한 일이다. 내 너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니 이 아비를 믿고 잠자코 있거라." 매약화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매천악의 독심(毒心)을 잘 알고 있는 정추수는 마음을 단단히 추스르며 한걸음 나섰다. "사부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문득 매천악은 이제껏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을 풀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탄식을 토해 내었다. "내 너를 이십 년간 길러 오면서 어찌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겠느냐? 이십 년 전의 일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의 일이 가슴에 사무쳤기에 너를 아끼는 마음이 더욱 컸단다." '진심일까?' 매천악의 어조가 너무 진중했으므로 뒤에 선 곽입지와 갈웅휘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매약화는 부친의 갑작스런 등장에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정추수를 아낀다는 말을 듣게 되자 내심 안도하게 되었다. 하나, 매천악의 흉험함을 잘 알고 있는 정추수가 어떻게 한마디 말에 현혹될 수 있겠는가? 정추수는 내심 냉소하며 매천악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지 너와 나, 사제의 관계만으로 남고 싶구나. 그래서 난 너와 약화를 맺어 주고 무림의 은원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살도록 함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 매천악은 정추수로부터 시선을 돌려 매약화에게 주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매약화의 모습이 보였다. 매천악은 딸에게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나의 판단이 경솔했음을 알고 널 다시 찾게 되었다. 마녀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살겁을 자행했어. 넌 그 마녀의 동생으로 다른 이들의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약화와 숨어 산들 수많은 무림동도의 눈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다행히 넌 아직 크게 악행을 행한 바 없으니..." 정추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심한 갈증이 밀려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침의 흔적을 자취도 없이 지워 버렸다. "나를 도와 네 누이의 악행을 종식시키도록 하여라." 정추수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가증스럽군요! 날 인질로 삼아 나의 누님을 협박하겠다고 말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젠 날더러 하나뿐인 혈육을 저버리라고 설득하는 겁니까? 사부! 지금 당신이 진정으로 내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안타깝구나. 난 한시라도 널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나를 미워하는 네 마음이 아직 식지 않았구나." 매천악은 정추수를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정추수의 목숨을 주겠노라고 다짐을 받은 갈웅휘조차 매천악이 진정으로 정추수를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매약화가 정추수의 팔을 부여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추수, 당신의 입장이 어려운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애쓰시는 아버님의 진심도 헤아려야 하지 않겠어요?" 매약화의 이런 태도에 정추수는 매천악의 철저한 위선에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약화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매천악이 사부와 동문과 제자와 가족들마저 속이고 있는 위선자라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매천악은 그런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약화를 만나러 올 때 각오했던 대로 목숨을 내줄 수밖에.'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매약화를 한 번 더 본 것으로 만족하리라, 정추수는 다짐했다. 물론 이 짧은 시간 동안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래도 보지 못한 것보단 나으리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생을 포기한 덕분일까? 정신이 맑아지고 평온해짐을 느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정추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죽으면 사부는 누님을 얽어 맬 구실이 없어지겠지. 그리고 누님은 공야 사숙님의 주장대로 황산으로 돌아갈 것이고.' 부모를 죽인 사부였지만 자신이 직접 사부를 죽여 복수할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번의 순간, 매천악에 대한 불 같은 증오가 끓어오른 적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증오가 사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정추수를 모질게 하지는 못했다. 정추수는 매약화를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았다.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그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을 주었던 궁조생의 얼굴도 눈에 담았다. 이어 매천악에겐 어느새 공허해진 눈동자를 던지며 정추수는 입을 열었다. 짭짤한 눈물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혀끝을 적셨다. "사부님은 무공이 높으시니 제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 검봉을 정추수에게 겨누고 다가오는 곽입지와 갈웅휘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의 의도대로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이후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상긋한 미소가 텁수룩한 수염을 헤집고 나왔다. 내공을 잔뜩 실어 부르르 떨리는 정추수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갈 때, 매천악과 궁조생이 동시에 놀라며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두 사람의 신형이 번득였다. 매천악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줄 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궁조생은 자신의 살점과도 같은 형제의 죽음을 만류하기 위해 정추수의 손을 잡아 갔다. 하나 이 순간, 두 사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추수에게 다가서는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한 손으로는 기이하게 회오리치는 장력을 떨쳐 매천악을 물러서게 했고, 한 손으로는 정추수의 손목을 정확하게 낚아채고 있었다. 매천악이 장력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때, 정추수를 꾸짖는 옥음(玉音)이 밤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철-썩! 뺨을 어루만지며 비틀거리는 정추수의 입에서 놀람에 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누님!" "정 소저! 여길 어떻게 알고...?" 바보 같은 질문이라 여겨 궁조생은 말을 흐렸다. 정려군의 등장에 가장 놀란 사람은 매천악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 그토록 주위를 샅샅이 살피라 일렀거늘..." 매천악은 등뒤의 숲속을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궁조생은 숲속에서 일렁이는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곳엔 적어도 수십 명의 무사들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려군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매천악! 네 얄팍한 술수를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원수를 모두 죽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네 스스로 무덤을 팠으니, 이는 필시 악마를 주살하라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 "흥!" 싸늘히 코웃음을 쳤지만 매천악은 내심 상황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녀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면 숲속에 있는 의정문의 무사들이 잠자코 있었을 리는 없을 터.' 순간적으로 매천악은 정려군을 따르는 무리가 없으리라 단정했다. 정려군만 제압할 수 있다면 자신의 뜻은 절로 이루어지리라 매천악은 생각했다. 조금 전 정추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정려군이 나타난 이상 그러한 시도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정추수가 그의 수중에 있는 이상 정려군은 나머지 진경을 내놓아야만 할 것이라고 매천악은 확신했다. 문제는 정려군을 이기는 것이었다. '때마침 달빛이 나를 돕고 있구나.' 매천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리의 연검을 뽑아 들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정려군은 말없이 허리의 패검을 뽑아 들며 매천악의 검을 응시했다. 은빛을 번들거리며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기이한 연검. 그것은 인명(人命)을 소중히 여기려는 선조들의 바람에 따라 비밀리에 묻혀 왔던 가문의 병기였다. 그 병기가 과거 정씨 일족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려군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곽 사제! 웅휘! 너희들은 추수를 사로잡도록 하여라." 이는 정려군의 심기를 흩뜨려서 선기를 제압하려는 조치였다. 곽입지와 갈웅휘가 정추수를 향해 살기를 뿌리며 다가왔다. 동시에 숲속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도와 검을 들고 정추수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공터엔 금방이라도 피를 뿌리고야 말 것 같은 살기가 바람을 타고 맴돌고 있었다. 문득, 매천악의 날카로운 시선이 궁조생에게 향했다. "조생! 너도 추수를 공격하라!" "사부님!" 궁조생이 머뭇거리자 매천악이 호통했다. "어서! 네가 나의 명을 거역할 참이냐?" 일갈과 동시에 매천악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삼 장에 이르는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며, 종잇장 같은 연검이 꿈틀거렸다. 수면에서 몸부림치는 은어의 비늘처럼 번득이는 은광이 정려군의 시선을 현혹했고, 그 날카로운 검봉은 정려군의 미간과 염천혈(廉泉穴) 옥당혈(玉堂穴)을 번갈아 노리고 들었다. 매천악은 자신이 승리를 거둘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검법은 해가 없는 밤에만큼은 무적이라는 사실을 백팔십 년 전 도마가 이미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낮에 위지광의 광명도법이 일으키는 광휘 속에서 눈이 어지러울 만치 신속하게 움직이던 정려군의 무공을 견식했다. 위지광은 그녀를 이기지 못했지만 그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의 검은 속도에 제한을 받는 위지광의 커다란 검과는 달리 정려군의 기묘한 신법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다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낮에도 위지광과 겨룰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 비법이 나머지 진경에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로 하여금 그 오랜 세월 동안 정추수를 지켜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정려군은 패월도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되 자신은 정려군의 검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차이가 매천악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연검이 정려군의 한 자 앞에 이르러 사선을 그리며 자취를 감추려 할 때, 그녀의 신형은 매천악의 뒤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천악도 그녀를 따라 회전하며 그녀의 등을 향해 연검을 내질렀다. 그의 검은 아무런 소리를 남기지 않았지만, 검의 방향을 틀면서 달빛에 반짝이는 검신을 정려군에게 보이고 말았다. 그 순간, 정려군의 검이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비어져 나오며 연검을 튕겨 내었다. 연약하기만한 매천악의 검은 조그마한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활짝 휘어졌다. 연이어 정려군의 패검은 여세를 몰아 매천악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헛...!' 태행검파의 제일고수라 할 수 있는 냉겸조차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신묘한 검법이 저지되자, 매천악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황급히 물러났다. 사아-악! 섬뜩한 느낌과 함께 어깨의 옷자락이 길게 베어졌다. 촌각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짓쳐 드는 정려군의 검법에 매천악은 연달아 다섯 걸음을 물러나야만 했다. 패월도법을 이용해 검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신형은 연검이 자취를 감출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방향에 상관없이 전신요혈을 파고드는 그녀의 검! 놀랍게도 그녀의 검법은 매천악의 패월도법과는 철저한 상극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갈웅휘는 당장에라도 정추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매천악은 그를 사로잡으라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자비를 베풀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추수의 놀라운 무공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곽입지 또한 갈웅휘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의정문의 무사들을 독려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선친이 남긴 의정문의 무사들은 그의 명이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것이었다. 흉흉한 살기가 사방에서 짓쳐 들자 매약화가 곽입지를 만류했다. "곽 사숙님, 왜 그러세요? 도대체 왜...?" 곽입지를 대신하여 갈웅휘가 소리쳤다. "흥! 사매는 저놈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해라. 저놈은 사백부와 동문을 죽인 악마라는 사실을 모르느냐? 넌 어째서 저런 놈과 어울려 다니려는 거지?" "그건 오해입니다." 궁조생이 변명하려 나서자 곽입지가 호통했다. "이 배은망덕한 놈! 넌 추수를 잡으라는 장문의 명을 거역하고 있다. 너마저 사문을 배신할 셈이냐?" "사숙님! 그게 아닙니다. 원 사백부는..." "닥쳐라! 너의 마음이 이미 사문을 떠났으니 더 이상 널 사질로 여기지 않겠다. 여봐라! 저 마교의 앞잡이를 공격하라!" 정려군이 돌연 나타나 제지하는 바람에 정추수는 자살을 하지 못했지만, 곽입지나 갈웅휘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하나, 이는 정추수의 사정일 뿐이었다.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한 원진은 갖가지 검과 도를 내세우며 좁혀들기 시작했다. 세 명의 무사들이 도를 휘두르며 정추수에게 달려들었다. 매약화가 비명을 질렀고, 정추수는 그런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며 몸을 피했다. 옆에 섰던 궁조생이 검을 빼어 들어 도를 막으며 소리쳤다. "곽 사숙님! 어째서 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십니까?" "지금도 사문의 뜻을 막으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너의 그 주둥이가 다물어지도록 만들어 주마!" 사숙과 사질 사이의 정은 이미 오간데없었다. 궁조생이 어떤 변명을 시도한들 곽입지에겐 귀를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에겐 오직 원가량을 죽인 정추수에 대한 원한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를 막으려는 궁조생은 마교의 무리와 다를 바 없었다. 세 명의 공격이 물러가자 이번엔 여섯 개의 검이 달려들었다. 그 목표물은 정추수였고, 정추수는 다시 매약화를 안고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도 그들의 무공은 피하기만 하는 정추수를 압박할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다시 여러 번의 공격이 가해졌다. 정추수는 여전히 피하기만 했다. 궁조생이 이들 공격을 가로막았고, 매약화의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머저리들 같으니! 피하기만 하는 놈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다니... 안 되겠다, 웅휘! 같이 공격하도록 하자." 수하들의 능력이 역부족임이 확연해지자 곽입지는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웅휘, 넌 조생을 맡아라. 내가 추수를 상대할 터이니." 수하들의 검을 피해 이리저리 물러나고 있는 정추수의 등이 드러나는 순간, 곽입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찔러 들어갔다. 매약화는 본래 무공도 보잘것없거니와 몸이 지극히 쇠약한 상태였다. 게다가 밤길을 달리느라 체력이 소진되어 스스로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저 정추수가 이끄는 대로 겨우 따라갈 뿐이었다. 따라서 정추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찔러 오는 검과 도를 피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약화에게 어떤 해가 미칠지 모르겠다. 차라리 약화와 떨어지면 그녀에게 위험이 없으리라.' 이런 생각에 수장 밖의 나무로 다가가 매약화를 기대어 앉히려 할 때, 등뒤에서 날아드는 날카로운 기세를 느꼈다. 의정문 무사들이 휘두르는 검과 도의 기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운. '곽 사숙이로구나!' 정추수는 위험을 직감하고 매약화를 살짝 밀치며 옆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검이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연이어 곽입지의 오른발이 정추수의 왼쪽 무릎을 밟아 왔다. 다시 옆으로 한 걸음을 옮기자 살기로 한껏 일그러진 곽입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짐승과 같은 기합을 토하며 다시 달려드는 곽입지를 보며 정추수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정추수가 곽입지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곽입지의 검은 살기로 충만해 있었고, 정추수는 싸울 의욕을 잃고 있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처음 곽입지는 정추수의 무공을 꺼렸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추수가 반격을 하지 않자 마음놓고 공세에 치중했다. 초식이 거듭될수록 그의 공세는 강맹해지고 있었다. 곽입지의 검이 검영(劍影)과 파공음을 남기며 정추수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해 갔고, 정추수는 금방이라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 같았다. 이를 보는 매약화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곽 사숙! 추수를 죽이지 마세요!" 매약화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정추수의 어깨 옷자락이 갈라졌다. 정추수가 나직하게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연이어 병아리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곽입지의 검이 정추수의 심장을 노리고 궤적을 그렸다. 이상하게도 정추수는 자신을 죽일 듯이 달려드는 곽입지가 밉지 않았다. 자신이 천심장을 사용하여 반격한다면 곽입지를 이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은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일순, 곽입지의 얼굴이 흐릿해지며 자신의 손에 죽어 간 뇌가명의 얼굴로 바뀌었다. 비록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지겹도록 얼굴을 맞댈 시간을 갖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이십 년간을 동문으로 지내 온 그를 죽였다는 자책감이 정추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또 한 번 자신의 손으로 사문의 정을 끊을 수는 없었다. 어깨로부터 전달되어 오는 화끈한 감촉이 이런 마음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어차피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약화와 같이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어.'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동문을 죽인 대가로 사문의 존장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과히 억울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곽입지의 검이 보였다. 그 너머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는 매약화의 모습과 궁조생을 핍박하는 갈웅휘의 모습도 보였다. 갑자기 힘이란 힘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연이어 절로 감기는 눈꺼풀. '한 순간이면 세상의 은원은 물거품이 되리라.' 정추수는 곧 이어 찾아올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5 장 선악(善惡)의 대가는..... 제 25 장 선악(善惡)의 대가는 하늘이 주는 법 "난 정말 정 숙부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곽입지의 공격에 반격은커녕 속시원하게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는 정추수를 보며 투덜거리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봉무구였다. 봉무구는 보구천과 함께 공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에 기대어 서서 장내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방금 전 정려군의 뒤를 따라 이곳에 도착했으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추가적인 적의 동태를 살피라는 정려군의 명에 따라 주위를 둘러본 직후였다. 보구천은 매천악이 정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정추수는 곽입지와 갈웅휘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굳이 나서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정추수는 무기력하게 위험에 빠져 들고 있었다. "나 같으면 내게 대드는 자를 일장에 때려 죽이고 말 텐데." 보구천은 이런 봉무구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무구는 자신이 좋으면 그만이고 거슬리면 용납하지 않는다. 게다가 술수가 깊으니 이후 교주직을 계승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를지 알 수가 없구나.' 보구천은 내심 걱정하며 정추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구천이 보기에도 정추수는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정추수는 곽입지의 검을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구천은 정추수의 심약함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솔직 담백하고 정의로운 기질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은원과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난에 빠져 드는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우리가 정 숙부를 도와야 할 것 같구나."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정추수가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거렸다. "안 되겠다." 보구천이 깜짝 놀라 몸을 날리는데, 봉무구가 그에 앞서 공터로 뛰어들었다. 봉무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경신술이 뛰어났다. 보구천이 공터에 내려설 때, 섬전 같은 봉구무의 신형은 이미 곽입지와 정추수 사이에 끼여들고 있었다. 봉무구는 정추수의 심장 한 치 앞에 이른 곽입지의 검을 정확히 걷어찼다. 곽입지는 자신을 물리친 장본인이 낮에 매천악과 겨루던 소년임을 알아보고는 크게 놀라 몸을 움츠렸다. "늙은이! 정 숙부님은 싸울 의사가 없으니 내가 상대해 주겠다." 익살스런 음성과는 달리 봉무구의 손에선 숨막힐 듯한 경력이 쏟아져 나와 곽입지를 압박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곽입지는 난데없는 변화에 낭패하여 이를 갈았다. 하나 실력 차가 크게 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곽입지는 이내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허둥거리게 되었다. 봉무구는 상대와 겨룰 때 사정을 두는 법이 없었다. 틈만 나면 일격에 필살하려는 기세로 몰아붙이는지라 오 초식이 지나기도 전에 곽입지는 내상을 입고 나뒹굴었다. 정추수는 죽음을 각오하던 차에 봉무구가 나타나 곽입지를 핍박하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누님이 나타나 방해하고 이번엔 무구가 곽 사숙을 막으니 정녕 삶이란 나의 의지 밖에 있는 걸까?' 정추수는 허탈한 심정이 되어 봉무구와 곽입지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곽입지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화들짝 놀라 봉무구를 가로막았다. "그를 죽이면 안 돼!" 숨통을 끊으려던 차에 정추수가 끼여들자 봉무구는 화급히 장력을 회수하며 물었다. "그는 정 숙부를 해치려 했는데, 어째서 저를 막으십니까?" "네가 어찌 나의 사숙을 죽이려 하느냐?" "그는 본 교의 적이니 사정을 둘 필요가 없어요." "안 될 소리! 네가 정녕 사숙을 죽이려 한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정추수의 태도가 완강하자 봉무구는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곽입지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정추수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추수의 행동이 오히려 위선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미 사문을 배신한 마당에 날 위하는 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날 능멸하려는 거냐?" 곽입지가 정추수를 믿지 않고 이를 갈며 소리치자 어느새 다가온 매약화가 안타깝게 말했다. "곽 사숙! 추수는 사숙을 미워하지 않아요. 추수는..." "약화! 이 녀석은 이미 마교와 뇌동하여 인성을 상실했다. 사문의 존장까지 스스럼없이 죽인 놈에게 너는 왜 그토록 미련을 떨치지 못하느냐?" "곽 사숙, 그렇지 않아요. 추수는 사문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에요." "바보 같은 소리! 추수, 어서 날 죽여라. 가증스럽게도 약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비를 베푸는 척하는 거냐? 네가 그런다고 믿을 사람은 여기에 없다. 어서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다!" 이런 곽입지를 가리키며 봉무구가 격하게 소리쳤다. "정 숙부께서 아무리 관대하게 대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참에 본 교의 적인 그를 제거하시는 것이 마땅해요!" 변함없이 증오를 퍼붓는 곽입지가 정추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정추수는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왜 아무도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 거지? 난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어째서 모두가 나더러 살인마가 되라고 하는 거지...?" 상심이 지나쳐 숨이 가빠지고 어지러움이 찾아들었다. 정추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섰다. 매약화가 급히 다가와 정추수를 부축하며 위로했다. "추수, 너무 상심 말아요. 지금은 당신을 오해하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이해할 거예요." 안타까움에 매약화는 눈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정추수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삼키는 울음 소리가 새어나오더니 마침내 울부짖으며 주먹으로 나무를 때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도 내 마음을알아주지 않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나무가 파이고 정추수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한편 의정문의 무사들을 도륙하고 갈웅휘를 공격하던 보구천은 심히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갈웅휘와 겨루던 궁조생이 오히려 보구천의 도를 가로막으며 갈웅휘를 도왔기 때문이다. "궁 대협! 왜 그를 도우시는 겁니까?" "내 동문의 죽음을 어찌 방관할 수 있겠소?" 보구천의 무공은 궁조생과 갈웅휘를 합한 것보다도 높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두 사람을 격퇴시키고 갈웅휘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려군이 내심 궁조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보구천으로선 궁조생의 몸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도를 쓰는데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갈웅휘가 위험해질수록 더욱 몸을 사리지 않는 궁조생 때문에 보구천의 의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덕분에 갈웅휘는 보구천의 도에 잃을 목숨을 근근이 연명할 수 있었다.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매천악은 다급히 물러났다. 정추수를 제압하고 정려군을 협박하여 진경을 얻으려던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고, 오히려 정려군에게 몰려 상처를 입게 되자 치솟는 노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심계가 깊고 경륜이 풍부한 매천악이었다. 그는 이내 이성을 되찾으려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나의 검법을 잘 알고 있군." "물론이다, 매천악.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결국 나의 손을 벗어나진 못한다. 오늘 넌 지난 죄과에 대한 보상으로 목숨을 내놔야만 해." 정려군은 매천악의 옆구리를 촉촉이 적시며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빛을 발하는 눈 위로 선혈이 한 점 한 점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살기 또한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흐흐흐, 너의 그 검법이 장한진경의 무공인가?" "바로 장한검법(長恨劍法)이지. 이 검엔 네 손에 죽어 간 원혼들의 한이 서려 있어 항상 너의 피와 살을 그리워했다. 이제 이 검에 네 피를 적셔 한을 풀고, 네 수급으로 제를 지내리라!" 정려군의 패검이 달빛에 부딪혀 부서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매천악의 연검이 뿌리는 은광과는 달리 스산하고 귀기 어린 푸른 빛이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일순, 패검이 짙푸른 검기를 토해 내며 한 자 이상 늘어났다.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정려군의 눈동자도 푸른 안광을 쏘아 내기 시작했다. 정려군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되려 함을 매천악은 직감했다. 자신이 믿었던 패월도법은 정려군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밑천은 바닥났으되 정려군의 검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패배라는 단어가 매천악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천악은 다가올 패배에 순응하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이라도 반드시 역전의 기회는 있는 법이라는 것을 잘 아는 매천악의 눈은 장내를 재빠르게 훑어 가기 시작했다. 곽입지는 내상을 입어 쓰러져 있었고, 갈웅휘는 보구천의 도 아래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그 옆에서 보구천을 제지하느라 여념이 없는 궁조생... 바로 그 궁조생을 바라보는 매천악의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잡혔다. 문득, 매천악이 대소하며 연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휘리리-릭! 연검이 기묘하게 굽이치며 날카로운 소성을 자아냈다. "마녀! 기특하게도 날 이런 곤경에 빠뜨리긴 했다만, 넌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헛소리!" 냉소와 함께 정려군의 신형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매천악으로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신법이 펼쳐지며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신형이 엇갈렸다. 매천악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정려군은 매천악이 왼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공격하면 매천악의 목숨을 앗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착지와 동시에 신형을 돌렸다. 하나 매천악이 있음 직한 곳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에 기대어 망연히 서 있는 정추수를 덮쳐 가는 매천악의 모습이었다. 매천악의 연검은 정확하게 정추수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뱀의 혓바닥처럼 요동치며 날아드는 검봉. "안 돼요!" 매약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며 정추수를 몸으로 가렸다. "비켜라!" 매천악은 검을 회수하며 매약화의 팔을 낚아채 정추수로부터 떨어뜨렸다. 비틀거리는 정추수를 그는 연검으로 연이어 세 번 찔렀고, 정추수는 왼쪽 어깨와 옆구리, 왼쪽 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매천악은 정추수를 사로잡아 정려군을 협박할 속셈이었으므로 정추수가 쓰러지자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때, 매약화가 매천악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제지했다. "아버님, 추수를 죽이면 안 돼요!" "바보 같으니! 죽이려는 게 아니다!" 매천악은 매약화를 꾸짖으며 뿌리치려 했지만, 정려군이 이미 바싹 다가와 있었다. '제기랄!' 매천악은 매약화를 힘껏 떠밀며 신형을 날렸다. 매약화가 나무에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고, 정려군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매천악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이 간악한 인간!" 분기 탱천한 정려군. 하나 매천악의 신형은 이미 그녀의 공격권을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정려군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매천악이 다시 향하고 있는 곳은 보구천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궁조생이었다. 쓰러진 정추수의 상세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정려군은 지체없이 매천악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리며 소리쳤다. "궁 대협!" 정려군의 다급한 외침에 등을 돌린 궁조생은 자신의 목을 겨냥해 날아드는 매천악의 검을 보았다. 사부가 자신을 공격하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궁조생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다가드는 희끗한 검봉, 살기로 번들거리는 매천악의 눈동자, 그 뒤로 정려군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사부님이 나를...?' 놀라움을 넘어선 허탈감이 궁조생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궁조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검봉이 휘어지며 매천악의 전신이 뒤틀렸다. 불시에 등뒤로 다가온 정려군을 공격하는 매천악. 일순, 연검이 정려군의 시야에서 벗어나 어둠 속으로 감추어졌다. 이는 매천악이 노린 최후의 한 수였다. 패월도법의 비전기술인 어둠 속에 감추는 검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는 정려군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매천악은 궁조생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제껏 패월도법의 허점을 파고들던 정려군은 다급한 마음에 방위를 놓치고 말았다. 촌각의 순간에도 상대의 심리를 흔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매천악의 치밀함에 휩쓸려 버린 것이었다. 궁조생에 대한 사모지심(思慕之心)으로 정려군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악!" 정려군은 왼쪽 가슴에 일검을 찔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매천악이 정추수를 쓰러뜨리고 궁조생을 이용하여 정려군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일련의 상황을 보구천과 봉무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건 정려군의 비명을 들은 직후였다. 동문과 사문의 존장이 그를 죽이려 하고 심지어 사부의 검에 상처를 입게 되자, 정추수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하나 그 와중에 들려 온 정려군의 애처로운 비명에 정추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려군의 몸을 관통한 매천악의 검과, 패검을 떨어뜨리고 낙엽처럼 하늘거리며 쓰러지는 정려군의 가녀린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누님! 누님!" 상처에서 전해 오는 고통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는 정추수의 곁으로 정려군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매천악이 정려군의 숨통을 끊으려 달려들었고, 정려군은 계속 굴러 정추수가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굴러간 자리엔 선명한 핏자국이 달빛을 받으며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하하하! 나를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다." 매천악의 득의에 찬 광소가 터져 나왔고, "아아!" 한탄하는 정려군과 그녀를 찌르려 검을 치켜 든 매천악의 모습이 나무 뒤로 보였다. "안 돼!" 정추수는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제껏 배우고 익혔던 천심장의 내공이 전신 혈맥을 타고 흘러 장심에 모여들었다. 정추수의 부모님은 매천악의 음모에 의해 희생되었고, 정추수가 겪고 있는 고통은 그 결과의 산물이었다. 그러하기에 이 세상 하나뿐인 혈육, 정려군마저 매천악에게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맷자락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며 정추수의 쌍장이 커다란 나무를 가격했다. 열두 가지 천심장 중 성심동에 갇힌 십 일 동안 연마한 격물전이(擊物轉移)의 수법이 무의식중에 펼쳐졌다. 그 막강한 기운이 나무를 통해 매천악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정려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매천악은 허리를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몸을 뒤흔드는 충격이 없는지라 다시 검을 들어 정려군을 찌르려던 매천악은 갑작스레 일어나는 날카로운 기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정추수는 다리를 절뚝이며 정려군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궁조생과 봉무구, 보구천이 그녀 곁에 모여들었다. "정 소저!" "사고!" 쓰러진 그녀의 몸에서 피가 흘러 주위로 번져 나갔다. 그녀의 왼쪽 가슴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추수는 다급히 정려군의 맥을 짚었다. 희미한 박동이 느껴졌지만 끊어질 듯이 불규칙했다. "누님!" 정추수는 그녀를 껴안고 몸을 마구 흔들었다. 정추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려군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주체할 수 없는 노기가 전신을 활활 불태우기 시작했다. "사고께서 죽다니! 사고를 죽이다니!" 보구천과 봉무구가 원통하게 부르짖으며 매천악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죽여 버리겠다, 매천악!" 보구천과 봉무구가 매천악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정추수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는, 그는... 내가 죽이겠소. 보 형은 물러나시오."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정추수의 음성과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터질 듯이 충혈된 두 눈동자에, 보구천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정추수는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정 숙부는 매천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구와 함께..." "내가 죽이겠다!" 만류할 틈도 없이 정추수는 매천악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니, 만류할 틈이 없었다기보다 정추수의 전신에서 뻗어나는 살기에 숨이 막혀 만류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우려 섞인 눈길로 매천악과 정추수를 번갈아 보았다. 여차하면 정추수를 도울 준비를 하면서... 하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천악이 이미 천심장에 격중되어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이 정려군을 살피고 있는 동안에도 매천악은 제자리에 선 채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심장의 칼날 같은 기운이 심장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천악은 체내의 진기를 집중하여 천심장 기운을 막으려 했지만,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살기를 띠고 다가오는 정추수를 보자 심기가 흩어져 피를 토하고 말았다. "으-웩!" 화살 같은 핏줄기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버님!" 자지러지게 놀라며 매천악을 부축하는 매약화의 미약한 힘에 떠밀려 매천악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지금 이 순간, 정추수는 사제지연과 매약화와의 사랑에 대한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하나뿐인 누님이 매천악의 손에 의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그로 인해 분노가 하늘을 꿰뚫고 있을 뿐이었다. "으흐흐흐..." 극도로 운기되는 내공에 의해 머리카락이 올올이 하늘로 치솟았고, 바람에 흐트러지는 수염 사이로 드러난 입술이 일그러지며 음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흡사 사신(死神)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매약화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추수, 안 돼요.'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외침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한 발 한 발 다가들던 정추수의 입이 벌어지며 살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의 부모님을 죽였고, 이젠 나의 누님이 죽어 가고 있소." 천심장의 기운에 소매가 다시 부풀기 시작했다. 매약화는 정추수의 천심장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추수, 안 돼요!" 매약화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정추수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가드는 정추수의 발걸음. 마침내 정추수와 매천악은 불과 두 걸음의 간격을 두고 마주하게 되었다. 그 사이엔 매약화가 와들와들 떨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매천악의 전신이 푸들푸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의 몸을 이용했고, 마음을 유린했으며, 마지막 남은 혈육의 정마저 무참히 끊으려 했소." 다시 한 걸음.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걸음에 불과했다. 그저 손을 내밀기만 해도 닿을 거리.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어진 매약화는 정추수의 가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추수! 제발 이러지 말아요. 아버님은 진심으로 당신과 날 위하려 했어요. 내 말을 들어요!" 정추수는 묵묵부답,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매약화가 뒤로 밀려나고 그 힘에 매천악도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두 걸음, 세 걸음을 내딛자 매천악도 두 걸음, 세 걸음을 휘청이며 물러났다. 매천악의 몸에 일기 시작한 경련이 더욱 거세지더니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시커먼 핏덩이가 매약화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며 정추수의 얼굴에 뿌려졌다. 비릿하게 파고드는 피 냄새가 언뜻 정추수의 정신을 일깨웠다. 뒤이어 그의 마음을 파고드는 매약화의 애처로운 음성. "당신은 정말로 사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려는 거예요?" 그래도 정추수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네 걸음, 다섯 걸음이 내디뎌졌고, 매약화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버님을 살려 주세요! 곽 사숙! 아버님을 살려 주세요!" 이미 봉무구와 보구천에게 목숨을 일을 뻔한 곽입지와 갈웅휘는 의기 소침해진 데다가 정추수의 기세에 눌려 넋이 빠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매약화의 간절한 외침에 이내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다. 매천악이 죽으면 자신들도 죽은목숨이라 생각하자 심기일전하여 정추수에게 달려들었다. 매약화의 외침에 정신이 든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궁조생은 매천악이 저질러 온 죄악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정려군이 매천악에게 품고 있는 원한의 깊이도 잘 알고 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추수가 매천악을 죽여 부모의 원한을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 사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굶어 죽어 가던 날 거두어 길러 주신 사부님이 아닌가?' 이러한 갈등에 휘말려 어쩔 줄 모르던 그는 매약화의 외침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소리치고 있었다. "추수! 사부님을 해치지 말아라!" 동시에 정추수를 공격하는 곽입지와 갈웅휘를 저지하기 위해 보구천과 봉무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봉무구의 신형이 번득이는 순간, 보구천은 자신의 다리를 잡는 손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려다보니 정려군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는 게 아닌가? 그가 귀를 가까이 대자 정려군이 속삭였다. "추수는 마음이 약해 결국은 매천악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자극을 줄 필요가 있어. 내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라." 이는 정려군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매천악은 정추수의 전력을 다한 천심장에 당하는 순간 이미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이 한마디가 정추수와 매약화로 하여금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길로 갈라 놓고야 말았다. 도와 줄 거라고 믿었던 곽입지와 갈웅휘가 봉무구에 의해 제지당하자 매약화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정추수의 가슴을 때리고 밀쳤다. "다가오지 말아요. 아버님을 죽이면 안 돼! 흑흑흑!" 매약화의 흐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조그마한 손이 전해 준 충격 때문이었을까? 문득, 정추수의 눈에 몸부림치는 매약화의 애틋한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그의 가슴을 욱죄어 오기 시작했다. '사매...' 계속 이어질 것만 같던 정추수의 걸음이 멈추어지고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동시에 다시 피를 토하는 매천악의 신형이 스르르 허물어지고 있었다. "아버님!" 자지러지게 놀라며 매천악을 떠받치는 매약화. 가녀린 몸으로 부친을 부축하는 그녀의 안쓰러운 모습이 정추수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매천악의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부풀어올랐다. "추수, 제발...!" 애절한 매약화의 음성이 정추수의 마음에 차츰 젖어들려 할 때, 바로 이때 보구천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정추수의 고막을 찔렀다. "사고! 사고-오!" 이 한마디가 가느다랗게 살아나려던 매약화에 대한 연민을 산산이 날려 버렸다. 정추수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죽었구나, 죽었어! 누님이 죽었어!" 정추수는 양손을 뻗어 매천악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다. 매약화가 이를 만류하려 한 걸음 물러났고, 이에 정추수는 한 걸음 나아갔다. 매천악의 입이 벌어지며 짐승과 같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혀끝은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꿈틀거렸으나 나오는 건 말 대신 핏물이었다. 매약화는 부친의 목숨이 이미 경각에 달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울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대신 정추수에게 울먹이며 애원했다. "추수! 제발 아버님을 살려 주세요. 이렇게 애원하잖아요. 제발..." 안타깝게도 그녀의 말은 이미 정추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곱 번째 걸음이 내디뎌지고 매천악은 매약화와 함께 일곱 걸음째 물러났다. "사부! 나의 누님이 죽었소! 누님이 죽었어!" 매천악의 눈동자는 이미 위로 말려 올라가 보이지 않았다. 전신의 근육은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매천악의 희미한 의식이 '너의 누나는 죽지 않았다'라고 말하려 했다. 하나 이 순간 마지막 남은 체내의 진기마저 사라졌고, 마침내 천심장의 악귀와 같은 기운이 수궐음심포경과 수소음심경을 통해 광풍 노도와 같이 심장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매천악의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나의 누님을 당신이 죽였소. 나의 부친도, 어머님도... 당신이 죽였소. 이제 나의 손으로 그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정추수가 오른손을 치켜 들었다. 정추수가 일으킨 천심장의 살기는 매약화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을 주었다. "추수! 당신은 정녕 나를 저버리는군요. 당신은..." 매약화가 두려움과 원망을 실어 정추수를 노려보며 물러나는 순간, "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매천악의 전신이 폭발할 듯이 부풀어오르다가 일순 잦아들었다. 동시에 입과 코, 눈, 귀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가 매약화와 정추수를 흠뻑 적셨다. "꺄아-악!" 이 끔찍한 모습에 매약화는 눈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매천악의 시신으로부터 핏물이 배어나와 주위를 적시며 서서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부친의 처참한 죽음이 준 충격 때문이었을까? 매약화는 두 눈을 가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녀가 가까스로 두 손을 내리고 부친의 시신을 바라본 건 피에서 피어나던 허연 김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아버님!" 매약화는 핏덩이로 화한 부친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정추수는 멍한 모습으로 매약화와 매천악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매천악의 죽음과 매약화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모두 꿈속의 일인 양 여겨졌다. '누님도 죽었고, 사부도 죽었다. 약화는 슬퍼하고 있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매천악은 장한진경을 얻기 위해 정씨 일가를 도륙했다. 그는 패월도법을 얻었고, 정추수를 이용하기 위해 이십 년간 제자로 거두었으며, 그를 이용해 정려군을 죽이려 했다. 결국 매천악은 자신이 기른 제자의 손에, 그리고 정씨 집안의 무공에 죽고 말았으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매천악에게 국한된 말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에게 그런 인과응보나 하늘의 뜻이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지겠는가? 그들은 다만 눈앞의 상황을 볼 뿐이고, 그에 따라 인연과 은원을 맺을 뿐이다. 정추수와 매약화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정추수의 두 손엔 천심장의 기운이 잔뜩 모두어져 있었다. 아니, 자신이 천심장을 운용하고 있음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불과 두어 발자국 거리에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천장단애(千丈斷崖)의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매약화의 흐느낌이 묘한 아픔이 되어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이때 정추수의 의식을 깨우는 손길이 있었다. "장하다. 추수! 결국 네가 가문의 원수를 죽였구나. 난 네가 반드시 부모님의 원한을 갚으리라 믿었다." 그의 등뒤엔 죽은 줄만 알았던 정려군이 활짝 웃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정추수의 두 눈이 홉떠졌다. "누, 누님! 살아 계셨군요..." "호호호! 장한검법을 익힌 내가 어찌 매천악에게 지겠느냐? 다만 네가 손수 매천악을 죽여 부모님의 한을 풀기를 바라는 마음에 죽은 척했을 뿐이다." 득의에 찬 정려군의 교소가 별처럼 피어났다. 그녀의 가슴은 피로 물들었지만, 행동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듯했다. 정려군은 기쁘기 한량없었다. 이십 년간을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살아 왔던 그녀였다. 이제 겨우 진정한 흉수를 알게 되었는데 힘에 부쳐 포기해야만 하는가, 하고 안타까워하던 차에 매천악을 죽이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정려군은 부모의 원한을 갚은 정추수에게 다정한 웃음을 선사하려 했다. 그러나 정추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정려군의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잔인성, 그것이 정추수를 몸서리쳐지게 했다. 정추수는 정려군에게서 멀어지려 뒷걸음질쳤다. "추수, 왜 그러느냐?" 정려군의 음성이 얼굴을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살을 엘 듯했다. 이때, 정추수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는 손이 있었다. 매약화였다. 그녀의 손과 옷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추수! 당신이 나의 아버님을 죽였어요!"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꿰뚫고 바늘처럼 파고드는 그녀의 한 맺힌 시선이 정추수의 의식을 가득 메웠다. "당신이 아버님을 죽였어요, 당신이!" "약화, 난..." "추수, 당신이 이럴 수 있나요? 아버님은 당신을 용서하려 했는데, 비록 당신의 원수라 할지라도 지난 이십 년간 당신을 길러 준 은혜가 있는데, 이렇게 내가 보는 앞에서, 그토록 애원했는데... 당신을 사랑한 내가 바보였어요. 호호호!" 매약화가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약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상황은 정추수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자신이 어떤 상황을 원하는지를 몰랐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매천악과 정려군,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정추수였다. 동문을 죽인 배반자라는 멍에가 두려워 곽입지의 검에 목숨을 맡기려 했던 정추수였다. 하나, 정려군이 나타나면서 그의 의도는 어긋나 버렸다. 매천악과 정려군은 서로가 정추수를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 했다. 정추수는 그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는 환경이 그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사부를 죽였고, 매약화가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매약화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야 만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서서히 내려앉는, 암흑과도 같은 절망이 정추수를 아득한 심연(深淵) 속으로 끌어내렸다. 그를 강요하는 현실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약화와 정추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정려군의 싸늘한 일갈이 또 한 번 정추수에게 원하지 않는 행동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수! 그녀는 원수의 딸이다. 죽여라!" 자신을 저주하는 운명보다도 더욱 무서운 음성에 정추수는 화들짝 놀라며 정려군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정추수를 엄습했다. 그녀는 정추수가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고 있었다. "누님, 난... 그럴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 이때 매약화가 정추수를 가로막으며 악을 썼다. "추수! 난 당신을 저주해요. 이제 당신은 나의 아버님을 죽인 원수가 되었어요. 어차피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망설일 필요가 뭐가 있나요? 죽여요, 날 죽이란 말이에요!" 그녀의 눈빛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과 원한과 사랑에 대한 배반감에 휩싸인 광기가 두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발악하는 모습이 정추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복받히는 좌절과 절망감에 정추수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아니, 차라리 애원에 가까웠다. "누님! 난 약화를 죽일 수 없어요!" 정려군은 매약화를 사랑하는 정추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제 은원이 종결되면 정추수는 태행검파에서의 추억을 잊어야만 했다. 지금 그의 손으로 잔정을 떨쳐 버리지 않는다면 평생을 번민 속에서 살아 가게 될 게 분명했다. 정려군은 사랑하는 동생이 한 여자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걸 방관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정추수의 손으로 매약화를 죽여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괴롭다 할지라도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동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정려군은 울부짖는 매약화를 사정없이 밀어 넘어뜨렸다. 나약한 매약화의 신형이 매천악의 시신 위로 포개졌다. 연이어 정려군의 손짓에 따라 정추수의 뺨에 손자국이 새겨지며 고개가 한껏 젖혀졌다. "바보 같은 것! 그녀는 원수의 딸이다. 한낱 정에 얽매여 혈한을 제쳐 둔단 말이냐?" 매천악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기 전, 궁조생은 정추수를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정추수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두 마디의 처연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곽입지와 갈웅휘가 봉무구의 손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죽음에서 궁조생은 태행검파의 몰락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원가량과 배간이 죽었고, 지금 이 순간 곽입지가 죽었다. 동문사제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고, 매천악도 결국은 이곳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부님이 추수의 손에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얄궂은 운명은 그의 마지막 바람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정추수에게 다가가는 궁조생을 봉무구가 가로막은 것이다. 검을 휘둘러 물리치려 했지만, 불과 이 초식도 펼치지 못하고 완맥을 잡혀 검을 떨구고 말았다. 나이 어린 후배를 이기지 못하여 제지당하자 궁조생은 분노에 앞서 자신이 살아 온 삶이 덧없게 느껴졌다.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매천악의 죽음을 바라봐야만 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든 매천악의 최후... 절규하는 매약화... 죽은 줄로 알았는데 멀쩡히 일어나 웃는 정려군... 제자의 목숨마저 이용했던 매천악의 흉계... 그 흉계를 이용한 정려군의 간계... 세상 모든 것이 위선으로 느껴졌다. 이제껏 진리처럼 받들어 왔던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와 사람 사이의 정이 밀물에 스러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아아! 강호에 도의(道義)는 없었다. 멍청하게도 나 혼자만이 인륜과 성현(聖賢)의 그늘 속에서 살아 온 것이었어.' 슬퍼야 함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부질없이 여겨졌다. 몸 속이 텅 비는 공허감에 삶의 기운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그나마 그가 다시 기운을 추스를 수 있게 해준 것은 자신이 사부를 위해 최후로 할 수 있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매약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정려군은 정추수와 실랑이 끝에 설득을 포기하고 직접 매약화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궁조생은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가는 생각을 접어 두고 몸을 날려 매약화를 감싸안았다. 하얀 달빛에 드리운 정려군의 섬섬옥수가 허공에 멈추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손에 초점을 맞추며 궁조생은 결연하게 말했다. "추수, 그리고 정 소저. 난 이십 년 전 당신들을 구해 주었소. 내가 아니었다면 당신들은 오늘날 원한을 갚지도 못했겠지. 정 소저, 당신이 아직도 날 은인으로 생각한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시오. 나의 목숨을 대신하여 사매를 살려 주시오." 정려군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매천악은 당신의 사부라고 하나, 당신을 이용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어요. 어째서 당신이 그의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나요?" 궁조생은 정려군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를 보노라면 지난 사랑과 지금의 은원이 야기하는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조생은 머리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정려군의 동정을 사 매약화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내 어릴 적 고아가 되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사부님이 거두어 가르치고 길러 주셨소.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은목숨이라오. 난 사부님께 구명지은을 입은 몸이라 나의 목숨은 곧 그분의 것이오. 이제 사부님은 돌아가셨소. 그분 따님의 목숨이라도 구해 은혜를 만분지 일이나마 갚고자 할 따름이오." 정려군은 무릎을 꿇은 궁조생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속눈썹이 봄바람에 흐늘거리는 버들잎처럼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궁조생에겐 매천악의 피 냄새와 매약화의 원한이 짙게 밴 영겁과 같은 순간이었다. 이윽고 정려군의 입술이 경련과 함께 벌어졌다. 그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당신은 우리 남매를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사부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려 하는군요. 내가 아무리 한에 사무쳐 살생에 거리끼는 바가 없다고 하지만, 어떻게 당신 같은 이를 죽일 수 있겠어요? 지금 이 순간부터 난 태행검파의 사람들은 절대 해치지 않겠어요." 어쩔 수 없이 탄식하며 정려군은 등을 돌렸다. 그녀가 품어 온 연정은 이 순간부터 은원의 종결과 함께 사라져야만 했다. 이유야 어떠했든 궁조생은 사부를 죽인 그녀를 영원히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철골빙심(鐵骨氷心)의 그녀. 그녀의 마음속엔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매약화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정추수에게 달려들었다. 궁조생이 그녀를 껴안아 저지했다. 그러나 그녀의 저주 어린 외침은 막을 수 없었다. "추수! 당신은 사부를 죽인 배은망덕한 인간이에요. 당신이 지금 날 죽이지 않는다면 훗날 반드시 복수하겠어요.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말겠어요. 마교의 악마들을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겠어요. 난 당신을 저주해요!" 정추수는 이런 매약화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하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눈물이 시야를 가려 그녀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억눌린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정려군이 정추수의 손을 살포시 쥐며 위로했다. "네가 짊어져야 할 업보가 크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정추수에게 그녀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속의 울분이 터져 화산처럼 시뻘건 불덩이를 토해 낼 것만 같았다. '나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난 사부를 죽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누님이 죽었겠지. 누님은 나의 손으로 사부를 죽이도록 만들었어. 앞으로 약화는 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겠지. 이 모든 것을 난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리 되고 말았어. 우습구나, 우스워. 내 스스로가 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심화(心火)가 혈관 구석구석을 달리며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터지고야 말 그 심화가 입을 통해 터져 나왔을 때, "아아아-!" 정추수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추수!" 정려군이 놀라 소리쳤지만 정추수는 아랑곳 않았다. 상처에서 피가 쉬지 않고 흘러 족적을 남겼지만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불타고 있었다. 정추수의 정신과 몸과 마음이 모두 불타 오르고 있었다. 부딪히는 바람도 터져 나오는 울분에 타버려 뜨겁게만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이 불타 오르고 있었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6 장 길고 긴 한(恨)..... 제 26 장 길고 긴 한(恨) 또한 그러하더라 까닭 모를 불안감에 공손월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기필코 중대한 변고가 일어나리란 예감이 천근보다 무거운 중압감이 되어 그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바늘 같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신 뿜어대는 가쁜 숨, 그때마다 퍼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공손월은 지금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운표국의 북쪽엔 의정문과 광운보의 무사들이 마교의 무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공손월은 그들을 다그쳐 매천악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었다. 허물어진 폐찰을 지나 눈 위로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 반 시진을 달렸다. 그의 옆엔 무당사협이 굳은 표정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고, 뒤엔 매휘양과 진국충이 사력을 다해 따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 위에 신장(神將)처럼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나뭇가지들을 헤집으며 달려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조용하기만 하던 밤하늘에 한 여인의 절규가 들려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귀에 익었던 것이다. 등뒤에서 매휘양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약화...? 약화의 목소립니다, 사숙!" 붉게 상기되어 열을 발산하던 매휘양의 얼굴에 찬 기운이 벼락같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절규가 기다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질 무렵, 한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정추수의 것임을 공손월은 알 수 있었다. 일시 정지해 버린 공손월을 이봉이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공손 대협. 일이 심상치 않소."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던 일행은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발한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커다란 인영. 정추수였다. 공손월이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추수! 멈추어라!" 하나 정추수는 공손월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흐릿하게 움직이는 몇 개의 인영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정추수의 눈에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비켜라!" 광풍 노도와 같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정추수는 노호(怒虎)같이 일갈하며 그들에게 돌진해 갔다. "추수!" 설마 정추수가 덤벼들 줄은 예상 못 한 공손월은 망연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정추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위험하오, 공손 대협!" 제양과 희견이 공손월을 밀치며 정추수의 저돌적인 육탄공세를 막아갔다.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그들은 검을 뽑지도 못한 채였다. 두 사람의 무당면장(武當綿掌)이 정추수를 덮쳐 가는 순간, 정추수의 소매가 펄럭였다. 그리고 천심장의 음유한 기운이 제양과 희견의 장력을 뚫고 장심(掌心)으로 파고들었다. 좌우로 갈라지며 떨어지는 제양과 희견의 신형이 땅위를 뒹굴었고, "정 소협! 자네가..." 그 두 사람의 사이를 뚫고 튀어나온 정추수가 놀람 가득한 진국충에게 일장을 날리고 있었다. 손 한번 쓰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진국충을 뒤로하며, 정추수는 곧장 앞으로 내달렸다. 그의 앞길엔 동료의 죽음에 대로한 이봉과 혁승이 검을 뽑아 가로막고 있었다. "죽어랏!" 이를 갈며 필살의 검을 떨치는 이봉과 혁승의 공세에 정추수는 다시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거렸다. 틈을 주지 않고 정추수의 사혈(死穴)을 노리는 두 자루의 검에 떠밀려 정추수는 나무에 등을 기대면서도 천심장 기운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이와 함께 광기 어린 살기도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한 순간, 이봉과 혁승의 검이 각각 정추수의 심장과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수직으로 뛰어오르는 정추수의 발바닥을 스치며 혁승의 검이 나무에 박혔다. 동시에 정추수의 거대한 신형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두 사람 뒤로 떨어졌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두 사람이 나무에 등을 대고 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성을 잃은 정추수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흐흐흐!" 음침한 웃음과 함께 정추수의 쌍장이 교차되었다. 뒤이어 슬그머니 밀려드는 음유한 기운. 이봉과 혁승은 조금 전 제양과 희견을 죽인 이 기이한 무공을 직접 목격했다. 두 사람은 감히 맞받을 생각을 못 하고 좌우로 갈라져 피했다. 천심장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치며 나무에 격중되었다. 한데, 나무 뒤에서 짧은 비명과 함께 한 사람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 괴로움에 꿈틀거리는 그는 다름 아닌 매휘양이었다. 처음 이들에게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정추수는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이는 매천악에게서 입은 세 군데의 상처에서 흐른 피 때문이었는데, 그 형상이 매휘양이 보기에 악마와도 같았다. 게다가 일장에 제양과 희견을 격살하자 두려움을 금할 길이 없어 그는 나무 뒤로 숨어 버렸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이봉과 혁승을 공격한 천심장이 나무를 뚫고 들어와 매휘양의 심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정추수에게 상처를 입힌 이는 매천악이었고, 그 상처의 피로 끔찍한 모습을 한 정추수 때문에 나무 뒤에 숨었다가 정추수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매휘양은 부친 때문에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저 세상일이란 참으로 묘하다고 할 수밖에. 한편, 정추수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제양과 희견, 진국충을 죽이자, 공손월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사질이기에 그 분노는 더욱 큰 것이었다. "추수! 넌 이미 악마가 되었구나!" 그는 노성(怒聲)을 터뜨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정추수의 천심장을 피해 흩어지는 이봉과 혁승, 그리고 등을 돌리고 선 정추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를 악물며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 그의 머리를 타고 넘는 인영이 있었다. 놀랍도록 날렵한 그 인영은 바닥에 착지하지도 않고 이 장을 더 날아가더니 이봉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 검에서 새파란 검기가 일었고, 억! 하는 비명과 함께 이봉의 신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 인영은 이봉을 죽인 즉시 혁승에게 다가가 일검을 날렸고, 혁승 또한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두 명의 고수를 죽여 버린, 일견해서 가냘프기 그지없는 인영은 정려군이었다. 혁승마저 죽자 정려군은 신형을 멈추고 공손월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일렁이는 눈동자는 별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눈빛은 비수보다도 날카롭게 공손월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 못 할 정려군의 신위에 공손월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졌고, 대신 두려움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거수지로(擧手之勞)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을 공손월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내 싸늘한 시선을 거두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정추수를 뒤쫓아갔다. 아직도 정려군은 살기가 가시지 않아 적이라면 누구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궁조생에게 한 약속을 상기하여 공손월은 살려 준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공손월은 한동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작 긴박한 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아하!" 공손월은 막힐 듯한 숨통이 터지자 일순 전신이 무기력해져 검을 떨구고 말았다. 이때, 이봉과 혁승이 쓰러져 있는 근처의 나무 뒤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휘양?" 그제야 매휘양의 존재를 깨달은 공손월이 화급히 다가갔다. 매휘양은 입에선 피를 흘렸고, 눈에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손월이 부축하자 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사숙, 사숙, 난..." 쥐어짜듯 밀려나오는 목소리가 그의 얼굴 근육을 묘하게 비틀고 있었다. 매휘양은 죽고 싶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매천악은 아들인 그에게조차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깊은 내막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매천악이 왜 이곳에 왔으며, 자신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정추수는 왜 그토록 광분하여 살겁을 일으켰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가 공손월에게 하려던 말은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고 싶어하는 열망도 잠시, 매휘양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고 말았다. 세상엔 끝없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있는 법. 누구든 성(盛)을 바라지 쇠(衰)함을 원하지는 않는다. 공손월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품속에서 매휘양이 죽었다. 매천악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걸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아 온 동문들과 제자들이 대부분 죽어 버린 지금, 그에게 운명으로 다가온 것은 사문의 몰락이었다. 공손월은 매휘양의 시신을 꼭 껴안으며 나직이 흐느꼈다. * * * "어찌 되었나?" "공야직은 더 이상 쫓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홍희를 보며 위지광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바보 같으니!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망치고 말았어." 행장을 제대로 추스를 여유도 없이 위지광 일행은 도망쳐야만 했다. 공손월이 떠나기 전 남긴 말에 위지광은 긴급히 수하들을 정비하여 뒤를 따랐다. 하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공야직에게 제지를 당하자, 위지광은 중대한 위기를 맞았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위기라는 것엔 매천악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시세가 글렀음을 깨달은 위지광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공야직과 자웅을 겨룰 마음이 나지 않았다. 적당히 겨루다가 기회를 틈타 외진 곳으로 숨어든 위지광은 수하들을 풀어 주변 정황을 탐색케 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매천악의 생존 여부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마교와 생사일전을 벌일 만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난 범의 아가리로 들어온 셈이 된다.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될 수도 있어.' 위지광은 초조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때 위지광이 하는 양을 말없이 바라보던 동철비가 다가와 따지듯 물었다. "위지 형, 조금 전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망치고 말았다는 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오?" 속이 뜨끔해진 위지광이 정색하여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능청떨지 마시오! 이렇게 된 마당에도 날 속이려 하시오?" 따지듯 묻는 동철비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속이다니? 내가 동 형에게 무얼 속였단 말이오?" 동철비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옆에서 겪고 들은 바를 분석하여 전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은 매천악과 위지광의 상대가 되지 못하므로 마음속에 눌러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위지광이 발뺌하자 더욱 가증스럽게 여겨져 동철비는 건곤권을 치켜들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태세로 소리쳤다. "그대는 정씨 가문의 진경을 얻기 위해 매천악과 짜고서 우리들을 이용하지 않았느냐! 이제껏 죽어 간 친우들의 죽음에 그대는 어떻게 사죄하려는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이에 녹야극이 다가와 동철비를 만류했다. "왜 이러십니까, 동 대협? 합심하여 적을 상대해도 위급한 판에 내분을 일으키면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고정하시오." 위지광의 농간 때문에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자 통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누이동생을 간살한 흉수가 위지광이나 매천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껏 이용만 당한 자신이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장의 적을 상대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일단은 살아야 과거의 은원을 가릴 수 있지 않겠는가? 동철비는 분노로 숨을 씩씩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거두었다. 이치대로라면 위지광은 동철비에게 백배 사죄를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면 부끄러움보다는 이를 숨기기 위한 분노가 앞서는 법이었다. 게다가 사문의 존망이 걸려 심란하기 짝이 없는 지금 동철비가 시비조로 따지자 위지광은 살기가 불끈 솟았다. 그의 눈에 핏발이 불거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동철비를 죽여 자신의 죄과를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강적을 눈앞에 둔 터라 한 명의 고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위지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살기를 억눌렀다. '만약 우리가 살아남게 된다면 제일 먼저 네놈부터 죽여 주마.' 내심 살의(殺意)를 다지는 그에게 녹야극이 다가왔다. "문주, 이렇게 물러나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섬멸함이 어떻겠습니까?" "안 될 말! 만약 매천악이 이미 죽었다면, 우린 상대가 되지 않아." "그렇다고 저들이 우리를 순순히 놓아 줄 리는 더욱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공야직과 처음 마주쳤을 때 끝장을 봤어야 했다고 녹야극은 생각했다. 다른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적어도 공야직과 겨룰 땐 신검문의 힘이 훨씬 우세했던 것이다. '그때 있는 힘을 다해 공야직을 죽였더라면 이토록 상황이 어렵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을...' 녹야극은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손에 땀을 쥐며 정탐 나간 이들의 소식을 기다린 지 반 시진이 흘렀을 때, 신검삼호 중 제갈후와 모경이 다급히 외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매 장문은 어떻게 되었는가?" 초조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지만 위지광은 두 사람의 절망적인 표정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읽어 내고 있었다. "매 장문뿐만 아니라 곽 대협, 무당사협이 모두 죽었습니다." 위지광과 녹야극이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무당사협까지?" "그렇습니다, 문주. 태행검파에서 살아남은 자는 공손 대협과 궁조생뿐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군." 위지광은 다시 묻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결과를 되짚어 본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검문으로 돌아간다." 위지광은 서둘렀다. '최소한 일가의 힘없는 아이와 아녀자들이라도 피신시켜야 한다.' 자신이 무사히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검문이 전력을 다해 대항해도 그 결말이 어떠하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위지광을 따라 신검문으로 돌아가는 신검삼호와 홍희는 다가올 암담한 미래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역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그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이른 새벽 먼동이 틀 무렵, 일행은 교산(敎山) 기슭에 이르렀다. 잠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저마다 자리를 골라 퍼더버렸을 때, 위지광은 자신의 두 아들인 위지혁과 위지천을 몰래 불렀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사기는 두 아들에게도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위지광은 피로가 역력한 아들에게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혁아, 천아 이제 매천악이 죽었으니 우리는 화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들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면 결코 살려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난 신검문으로 돌아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할 것이니 너흰 지금부터 살길을 도모하여라." 위지혁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직 승세가 판가름나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의 지주이신 아버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어찌 아버님을 두고 저 혼자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버님과 생사를 함께하겠습니다." 의기 분분한 위지혁과는 달리 위지천은 입도 벙긋 못 하고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친이 승리를 포기한 이상 자신의 앞길엔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 위지광이 화를 내며 위지혁을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너희가 가문의 대마저 끊어 버리려 하느냐? 내가 없으면 저들은 우리를 죽이려 중원 끝까지라도 쫓을 것이다. 내가 신검문에서 저들과 겨루어 이기면 다행이고, 지더라도 나의 죽음을 확인할 터이니 구태여 너희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가문을 위한 마지막 대계(大計)이니 넌 나의 명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아버님!" 부친의 뜻이 완강한지라 위지혁은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이때까지도 위지천은 몸을 벌벌 떨며 서 있을 뿐이었다. 이를 보며 위지광은 속으로 탄식했다. '둘째는 겁이 많고 심계가 얕아 대사를 도모할 인재가 되지 못한다. 신검문으로 데리고 간들 적이 나타나면 지레 놀라 죽고 말 것이다. 믿을 것은 첫째밖에 없고, 둘째가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첫째에게 딸려 보내야겠구나.' 위지광은 품속에서 양피두루마리 하나와 은빛이 반짝이는 작은 단검을 꺼내 들며 다시 탄식했다. "이 신검령이야 너도 잘 알겠지만, 이 진경은 처음 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분에 넘치는 과욕이 오늘의 화를 부른 셈이야." 위지광은 두루마리와 신검령을 위지혁에게 건넸다. 위지혁이 눈물을 흘리며 받으려 하지 않자 위지광이 화를 버럭 냈다. "아비의 뜻을 받들지 않으면 그게 바로 불효이니라. 네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려 하느냐?" 이미 위지광의 의도가 확고하여 거역할 수 없음을 느낀 위지혁은 마지못해 신검령과 진경을 받아 들었다. 위지광의 말이 계속되었다. "이 진경엔 도마의 광명도법이 적혀 있다. 이 아비가 산서제일의 고수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광명도법 덕분이었지. 이제 혁아, 너를 신검문의 사 대 문주로 봉한다. 내가 죽더라도 넌 반드시 살아남아 신검문을 재건해야 한다. 알겠느냐?" 위지혁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넌 이 길로 적의 손길이 닿지 않을 곳으로 피신하거라. 너의 어깨에 신검문과 가문의 영화가 걸려 있다. 넌 신검문 최후의 희망임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해야 한다." 이어 위지광은 측은한 눈빛으로 위지천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죽음을 보고 싶어하는 아비는 없다. 너도 형을 따라 살길을 도모하도록 해라." "아버님, 흑흑!" 비록 죽음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위지천이었지만, 막상 부친이 자신을 걱정하자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서 가거라."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위지광은 짧고 냉담하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신검삼호에게 다가갔다. 신검삼호는 위지광이 두 아들에게 남겼을 말들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신검삼호는 위지광의 조치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만, 마음 저편에선 신검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려 오고 있었다. 그들은 묵묵히 일어나 다가오는 위지광을 맞이했다.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그 눈빛을 타고 흐르는 무언(無言)의 비감이 서로의 마음을 구슬프게 했다. "다시 출발한다. 오늘 중으로 신검문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지광의 결의에 찬 명령과 함께 일행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터전인 신검문을 향해... "위지광이 이곳을 지나간 지 한 시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등고의 말을 들으며 정려군은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파란 물이 금세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가 콧잔등을 상쾌하게 간질였다. 정려군은 눈을 지그시 감고 바람이 실어 오는 흙 냄새를 흠뻑 들이켰다. '오늘밤이면 모든 은원이 매듭 지어질 것이다.' 지난 이십 년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한이었다. 그 한을 불러일으켰던 흉수는 모두 죽고 위지광과 동철비만이 남았다. '오늘밤 그 둘의 목을 베어 아버님 영전에 바치리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 산서 땅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녀에게 산서 땅은 기억하기 싫은 악몽의 땅이었다.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저주의 땅이었다. '나의 사랑스런 동생과 함께 이곳에서의 기억을 묻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가리라.' 정려군은 갑자기 애틋한 표정이 되어 정추수를 바라보았다. 정추수는 지난밤 참사가 일어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수염이 날리건만 정추수의 눈동자는 석상의 그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보구천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정 숙부님께서 상심이 큰 모양입니다. 저러다가 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보구천의 말은 아릿한 아픔이 되어 정려군의 가슴을 찔렀다. 정려군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천심장은 오행(五行) 중 화(火)의 기운을 바탕으로 수련하기 때문에 이를 수련한 이는 자칫 감정이 격해지기 쉬워. 따라서 심마(心魔)가 들면 인성(人性)을 잃게 되지. 나의 육 대 조부께서 잔인한 살수를 펼쳐 도마란 이름을 얻게 된 건 바로 천심장 내공을 익혔기 때문이야. 그분은 말년에 이르러 이를 후회하고 후손들에게 장한진경을 익히지 말도록 당부하신 거야. 지금 추수는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이성을 잃게 되니... 휴우!" 정려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추수의 마음이 불안정한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추수의 몸은 신검문을 향하고 있었지만, 매약화를 애타게 그리는 마음은 아직도 그 처절한 현장에 있었다. 눈물이 바람에 말라 버리는가 싶으면 이내 흘러내려 볼을 적셨다. 매천악의 음흉한 웃음과, 매약화의 그 처절했던 울부짖음, 그리고 정려군의 서슬 퍼런 음성이 그의 기억 속에서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피눈물을 흘리는 매약화의 모습이 자꾸만,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추수는 지금 조용히 앉아 있는 가운데 그 사라져 가는 기억의 편린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천아! 이대로 우리만 갈 수는 없다. 아버님과 처자를 남겨 두고 나 혼자 도망갈 순 없어." 위지혁의 결연한 말에 위지천이 놀라 물었다. "그럼 어찌하시렵니까?" "신검문으로 돌아가야지." "신검문으로?" 위지천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답이 위지혁의 입에서 나왔다. 위지천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정려군의 무시무시한 신위와 그녀의 검에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위지천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아버님께선 우리더러 훗날을 도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우린, 우린..." "죽음이 두려우냐?" "..." 위지천은 형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후줄근한 땀방울이 그의 등을 타고 흘렀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겐 부모와 처자의 목숨보다도 자신의 죽음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위지천은 정녕 죽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위지천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위지혁은 동생을 나무랄 수 없었다. 그 역시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자신에겐 가족을 저버리고 혼자 살아 갈 용기가 없다는 것이라고 위지혁은 생각했다. "그래, 우리 모두가 죽을 필요는 없겠지. 아버님 말씀대로 우리들 중 하나가 살아남아 대를 잇는 것도 선조님들에 대한 중요한 효도라 할 수 있겠지." 위지천은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은 죽음이 두려워 신검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형을 만류할 수도 없었다. "형님!" 위지천은 눈물을 흘리며 형의 손을 잡았다. 위지혁이 싱긋 웃으며 동생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형으로서 너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겠다. 아버님과 나와 가족들에 대한 미련은 떨쳐 버리도록 해라. 넌 반드시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 우리 가문을..." 위지혁은 눈물을 감추려 등을 돌려 뛰며 소리쳤다. "우리 가문을 재건해야 한다!" "형님! 으흐흐흑..." 위지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용기없는 자신이 한없이 저주스러웠다. 죽도록 미웠다. "짚단을 쌓아라! 정원과 전각 구석구석에 짚단을 쌓고 기름을 뿌려라!" 위지광은 잠시도 쉬지 않고 수하들을 독려했다. 신검문의 무사들은 마교의 내습에 불안해 하는 기색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두 시진 전에 해가 져 어둠이 사위에 가득했다. 그 어둠이 위지광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의 광명도법은 어둠 속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녹야극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문주, 신검문의 모든 건물을 태울 셈이오?" 그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위지광이 쌍심지를 돋우며 소리쳤다. "우리가 지고 나면 이따위 건물이 무슨 소용인가? 마녀만 이길 수 있다면 건물은 언제든지 다시 지을 수 있어. 지금은 불빛이 필요해. 태양 같은 밝은 빛이 필요해. 불빛이!" "우리야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지만 나머지 처자권속(妻子眷屬)들은 어찌하려 하오? 그들은 적의 검이 다가오기도 전에 불에 타 죽고 말 것이오." "그들은, 그들은..." 위지광의 얼굴에 괴로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위지 가문에 딸린 처자들은 스무 명이 넘었다. 뿐만 아니라 신검삼호를 비롯해 신검문에 몸담고 있는 주요 인물들의 식솔을 모두 합하면 백 명을 훨씬 웃돌았다. 애초에 신검문으로 돌아올 때 그들을 신검문 밖으로 피신시킬 계획이었으나, 마교의 인물들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느새 황산박룡 등고와 회선쌍검 구화성, 그리고 금응방주 용문원 등이 수하들을 이끌고 신검문을 포위해 버린 것이다. "으으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위지광의 악 다문 이빨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그에겐 고민할 시간조차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위지광이 쓰라린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녹 사제, 그들을 모두 창덕전(昌德殿) 아래의 지하석실로 들여보내게. 나의 처와 가족들도 모두!" 녹야극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하석실로 말입니까?" "그렇다, 지하석실이다. 그곳 외엔 대안이 없지 않느냐?" "하지만..." 창덕전은 높이 오 장이 넘는 삼층의 대형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하석실은 창덕전 아래,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건물이 불타 버린다면 지하에 숨는다 해도 짓누르는 열기에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위지광의 말대로 대안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경과로 보아 마교의 일당은 아녀자라고 해서 자비를 베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녹야극은 어쩔 수 없이 수하들을 시켜 아녀자들을 창덕전의 지하석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울부짖는 처자권속들을 보자 위지광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무사들에게 떠밀려 창덕전으로 가면서도 연신 남편과 가족들을 찾았다. 문득, 무리에 휩쓸려 가는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이 위지광의 눈에 띄었다. 위지광의 볼이 실룩이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중 나이 어린 여아(女兒) 하나가 무리에서 빠져 나와 울면서 위지광에게 달려왔다. 이제 갓 열 살쯤 되어 보였는데, 그녀를 보는 위지광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그녀는 위지천의 딸, 즉 위지광의 손녀였던 것이다. 그녀가 위지광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초롱초롱하기만 한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흑흑! 할아버지, 아빠는 어디에 있어요? 사람들의 말이 우린 모두 죽을 거래요. 사실인가요? 묘아(妙兒)는 죽기 싫어요, 할아버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아의 가녀린 손이 위지광의 가슴을 울렸다. 위지광이 입술을 떨며 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묘아, 걱정 말아라.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할아버지가 항상 들어주지 않았니? 오늘밤만 지나면 예쁜 선물을 잔뜩 사다 주마. 착하지, 우리 묘아. 어머니를 따라가거라." 끝내 참지 못한 위지광의 눈물이 여아의 머리에 뚝뚝 떨어졌다. 위지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근처의 무사에게 명했다. "묘아를 석실로 데려가거라, 어서!" 여아는 무사에게 끌려가면서도 바동거리며 울부짖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할아버지! 아빠가 보고 싶어요!" 위지광의 굳게 다문 이빨 사이로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흑!" 제자리에 선 채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떠는 위지광. 돌연 그는 허공을 움켜잡듯이 두 팔을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절규했다. "빛! 빛이 필요해! 기름을 뿌려라! 짚단에도, 회랑에도... 이곳에 있는 기름은 모두 뿌려라-!" 동철비는 마치 딴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위지광이 하는 행동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철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공포에 떨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담담해졌다. 그 대신 이런 결과를 초래한 위지광에 대한 증오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다가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제법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신검문 무사들의 모습이 아녀자들의 울부짖음과 교차되면서, 그의 눈엔 난무하는 불꽃과 피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가는 신검문의 최후가 연상되었다. 문득 허탈한 웃음이 헝클어진 콧수염을 흔들며 터져 나왔다. "허허허허..." 자신이 살아 온 생과 매천악의 죽음, 위지광의 위선이 모두 허허롭게 여겨져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아우성과 어지러이 땅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헤집고 피리 소리가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신검문의 웅장한 건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탕산(湯山) 중턱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정추수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피리 소리의 주인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나무조차 가리지 못한 높은 바위에 올라 피리를 부는 정려군의 하늘거리는 몸매가 달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피리 소리는 기이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힘은 심란하기만 하던 정추수에게 숨을 고르게 하고 기력을 되찾게 했다. 어느 순간 답답하던 숨통이 뚫리며 정추수는 길게 숨을 토해 내었다. 요요(夭夭)한 달빛 아래서 피리를 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와도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흉신악살처럼 피를 부르던 악귀의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정추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비하기도 하구나. 저 피리엔 어떤 내력이 있기에 이토록 고아한 정취를 자아내는 걸까?" "본 교의 호교무공(護敎武功)인 섭심대법(攝心大法)이지요." 정추수 곁엔 어느새 보구천이 다가와 있었다. "섭심대법...?" 정추수가 중얼거리자 보구천은 정추수의 의식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라 여겨 즉시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상대의 심령(心靈)을 제압하는 내가공부(內家工夫)의 일종입니다. 목소리, 혹은 악기 소리에 내공을 실어 시전하는데, 듣기로 섭심대법을 극성까지 연마하면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여 종복처럼 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정추수의 얼굴에 언뜻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와 싸울 필요도 없지 않겠소? 섭심대법을 이용하면 상대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인데." "하하하! 섭심대법은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합니다. 본 교의 역대 교주님들 중에서도 섭심대법을 극성까지 연마한 분은 아직 없어요. 제 사부님께서도 소리를 이용해 상대의 심기를 흩뜨리는 게 고작이지요. 특히 상대가 내공이 고강한 고수일수록 섭심대법을 사용하는 데 더욱 많은 공력을 소모해야 합니다. 따라서 순식간에 상대의 심령을 제압하여 굴복시키는 경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결전을 앞에 두고서 적들의 사기를 흩뜨리는 데는 효과가 크지요." 보구천의 설명을 듣고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정추수의 표정은 아직도 어색한 데가 있었다. 정추수의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피며 보구천은 내심 안도했다. '아직 온전치는 않지만 숙부의 정신이 약간은 돌아온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득, 두 사람과 십여 보 가량 떨어진 곳에서 시를 읊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눈비 맞은 옷자락 삭풍에 나부끼는데 방갓엔 반쪽 달 위태로이 걸려 있구나 공야직이 바위에 선 정려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봉무구가 손뼉을 치며 히히덕거렸다. "때마침 반달이 사고의 머리에 걸려 있으니 장로님의 시가 정말 운치 있네요." 이를 보며 보구천이 씁쓸히 뇌까렸다. "피를 부르는 결전이 임박한 이때에 시를 읊으시다니, 장로님의 취미는 참으로 묘하단 말이야." 정추수 일행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피리 소리는 신검문의 무사들에게는 피의 서막(序幕)을 알리는 전장의 북 소리보다도 더 섬뜩하게 들렸다. 피리 소리가 고저(高低)를 반복할 때마다 신검문 무사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요동치고 있었다. 겨우 마음의 평정을 찾던 동철비도 섬뜩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위지광에게 다가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마녀가 부는 피리 소리외다. 이 피리 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힘이 담겨 있으니 수하들이 귀를 기울이게 해서는 아니 되오." 위지광은 결전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위지광은 커다란 애검(愛劍)을 불끈 쥐며 모든 수하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높여 호령했다. "이제 적의 내습이 있을 것이다. 모두 피리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을 굳게 다지라!" 그의 일갈이 효험을 발휘해서인지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피리 소리가 끊어졌다. 그리고 뒤따르는 침묵. 이 침묵이 신검문 무사들의 마음을 다시 동요시키기 시작했다. 불안과 초조가 전염병처럼 무사들의 눈동자에 퍼져 나가기 시작할 무렵, "으-악!" "마교다!" 처참한 비명 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밖으로부터 들려 왔다. 동시에 위지광은 있는 힘을 다해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짚단에 불을 놓아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드넓은 신검문 곳곳에서 화광(火光)이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길과 불길이 연결되며 위지광이 서 있는 커다란 정원을 붉게 물들였다. 신검문에는 크고 작은 정원이 수십 개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정원이 위지광이 지금 서 있는 무량원(無量園)이었고, 신검삼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수들이 이곳에 운집해 있었다. 외곽 경비를 서던 수하들이 분분히 무량원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불꽃은 사람의 키를 넘어 무량원 구석구석을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 불꽃이 이글거리는 담을 비조처럼 넘어오는 신형들이 있었다. "왔구나!" 동철비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정려군과 공야직을 필두로 마교의 고수들이 속속들이 무량원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비록 수적으로는 신검문에 비할 바 아니었으나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이라 무량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불과 서너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네 명의 무사들을 죽이는 정려군을 향해 위지광이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정려군은 화광에 붉게 반사되는 위지광의 검이 다가오자 지체 않고 마주쳐 갔다. 정려군의 조그마한 신형을 삼켜 버린 휘황찬란한 검광과 마치 공기를 영원히 갈라 놓을 것만 같은 위력의 검법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마교와 신검문의 고수들은 행여 위지광의 공격권에 들세라 분분히 물러나기에 바빴다. 하나, 그토록 강맹해 보이는 위지광의 공격에도 정려군은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 듯 마음대로 공격권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정려군의 패검은 위지광의 검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패검에서 뻗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검기는 위지광의 검광을 여지없이 꿰뚫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위지광의 검법은 보운표국에서 정려군과 겨룰 때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순간, 두 신형이 엇갈리며 나직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위지광의 것이었다. 그의 옆구리에 가는 혈선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선혈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찌푸려지는 위지광의 얼굴을 보며 정려군이 조소했다. "위지광, 신검문 전체를 태운들 태양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넌 정씨 가문의 무공을 훔쳐 명성을 얻었으니, 이제 정씨 가문의 무공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는 네가 저지른 죄과에 대한 인과응보이니 억울하게 생각하진 말아라." 평소의 위지광이라면 정려군의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당장에 찢어 죽이려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는 불리하고 자신이 지면 모든 일가의 생명들도 끝장이라 생각하자 노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문의 고수들은 악전고투(惡戰苦鬪)를 거듭할 뿐 희망적인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위지광의 마음을 더욱 짓누르는 건 조금 전 손녀딸의 울먹이던 모습이었다. 사랑스런 손녀와 며느리들이 모두 죽게 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위지광은 모진 결심을 하고 정려군에게 말을 건넸다. "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이냐?" 정려군은 여전히 비웃음을 입에 문 채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내밀었다. "만약 내가 순순히 목숨을 내어 준다면 나의 가족들을 살려 줄 수 있겠느냐?" 의외의 말에 정려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모두 살려 달라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철모르는 어린것들의 생명은 구태여 빼앗아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위지광으로선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을 참으며 한 말이었다. 하나, 곧 이어 터져 나온 정려군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호호호호! 가증스럽구나, 위지광! 너흰 우리 정씨 가문의 사람들 중 남녀노소를 가리고서 살겁을 저질렀느냐? 흥! 이제 와서 내게 자비를 구하려 하다니..." 정려군은 검봉으로 위지광을 가리키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위지씨 성을 가진 자와 너를 위해 신검문에 몸담은 이는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정려군의 매정한 거절에 위지광은 정려군에게 부탁한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과연 마녀다운 대답이로군. 일말의 기대를 한 내가 어리석었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족들의 목숨을 걸고 정려군과 싸우는 것뿐이었다. 위지광은 수치심을 감추려 필요 이상으로 길게 고함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커다란 검봉이 흔들거리더니 낚싯바늘에 걸린 잉어처럼 요동치며 빛을 뿌렸다. 광명도법은 넓은 검신을 이용해 빛을 반사시킴으로써 상대의 시각을 마비시켜 수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수법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광명도법을 펼치면 상대는 눈으로 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어 방어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정려군은 이런 어려움을 훌륭하게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검의 변화를 파악하는 무상심법(無常心法)이었다. 정려군은 원수가 광명패월도법을 익히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지난 이십 년 동안 피나는 수련을 통해 무상심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무상심법의 이치는 무림에 알려졌으되, 그 수련의 험난함 때문에 이를 터득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오로지 복수의 일념으로 이십 년간 참수하여 이 어려움을 이겨 냈고, 그 때문에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 이름을 떨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위지광이 다시 광명도법을 펼치자 정려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위지광의 검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광명도법은 강력한 이점과 힘을 가지고 있는 대신 변화가 비교적 단순했다. 위지광의 검은 정려군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초식이 거듭될수록 위지광은 허점을 드러내며 물러서기에 급급했고,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위지광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듯 비틀거릴 때, "아버님!" 다급하게 외치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드는 인영이 있었다. 정려군과 위지광의 대결이 지속되는 동안 정추수는 신검삼호의 모경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모경은 공손월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된 데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정추수의 거센 기세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주위에서 들리는 건 신검문 무사들의 비명뿐이라 정신이 더욱 산만해졌다. 그는 검을 휘둘러 정추수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상태로 이십여 초가 지나자 가랑비에 옷 젖듯 천심장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이십여 초가 지나자 마침내 천심장 기운이 혈맥을 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일단 천심장 기운이 체내에 일자 진원진기가 산산이 부서져 버려 수족(手足)이 마비되었다. 이 틈에 정추수의 일장이 모경의 가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결국 모경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즉사하고 말았다. 정추수는 모경을 죽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야직은 신검삼호 중 녹야극과 제갈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황산박룡 등고는 벌써 홍희를 죽인 후 나머지 신검문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었고, 보구천은 동철비를 여유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동철비가 심원에서 고죽검 유권을 죽였을 때, 보구천은 이후 기회가 오면 반드시 동철비를 사로잡아 유검학에게 넘겨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오늘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유검학은 검법 수련에 입문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적과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살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정려군을 끈질기게 따라다닌 터라 동철비가 보구천의 손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손은 부친이 쓰던 검을 꼭 쥐고 있었다. 유검학은 그 검으로 동철비의 심장을 찌를 순간을 노리며 두 사람의 대결 현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신검문 무사들은 구화성과 용문원이 이끄는 고수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도살되고 있었다. 시세가 기울어 도망가려는 자들의 아우성과 마교 고수들에게 쓰러지며 터져 나오는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주위는 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급속도로 번지는 불길에 시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었다. 무량원을 감싸고 있던 네 채의 전각에도 불이 붙어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비록 매천악이 죽은 후 이곳으로 오면서 살기가 치솟아 원수의 무리를 멸하리라 결심한 정추수였지만, 이와 같은 참사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한 인영이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불길이 오르기 시작한 담을 뛰어넘어 정려군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정추수가 본 건 바로 이때였다. 그 인영은 위지광이 신검령을 전했던 위지혁이었다. 그는 부친이 정려군의 검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괴성을 지르며 정려군에게 달려들었다. 후사를 위해 떠나 보냈던 위지혁이 갑자기 나타나자 위지광은 대경하여 소리쳤다. "여긴 왜 왔단 말이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지혁은 정려군의 검에 심장을 찔리우고 말았다.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는 위지혁의 심장엔 아직도 정려군의 검이 꽂혀 있었다. 위지광의 안타까운 외침을 들으며 정려군이 웃었다. "이 녀석이 네 아들놈이냐? 호호호! 잘되었다, 잘되었어. 이렇게 돌아와 몸소 찾는 수고를 덜어 주다니." 정려군은 보란 듯이 위지혁의 머리채를 잡고서 그의 시신을 불길 속으로 던져 버렸다. "혁아-!" 이미 기력이 다하여 쓰러진 채, 위지광은 시뻘건 화광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시신을 보며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이런 그의 모습에 정려군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흐으으! 이 마녀!" 위지광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희망이 사라지자 위지광은 더 이상 삶을 도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아아아-!" 그는 상심이 지나쳐 최후의 힘을 짜내 소리치더니 분수같이 피를 토하고 경련하다가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위지광은 당대를 울릴 만한 무공을 지니고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정려군은 위지광에게 다가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목을 베어 치켜 들었다. "오호호호호-!" 위지광 부자를 죽인 후 미친 듯이 웃는 정려군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악귀를 연상케 했다. 정추수는 위지광 부자의 최후와 정려군의 지독한 수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가문의 복수라는 명분 아래 추호의 사정을 두지 않고 사람을 도살하는 정려군과 마교의 인물들을 보며 정추수는 비탄지감을 가눌 수 없었다. 문득,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저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갑자기 자신이 살인마가 되었음을 알게 되자 주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동철비는 사력을 다해 보구천을 상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보구천의 도에 십여 군데 상처를 입으면서도 악전고투하다가 결국 오른쪽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으며 건곤권을 떨어뜨렸다. "아아!"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동철비는 탄식을 터뜨렸다. "동철비! 네가 고죽검을 죽일 때에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지?" 보구천의 조소 어린 말에 동철비는 눈을 감아 버렸다. 동철비에겐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보구천이 유검학에게 손짓했다. 유검학이 다가오자 보구천은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검학, 이제 너의 손으로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 유검학은 지체 않고 동철비에게 다가가 검으로 심장을 겨누었다. "동철비! 결국은 오늘 같은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죽기를 각오한 동철비는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린놈이 어른을 능멸하려느냐? 어서 죽여 네 부친의 원한을 갚아라!" "좋다! 이제 죽여 주마." 유검학의 검이 동철비의 가슴을 깊숙이 꿰뚫었고, 동철비는 입을 벌린 채 몇 번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유검학은 동철비의 심장을 찌른 검을 빼어 들었다. 뜨거운 피가 검신을 타고 흘렀다. 유검학은 혓바닥으로 검신을 핥은 후 검을 높이 치켜 들며 외쳤다. "아버님! 소자 검학이 아버님의 검으로 원수를 찔러 죽였으니, 구천에서나마 원을 푸시옵소서!" 동철비를 끝으로 장내엔 반항하는 신검문의 고수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정려군 일행이 신검문을 공격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백 명이 훨씬 넘는 신검문의 고수들이 모두 죽어 간 것이다. 정려군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위지광의 식솔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등고가 다가와 대답했다. "불길만이 거셀 뿐 어느 곳에서도 아녀자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정려군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위지광이 무슨 여유가 있어 그들을 빼돌렸겠느냐? 다시 한 번 찾아보아라." 이때, 공야직이 다가와 정려군을 만류했다. "려군, 불길이 거세니 우리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그들은 내버려두도록 하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어찌 화근이 될 씨앗을 남겨 두겠습니까? 위지광의 식솔들은 분명 신검문 내에 숨어 있을 거예요. 그들을 반드시 찾아야 해요." 악착 같은 정려군의 말에 모두가 속으로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공야직이 눈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여 나무랐다. "시간이 없다, 려군. 그리고 어찌 그리도 마음을 독하게 쓰느냐? 원한을 갚았으면 족하게 여길 것을!" 공야직의 꾸짖음이 아니라도 주위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정려군은 아쉬움에 발을 구르다가 문득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곳엔 아직 불타지 않은 전각이 한 채 있었다. "위지광이 왜 저곳엔 불을 지르지 않았지?" 그녀가 검으로 가리킨 곳은 창덕전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숨어 있는 석실이 그 지하에 있어 신검문의 무사들은 차마 불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지만, 총명한 정려군은 이내 연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등고가 창덕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건물에도 이미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바람이 거세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소할 것입니다." 정려군은 창덕전을 잠시 노려보다가 어쩔 수 없이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철수한다. 등고! 넌 동철비의 목을 베어라." 마지막 명을 내리며 무량전을 벗어나는 정려군을 보면서 공야직은 나직이 혀를 찼다. "너무 잔인해. 결국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이거늘, 어찌 자신의 원한만 생각한단 말인가...?" 정추수의 일행이 모두 물러간 뒤에도 화마는 지칠 줄을 모르고 신검문의 모든 자취들을 태워 버렸다. 바람이 불길을 재촉하고 불길이 다시 바람을 일으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밤새도록 타오르던 불은 먼동이 틀 때부터 내린 눈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시진이 지나 해가 중천을 향해 달려갈 무렵엔 몇 줄기 연기마저 눈에 눌려 버렸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이 황폐한 잿더미를 차곡차곡 덮어 가고 있었다. 신검문의 영화(榮華)는 그렇게 눈 속에 사라져 갔다. 신검문이 멸망한 지 사흘이 지났다. 언제 끔찍한 혈겁이 있었냐는 듯 대지를 하얗게 덮은 흰 눈이 달빛을 받아 은은한 정취를 풍기는 자정 무렵, 한 인영이 나타나 신검문의 자취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 흐느끼다가 울부짖고, 그러다가 웃기도 했는데, 밤새도록 맨손으로 눈을 헤집고 있었다. 그의 손에 타다 만 시신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목 없는 시신 한 구를 발견하고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던 그는 문득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교여! 반드시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사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데... 인간사에 무심한 달빛은 교교(皎皎)한 멋을 한껏 뿌려대고 있었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7 장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제 27 장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무정(無情)하기 그지없어 훗날 신검문과 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 지하석실에서 시신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모두가 여인과 아이들이었는데, 서로 부둥켜안고 불에 타 죽은 끔찍한 모습에 치를 떨었다. 이는 위지광이 내린 한순간의 결단으로 인한 참사임을 모르는 그들은 정려군의 소행이라 단정했다. 일백 명이 넘는 아녀자들이 석실에 갇혀 집단 분사(焚死)한 참극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 사람들은 정려군을 고금미증유(古今未曾有)의 대마녀라 부르며 저주했다. 그들은 정려군을 장한마녀(長恨魔女)라 불렀다. 정추수는 신검문이 멸망한 후 정려군을 따라 황산 천도봉으로 갔다. 정려군이 마교 교주 봉천생을 도와 정파의 고수들을 수없이 죽였으므로, 자연히 그도 누님을 도와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특히 무당파의 고수들은 무당사협에 대한 원한으로 정추수를 집요하게 추살하려 했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희생자만 늘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정추수의 천심장에 죽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 갈수록 정추수의 악명 또한 드높아만 갔다. 기이하게도 매천악이 정추수의 천심장에 목숨을 잃은 상황이 상세하게 무림인들에게 전해졌는데, 이후 많은 무당파의 고수들이 천심장에 당한 후 서너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오직 매천악만이 여덟 걸음 만에 죽었는지라, 정파의 사람들은 천심장에 당하면 여덟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혼이 달아난다고 하여 정추수를 팔보추혼(八步追魂)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신검문이 멸망한 후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뽀드득! 뽀드득! 눈이 부서지는 소리에 깜짝 놀란 토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이어진 발자국이 멈춘 곳엔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엔 서글픈 기억이 어려 있었다. 간간이 시야를 흐리는 입김 사이로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설산(雪山)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그는 지금 태행산 기슭에 서서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약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태행산을 바라보며 한 여인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그는 정추수였다. 시간이 지나면 회상(回想)이 남는 법이던가? 정추수는 가만히 등을 돌려 자신이 지나온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타인의 삶처럼 살아 온 지난 일 년이라는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의미없이 저질러 온 수많은 살인과 이권(利權)을 위한 다툼들... 그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진 생명들처럼 정추수의 삶도 의미를 잃고 있었다. 가슴에 사무치는 영상들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고, 그럴수록 정추수는 과거의 기억을 떨치려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정확히 한 달 전. 정추수는 산서 땅에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냉겸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에게 그리움의 잔재를 남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못다 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약화, 대사형, 그리고 공손 사숙. 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지. 아직도 난 그들을 잊지 못하고 있어. 난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만 해. 근본을 알고서 갈등했던 내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노라고...' 슬퍼하기 위해 그들을 찾으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더 이상 의미없는 생을 살고 싶지 않았던 정추수는 과거의 악령에서 벗어나고자 먼 길을 찾아온 것이었다. 매천악을 비롯해 대부분의 고수가 죽은 지금, 태행검파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제자들마저 대부분 떠나 버려, 이젠 공손월과 십여 명의 제자들만이 산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멀리 태행검파의 산문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함박눈이 쌓이더라도 사문을 드나드는 발자국이 끊이지 않았을 터인데...' 깨끗하기만 한 길이 태행검파의 쇠락(衰落)을 알려 주는 듯했다. 정추수는 그 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멀리 인적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정이 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측을 보면 매약화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바위가 있었고, 좌측을 보면 어릴 적 그녀와 서로 키를 재던 나무가 있었다. 지나간 추억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는 일이 잦아, 정추수가 산을 올라가는 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문득 정추수의 발걸음이 커다란 나무 아래 멈추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매약화와 길을 잃어 울었을 때, 그리고 그녀와 사랑을 확인하며 포옹했을 때 그들과 함께했던 바로 그 백양나무였다. "앞으로도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으면 좋으련만..." 미련을 떨치려 애써 미소 지으며 정추수는 다시 산을 올랐다. 냉겸이 거처하던 동굴에 도착했을 땐 정오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냉겸이 웃으며 마중 나올 것만 같은 동굴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정적을 토해 내고 있었다. 동굴 앞 공터엔 인적 대신 짐승들의 발자국이 임자가 바뀌었음을 주장하는 듯했다. 정추수는 가만히 숨을 들이키며 동굴로 들어섰다. 한겨울의 차디찬 기운이 동굴을 가득 맴돌고 있었다. 아직도 냉겸의 소탈한 웃음과 애정이 온몸을 감쌀 것만 같은데, 냉겸이 사용하던 돌침상엔 짐승들의 배설물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비릿한 짐승들의 내음과 자그마한 뼈들이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있어 짐승들의 보금자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나마저 떠나고 나면 이곳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겠지.' 정추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동굴을 나섰다. 정추수의 시선이 동굴의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나무 한 그루가 밑동만을 남긴 채 부러져 있었다. 정추수의 천심장에 명을 다한 그 나무였다. 정추수는 냉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상기하여 나무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한 자 반 가량 파고 들어가자, 기름종이 뭉치 하나가 나왔다. 기름종이를 벗기니 얇은 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지엔 '태행팔변검법요결(太行八變劍法要訣)'이란 주홍빛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사숙조님은 내게 태행팔변을 전수하려 하셨구나.' 냉겸의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 정추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무심코 책장을 넘기려던 정추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책을 도로 덮어야 했다. '난 태행검파의 반도가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난 사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다. 그런 내가 태행팔변을 익힌다면, 이는 조사에 대한 모독이 되리라.' 정추수는 태행팔변의 검보를 손에 쥐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매천악은 냉겸을 협박하여 이 검보를 얻으려 했다. 냉겸은 매천악의 요구를 거절하여 오랜 세월 동안 참담한 생활을 해야 했으며, 종내엔 정추수에게 검보를 전하려 했다. '사숙조님께서 이 검보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던 이유는 태행검파에 올바르게 계승되기를 염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난 태행검파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이 검보를 취할 자격이 없지. 검보는 당연히 공손 사숙께 전달되어야 한다.' 정추수는 두 손으로 검보를 소중히 받쳐 들며 동굴을 향해 절을 올렸다. '부디 사숙조님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나이다. 이후 태행검파의 영광이 온 누리에 비치길 기원하나이다.' 정추수는 검보를 품에 갈무리한 후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산 중턱에 보이는 태행검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멀리 태사전이 보였다. 과거엔 매천악이 머물렀지만 지금은 공손월이 머물고 있었다. 처음엔 곧장 태사전으로 향하려 했지만, 정추수는 이내 생각을 바꾸어 우회하기 시작했다.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산문을 거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는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태행검파에 예를 차리기 위함이었다. 작은 길로 접어들고 산문이 가까워졌지만 제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길을 오르내린 흔적조차 없었다. 정추수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추수가 산문을 지나 넓은 연무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멀리 제자들의 숙소에서 마당을 쓸던 제자가 있어 의외의 이방인을 쳐다보더니 이내 사라졌다. 정추수는 그가 죽은 마원의의 제자임을 알아보았다. '아마 나를 보고 놀라 사숙들에게 알리러 간 것이겠지.' 정추수는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서서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태사전과 청빈전이 있는 곳으로부터 두 개의 신형이 날렵하게 다가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명은 궁조생의 제자 국진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여인이었다. "정 사형! 어쩌자고 이곳에 나타난 거예요?" 처음 그 여인이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정추수는, 그를 걱정하는 듯한 여인의 음성을 듣고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추수가 목숨을 구해 준 바 있는 방운영이었다. 그녀는 태행검파로 와서 정추수를 변호한 이후 공손월의 제자가 되어 공손월의 취산장에 머물렀던 탓에, 정추수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부친은 정려군의 손에 죽었으므로 정추수는 그녀의 원수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지라 정추수가 물었다. "방 소저, 그대는 내가 원망스럽지 않소?" 방운영은 정추수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지만 이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사부님께서 아시면 노발대발하시어 당신을 죽이려 할 거예요." "그래요, 사숙! 어서 이 자리를 피하세요." 국진도 안색이 파리해져 정추수의 소매를 끌었다. 정추수는 국진의 염려에 미소로 화답했다. "방 소저, 날 걱정해 주어 고맙소. 국진도 고맙구나. 하지만 난 사숙님께 필히 전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니 반드시 그분을 뵈어야 한단다." 태사전 방향에서 노기 가득한 외침이 들려 온 건 바로 이때였다. "운영! 국진! 어서 물러나거라!" 고개를 돌리니 허연 수염을 날리며 달려오는 공손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오른손에 검을 빼어 들고 있었다. 정추수와 일 장 거리까지 다가온 그는 허공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잇따라 일곱 번을 찌르고 베었다. 장강유사의 초식. 정추수는 일 년 만에 보는 검법에 감회가 어리면서도 상황이 위험한지라 뒤로 물러났다. 지난 일 년간 정려군에게서 지도를 받은 정추수의 무공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일 년 전만 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두 사람의 무공은 격차가 현저히 벌어져 정추수는 어렵지 않게 공손월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방운영이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며 공손월을 만류했다. "사부님, 정 사형은 사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어요. 일단 그의 말을 들어 보신 후에..." "닥쳐라! 사문을 배신한 마두를 두둔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방운영을 꾸짖은 공손월은 검을 들어 정추수를 가리켰다. "정추수, 대담하구나! 사문을 배반한 것도 모자라 이젠 우릴 조롱하려 예까지 온 것이냐?"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깊은 감정의 골에 정추수는 마음이 아파 왔다. "사숙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고 여길 올 수 있겠습니까?" "흥! 혀는 번지르르하게 놀리는구나. 은혜를 아는 놈이 사부와 동문을 죽였단 말이냐? 네 말은 절대 믿을 수 없다!" 공손월은 노기를 풀지 않고 다시 정추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숙님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 왔으니 제발 잠시만이라도 저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정추수가 공손월의 검을 피하며 여러 번 간청했지만, 공손월은 들은 척 않고 오히려 공세의 강도를 높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였다. "이 악마! 내가 널 죽이겠다!" 앙칼진 여인의 음성이 들리더니 한 자루의 검이 공손월과 합류했다. 정추수는 새로이 나타난 여인을 보는 순간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추수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녀는 왕옥진이었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모습은 오간데없고, 파리하고 뼈만 앙상한 얼굴엔 독기만이 가득했다. 말 그대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정추수는 그 연유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그녀와 공손월의 공세에 정추수는 말할 틈을 얻을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을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면 두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게 분명했고, 감정의 골 또한 더욱 깊어질 터라 정추수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못한 방운영이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정 사형! 오늘은 일단 물러가세요." 더 이상 자리에 있어 봤자 원하는 진척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추수는 방운영의 말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공손월이 다시 달려들자 정추수는 더욱 멀리 달아나며 처연하게 소리쳤다. "사숙! 비록 몸은 태행산을 떠났어도 마음은 항상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언제고 제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때에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터이니 부디, 부디..." 공손월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정추수는 물러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정추수는 산을 내려오다가 다시 냉겸의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침상 위의 지저분한 오물을 치우고 걸터앉아 검보를 꺼내 들었다. '이 검보를 전하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공손월의 분노한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이 상태로 검보를 전한다 한들 사숙님께서 받기나 하실까? 어쩌면 나의 손을 탔다고 찢어 버리실지도 모를 일이지.' 공손월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또한 참혹하게 변한 왕옥진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려 왔다. '지난 일 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왕 사저께서 저렇게 변했을까? 누구보다도 날 귀여워해 주셨는데, 이젠 날 죽이려고만 하니...' 갑자기 궁조생과 매약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곧 공손월과 왕옥진의 얼굴이 떠올라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사숙님께서 날 용서하지 않는 이상, 사형과 사매가 날 만나려 할 리는 더욱 없지 않는가.'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 날이 저물었다. 이때, 밤하늘을 타고 흘러드는 늑대의 처량한 울음 소리가 정추수에게 한 가지 생각을 깨우쳐 주었다. '한낱 짐승들도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의 은혜와 보금자리는 잊지 않으려 한다. 비록 사부님이 가문의 원수였다고 하나 난 태행검파에서 자랐고 무공을 배웠다. 내가 은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인간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검보를 전하여 태행검파에 영원히 계승토록 하는 것이니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추수는 품에서 검보를 꺼내 들었다. '사숙께서 받으려 하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전하면 될 것이다.' 정추수는 방운영을 떠올렸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결국 우리 남매는 방 사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다. 이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정녕 찾기 힘들다. 그녀는 사숙님의 제자이니 내가 그녀에게 검법을 전수하면 이는 곧 사숙님께 검보를 전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그녀가 검법을 익히고 난 후라면 사숙께서 어쩌시겠는가?' 정추수가 다녀간 직후, 공손월은 모든 제자들을 태사전으로 불렀다. 제자라고 해봐야 방운영을 포함해 열세 명에 불과했다. 공손월은 그때까지도 화가 풀리지 않은 음성으로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너희는 일 년 전 사문의 참극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사문을 배반한 역도가 찾아왔다. 그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너희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그와 싸워야 할 것이다. 옛정에 얽매여 그를 동문처럼 대하지 말란 말이다. 운영! 국진! 알겠느냐?" 공손월의 질책에 방운영과 국진은 고개 숙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공손월은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태사전 주위를 경계하며 사문을 벗어나지 말도록 명했다. 방운영도 예외는 아니어서 해가 져서야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운영은 이런 공손월의 조치에 승복할 수 없었다. 태행검파의 제자들은 궁조생으로부터 매천악이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을 모두 들은 터였다. 그러하기에 그녀도 살부(殺父)의 원한을 접어 둔 것이 아닌가? '그때의 일은 무작정 정 사형만 탓할 일이 아니야. 누구보다도 사부님께서 이를 잘 아실 텐데, 어째서 정 사형에게 이리도 매정하게 대하시는 걸까?' 사부와 정추수의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녀는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초롱초롱한 별들과 여인의 얼굴처럼 화사한 달이 그녀의 그림자를 설지(雪地)에 드리웠다. 방운영은 아무도 몰래 산문을 벗어나 평소에 보아 두었던 공터로 갔다. 공손월이 그녀에게 전수해 준 육십사 초의 태행검법을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왕 태행검파의 제자가 된 이상, 다시 사문의 성세를 이루는 데 일조하리라 마음먹은 그녀였다. 지난 일 년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수련한 덕에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제법 손에 익을 만큼 숙달이 되었다. 바람 소리만이 천지를 가득 메운 밤중에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마치 선녀의 그것인 양 백설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가 한창 검법에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번개같이 튀어나와 나뭇가지를 검처럼 내질러 방운영을 공격했다. 난데없는 공격에 방운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검을 어지러이 휘두르며 물러났다. 괴인영은 방운영이 정신을 수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괴인영의 나뭇가지가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그녀는 그 나뭇가지로부터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오십여 초가 지났다. 그 동안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상대의 검법이 바로 태행검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곰처럼 커다란 덩치... 일순, 그녀의 입에서 놀람과 반가움이 섞인 외침이 튀어나왔다. "정 사형?"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신 그의 공격이 더욱 빨라졌다. 그는 오직 방운영의 허리만을 공격했다. 그녀가 검을 막으면 순식간에 검초를 변화시켜 그녀의 검법을 흩뜨린 다음 다시 그녀의 허리를 공격했는데, 여전히 태행검법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이렇게 십여 초가 지나자 그녀는 상대가 검법을 전수하려 함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나뭇가지는 그녀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는 공격하고 방운영은 수비하며 검법을 겨룬 지 이백여 초가 지나자, 방운영의 전신은 땀에 젖어 버렸다. 그녀가 힘에 부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릴 때야 비로소 상대는 나뭇가지로 된 검을 거두었다. 그리곤 훌쩍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지라 그녀는 말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방운영은 한동안 정추수가 떠나 버린 어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추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추수가 가장 듣고자 할 말이 무엇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정추수에게 대해 생각했던 바를 차근차근 얘기해 주고 싶은 바람도 가득했다. 따라서 일언반구없이 사라져 버린 정추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이내 생각을 달리하며 검을 거두었다. '정 사형이 내게 검법을 전수하실 생각이라면 다시 찾아올 거야.' 다음날 방운영은 정추수와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시 밤이 되어 그 장소에서 검법을 수련하자, 정추수가 나타나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추수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오로지 나뭇가지로 방운영을 공격했고 방운영은 수비하길 거듭했다. 이백여 초가 지나자 정추수는 다시 떠나 버렸다. 정추수는 다음날, 그 다음날 밤에도 나타나 방운영과 비무를 통해 태행검법의 요체(要諦)를 전수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보름이 되던 날. 이상하게도 정추수는 그날 혼자서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그 검무는 근본이 태행검법과 유사하되 변화가 완전히 다른지라 방운영은 이치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정추수의 나뭇가지는 마치 장강의 흐름처럼 도도하게 찌르고 베었으며,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쾌속하게 움직여 신형을 나누기도 했다. 그 움직임과 변화가 막측하여 방운영은 어지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달은 없고 오직 별빛만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정추수의 신형이 자아내는 어지러운 그림자는 신선들의 선무(仙舞)처럼 느껴졌다. 정추수의 검무는 크게 여덟 가지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변화들이 각각 도드라지기도 하고 서로 섞이기도 하면서 수많은 변화를 생성하고 있었다. 정추수의 검무는 반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정추수는 검무를 끝낸 후 방운영을 바라보았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표정을 하고 있는 방운영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다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검무는 방운영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너울너울 춤추는 정추수의 옷자락과 교묘히 엇갈리는 발의 움직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방운영은 검법 변화의 정수를 알 수 없었다. 정추수의 검무는 산봉우리 너머 여명을 알리는 빛이 두 사람을 비출 무렵에야 멈추었다. 그날로부터 열흘 동안 정추수의 검무는 계속되었다. 정추수의 검무를 구경하던 방운영은 그 변화를 차츰 이해하게 되었고, 열하루가 지나자 스스로 따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추수는 방운영과 어울려 검무를 추었다. 그녀의 검무가 흐트러지면 인도하고 올바른 검로를 밟으면 흥을 북돋우어 몸에 배도록 도와 주었다. 이렇게 다시 열흘이 지나자 방운영은 혼자서도 검무를 출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힘이 부족하여 모든 변화를 올바르게 시전할 수는 없었지만, 변화의 요체는 대부분 터득할 수 있었다. 정추수가 밤마다 나타나 그녀에게 검법을 전수한 지 한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그날 밤 둘이서 한바탕 검무를 추고 난 후, 정추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책자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 책자를 말없이 방운영에게 건네 주었다. 평소라면 훌쩍 떠나 버렸을 그가 이날만큼은 무엇엔가 미련이 남는 듯 돌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방운영은 그의 태도에서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방운영은 정추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사형은 매 사저의 소식을 알고 싶은 거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정추수의 신형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이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한 방운영은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전임 장문께서 돌아가신 그날, 매 사저는 모습을 감추었어요.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말이에요. 사저는 그 비극의 발단을 모르고 있으니 아직도 사형을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그날 이후 매 사저로부터 소식이 끊어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어요." 정추수에 대한 매약화의 원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 험한 세상을 여인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 가고 있을 것인가?' 정추수는 방운영이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눈물을 흘렸다. 정추수의 감정이 풀리길 기다리던 방운영이 다시 입을 열였다. "그리고 대사형께선..." "그래, 대사형께서는 어디 계시오?" 궁조생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정추수는 눈물을 거두며 급히 물었다. 정추수가 이곳에 올 때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이 바로 매약화와 궁조생이 아니었던가? "대사형께선 매 장문께서 돌아가신 후 며칠 밤낮을 슬픔에 잠기시어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 왼팔을 자르시고는 성심동에 들어가셨고, 이후로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어요." "성심동에...?" 정추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차디찬 바람과 외로움만이 가득할 성심동의 전경이 떠올랐다. 정추수는 성심동에 두 번을 갇혀 지냈었다. 한 번은 어릴 적 매약화와 산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린 죄로, 한 번은 매약화와의 결합을 원치 않는 사부의 명에 의해 성심동에서 지내야 했다. 어릴 적엔 성심동은 그에게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선물했고, 두 번째 갇혔을 땐 분노를 심어 주었다. 지금 성심동은 사형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원한? 분노? 괴로움...? '궁 사형은 오로지 나와 사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을 뿐이다. 그런 분이 이런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잘못이 너무나 크다. 내가 사부님을 죽이지 않았던들 궁 사형께서 이렇듯 괴로움 속에서 지내지는 않을 것을...' "대사형께선 아직도 깊은 밤중이면 구슬프게 울곤 하신답니다." 마침내 정추수는 자책하는 마음이 일어 소리내어 울었다. 방운영은 정추수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흘러 정추수의 울음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 사형께서 제게 검법을 전수해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녀의 질문이 정추수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난 방 소저의 원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토록 잘 대해 주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정 사형께서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제 부친께선 스스로 행하신 대가를 받으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원한을 가지고 복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더군다나 저의 목숨은 정 사형께서 구해 주신 건데 어찌 복수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지요." "방 소저의 그 마음씨가 너무나 고맙구려." 정추수는 냉겸의 유언과 태행팔변 검법에 얽힌 얘기를 방운영에게 소상히 말해 주었다. 방운영과 얘기를 계속하는 동안 정추수는 마음이 점차 후련해짐을 느꼈다. 이는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낀 일 중에서 한 가지의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희망으로 준비에 소홀하지 않는 방운영의 태도로부터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추수가 만나야 할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매약화와 궁조생... 비록 매약화는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궁조생만큼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정추수는 생각했다. 정추수는 방운영과 헤어져 성심동으로 향했다. 천근 만근 무거운 마음 때문일까?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정추수의 무거운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듯했다. 성심동 앞에 이르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에서 탁한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처럼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있어 정추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추수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지라 한식경 이상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악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의 기척을 느꼈음인지 동굴 안에서 쇠약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무도 날 찾지 말라 했는데 누가 거기서 울고 있는가?" "궁 사형..." 정추수의 부름에 동굴에선 인기척이 끊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아하...!" 동굴 안에서 가슴을 저미는 탄식이 흘러나올 무렵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궁조생이 탄식과는 달리 냉막한 어조로 물었다. "넌 왜 여기를 찾아왔느냐?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왜 왔느냐?" 정추수는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느냐? 넌 마음이 약해 스스로 어려운 일에 빠져 드는 경우가 많았지. 조금만 더 마음을 냉정히 가지면 괴로움이 적을 것을... 그래, 할 일은 다했느냐?" "사형만 만나 뵈면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다한 셈입니다." "그럼 날 본 셈치고 그만 가도록 해라." 정추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명백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아직도 제가 미우십니까?" 정추수의 흐느낌 섞인 물음에 궁조생이 싸늘하게 외쳤다. "가거라, 어서 가거라! 태행검파는 영원히 잊도록 해라. 네가 잊지 못하면 서로가 괴롭게 될 뿐이다." 그것은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울분이 가득 담긴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정추수가 울면서 소리쳤다. "절더러 잊으라고 하시는 사형께선 어째서 과거의 일을 잊지 못하여 팔을 자르시고 이토록 몸을 학대하시는 것입니까?" 정추수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였을까? 동굴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정추수의 흐느낌만이 동굴 앞을 간질이며 한식경의 시간이 지났다. 문득 나직한 기침과 함께 궁조생의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내가 잊지 못한다고 너마저 그래서는 안 되지. 난 스스로 벌을 주어 과거를 잊고자 하는 중이야. 이 괴로움이 끝나면 난 너를 잊을 것이다. 사부님도, 사숙들도, 동문들도, 그리고 정 소저도 모두..." 정추수는 궁조생이 아직도 정려군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 정려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궁조생의 마음이 철석같이 굳어 있어 정추수가 설득한들 어찌할 수 없음도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을 소리 죽여 울던 정추수는 느릿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굴을 향해서 이마가 바닥에 닿게 절을 했다. "제가 성심동에 갇혔을 때, 사형께선 항상 저를 지켜 주셨지요. 하지만 전 사형을 지켜 드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부디, 부디 훗날 다시 만나 뵈올 수 있기를..." 정추수는 목이 메어 말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이제 가면 언제나 다시 사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정추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다시 한 번 동굴을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궁조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팔이 잘리고 몸은 여위어, 눈물이 항시 마르지 않은 채 추위에 떠는 모습으로... '나보다도 더욱 마음이 여리고 정에 약하여 결국은 평생을 번민하시리라.' 몇 방울의 눈물이 바닥에 더 떨어지고 나서야 정추수의 커다란 등이 어둠 속에 쓸쓸히 묻혀 갔다. 정추수가 떠난 직후 성심동 앞 공터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방운영과 공손월이었다. 공손월은 방운영으로부터 태행검법을 전수받은 사실을 듣고, 이곳으로 와 정추수를 몰래 지켜본 것이었다. 그가 정추수를 미워하던 마음은 궁조생으로부터 정씨 가문의 비사(悲事)를 상세히 듣는 순간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일 년이 지났음에도 정추수가 사문을 잊지 못해 찾아온 것은 그의 인생을 위해 해가 될 뿐이라 여겨 일부러 매정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는 정추수가 한시라도 빨리 과거를 잊고 젊은이다운 희망찬 새 출발을 하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궁조생을 잊지 못하고 그의 처지를 슬퍼하는 정추수를 보게 되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정추수가 사라져 간 방향을 보며 방운영이 물었다. "사부님께선 지금도 정 사형을 미워하시나요? 전 정 사형이 결코 악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있어요." 공손월이 탄식하며 대답했다. "글쎄다... 생각은 추수를 이미 용서하고 있지만 난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모르겠구나. 추수의 인간 됨은 나도 알고 있지만 지금 추수는 희대(稀代)의 마두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느냐? 인생이란 정녕 자신의 뜻대로 되기 어려운 것이지. 다만 분명한 것은 태행검파와의 인연을 한시라도 빨리 잊는 것만이 추수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것이야." 한동안 정추수가 남기고 간 흔적을 느끼며 서성거리던 두 사람은 동굴을 향해 한마디씩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조생, 추수가 과거를 잊기 바라듯 너도 하루빨리 과거의 악연(惡緣)을 잊기 바란다." "사형, 다시 찾아오겠어요. 추운데 몸조심하세요." 두 사람이 떠난 성심동엔 바람만이 정적을 흩어 버리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간혹 병자의 거친 기침 소리만이 동굴로부터 간간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두 사람 외에 멀어져 가는 정추수의 뒷모습을 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성심동의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었다. 수척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에 이르기도 전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매천악이 죽고 위지광이 신검문으로 달아날 때 왕옥진은 일행과 동떨어져 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 정려군에 대한 원한이 사그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조생이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마음을 다지면서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궁조생은 사부의 죽음과 사문의 몰락이 제 책임인 양 괴로워하다가 팔을 자르고 성심동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궁조생이 괴로워하는 이유 중에 정려군에 대한 그리움도 한몫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궁조생이 정려군을 잊지 못하듯이 그녀 또한 궁조생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궁조생이 성심동에 든 이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바위에 앉아서 그리움을 불태웠다. 해가 가고 달이 가면서 원한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궁조생에 대한 사랑만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정추수가 나타나자 겨우 잠재웠던 원한과 분노가 일시에 살아나며 그녀의 끔찍했던 기억을 다시 일깨웠던 것이다. 처음엔 정추수를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사부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정추수와 정겨웠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모든 걸 잊으리라 다짐했던 그녀였건만, 또다시 정추수를 보자 새삼스럽게 원한과 애증이 교차하여 그녀로 하여금 눈물을 참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며칠간 잠잠했던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하며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소복소복 메우고 있었다. 제 목 : [장한백설] 3 권 제 28 장 천지(天地)엔....... 제 28 장 천지(天地)엔 백설(白雪)만이 가득하도다 모든 게 허망했다. 복수의 미명 아래 수없이 죽어 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정추수는 가문의 원한으로 사부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다정했던 사람들 곁을 떠나야만 했다. '난 약화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심어 주었다. 어쩌면 그녀는 나와 누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추운 날씨 때문인지 주루 안은 한산하기만 했다. 이십 개가 넘는 탁자는 거의 비어 있었다. 정추수가 앉은 자리 외엔 안쪽 구석진 곳 탁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장한이 전부였다. 입구 쪽 계산대엔 주인이 추위에 몸을 비비면서 졸고 있었다. 이곳 능천은 곽입지의 의정문이 자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곽입지가 죽고 나자 의정문은 와해되었고, 능천 거리를 둘러보아도 의정문 무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쓰라린 심정을 달래려 초저녁부터 들이킨 술이 벌써 세 병을 넘고 있었다. 정추수가 네 병째 술의 마지막 잔을 비우려 할 때였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장한이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자네... 마교에 대한 소문 들었나?"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길쭉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장한은 얼굴에 곰보 자국이 가득했다. 탁자에 놓인 두 자루의 거치도(巨齒刀)가 그들이 무림인임을 알려 주었다. 곰보 장한이 궁금한 표정을 가득 담고 되물었다. "마교에 대한 소문이야 항상 무성하지 않은가? 무슨 소문을 얘기하는가?" 얼굴이 긴 장한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마교가 멸망했다네." 곰보 장한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라고?" 놀란 건 곰보 장한뿐만이 아니었다. 뜻밖의 말에 정추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술잔을 떨어뜨렸다. 술잔이 깨지는 소리에 두 장한의 시선이 정추수에게 쏠렸다. 정추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탁자에 흐르는 술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놀랍기 그지없어 그만 술잔을 떨어뜨리고 말았구려. 계속 얘기를 해주시겠소?" 정추수의 허우대가 대단한지라 장한은 의심스런 눈길로 물었다. "그대는 뉘시기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당신도 무림인이오?" '내가 마교를 떠나온 지 두 달이 넘었구나.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정추수는 상대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교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인지라 정추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얘기를 종용했다. "무림에 몸담은 사람치고 마교의 위세를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 난데없이 마교가 멸망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구려." 얼굴이 긴 장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하오. 마교라면 강호무림의 제일 방파가 아니겠소? 나도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다오." 그는 잘 들어 보라는 듯이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난 처음 이 소식을 듣고 믿어지지 않아 하북성의 다른 무림인들에게 물었는데 대답이 한결같더군요. 그러니까 한 달 보름 전, 정파의 고수들이 야밤에 황산 천도봉의 회회교 총단을 급습하여 일전을 벌였다더군요. 그 일전에 참가한 고수들로는 소림의 명허대사(明虛大師)와 십팔나한(十八羅漢), 무당의 장춘진인(長春眞人), 노가장주 노식(魯植)과 금검대(金劍隊)의 고수들, 흑룡문(黑龍門)의 장청일(張靑一)과 휘하고수들, 그리고 나머지 화산(華山), 공동(山空山同) 등 칠대문파(七大門派)의 수장들을 포함하여 이백 명이 넘었다고 하오." 곰보 장한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어떻게 황산을 급습할 수 있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그날 밤의 기습으로 마교는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오. 마교 교주 봉천생이 죽었고, 음풍노조 조천주, 검독쌍마, 낭아조 공야직 등 마교의 고수들 대부분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공야직이 죽었다는 말에 정추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얼굴이 긴 장한에게 바싹 다가가 물었다. "분명 낭아조 공야직도 죽었소?" 정추수의 얼굴은 충격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 장한은 이상히 여겨 정추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혹시 공야직과 아는 사이라도...?" 그가 말끝을 흐린 건 정추수가 마교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어서였다. 만약 정추수가 정말로 마교의 사람이라면 자신은 횡액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정추수는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설명을 재촉했다. "얘기를 계속해 보시오." 얼굴이 긴 장한은 정추수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만만치 않아 보이는지라 자칫 화를 입을까 두려워 얘기를 계속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봉천생의 사매인 비화살 강월령과 장한마녀 정려군도 죽었다더군요. 그 마녀는 작년 이곳에서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짓을 저지르더니 결국 하늘의 벌을 받은 셈이오." 믿기 힘든 소식에 정추수는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있을까?" 곰보 장한이 의아함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의 태도가 수상하오. 아무래도 그대는 마교와 관련이 있는 듯한데, 내 짐작이 틀리오?" 정추수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정추수는 누님이 죽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터질 듯하여 당장에라도 누군가에게 감정을 폭발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멀뚱멀뚱한 눈동자를 보자 화를 터뜨릴 수 없었다. '하긴 이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정추수가 탄식하며 대답했다. "장한마녀는 나의 누님이라오." "...!" 두 장한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들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의자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정추수가 주루를 나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더니 얼굴이 긴 장한이 맥을 풀며 말했다. "팔보추혼! 그가 팔보추혼 정추수였다니... 그것도 모르고 장한마녀를 욕했으니 우린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셈이네그려." 이어 곰보 장한이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거... 일어나서 걸음을 걸어도 무사할까 모르겠네." 정추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채찍질했다. 가다가 말이 지쳐 쓰러지면 경공술을 써서 달렸고, 마을이 나타나면 다시 말을 구하여 몰았다. 어쩌다가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식사를 하다 보면 어김없이 마교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그때마다 얘기는 항상 일치했다. 소문을 탐문할수록 정려군과 공야직의 죽음이 확실해지는지라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달리길 열흘. 정추수는 안휘성(安徽省)에 들어서 황산과는 불과 이틀 거리만을 남겨 두게 되었다. 황산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은 더욱 커져 갔다. 공야직과 정려군의 모습이 아른거려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황산과는 이백여 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날은 저물고 말은 지쳐 더 이상 길을 가기 곤란하게 되었다. 정추수는 식사를 하며 잠시 쉬어 가기 위해 주점에 들었다. 정추수가 주문한 음식을 주보가 막 내올 때였다. 갑자기 주점 밖이 소란해지더니 몇몇 사람들이 다급하게 주점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농민 차림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또 싸움이 났네그려." 다른 이가 대꾸했다. "점창파(點蒼派)의 고수들이 마교의 백귀방(白龜幇)을 없애 버리겠다고 난리더군. 벌써 십여 명의 사람들이 죽은 모양이야." "휴우! 마교 교주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돈 후로 정파 무림인들이 여기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싸움이 끊이질 않으니,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대낮에도 길을 가기가 두려울 지경일세." 백귀방이란 말에 정추수는 둥근 얼굴에 가시와 같은 수염이 수두룩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백귀방주 구문음(具文吟)이란 자로 정추수가 정려군을 도와 정파의 고수들을 상대할 때, 함께 지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성격이 호탕하고 거짓이 없어 호감이 갔으므로 정추수는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되자 정추수는 지체 않고 밖으로 나섰다. 주점과는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어지러이 움직이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달려가 보니 바닥엔 이미 네 명의 백귀방 무사들이 피를 뿌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나마 나머지 다섯 명도 곳곳에 상처를 입어 위태하기 그지없었다. 점창파의 무사들은 기세 등등하여 추호의 사정을 두지 않고 쓰러져 신음하는 무사들마저 확인하여 죽이고 있었다. 이에 정추수는 발끈하여 천심장으로 점창파 무사 두 명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대담하게도 너희들이 여기까지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단 말이냐?" 천심장에 당한 두 사람은 끽소리도 못 하고 즉사하고 말았다. 정추수의 등장에 나머지 아홉 명의 점창파 무사들이 놀라 공격을 멈추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그댄 누구인데 제마멸사(制魔滅邪)의 일을 방해하는 것인가?" 이때 다른 이가 정추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노성을 터뜨렸다. "사형께선 물어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동문을 죽였으니 저자는 마교의 무리가 분명합니다." 정추수는 산서무림을 떠난 후 스스로 정파임을 자부하는 무림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문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 바로 정파라 자칭하던 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추수는 대답 대신 냉소하며 다시 천심장을 휘둘러 그들을 덮쳐 갔다. 정추수가 그들 사이를 헤집으며 손을 몇 번 떨치자 네 명이 연이어 쓰러지고는 움직이지 못했다. 나머지 다섯 명의 무사들은 정추수의 무공에 두려움을 느껴 쓰러진 동료들을 살피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백귀방의 무사들 중 하나가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와 정추수에게 읍을 했다. "은공께서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그대들은 백귀방 사람들이오?" "그렇습니다. 전 권이릉(權二凌)이라고 합니다. 은공께선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난 정추수라 하오. 귀방주를 만나고자 하니 안내해 주시오." 정추수가 이름을 밝히자 백귀방 무사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권이릉이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늘이 저희를 돕는군요. 방주님께선 지금 점창파의 맹씨(盟氏) 형제(兄弟)에게 상처를 입으시고 숨어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그는 마을을 벗어나 제법 숲이 우거진 작은 구릉(丘陵)에 이르더니 부엉이 소리를 흉내냈다. 이에 화답하듯 숲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 왔고, 권이릉이 다시 부엉이 울음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나무 사이로 권이릉과 같은 복장의 무사 두 명이 나타나자 권이릉이 소리쳤다. "팔보추혼 정공(程公)께서 방주님을 만나고자 하시니 어서 안내하게." 그 두 사람은 정추수의 이름을 듣자 공손히 대하며 숲속으로 들어갔는데, 어느 비탈진 곳에 이르러 나뭇가지가 쌓인 곳을 들추어 내자 자그마한 동굴이 나타났다. 정추수가 허리를 숙여 동굴로 들어가니 어깨와 등을 붕대로 동여맨 구문음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공께서 납시었는데도 마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는 정추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도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 상세가 심한 모양이었다. 정추수가 억지로 일어나려는 그를 만류했다. "예를 차릴 필요 없소이다." 구문음이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시세가 부득이하여 이렇게 옹색한 곳에 지내고 있습니다." 그의 신색이 몹시 초라하여 정추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구 방주 같은 분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동안 고초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구려." 정추수의 말에 그는 화가 치미는지 바닥을 내리쳤다. "제기랄! 정파 놈들의 공격에 상처를 입어 방(幇)을 버리고 쥐새끼처럼 이곳에 숨어 지내고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어쩌다가 본 교가 이 지경이 되었소?" "정파 놈들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간 거지요. 몇 달 전 정파의 수장들이 소림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다는 건 정공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정추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총단에서 누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소. 그들이 모임을 가진 목적은 본 교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기 위함이라고 알고 있었소만." 구문음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우릴 속이려는 술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원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 교의 세력들을 공격하여 본 교의 수족을 자를 계획이라는 정보를 우리에게 은근히 흘렸지요. 우리의 첩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 정보엔 구체적인 시기와 장소까지 거론되어 있었으니 총단에선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요. 본 교에선 위험이 예상되는 방파에 총단의 고수들을 파견하여 단단히 준비토록 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파 놈들이 노리던 함정이었어요. 총단의 고수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우자 정파 놈들이 일거에 습격을 한 겁니다. 교주님과 장로님들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지만 중과부적이라 결국엔 모두 전사(戰死)하고 말았지요." "교주님의 무공은 당세무적이시오. 그분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빠져 나올 수 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당시 몇몇 살아남은 자들의 말에 의하면 소림의 명허가 무공이 대단하여 교주님을 패배시켰다고 합니다." 정추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명허? 그는 소림의 이 대 제자가 아니오? 그런 그의 무공이 그토록 대단하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엔 노가장주 노식이 교주님께 도전했는데, 교주님께선 그를 백여 초 만에 격퇴시켰다더군요. 다음에 명허가 나타나 교주님과 겨루었는데, 놀랍게도 교주님께선 이백여 초 만에 내상을 입으셨다 합니다. 시세가 불리한지라 교주님께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피신하셨는데, 갑자기 흑룡문의 장청일이 나타나 기습하여 교주님을 살해했다고 하더군요." 정추수는 마교의 총단에 머무르면서 봉천생과 대면할 기회를 여러 번 가질 수 있었다. 한 번은 우연히 정려군과 봉천생이 비무하는 장면을 목도했는데, 봉천생의 무공은 정려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당시 정추수는 자신이 평생을 무공 연마에 전념해도 봉천생을 따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무공을 겨루어 졌다고 생각하니,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문음은 생각에 잠긴 정추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공의 누님이신 정 사고께서도... 액겁을 면치 못하셨습니다." 정추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오." 구문음은 정추수에게 불행한 소식을 전하기가 몹시 껄끄러웠는데, 의외로 정추수가 담담히 대답하자 내심 안도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소교주께서 살아 계신다는 거지요. 그분은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분을 중심으로 단결하면 지금의 치욕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보 형과 나머지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구려." "아! 정공께선 자세한 사정을 모르시는군요. 다행히 총단의 장로들 중 팔비금마(八臂琴魔) 채담(蔡淡) 장로님은 무사하시지요. 그리고 교주님의 제자들 중 보구천은 당시 외단에 나가 있었기에 무사했지요. 그리고 조 장로님의 제자들인 음풍쌍살(陰風雙煞)도 무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모두 본 교의 장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이니, 본 교는 아직 무너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소이다." "낙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파 놈들은 총단이 무너지면 본 교가 끝장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생각이지요. 본 교의 힘은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어 아직 그 세력의 대부분은 건재합니다. 돌아가신 조 장로님 못지않은 기라성 같은 고수들도 많이 남아 있지요. 이제 소교주님과 정공께서 나서 그들을 규합하시면 당장에라도 정파 놈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음날 정추수는 구문음과 함께 황산 천도봉으로 향했다. 길을 가는 도중 일행은 점창의 맹종정(孟宗政), 맹종학(孟宗學) 형제를 비롯해 여러 문파의 고수들과 격전을 치러야 했다. 구문음은 부상 중이라 정추수가 나서 그들을 격퇴했는데, 맹씨 형제를 비롯한 예닐곱의 고수들은 그의 천심장에 고혼(孤魂)이 되었다. 정추수의 가공할 무위에 구문음을 비롯한 마교의 무사들은 정추수를 추앙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정추수를 추켜세울 때마다 정추수의 마음은 반대로 무거워지기만 했다. 지겹게 달려들던 정파의 고수들은 일행이 황산 기슭에 이르자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마교에 소속된 만수동(萬水洞), 독류방(毒流幇), 현고방(玄鼓幇) 백골문(白骨門), 흑수채(黑水寨) 등 여러 방파의 고수들이 득실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총단의 참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들이었는데, 저마다 정파무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정추수와는 달리 그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는 구문음은 그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정추수를 소개하며 마교를 부흥시킬 인물임을 강조했다. 그럴 때마다 정추수는 속으로 고소(苦笑)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도봉을 오르자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길목마다 마교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어 정추수 일행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팔보추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이면 저마다 예를 차리며 길을 비켜 주었다. 회회교의 총단은 천도봉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총단에 이르자 모여든 마교 고수들의 숫자는 더욱 많아졌다. 총단 주위에 모여 있는 자들만도 어림잡아 천 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정 숙부님!" 정추수가 도착했음을 누군가가 이미 알린 듯 건물로부터 청의인영이 정추수를 부르며 달려나왔다. 유검학이었다. 그 뒤로 보구천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추수는 유검학의 생사를 몰라 근심이 컸는데, 그가 멀쩡함을 알게 되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검학! 무사했구나." "정 숙부님, 흑흑흑!" 유검학은 정추수의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사부님이 돌아가셨어요. 사부님이..." '이 아이도 나처럼 정이 많지. 나에겐 누님이지만 검학에게는 사부님이니 슬픔이 클 수밖에.' 정추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말없이 유검학의 등을 다독거렸다. 이때 보구천이 다가와 정추수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정 숙부님께서 오시길 애가 닳도록 기다렸습니다. 숙부님께서 오셨으니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요." 보구천의 말이 의미 심장한지라 정추수가 되물었다. "무슨 사유가 있는 것이오?" 보구천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정추수의 손을 끌었다. "들어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본 교의 흥망이 걸린 이때 저마다 제 목소리 높이기에 바쁘니 앞일이 걱정스럽습니다." 정추수는 보구천을 따라 총단 건물로 들어서며 물었다. "교주님과 누님의 영전(靈前)에 분향(焚香)하기도 전에 보 형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영문을 모르겠구려." "아참! 제가 너무 경황이 없었군요. 죄송합니다. 우선 교주님과 사고의 영전으로 모시겠습니다." 회회교의 총단은 교주가 거처하던 용등전(龍騰殿)을 비롯하여 커다란 전각이 다섯 개, 그보다 작은 누각이 삼십 개가 넘는 막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교주를 위시한 많은 고수가 죽었지만, 그리고 곳곳에 불타 버린 누각들이 흉험함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웅장한 건물들은 회회교의 위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보구천이 인도한 곳은 임시로 제단을 설치한 가건물이었다. 중앙의 교주 위패를 비롯하여 좌우로 장로급 인사들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그 끄트머리에 정려군의 위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누님의 위패를 보는 순간, 정추수의 눈엔 눈물이 핑 돌았다. 제단 앞으로 십여 명의 인물들이 향을 사르고 있었다. 일견하여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무슨 단(團)이며, 무슨 방의 수뇌급 인물들이 분명했다. 그들 중 정추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오직 정려군의 위패만이 눈에 가득한지라 정추수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했다. "숙부님, 이리로 오셔서 향을 사르시고..." 망연히 서 있기만 하는 정추수가 안돼 보였는지 보구천이 손을 이끌었다. 보구천이 이끈 곳은 교주 봉천생의 영전 앞이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정추수는 향에 불을 붙이며 봉천생의 영전에 향배(向拜)했다. 그런 후 정려군의 영전에 이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급기야 오열하고 말았다. 이런 정추수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분연히 소리쳤다. "팔보추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강호의 모든 동도들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두려워했는데, 이렇듯 고인(故人)의 영전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으니 이게 다 누구 때문이오? 우린 소교주와 정공을 중심으로 뭉쳐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되갚아야 하오." 다른 이들이 맞장구쳤다. "옳은 말씀이오. 정파 놈들은 모두 찢어 죽여야 하오!" "어서 빨리 새 교주를 옹립하고 정파 놈들을 무찌릅시다!" "열 배, 백 배로 갚아야 하오!" "그놈들은 교주님의 목을 베어 갔소. 우린 구대문파와 노가장, 흑룡문 수장들의 목을 모두 베어야 한이 풀릴 것이오!" 어느새 원한에 불타는 목소리들이 제단을 가득 메웠다. 이들의 아우성을 듣게 되자 정추수는 누님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오히려 냉담해지게 되었다. 누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 보름 동안 정추수는 갖가지 생각을 했다. 크나큰 슬픔에 잠기기도 했고 정파 무림인들에 대한 분노에 이를 갈기도 했다. 그러나 태행검파를 방문하여 느낀 바가 많았기에 정추수는 현실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방운영의 말을 듣고서,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매약화의 소식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스스로 과거의 악연을 잊으려 고행하고 있는 궁조생을 생각하면서, 정추수는 복수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막상 누님의 영전에 이르러 다시금 슬픔이 솟구쳤지만, 주위 사람들의 아우성을 듣게 되자 그에게 닥쳐 올 미래를 연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피〔血〕였다. 복수의 미명 아래 수없이 죽어 갈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다시 피비린내 풍기는 참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그를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정추수는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보구천에게 물었다. "보 형, 소교주는 어디에 있소?" 보구천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게... 한 달 전부터 용등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친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큰 탓인지 아무에게도 얼굴을 내밀지 않으려는군요." 정추수는 봉무구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교주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심계가 깊고 술수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결코 부친의 죽음 때문에 시름에 잠길 아이가 아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문득, 정추수는 총단을 들어오기 전 보구천이 한 말을 상기하여 보구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 보 형께서 근심스럽게 한 말은 무슨 뜻이오?" "그건... 휴우!" 보구천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낙담한 표정이 되었다. 정추수는 교주의 죽음 이후 그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구천은 괴로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용등전으로 가시지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저의 고민을 말해 줄 것입니다." 정추수, 보구천, 유검학 등 세 사람이 용등전의 커다란 대청에 이르자, 십여 명의 인물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정추수는 단번에 보구천의 고민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구천이 들어서자 좌중의 시선이 일행에게 쏠렸다. 보구천이 목청을 높여 정추수를 소개했다. "이분은 무림동도들이 팔보추혼이라 부르는 정추수, 정 숙부님이십니다." 이에 얼굴이 몹시 닮은 흑의청년 두 명이 다가와 크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 귀하가 그 유명한 팔보추혼 정공이셨군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전 동방철(東方哲), 여긴 제 동생 동방책(東方策)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指導鞭撻)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보구천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호탕한 웃음을 잘랐다. "동방 형! 나와 소교주는 이분을 숙부님이라 부른다오." 방금 정추수에게 인사한 두 청년은 친형제로 음풍노조의 직전제자(直傳弟子)인 음풍쌍살이었다. 그들은 배분상 보구천과 동배였는데, 정추수에게 정공이라 부르자 그들의 오만한 태도에 보구천이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음풍노조는 평생 이들 두 사람만을 제자로 거두어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만큼 그들의 능력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눈빛과 강한 의지로 다져진 입술,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강한 기풍 등은 그들이 야심만만한 인물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끔 해주었다. 이 한 번의 대화로 정추수는 보구천이 음풍쌍살과 감정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동방철이 날카로운 눈으로 보구천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풀며 정추수에게 사과했다. "제가 잠시 결례를 했습니다, 정 숙부님. 부디 용서하시길." "마음에 두지 않으니 괘념치 마시오." 정추수는 겉으론 담담하게 말했지만 속으론 그를 예사롭지 않게 여겨 혀를 찼다. '순식간에 마음을 가다듬어 태도를 바꾸다니, 이자의 심계도 보통이 아니로구나.' 이때 두 자가 넘는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오십대 중반의 인물이 다가와 보구천에게 말을 건넸다. "내게도 정 형께 인사할 기회를 주시겠나?" 그는 특히 '정 형'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는데, 이는 그의 배분을 은근히 과시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하지요. 정 숙부님, 이분은 본 교의 호남 지역 세력을 관장하는 비천문의 문주, 비천마극(飛天魔戟) 요뢰(姚雷)이십니다." 보구천은 그의 말에 두말 않고 소개했지만, 그를 보는 보구천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정추수는 간략하게 응대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후 십여 명의 인물들이 저마다 정추수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서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정추수가 눈치를 살피니 그들은 제각각 요뢰와 음풍쌍살, 그리고 보구천의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정추수는 내심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교주가 돌아가시고 난 후 세력 다툼이 벌어진 듯하구나.' 한바탕 인사치레가 끝난 후, 그들은 다른 마교의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복수를 다짐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파의 인물들을 증오하는 말을 한마디씩 내뱉는 것이었다. "흑룡문의 장방이 교주님의 목을 베었다고 하니 그는 물론이고 그의 식솔들 목을 모두 베어 교주님의 영전에 바쳐야 하오!" "소림, 무당은 물론이고 천하의 중들과 도사들은 모두 쳐죽이도록 합시다!" 음풍쌍살의 동방철이 주먹을 불끈 쥐며 목을 높였다. "여문량! 반드시 그놈을 죽여 심장을 씹고야 말겠소." 정추수는 여문량이 산서의 방가장에서 조천주에게 동문을 잃은 후 복수를 다짐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여문량은 노가장의 금검대를 이끌고 조천주를 죽였으니, 그때의 맹세를 지킨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요뢰, 음풍쌍살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행태가 이제껏 보아 온 무리들과 다르지 않은지라 정추수는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 요뢰가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정파 놈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선... 일단 본 교의 세력을 한곳으로 재결집시켜야 하오. 지금 정파의 무리들은 무림 전역에서 본 교의 세력을 궤멸하리라 공공연히 선언하고 싸움을 걸어 오고 있소이다. 본 교의 모든 방(幇)과 교(敎)와 문파들은 저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하니, 이러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세력을 잃게 될 것이오." 요뢰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동방철이 재빨리 나섰다. "교주님이 돌아가신 지금, 이곳 천도봉은 소림, 무당, 노가장의 세력과 근접하여 세를 모으기에 너무 불리하오이다. 그들은 힘을 모아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오. 그리고 본 교 휘하의 세력 대부분은 광동(廣東)과 복건(福健), 호남(湖南), 운남(雲南) 등에 산재해 있어 안휘와는 거리가 너무 머외다. 따라서 일단은 적의 예봉을 피해 운남의 음풍단(陰風團)을 중심으로 세력을 재결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오." 보구천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동 형!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황산 천도봉은 백 년래 우리 흑도인(黑道人)들의 성지(聖地)로써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왔소. 이곳을 포기함은 회회교의 전통을 버리겠다는 말씀이 아니시오?" 요뢰가 한마디했다. "동방철의 말은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일세." 보구천은 요뢰와 음풍쌍살을 같은 무리라 여겨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요뢰에게 삿대질했다. "흥! 모두가 한통속이로군. 교주님이 돌아가신 지금은 새로이 교주를 옹립하여 체제를 정비해야 할 때인데 서로 자신의 안방을 주체로 삼겠다니, 이 무슨 망발들이시오?" "보구천! 자네의 말이 심하군그래. 망발이라니? 그게 선배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그리고 교주께선 횡사(橫死)를 당하시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셨으니 당장 새 교주를 모시기도 곤란하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소교주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찌 새 교주를 모시기 어렵다는 것이오?" 요뢰는 흥분한 보구천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교주라는 직위는 전 흑도인들의 안위를 좌우하는 자리일세. 비록 소교주라고 하나 그 자질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는데, 함부로 교주직을 계승시킬 수는 없지 않나?" 보구천은 화를 참지 못하고 유엽도를 빼어 들었다. "요뢰! 당신은 반역을 도모할 작정이오?" 이에 요뢰는 눈을 부릅뜨고서 그의 애병인 철극(鐵戟)으로 땅을 내리치며 보구천을 꾸짖었다. "보구천! 넌 정말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이들의 말다툼을 통해 정추수는 요뢰와 음풍쌍살이 불온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추수는 보구천이 봉무구를 도와 회회교를 재건하려 함을 알고 그를 도울 생각을 굳혔다. 이대로 말다툼이 계속되면 보구천은 요뢰와 음풍쌍살의 협공에 궁지에 몰릴 판이라 정추수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여겼다. 정추수는 내공을 모아 크게 소리쳐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요 문주! 보 형! 두 분 모두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잠자코 있던 정추수의 일갈에 요뢰와 음풍쌍살은 보구천을 제쳐 두고 정추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교주의 총명절륜함은 본 교의 사람들이라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오. 게다가 교주의 제자들은 모두 죽고 여기 보 형만이 살아남았소이다. 본 교의 전통대로라면 차기 교주직은 전임 교주의 제자나 자손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계승해야 하오. 그렇다면 교주직을 계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여기 보 형과 소교주뿐이오. 그 중 보 형이 소교주를 차기 교주로 적극 추천하니 소교주가 교주직을 계승함이 온당하오. 만약 이를 거부하면 본 교의 전통에 정면 도전한다는 의심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 회회교의 전통에 도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비록 교주가 죽었다고는 하나 모두에겐 아직도 회회교의 전통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교도들은 요뢰나 음풍쌍살의 현실론에 입각한 이기심보다는 마교의 전통을 더욱 충실히 따를 거라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추수의 이 말은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 모두가 일시 함구무언(緘口無言)했다. 이때였다. "정공의 말이 옳네." 늙수그레한 음성과 함께 대전으로 두 명이 들어왔다. 이젠 정추수보다도 키가 더 커보이는 봉무구와 어깨에 붕대를 친친 동여맨 칠십대의 노인이었다. "제자 보구천, 채 장로님을 뵈옵니다." 보구천이 그 노인에게 정중히 읍을 하자 모두가 뒤따라 읍을 했다. 그 노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회회교의 장로인 팔비금마 채담이었다. 봉무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좌중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 눈빛엔 적대감마저 품고 있어 보였다. 반면, 채담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요뢰와 음풍쌍살을 번갈아 응시하며 찬찬히 말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구심점을 찾아 화합(和合)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네. 그것만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야." 요뢰가 채담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작금의 어려운 현실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동방철이 요뢰의 말에 동조했다. "요 문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들의 대꾸에 보구천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요뢰와 동방철의 무례함에 화가 난 것이다. 채담은 그들의 태도에 아랑곳 않고 시종일관 미소로 응대했다. "그대들의 말도 옳네. 그래서 내 한 가지 제안을 하지." 교주와 장로들이 모두 죽은 지금 마교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는 채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말에 함부로 반박할 수 없는 입장이라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정공의 주장대로 소교주로 하여금 교주직을 계승토록 해야 할 것이네. 그리고 교주를 중심으로 요뢰가 호남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파의 세력을 물리치도록 하고, 동방 형제는 운남의 음풍단을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도록 하게. 그리고 정공과 구천은 교주를 도와 안휘의 총단을 지키고 복건 쪽의 세력이 이탈되지 않도록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야." 채담의 말에 요뢰와 음풍쌍살은 불만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채담의 의견에 반하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러나 채담의 지위가 주는 무게와 작고한 교주 봉천생의 눈을 연상시키는 봉무구의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정추수의 전통을 앞세운 발언 등으로 일단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물러가자 보구천이 정추수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정 숙부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숙부님의 준엄한 논리엔 저들도 할말이 없을 수밖에요." "그런 말 말게. 장로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나 했겠는가?" 채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좀 전과는 달리 힘없는 목소리였다. "이제 본 교는 그대들과 같은 젊은 사람이 이끌어야 해. 나 같은 늙은이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무용지물일 뿐이야." 보구천이 근심스레 물었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상처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나이 때문이니 걱정할 필요 없어." 일단 내분의 조짐은 해결된 셈이라 보구천은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이들이 대화하는 동안 봉무구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채담이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는 게냐?" 봉무구는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저들은 이미 본 교의 전통에 승복할 마음이 없습니다. 모두가 본 교의 대권만을 차지하려고 광분하고 있어요. 저런 자들을 데리고 어떻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나이답지 않게 통렬한 말이었다. 그의 말이 옳은지라 채담과 정추수, 보구천은 다시금 침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들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유검학이 분위기를 일신하며 야무지게 소리쳤다. "세상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 일은 없어요. 본 교가 이제껏 성세를 누린 것은 선조님들의 피땀 어린 노력 덕분이었겠죠. 이제부턴 우리가 난관을 헤치고 다시 교의 성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전 사형과 숙부님을 도와 사부님의 원수를 갚고 본 교를 재건하고 말겠어요." "하하하! 검학, 너의 말이 옳다. 우린 교를 재건할 의무가 있어. 검학! 그리고 숙부님!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본 교의 세를 다시 모으면 오늘날의 복수는 곧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이상으로 정파 놈들의 목을 베어 복수를 할 것입니다." 보구천의 유쾌한 웃음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채담도 흐뭇하게 유검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면, 피비린내나는 보구천의 맹세에 정추수는 마음이 암울해져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밤이 이슥해졌다. 정추수는 쏟아지는 상념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총단을 벗어나 천도봉을 거닐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수많은 마교 고수들이 다짐하던 맹세들. 야심을 억누르고 일단은 채담에게 굴복한 이들. 보구천과 유검학의 피를 부르는 결의... 이 모든 사람들이 정추수에게 사람을 죽이는 싸움을 강요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껏 정추수가 마교를 위해 정파의 고수들을 죽인 것은 정려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육의 정에 이끌려 정추수는 정려군을 도울 수밖에 없었고, 정려군을 해치려는 자들을 죽여 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를 느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면 그만큼의 고뇌가 그를 짓눌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마교를 떠나고 싶었지만, 정려군이 있었기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일 년 만에 태행검파를 방문하여 방운영의 얘기를 듣고, 또한 성심동에 갇혀 지내는 궁조생을 보며, 피맺힌 과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줄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하지 않았던가? 정려군이 죽어 버린 지금 그는 마교에 아무런 미련을 둘 수 없었다. 산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발을 포근히 감싸는 눈이 당장에라도 피로 물들 것만 같았다. 가는 걸음마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의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손에 죽었는가?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남편과 부친을 잃었으니 그들의 원한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이 나에게 칼을 들이대면 난 무슨 핑계를 댈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무구와 보 형을 도우려면 또다시 수많은 악업을 되풀이해야 한다.' 정추수의 고민은 어둠의 흐름과 함께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둠이 밝음 속으로 숨으려 몸부림칠 때에 즈음하여 정추수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했다. 파-앗! 정추수의 신형이 눈덮인 정상을 한 줄기 흑선(黑線)처럼 움직였다. 저만치 산등성이 너머로 여명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경하(輕霞)를 뿜어 내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지기 전에...' 정추수의 신형은 회회교 총단의 담을 넘어 용봉(龍鳳)이 어우러진 기와지붕으로 곧장 날아갔다. 그 아래엔 두 명의 무사가 번을 서고 있었다. 정추수의 거대한 신형이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두 무사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정추수는 소리나지 않게 두 무사의 시신을 떠받치며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곳에선 세 사람의 웃음 소리와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천마극 요뢰와 동방철, 동방책 형제의 목소리였다. 요뢰의 음성이 들렸다. "아무래도 채 장로가 건재하는 한 우리의 목표를 이루기 힘들 것 같네." 이어 동방철의 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팔보추혼 정공이란 작자가 더욱 문제외다. 그자가 보구천을 적극 돕고 나선다면 우린 그저 자투리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일단 뭉치고 볼 일일세. 봉무구를 추종하는 세력이 적지 않으니 우리가 흩어지면 당적해 낼 도리가 없어." "맞는 말씀이오. 일단은 외적(外敵)을 막는 일이 시급하니 우리끼리 은연중에 세력을 규합한 후 때를 보아 보구천과 정공을 제거해야..." 자신이 내뱉은 말의 중요성을 의식해서인지 동방철은 말꼬리를 흐렸다. "내 생각 또한 그러하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끼리 맹약을 하세." "좋소이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기까지 대화를 듣자 정추수는 내심 크게 살기가 치밀었다. '과연 짐작대로 이들은 본 교에 반기를 들 참이로구나. 내 보 형과 무구를 위해 이들을 제거할 결심을 할 때만 해도 미안한 감정을 가졌지만 이제 그 부담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정추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심장을 극도로 운용했다. '이들은 모두가 나 못지않은 고수들이다. 일순간에 제압하지 않으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 문득 방안에서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건배하세!" "좋소이다. 우리의 대계를 위하여!" 요란히 잔을 치켜 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다!' 정추수는 지체 않고 방문을 부수며 뛰어들었다. 방안엔 가운데 둥근 탁자를 중심으로 요뢰와 동방 형제가 잔을 들어 막 입으로 가져 가는 중이었다. 방문이 부서지며 커다란 신형이 덮쳐 오자 그들은 미처 방어할 자세를 취하지도 못하고 취기 어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대뜸 호통하던 요뢰가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어느새 정추수의 천심장이 그의 심장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잠시 꿈틀대던 그의 신형 주위로 붉은 피가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정추수가 요뢰를 일장에 격살하는 사이 동방 형제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추수!" 하나 그들에겐 더 이상 소리칠 여유가 없었다. 정추수의 천심장력이 연거푸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심장을 겪어 보기는 지금이 처음이지만, 그 위력이 어떠한지는 귀가 따갑도록 듣던 차였다. 두 사람은 체면을 불사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어 천심장을 피했다. 정추수는 그런 그들에게 촌음의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덮쳐 들었다. 그는 지난 일 년간 정파의 수많은 고수들로부터 위협을 받아 왔다. 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터득한 것은 찰나간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일단 그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정추수의 손길엔 추호의 인정이나 여유가 없었다. 천심장을 떨치는 정추수와 이를 피하는 동방 형제의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동방 형제는 개개인이 모두 정추수에 못지않은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당하여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다가올 것은 죽음뿐이다.' 동방 형제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음풍장의 지독한 경력을 쏟아 부었다. 비록 전력을 끌어올리지는 못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파팍! 문풍지 뚫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장력이 부딪히는 순간, 정추수는 뼈를 찌르는 한기가 침투함을 느꼈다. '음풍장이로구나.' 정추수는 바짝 긴장하여 장심을 파고드는 한기에 대항했다. 한편으로 동방 형제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정추수와는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깊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때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요뢰나 동방 형제의 수하들이 분명한지라 정추수는 다급한 마음이 일었다. 정추수는 다시 동방 형제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의 안색이 벌써 퍼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천심장이 혈맥을 타고 심장을 공격하는 증상이 분명했다. '됐다. 저 정도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정추수는 더 늦기 전에 자리를 피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다시 동방형제에게 일장을 날렸다. 동시에 창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등뒤로 동방 형제의 괴로워하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로 요뢰의 비천문도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추수가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라 담을 넘어가자, 그들이 호통하며 뒤따라왔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정추수는 요뢰와 동방 형제를 제거한 후 즉시 유검학의 거처로 달려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유검학은 잠들어 있었다. 정추수는 유검학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탁자 위의 붓을 들어 다급히 소매에다 글을 적어 나갔다. 그리고는 소매를 찢어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방을 빠져 나갔다. 그는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회회교의 총단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일을 이룬 터라 이제 그에겐 회회교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한시라도 피의 기억을 일깨우는 마지(魔地)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회회교여, 누님의 뼈가 묻힌 곳이여! 이제 영영 나를 잊으라. 나 또한 너를 잊으리라. 내가 잊어버린 모든 것처럼 너 또한 나를 잊어버리라.' 그의 커다란 신형이 비조처럼 눈 속으로 날아가더니 마침내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한 점이 되어 버렸다. 그날 아침 보구천은 급히 달려온 수하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비천문의 요뢰가 죽었습니다." "뭣이?" 대경 실색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보구천에게 수하는 또 하나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음풍단의 동방철, 동방책 형제는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합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어서 그들에게 가봐야겠다." 보구천이 연유를 몰라 허둥거릴 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유검학이 한 장의 편지를 내밀었다. 그 편지엔 다급히 쓴 필치로 간략한, 그러나 정추수의 한(恨)이 서린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보 형, 이렇게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몰래 떠나는 날 용서하시오. 지난날 내가 흘렸던 피눈물이 자꾸만 되살아나 날 견딜 수 없게 하는구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내 자신의 신세를 알기 전이었다오. 비록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땐 사부님 아래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소. 하나, 누님이 나타나고 가문의 혈한(血恨)을 알게 되면서 나의 생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소.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주는 것인지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달았다오.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난 사부님과 사숙들, 동문과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야만 했소. 나의 부모님이 살해됨으로써 겪어야 했던 나의 아픔과 누님의 처절한 삶은 한시라도 내게서 고통을 떼어 놓으려 하지 않았소. 그리고 어리석게도 난 지난 일 년간, 내가 겪었던 고통을 남에게 안겨 주고 말았다오. 그 사실이 괴로워 난 하루라도 편히 지낼 수가 없었소. ...(중략)... 난 보 형의 의지를 반대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나 내가 겪었던 아픔을 또다시 수많은 다른 이들에게 안겨 줄 자신이 서지 않는구려. 이제 내가 무림을 떠나고자 하는 건 살인과 고통만이 반복되는 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라오. 아아! 보 형과 무구가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저리오. 차마 그냥 떠나기 어렵구려. 요뢰와 동방 형제는 본 교의 전통을 무너뜨릴 위험 인물이오. 그대와 무구를 위해, 그리고 본 교의 장래를 위해 그들은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구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 손에 피를 묻혔소. 그들의 원망은 모두 내게 돌리시고 그대는 오직 교의 부흥을 위해 매진해 주시기 바라오. 이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날 용서하시오. 부디 몰래 떠나는 겁쟁이는 냉정히 잊으시고 뜻하는 바를 이루길 바라오. '결국 이렇게 떠나고 마는 건가...' 편지를 쥔 보구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유검학이 울먹이며 말했다. "사형, 전 정 숙부님이 이렇게 떠나실 줄은 몰랐어요." 보구천은 말없이 유검학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정 숙부님은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해 우리와 같이 생활하면서도 갈등이 많으셨던 게야. 어쩌면 이 선택이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옳은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추수가 떠난 지금 앞길이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보구천은 뜨겁고 답답한 가슴을 식히려 창문을 열었다. 창 밖엔 백설(白雪)이 하늘과 땅을 순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대 미 > ━━━━━━━━━━━━━━━━━━━━━━━━━ << To be Continue......무림야그>> ━━━━━━━━━━━━━━━━━━━━━━━━━